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병후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런 병후 옆에 선 한 명의 남자가 병후에게 물었다.
“아는 사람이야?”
“네. 대장도 알 걸요? 랭킹 1위 최승현.”
“아아! 방칼 대전. 거물이 걸렸네.”
“조심해요. 저 형 싸움 실력 장난 아니에요. 그리고 그림자도 조심하고. 막 그림자를 조종하니까 방심하면 훅 가요.”
병후는 남자와 대화를 하면서도 착실히 승현을 견제했다.
언제든 던질 수 있게 단검을 손에 들고 있는 것이다.
승현은 탐색 기술을 통해 포위한 인원을 파악했다.
‘스무 명. 나오지 않는 걸 보면 궁수나 도적 혹은 마법사일 확률이 높다.’
인원을 파악한 승현은 가만히 등장한 사람들을 바라봤다.
그때 남자와 대화를 나누던 병후는 웃으며 말했다.
“형! 내가 대장이랑 잘 이야기했으니까 그 활이랑 머스킷만 줘요. 그러면 그냥 통과에요.”
“정부에서 범죄행위에 대한 엄중한 처벌을 경고했을 텐데.”
“하하하. 형도 참. 말뿐인 경고를 누가 따라요. 아, 원한다면 형도 합류해도 되요. 형은 잘 싸우니까요. 그리고 걱정돼서 하는 말인데 지금 궁수랑 법사랑 잔뜩 포위하고 있으니까 괜한 짓은 하지 말고요.”
“제안은 모두 거절하도록 하지.”
승현의 말에 병후 옆의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이, 최승현! 지금도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본데 순순히 보내줄 때 가라.”
승현은 감각을 최대한으로 확장했다.
포위한 이들까지 모두 포함할 정도로 넓게 감각을 퍼트린 승현은 소혜와 다연을 빼고 모두 암왕이 되고서 얻은 기술인 고유 결계로 끌어들였다.
화아아악!
“뭐, 뭐야?!”
순식간에 주변의 풍경이 변하자 승현을 포위한 이들 모두 당황했다.
어느새 방대한 넓이의 공간으로 이동된 그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방에 촛불이 켜져 있지만 워낙 넓어서 주위는 상당히 어두운 편이었다.
그러나 빛이 없는 게 아닌지라 사방에서 그림자가 졌다.
승현은 바로 그림자를 조종했다.
“컥!”
“크아악!”
그림자에서 빛살처럼 튀어나온 단검들은 스무 명 모두를 덮쳤다.
한 사람에게 대여섯 자루가 날아가 몸 곳곳에 박혔다.
승현은 정교한 조작을 통해 단검을 모조리 관절에 꽂아주었다.
스무 명 모두가 순식간에 전투불능상태가 되고 승현은 바로 고갈된 마력을 무극심법의 무지막지한 회복력으로 채웠다.
딱 한 사람은 온전히 남겨두었는데 바로 병후였다.
설마하니 승현이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한 건지 병후는 당황한 기색으로 다가오는 승현에게 말을 걸었다.
“아니, 그, 혀, 형! 대단하네요! 그거 알죠, 저는 형 많이 생각한 거. 대장한테도 이야기 잘 했고 저는 그러니까······.”
“조용.”
승현은 빠르게 말을 뱉는 병후의 입을 다물게 했다.
승현의 무력은 지금만 해도 20레벨 유저라면 100명은 거뜬히 학살할 수 있는 정도다.
고레벨의 몬스터야 능력치의 격차 때문에 밀리는 거지 살상력만 두면 승현이 한 수 위다.
마력만 받쳐주면 천 명도 학살할 수 있는 게 지금 승현의 무력이다.
그러니 아직 10레벨도 넘은 것 같지 않은 유저 스무 명은 너무나 우습다.
사방에서 들리는 신음 소리만이 적막한 공간을 채우고.
승현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고문은 취미가 아니니까 빠르게 죽여줄까?”
“자, 잠시만요! 제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요? 처음 몬스터 몰이한 거? 그건 형도 알아차린 일이고 별 위협도 안 됐잖아요. 그리고 도망친 것도 솔직히 배신도 뭣도 아니고 그냥 냉정하게 판단한 거잖아요. 산 사람은 살아야죠!”
병후는 급하게 변론을 시작했다.
승현은 그런 병후의 변론을 가만히 들어주었다.
마치 마지막 유언을 들어주는 자세라 병후는 더욱 급히 말을 꺼냈다.
“제가 뭘 잘못했다고요! 살려는 의지는 사람이라면 다 있잖아요. 피해 준 것도 없고 이번엔 오히려 형의 편에서 도움을 주려고 했다고요. 제가 왜 죽어야 하죠? 단지 범죄에 가담했다는 거?”
승현의 침묵에 병후는 이를 악 물었다.
