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옐은 지도 한 장을 꺼내보였다.
도시의 지도인데 지상을 표시한 것이 아닌 지하도와 하수구를 표시한 것들이었다.
그중 각각 떨어진 세 곳에 붉은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여기가 쟁이 있는 곳이고 여기가 켈그가 있는 곳이야. 이 멍청한 두 놈들 때문에 우리 셋은 전쟁 중에 있지.”
그중 옐은 섬 한 쪽에 나 있는 긴 선을 가리켰다.
딱 쟁과 켈그의 패거리가 있는 곳이 교묘하게 그곳으로 가는 진로를 막고 있었다.
“보면 알겠지만 두 놈들 모두 파티장으로 가는 해저터널을 막고 있어. 가장 의심스러운 파티장으로 가려면 두 놈들을 치워야 하지.”
“흠, 왜 의심스럽다고 한지 대충 이해가 갑니다.”
“그렇지? 왜 이 놈들은 파티장으로 가지 않고 여기서 치고 박고 싸울까. 이걸로 한 가지 가설이 서는데 둘 다 배후에 조종되어선 지금에 와서 버려졌다는 거야. 그럴듯하지 않아?”
옐의 말에 승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상황만 놓고 보면 꽤 신빙성 있는 가설이다.
파티장에 배후와 원인이 있고 저 두 갱단은 잔뜩 이용을 당하다 막판에 배신을 당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그러면 이 둘은 왜 싸우는 겁니까?”
“글쎄? 원래부터 사이가 안 좋긴 했는데. 한 번 힘을 모아서 파티장으로 쳐들어가자고 했더니 둘 다 무시하더군. 뭔가 이유가 있나 보지.”
배신을 당했다면 응당 복수를 꿈꿀 텐데 두 집단끼리 싸움을 벌이고 있다.
어쩌면 배신을 당했다는 전제가 틀렸을 지도 모른다. 또 눈앞의 옐을 완전히 신뢰하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다.
승현은 의문점 하나를 더 물었다.
“이곳에 와서 감염자에게 포위되었을 때 갑자기 폭탄 같은 게 머리 위로 떨어졌습니다. 그에 대해 아는 거 없습니까?”
“그거? 파티장에서 날아온 걸 거야. 내가 판 무기 중에선 소형 미사일도 있거든. 그런 건 구하기가 까다로워서 많지 않겠지만 초기에 감염자가 잔뜩 뭉치면 날아왔었지. 아직도 수량이 남았는지는 모르겠네.”
“옐은 상당히 능력이 좋나 보군요.”
“흐흠! 소형이라고는 해도 미사일은 구하기가 어렵단 말씀. 그것도 이런 번화한 도시에 들여오는 건 더 어렵지. 아무리 라이빈이라도 말이야.”
자랑스러운지 가슴을 내밀며 하는 말에 속으로 웃은 승현은 대화를 이어갔다.
“옐은 저 두 갱단을 처리하고 우리가 파티장으로 가자는 말이죠?”
“맞아. 그 빌어먹을 돼지 놈들 면상에 샷건을 갈겨야하지 않겠어?”
“좋습니다. 그럼 두 조직을 처리하고 파티장에 진입하죠.”
“말이 잘 통하니 좋군. 그럼 어느 쪽을 칠거야?”
“옐은 전력을 보존하세요. 두 갱단은 제 선에서 정리하겠습니다. 대신에 다른 통로를 봉쇄해서 빠져나가는 이들을 막으세요. 아, 각 갱단의 수장은 생포 부탁합니다.”
“초인이 있으니 이렇게 편하네. 그럼 말 나온 김에 바로 처리하자.”
자리에서 일어난 옐은 바로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무기밀매를 한다더니 어느 군대 못지않은 첨단무기로 잔뜩 무장하기 시작했는데 그냥 보면 근미래에서 튀어나온 특수부대를 연상케 했다.
무장하는 걸 지켜보던 승현은 무장을 마친 한 사람과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눴다.
“저 문엔 뭐가 있습니까?”
“저 문? 잘은 모르지만 통제실이라고 하던데.”
“통제실?”
“아아, 나도 잘은 몰라. 여긴 보스랑 간부들만 알던 곳이거든. 뭔가 조종하는 곳이라고 하는데 잘은 모르겠어.”
“자자, 준비도 끝났으니 가벼운 브리핑을 하도록 하겠어.”
옐은 사람들을 모아두고 작전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선 쟁 놈들을 이쪽의 초인 씨가 공격할 거고 우린 각 길목에서 대기했다가 나오는 놈들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준다. 처리가 끝나고 나면 다음은 이어서 켈그 놈들을 공격하니까 바로 준비하고. 모두 알았나?”
“예, 보스!”
“좋아, 그럼 바로 출발!”
옐의 지시를 끝으로 무장을 한 단원들이 밖으로 나갔다.
