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승현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도화는 그를 보곤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반가워. 승현. 내겐 상당히 오랜만이네.”
“날 기억해?”
“그럼. 내 하나뿐인 친구인 걸?”
놀랍게도 도화는 승현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과거의 도화가 아닌 자신과 헤어진 후의 도화인 것 같다.
그대로 죽음을 맞이한 것 같더니 그게 아닌 또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었나 보다.
도화와 대화를 나누려던 찰나 웅장한 음악 소리가 울리더니 경기장 가운데에 있는 특별석 같은 공간에 파를이 등장했다.
“환영한다. 무사히 예선을 치르고 온 전사들이여!”
파를은 꽤 긴 연설을 시작했는데 그동안 승현은 주위에 있는 선수들을 살폈다.
다들 만만치 않은 상대로 보였는데 그중 승현의 눈에 박히듯 들어온 인물이 있었다.
승현은 잠시 그 인물을 가만히 주시했다.
무심하게 승현과 눈을 마주친 그는 감흥 없는 얼굴로 다시 파를을 바라봤다.
“설마하니 놈들을 여기서 볼 줄은 몰랐어.”
승현은 가볍게 상대를 노려보다가 시선을 거뒀다.
그가 본 인물은 다름 아닌 원의 일원이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한국을 담당해서 승현도 상당히 잘 알고 있는 이였다.
많은 시간을 원의 스파이로서 지냈던 승현임에도 그들의 이름조차 제대로 알지 못할 정도로 그들은 많은 것들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
원의 인물을 이곳에서 만났으니 잘하면 어떤 정보를 얻을 수 있진 않을까?
‘놈은 강해. 분명 위까지 올라오겠지. 기회가 되면 저놈과 마주할 수 있다.’
생각을 마친 승현은 곧 연설을 마치는 파를을 바라봤다.
그녀의 연설이 끝나고 선수들은 다시 방으로 안내를 받았는데 이번 대회는 두각을 보이는 몇몇을 제외하면 수준이 크게 높은 것 같진 않았다.
승현은 이동을 하면서 도화와 대화를 나눴다.
“그렇게 떠나고 어떻게 된 거야?”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끝이 있으면 또 다른 시작이 있지. 새로운 시작을 했을 뿐이야.”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이렇게 보게 되니 정말 반갑네.”
“이렇게 일찍 보게 될 줄은 몰랐지만 나도 무척 반가워.”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말해줄 수 있어?”
“아마 내가 사라지고 남은 물건 때문이지?”
도화는 승현의 질문을 정확히 예상하며 웃었다.
그녀는 사망 후에 무엇이 남을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고개를 끄덕인 승현은 그녀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나도 날 잘 몰랐는데 나는 좀 특별한 존재인가 봐. 그건 상당히 위험한 물건이야. 하지만 한 번은 네게 큰 힘이 되어줄 테니 잘 가지고 있어.”
“너무 추상적이야. 좀 더 자세히 말해줄 순 없어?”
“그건 말로 설명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거든. 그냥 나중에 직접 겪어봐.”
잠시 자리에서 멈춘 도화는 승현을 보며 말했다.
“대회에 참가한 이상 상대로 만나더라도 봐주지 않을 거니까 날 만나거든 각오하라고?”
손을 흔든 도화는 곧 통로로 사라졌다.
승현도 이내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가만히 이번 대회를 생각했다.
이번 본선에 올라온 선수는 촌 300여 명이었고 그중에서 자신을 포함해 12명 정도가 마지막에 남을 것 같다.
그 전까지는 조용히 힘을 숨기며 ㄷ른 11명을 주시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대진표가 나오고 승현은 가장 먼저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경기장으로 나오자 맞은편에서 상대가 나왔다.
절제된 기도를 가진 사내는 척 보기에도 상당히 강해보였다.
바로 승현이 후반부에 남을 걸로 예상했던 11명 중 한 명과 처음부터 맞붙게 되었다.
상대방도 승현의 강함을 어느 정도 알아차렸는지 신중하게 자세를 잡았다.
“조금 치사하지만 어쩔 수 없지.”
