70화
승현이 돌아왔지만 변하는 건 거의 없었다.
보고서를 읽고 결재를 하는 정도만 하면 승현이 하는 일은 없었다.
대원이 많은 것도 있지만 대장이나 되는 인물이 움직일 정도의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헌터 등록을 마친 승현은 바로 미궁으로 향했다.
“그럼 안으로 들어가 볼까?”
그대로 통로로 들어간 승현은 자신을 반기는 언데드들을 무시하며 미궁 안을 내달렸다.
은신을 한 사태로 질풍처럼 스쳐지나가는 승현을 잡을 수 있는 언데드는 없었다.
순식간에 5층까지 달려 문지기 앞에 섰다.
“오랜만입니다.”
“미궁에 들어가겠는가?”
고개를 끄덕이자 문지기 뒤에 있는 문이 서서히 열렸다.
문지기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자 다시 문이 닫혔다.
“어디 이 끝에 뭐가 있는지 내 눈으로 확인해보자.”
천천히 안으로 걸어가자 바로 몬스터가 앞을 가로막았다.
상당히 강한 축에 속하는 몬스터였고 만약 지금 등장한 몬스터가 밖에서 등장했다면 상당한 피해를 입어야 할 것이다.
100레벨이나 차이가 나는 몬스터를 쉽게 잡을 순 없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승현에겐 그리 강한 상대가 아니었다.
“크아아앙!!”
괴성을 지르는 몬스터를 감흥 없이 보던 승현은 몬스터를 무시하고 앞으로 걸어갔다.
몬스터가 승현을 공격하려던 순간 몬스터의 그림자에서 수백 개의 검은 꼬챙이가 일어나 몬스터를 벌집으로 만들었다.
게임으로 치면 그런 거다.
마력을 이용한 공격을 가할 경우 상대의 방어력에 영향을 받아 데미지가 반감된다.
하지만 그림자를 이용한 공격은 그런 상대의 방어력을 무시하고 데미지가 들어간다.
시스템에서 벗어난 암왕의 힘은 더 이상 레벨과 상대의 마력 저항에 영향을 받지 않게 되었다. 그나마 물리력 저항이 높으면 간단한 공격은 막을 수 있겠지만.
손도 움직이지 않고 첫 몬스터를 처리한 승현은 계속 앞으로 걸었다.
다음으로 등장한 몬스터도 예외는 아니었다.
상대하기가 버거운 몬스터가 줄줄이 나왔지만 승현과 손 한 번 섞어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몇 차례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을까.
점점 등장하는 몬스터의 수준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승현에게 그리 큰 감흥을 이끌어내진 못했다.
차례차례 몬스터를 쓰러트린 끝에 어느덧 복도식으로 되어 있던 미궁이 확 넓어졌다.
“더 이상 내려가는 통로는 보이지 않는데?”
아무리 주위를 살펴도 더 이상 내려갈 수 있는 통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공간에 뭐가 있느냐하면 또 그렇지도 않은 게 보이는 거라곤 낮은 천장과 저 멀리 보이는 벽뿐이었다.
‘분명 뭔가 더 있을 거야. 여기서 끝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지.’
승현은 천천히 주위를 돌아다녀봤다.
허나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몇 시간이고 이곳을 탐색한 승현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위로 올라가야만 했다.
비밀을 아는 건 오직 문지기 사내뿐이니 그를 찾아 답을 얻어야 했다.
다행이도 올라가는 길에 몬스터가 다시 생성되진 않았다.
최대한 빠르게 위로 올라가 미궁 입구로 돌아오자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사내가 말을 걸었다.
“아무것도 없었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군요.”
“당연히. 아직 준비가 안 됐기 때문이다.”
“준비? 무슨 준비죠?”
문지기 사내는 만나서 처음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그것이 미궁에 생겨나려면 시간이 더 있어야 하지.”
“그걸 왜 지금 말해주는 겁니까?”
“물어보지 않았으니까.”
힘이 쭉 빠지는 대답에 승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ㅎ아, 그럼 언제 그게 생성됩니까?”