승현에게 다가온 옐은 승현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수고하라고. 승현. 아까 지도를 봐서 알겠지만 쟁 패거리를 처리하고 큰 길로 쭉 가면 바로 켈그 놈들이야. 잘 할 수 있지?”
“기억력은 좋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승현은 단원들이 나간 방향으로 따라 나갔다.
빠른 걸음으로 기억하는 통로를 걸었다.
시야가 컴컴해서 보관해두었던 반가면을 꺼내 썼는데 그러자 시야가 확보되며 벽에 표시된 숫자가 보였다.
가끔가다 왜 있는지 모를 CCTV들도 보였다.
‘그러니까 2구역에 쟁이 있고 6구역에 켈그가 있었지?’
정확히 해저터널로 가는 곳을 막는 곳은 켈그 패거리였는데 해저터널로 가는 통로가 모두 그들의 아지트로 모여 있었다.
위치를 떠올린 후 걸음을 옮기자 이미 대기하고 있는 옐의 단원들이 보였다.
그들은 야간투시경 같은 걸 쓰고 있었는데 승현을 발견하자 손짓으로 진입할 것을 지시했다. 승현은 고개를 끄덕이곤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굳게 닫힌 철문이 보였는데 승현은 발로 철문을 찼다.
쾅!
“상당히 두껍군.”
살짝 파인 철문을 본 승현은 몇 차례 더 발로 차 철문을 강제로 열었다.
철문 자체는 상당한 내구도를 지녔으나 경첩이 부서지며 문짝 자체가 넘어갔다.
문이 넘어가기 무섭게 요란한 총소리가 울렸다.
이미 룬으로 보호를 받고 있는 승현이었지만 총성과 함께 던져진 수류탄 같은 것들 때문에 뒤로 물러나야 했다.
쉬지 않고 날아드는 총알에 승현은 몸을 낮추고 안으로 진입했다.
다소 어두운 실내에 선 수많은 장정들은 승현이 안으로 들어오자 기겁을 하며 물러났는데 승현은 그대로 단검을 던져 가장 앞에 있는 사람을 쓰러트렸다.
몇 사람을 처리하던 중 승현은 이상함을 느꼈다.
다들 공포에 질린 얼굴로 승현이 들어오자 사방으로 총을 쏘기 시작한 거다.
분명 어둡긴 하지만 사리를 분별할 수 있을 정도인데 아군을 향해서도 총을 쏘는 것이다. 또 복장도 뭔가 평범했다.
마치 일반인 같은······.
그때 갑자기 빛을 내던 전등에 불이 꺼졌다.
드르륵, 쿵!
어디선가 들리는 묵직한 소음이 총성 속에도 들렸다.
승현은 불길한 예감에 전투를 중단하고 들어왔던 통로로 향했다.
“······허, 속은 건가.”
어느새 사라진 옐의 단원들과 철판으로 봉쇄된 통로.
지금 상황을 보면 정말 시원하게 뒤통수를 맞은 것 같다.
인상을 굳힌 승현은 있는 힘껏 철판을 쳤다.
쿠웅.
“젠장. 그냥 철판이 아니었군.”
마력이 실린 주먹을 받고도 멀쩡한 철판에 인상을 구겨야 했다. 손에서 전해진 감촉으로 보면 상당히 두꺼운 철판 같은데 중간에 콘크리트라도 채워 넣었는지 그냥 철판을 치는 느낌은 아니었다.
승현은 어느 정도 줄어든 총성에 다시 쟁의 패거리가 있을 걸로 여겼던 2구역으로 들어갔다.
“으으, 사, 살려줘······.”
“우, 우린 다 죽을 거야.”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공간에서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사람을 찾았다.
하지만 말이 통할 정도로 멀쩡한 이들은 이곳에 없었다. 다들 심각한 부상을 당했거나 이미 사망했기 때문이다.
문뜩 승현은 천장에서 붉은 빛을 깜빡이는 카메라를 발견했다.
“옐. 들릴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 상황을 후회하게 될 거야.”
카메라를 향해 으르렁거리듯 경고한 승현은 탐색을 시도했다.
조금 시간을 들여 저 멀리 수백의 기척을 감지하고 이동을 시작했다.
기척이 모인 곳은 6구역으로 켈그 패거리가 있다고 했던 곳이다.
탐색을 해봤을 때에도 그곳으로 가는 입구를 빼면 모두 봉쇄되어 있었기에 선택지도 없었지만 말이다.
천천히 무거운 걸음을 옮기자 저 멀리 광장으로 보이는 곳에 작은 불빛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 보였는데 그쪽은 아직 승현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들과의 대화가 필요했기에 승현은 거리를 두고 큰 소리로 말했다.
“대표와 대화를 하고 싶습니다!”
잠시 웅성이던 사람들 중 한 무리가 랜턴을 들고 다가왔다.
“당신은 누구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사망했습니다. 저는 지금 상황을 해결하고자 찾아왔습니다.”
“지금 상황? 하! 웃기지도 않는군. 너는 지금 상황이 어떤지 알기나 해?!”