처음부터 자신의 모든 수를 보이는 건 어리석은 짓이기에 승현은 편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바로 멸마의 창을 꺼내든 승현은 상대에게 창을 던졌다.
창은 빠르게 날아갔지만 아직까지는 어느 정도 실력이 있는 이라면 피할 수 있을 정도였기에 상대방도 간단하게 피해냈다.
그러나 승현이 노린 건 그게 아니었다.
멸마의 창은 물체가 닿을 때까지 무한히 가속한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물체에 닿지 않게 만든다면 그 속도는 과연 어디까지 올라갈 것인가?
경기장 벽으로 날아간 멸마의 창을 그림자로 넣은 승현은 다시 측면의 벽에 있는 그림자에서 멸마의 창이 빠져나왔다.
아까보다 배는 빠른 속도로 날아드는 창에 상대방은 바로 창의 궤적에서 벗어났다.
그것이 세 번, 다섯 번 정도 반복되자 서서히 가속하기 시작한 창은 총알보다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음······!”
상대는 슬슬 피하는 게 버거워지기 시작하자 과감하게 승현에게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승현은 그가 다가오려고 하면 뒤로 물러나며 피하기만 할 뿐 상대하지 않았다.
결국 창의 속도는 걷잡을 수 없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상대의 패착이라면 초기에 창을 잡아채지 못한 것.
하지만 만일 창을 잡았다고 하더라도 강한 폭발에 휩쓸렸을 거다.
무시하기 힘든 양의 마력을 창에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점점 속도를 더한 창은 상대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그의 그림자에서 솟아나 상대를 꿰뚫었다.
그대로 창이 박힌 상대는 몸 내부에서부터 시작된 마력 폭발에 그대로 죽음을 맞이했다.
분명 상대는 강자다. 어느 정도냐 하면 이전 방에서 만났던 7명의 전사들과 비슷한 정도인데 상대는 너무 신중한 나머지 이도저도 아니게 되어버린 거다.
아마 과감히 나섰다면 좀 더 많은 걸 보여야 했을 거다.
다분히 요행이 섞였지만 가뿐히 승리를 취한 승현은 방으로 돌아가 다른 이들의 경기를 관람했다.
경기는 다소 빠르게 진행되었다.
본선에 올라온 이들의 숫자가 꽤 되다 보니 한 번에 여러 경기를 치렀는데 남은 10명의 경우 승현처럼 대부분의 힘을 보이지 않았다.
후에도 몇 번의 경기를 더 겪은 끝에 드디어 대회가 막바지에 이르기 시작했다.
조금 의외인 건 도화가 도중에 기권을 해버렸다는 건데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기권을 한 그녀는 그대로 원래 세계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쪽지를 하나 남겼는데 쪽지의 내용을 읽은 승현은 연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어느덧 4강까지 올라온 승현은 드디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상대와 마주하게 되었다.
관중석에서 울리는 함성을 배경으로 원의 일원을 바라봤다.
검은색 코트를 입은 그는 승현을 보더니 손을 뻗었다.
이미 그에 대해서는 많은 걸 알고 있는 승현은 마력을 일으켜 자신을 끌어당기는 힘에 저항했다.
“재밌군.”
“나 또한. 이런 곳에서 원의 일원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거든.”
나직이 중얼거리는 말에 승현은 입가를 위로 올리며 말했다.
그 말에 순간 상대의 기세가 일변했다.
사방에서 승현의 몸을 옥죄는 힘에 능숙하게 마력을 방출했다.
“어떻게 우리를 알고 있는 거지?”
“글쎄. 나도 궁금한 게 좀 있는데 말이야. 서로 입을 열게 하려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겠지?”
승현은 그대로 상대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공간을 조종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상당히 까다로운 능력으로 상대하는 것도 어렵다.
말만 들으면 적수가 없을 것 같은 능력이지만 그 능력에도 약점은 있다.
바로 조종을 하기 위해선 손짓을 해야 한다는 것인데 손짓을 하지 않으면 공간을 조종할 수 없다. 즉, 손짓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움직인다면 공격을 피할 수 있다.
승현은 빠른 속도로 상대의 주위를 빙빙 돌며 서서히 접근했다.