“충분한 염원이 모였을 때. 정확한 시기는 없어. 어쩌면 평생 생겨나지 않을 수도 있지. 그건 어떤 미궁이든 마찬가지다.”
문지기의 말에 승현은 고개를 저어보이곤 밖으로 올라갔다.
분명 미궁에 생겨나는 건 엄청난 힘을 지녔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곳에서 계속 머물며 언제가 될지 모를 때를 기다리는 건 시간낭비다.
“4년이란 시간이 흘렀으니 충분히 원이 등장했을 거야. 그런데도 세상이 왜 이렇게 조용한 걸까?”
원은 등장과 함께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준다.
단신으로 재건된 도시를 지워버리면서 화려하게 등장을 알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귀를 하고 나서 원의 등장 소식이나 징조는 하나도 없었다.
원의 등장이 늦어질수록 인류에겐 희소식이라고는 하나 너무 조용한 게 불안감을 일으켰다.
“레벨이나 올려야 하나?”
최우선순위에 있던 원의 척결을 지금은 이룰 수 없다.
그렇다면 지금 할 수 있는 건 미래를 위한 대비를 하는 것일 뿐.
“레벨이라. 하지만 그것도 결국은 창조자란 놈들이 만들어낸 법칙에 하나지.”
더 이상 시스템에 의한 강함은 승현에게 의미가 사라졌다.
오히려 시스템은 그의 성장을 교묘히 방해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레벨에 연연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번에 미궁에서 겪은 것처럼 천 레벨에 육박하는 몬스터라 할지라도 승현의 전력을 끌어내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지금 필요한 건 창조자들이 만든 법칙을 깨부수고 내가 가진 불가해 아이템을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세상이 자리를 잡기 시작한 만큼 어지간히 큰 사건이 아니라면 자신이 나설 일은 없다.
생각을 마친 후 서울로 돌아온 승현은 간단한 보고를 받고 가장 먼저 룬을 깨우기로 했다.
만일을 대비해 서울에서 조금 떨어진 어느 산 속으로 이동한 다음 천천히 룬을 살폈다.
답은 룬 안에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승현은 지그시 룬을 바라봤다.
아무리 룬을 바라봐도 당연히 변하는 건 없었다.
과연 어떻게 해야 잠긴 기능을 풀고 룬을 사용할 수 있을까?
며칠 동안 산속에서 시간을 보내던 승현은 역시 답을 얻을 수 없었다.
이리저리 형태를 바꿔보기도 했지만 변하는 건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알아낸 게 있다면 룬의 일부를 분리시킬 수 있다는 것 정도?
한 없이 시간을 보내는 동안 족므 특별한 보고가 승현에게 올라왔다.
“부산에서 반정부군이 일어났다고요?”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최 보좌관의 보고에 승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국에서도 드물지 않게 일어나는 일인데 이번에 저희도 이런 일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정부에서 이번 무장점거를 진압하고자 부대 전체 소집을 지시했습니다.”
“바로 가도록 하죠. 다른 부대원들은 어떻습니까?”
“모두 본부로 모이고 있습니다.”
전화를 끊은 승현은 지급받은 공간이동 장치를 발동시켰다.
약간의 대기 시간을 끝으로 본부로 이동한 승현은 소대장들이 모인 회의실로 안내를 받았다.
한두 사람이 더 들어오고 나자 최 보좌관이 앞으로 나와 브리핑을 시작했다.
“이번 부산 점거 사태에 대해 확인된 정보입니다.”
회의실 앞에 설치된 스크린에서 이번 무장단체에 대한 설명이 쭉 나열되었다.
“확인된 바에 의하면 무장단체의 규모는 천여 명이며 평균 레벨은 250레벨로 상당히 높습니다. 점거 후 정부에게 부산을 독립해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민간인 피해는?”
“부산에 거주 중인 민간인은 약 12만 명입니다. 외출을 삼가할 것을 알렸지만 정확한 정보는 아직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부산에 설치된 카메라와 위성 등으로 상황을 정리 중에 있습니다.”