격한 목소리와 함께 욕설이 들리고 승현은 진짜 내막을 알기 위해 그들의 감정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가장 먼저 입을 열었던 사내가 다시 말했다.
“지금 상황을 해결하러 왔다고 했는데 혹시 정부에서 왔나?”
“아닙니다. 하지만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가졌습니다. 제게 자세한 상황을 설명해주십시오.”
“잠시만 기다리시오.”
말을 마친 사내는 이내 함께 온 이들과 회의를 하기 시작했다.
언뜻 들리는 말로 보아선 자신을 믿을 수 있는지에 대해 논의하는 것 같았다.
조금 큰 소리도 나며 격하게 논의를 한 끝에 다시 대표로 보이는 남자가 말했다.
“당신을 믿기로 했으니 말해보시오.”
“감사합니다. 저는 옐이란 붉은 머리의 여자에게 속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제 질문에 알고 계신 것을 말씀해주세요.”
승현은 옐에게서 들은 정보를 토대로 질문을 했다.
그녀가 했던 말은 꽤 많은 부분이 사실이었다.
우선 라이빈은 범죄 도시가 맞았고 쟁과 켈그의 갱단도 맞았다.
이들은 감염자를 피해 모였고 쟁은 승현이 왔던 2구역에서 건장한 남자와 무기를 모아 혹시 모를 감염자를 막았고 지금 승현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켈그는 생존자를 보호하고 있다.
즉, 두 갱단은 싸우고 있지 않았고 오히려 힘을 모아 생존하고 있었다.
해저터널과 파티장도 사실이다.
하지만 해저터널은 두꺼운 차단막으로 막혀 있다고 한다.
옐의 갱단은 불과 몇 개월 전에 유입된 신생 갱단이라고 한다.
켈그는 그들이 살아있는 지도 몰랐다고 하는데 이쯤 대화를 하니 옐의 의도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이 지하에 차단막을 내릴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리고 첨단 무기도 갖추고 있다.
그러면 3개월 동안 왜 이들을 살려두었는가. 그녀가 감염자와 연관이 있다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꾸민 걸까.
“당신은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했는데 어떻게 해결할 수 있다는 거요?”
“이번 일에 원인을 제거하고 감염자를 모두 처리할 겁니다. 그리고 그 원인이 파티장에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음, 하지만 파티장으로 갈 수 있는 길은 모두 막혀 있소.”
“차단막을 부술 겁니다.”
“차단막은 절대 못 부숴. 차단막의 두께는 10센티미터야. 그런 차단막이 한 개도 아니고 무려 스무 개나 되지.”
한 사람이 냉소적인 반응으로 말했다.
확실히 차단막을 주먹으로 쳤을 때 두껍긴 했다.
그렇다고는 하나 승현은 보통 인간이 아니다.
“충분히 부술 수 있습니다.”
그때였다.
천장에 스피커가 달려 있던 건지 옐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 잘 들리나? 생존자 여러분과 최승현. 지금부터 깜짝 파티를 열까 해. 아무래도 이번에 빌어먹을 장막의 원흉 같은 사람도 있으니까. 그럼 힘을 모아서 잘 싸워봐.”
목소리가 끊기고 스피커에서 시끄러운 클럽 음악이 울렸다.
그와 함께 꺼진 조명에 불이 들어왔는데 모두 불안감에 휩싸였다.
승현은 급히 탐색을 시도했다.
서서히 퍼지는 마력을 통해 저 멀리서부터 수백 아니 수천의 기척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걸 느꼈다.
“당장 사람들을 해저터널 쪽으로 모으고 무기를 가진 사람들은 사람들을 보호하세요! 감염자가 몰려옵니다!”
승현의 다급한 외침은 역효과를 낳았다.
생존자 모두가 극도의 불안에 휩싸인 상태였고 승현의 말은 방아쇠가 되어 생존자들을 패닉으로 몰고 갔다.
절규하고 비명을 지르며 넋을 놓기까지.
대표인 켈그나 다른 이들도 냉정을 찾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승현은 빠르게 켈그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꽉 쥐었다.
“정신 차려! 당장 사람들을 해저터널 쪽으로 몰아. 그리고 감염자의 약점을 알고 있나?”
“야, 약점? 그러니까. 불에 약하다는 것 말고는······.”
“알았어. 그럼 어서 사람들을 피난시켜.”
“아, 알았어.”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켈그가 급히 사람들을 해저터널 쪽으로 몰기 시작했다.
대표인 켈그의 말에 다들 그의 말을 따라 황급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모두 도망치고 승현은 해저터널로 가는 유일한 길 앞에 섰다.
“최승현. 네가 아무리 초능력을 써도 이번엔 무사하지 못할 거야. 네가 죽으면 사방에 둘러진 막도 사라지겠지. 그래도 발버둥 쳐봐. 최후를 지켜봐주지.”
승현은 숨을 들이마시고는 사방에 뚫린 통로로 쏟아져 들어오는 감염자들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