손을 뻗어 공간을 일그러트리는 등의 공격이 이어졌지만 그럴 때마다 일그러진 공간을 피한 승현은 순간 상대 그림자로 이동해 검으로 그의 한쪽 팔을 잘랐다.
촤악!
팔 하나를 자른 승현은 바로 저 멀리 벽에 진 그림자로 이동해 몸을 피했다.
그러자 그의 주변에 있는 공간이 크게 일그러졌다가 돌아왔다.
“다음은 다른 팔을 잘라주지.”
“······죽여주마.”
상대는 바닥에 손을 뻗고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점점 일그러지는 공간은 느릿하게 그 크기를 넓혀갔다.
저 일그러진 공간에 발을 디디는 순간 몸 또한 일그러져 찢겨나갈 것이다. 그건 어떤 사물도 마찬가지.
“하지만 사물이 아니면 상관없지.”
바로 상대의 그림자를 움직여 다른 팔을 절단했다.
능력은 확실히 대단하지만 본신의 능력은 그리 강한 편이 아니다.
그건 상당한 약점으로 작용했고 때문에 지구에서도 놈은 다른 원과 함께 움직였다.
그러나 이 자리에는 오직 승현과 그만이 있었고 승현은 그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양 팔을 잃은 그에게 다가간 승현은 여유롭게 말했다.
“너희가 노리는 건 뭐지? 뭘 얻으려 했고 뭘 완성하려 했지?”
“너는, 여기서 죽어줘야겠다.”
“네가 손을 이용해야만 능력을 쓸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어. 그런 무의미한 위협은 내게 전혀 위험하지 않아.”
“그래, 내 힘은 오직 손짓으로만 조종할 수 있다. 하지만 조종을 하려고 할 때만이지.”
그는 조소를 머금었다.
그와 동시에 미쳐 피할 새도 없이 강력한 힘이 작용하기 시작했다.
주위의 공간이 요동을 치면서 모든 걸 어긋나게 만들었다.
인상을 찡그린 승현은 몸을 피하고자 했다.
그때 상대의 입에서 아까와는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놀랍군. 설마하니 우리의 존재를 아는 자가 있을 줄이야.”
“너는, 누구지?”
“급히 생각할 필요 없다. 너와는 언젠가 만나게 될 테니까.”
승현은 더 이상 일그러지는 공간에서 버틸 수 없어 급히 몸을 피했다.
몸을 피하고 나자 그대로 그 공간이 검게 물들었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잠시 그림자 안에 숨었던 승현은 다시 밖으로 나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을 보며 혀를 찼다.
이대로라면 놈을 확실히 죽였다고 말할 수도 없다.
공간을 조종해 몸을 피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찝찝한 승리를 얻은 승현은 결승에 올랐다.
대망의 결승전이 펼쳐지고 승현은 크게 어려움 없이 우승을 거머쥐었다.
후에 영양가 없는 만찬 파티와 시상식이 지나가고 드디어 고대하던 파를과의 만남을 가졌다.
“이번엔 너무 싱거웠어. 좀 더 즐거울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래도 우승을 축하해. 날 그렇게 만나고 싶어 했다던데.”
“아아, 이 공간을 네가 만들었다고 들었어.”
“맞아. 고생 좀 했지만 매번 벌어지는 재밌는 경기는 늘 날 즐겁게 하지.”
“이 공간은 시공간과 모두 이어졌다고 했는데 혹시 내가 다른 시공간으로 잠시 갔다 올 수 있어?”
“비싼 대가를 치르면 가능은 해. 하지만 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다시 돌아오는 게 거의 불가능하거든.”
갈 순 있지만 돌아올 순 없다는 말이다.
사실을 들은 승현은 김이 빠지는 표정으로 지었다.
이곳이라면 잠시지만 미래의 지구를 살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이 자리는 우승자의 원하는 걸 들어주는 자리야. 자, 상품을 하나 말해봐.”
“뭐든 말하면 들어줄 수 있어?”
“여긴 모든 시공간이 뒤틀린 곳이야. 어떤 거든 가능해.”
승현은 자신만만한 얼굴의 파를을 보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