“특별법에 의하면 즉시 사살이 가능하던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전면으로 나섰다간 도시와 민간인에게 피해가 갈 것이라.”
설명을 듣던 소대장들은 가만히 앉아있는 승현에게 하나씩 시선을 모았다.
고민을 하는 승현을 보며 한 소대장이 넌지시 의견을 제시했다.
“대장님. 길드에 지원을 요청할까요?”
가만히 스크린의 영상을 보던 승현은 이내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우선 놈들이 빠져나갈 수 있는 통로는 모두 차단합니다. 그리고 협상을 제시하고 놈들의 수뇌부가 한 자리에 모였을 때 제가 그들을 모두 처리하죠.”
“저들의 레벨이 상당해 제압이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건 숫자입니다. 수뇌부가 전멸하면 나머진 길드와 협력해서 금방 진압하면 될 겁니다.”
“12만여 명의 생명이 걸린 일입니다. 조금 더 신중히 판단하시는 게 어떠신지요?”
“작전의 기본 골자는 변경하지 않습니다. 모든 책임은 제가 지죠. 이제 구체적인 안건을 논의합시다.”
승현의 강경한 태도에 소대장들은 더 이상 다른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한 시간 정도 구체적인 진입 경로 등을 짜는 동안 승현의 의견대로 부산을 점거한 무장단체에게 협상을 제안했다.
그러는 동안 몇몇 길드의 협조를 받아 부산 전체를 포위했다.
그러자 언제라도 응수할 수 있도록 무장단체들도 주요 출입로에 병력을 배치했다.
도시 곳곳에 자리를 잡은 무장단체의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하고 최종적으로 진입 경로를 설정한 끝에 드디어 협상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었다.
“대장님. 아무래도 부대장님이 합류할 때까지 시간을 끄는 게 어떤가요?”
“알드리안의 힘이 없어도 이 정도는 충분합니다.”
“혼자서 적진으로 가시는 겁니다. 안으로 가시면 저희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진중한 얼굴로 말하는 소대장을 보며 승현은 그저 미소를 지어보였다.
곧 사전에 이야기가 오갔던 대로 통제된 도로로 걸어갔다.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지자 건물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무장단체의 단원들이 밖으로 나왔다.
“그쪽이 책임자인가?”
“그렇다. 이번 협상의 전권을 부여받았지.”
“따라와. 허튼짓을 할 경우 부산은 전쟁터가 될 거야.”
제복을 차려입은 승현은 단원의 안내를 받으며 부산 시청으로 향했다.
부산 시청에 도착하자 상당한 마력을 가진 유저들이 곳곳에서 눈에 들어왔는데 핵심 전력은 대부분 이곳에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슬쩍 탐색을 사용해 인근에 있는 유저와 지형을 모두 파악했다.
시청 안으로 들어가자 보이는 건 무기를 들고 기다리고 있던 무장단체의 수뇌부들이었다.
“굳이 만나서 협상을 하자고 조르기에 난 그 이계인이라도 오는 줄 알았는데 말이야. 준비한 게 쓸모없게 됐네.”
“무력화 마법과 마력 동결 마법이군. 이러면 너희도 기술을 사용하지 못할 텐데?”
“용케 알아보네. 반갑다. 나는 새로운 국가의 수장이 될 고병환이라고 한다. 협상이라고 해도 변하는 건 없는 건 알고 있지?”
고병환이라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승현은 현장에 있는 이들을 하나씩 살폈다.
“고병환이라. 이름은 들어본 것 같아. 꽤 유명했지.”
승현의 말에 모두 의아한 듯 그를 바라봤다.
회귀 전에 들어본 이름이었는데 자신과 마찬가지로 원의 편에 붙은 인물 중 하나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승현은 스파이로 활동했다면 그는 전면에서 전투를 했다는 것 정도이다.
나름 실력도 좋고 보스의 기질이 있어서 사람을 퍽 잘 다뤘었던 걸로 기억한다.
승현은 무전기를 켜고 입을 열었다.
“나다. 작전을 개시하도록.”
승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상황을 파악한 이들이 일제히 승현에게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