“이런 개 같은 상황에서 더 이상 뭘 해야 하는데! 당연히 살고 봐야지! 가족도 죽은 마당에 나라도 살아야죠. 그리고 지금 저 죽이면 형도 범죄자에요. 살인이라고요! 정당하게 날 죽일 이유도 권리도 형에겐 없어요!”
말을 마친 병후는 승현을 노려봤다.
그런 병후를 보며 승현은 가볍게 이야기했다.
“할 말은 다 했냐?”
“아니요! 혀, 형. 나는, 나만은 살려줘요. 앞으로 착실히 살게요. 다 살려고 한 일이었어요. 저 고작 17살이에요. 네? 하, 한 번만 살려줘요.”
병후는 바로 무릎을 꿇으며 빌었다.
승현은 그런 병후를 보며 점점 더 과거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아무도 믿지 않으며 자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승현도 그랬다.
살기 위해서 범죄도 서슴없이 저질렀고 한땐 수호 길드의 하수인 노릇을 하기도 했으며 나중엔 인류의 적인 놈들의 편에 서 스파이로서 활동했다.
끝은 결국 배신이었지만.
이렇게 정의의 사도인 것처럼 나설 정도로 승현이 정의심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들을 심판할 정도로 깔끔한 인생을 살아온 것도 아니고 말이다.
승현은 김병후에게 딱 잘라 말해주었다.
“네가 죽는 이유는 두 가지야. 하나는 내 믿음을 배신한 거. 그리고 하나는 그러면서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는 거.”
“그게 무슨 말도 안 돼는!”
“다 사정이 있지. 살려고 하는 건 본능이야. 그런데 그렇게 살았으면 눈에 보여선 안 됐어. 그것도 적으로 나타난 건 아주 큰 실수지. 네가 날 봐줬다고? 아니야. 네가 도망갈 때 무리해서라도 널 죽일 수 있었어.”
승현은 조용히 말을 꺼냈다.
“그래도 널 보낸 건 약간의 연민과 동정 때문이었지. 지금도 어느 정도 널 동정해. 하지만 난 깔끔한 걸 더 선호하는 편이야. 무슨 뜻인지는 잘 알거야.”
“제, 제발! 다신 안 나타날 게요. 형한테 복수나 악감정도 없어요. 한 번만 살려주세요.”
“사람을 죽이는 이유로는 좀 하찮지만 너도 말했다시피 이 개 같은 상황을 원망해라. 다른 놈들도 죽일 거니까 그냥 운이 없었다고 생각해.”
승현은 멸마의 창을 꺼내 그대로 병후의 머리를 꿰뚫었다.
분명 김병후의 변론은 상당부분 맞는 말이지만 승현은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적으로 규정지으면 확실히 끝을 봐야한다. 어줍지 않은 자비는 독이 된다.
사실 김병후의 경우는 확실히 규정짓기엔 조금 애매했다.
그가 도망을 치긴 했지만 피해를 주진 않은 건 맞았고 다시 만났을 때에도 친분을 과시하며 어느 정도 여지를 남겼다.
나름의 호의를 보인 것이다.
승현이 병후를 죽이는데 근거가 부족하다.
그저 믿음을 배신하고 다시 눈에 띠였다고 죽이는 건 살인귀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는데 승현은 찰나에 많은 고민을 했다.
불쾌감과 동정, 분노와 연민이 팽팽한 균형을 이뤘다.
김병후의 변론을 들으며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럼에도 그를 죽인 건 모든 걸 배제하고 그를 적으로 규정지었기 때문이다.
연민과 동정도 분노와 불쾌감도 모두 들어가지 않고 오직 한 가지. 김병후와는 적으로 만났고 그렇기에 죽였다.
단지 그뿐이다.
“하, 담배가 어디 있더라.”
승현은 한 보루 정도 챙겨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라이터로 불을 붙인 후 아직도 끙끙대는 남은 이들을 처리했다.
김병후의 경우가 조금 애매해서 그랬지 다른 이들에겐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다.
그렇게 그들을 모두 처리한 후 시체까지 다시 이동될 걸 생각해 그림자 안으로 시체를 넣고 나중에 처리하기로 했다.
의지를 일으키자 서서히 고유결계가 사라졌다.
다시 원래 자리에 선 승현은 뒤를 돌아 소혜와 다연에게 말했다.
“자, 이제 가자.”
“어떻게 된 거에요?”
“딱히. 그저 적이 등장했고 그걸 해결했어.”
승현의 말에 두 사람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다시 길을 나섰다.
며칠 정도 더 걸어가니 서울에 들어올 수 있었다.
서울에 입성하고 나자 속속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에게 물어가며 서울이었던 지역 안으로 들어가자 군용 텐트들이 잔뜩 늘어선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무너진 서울시청의 잔해가 있는 곳이었는데 족히 수만 명은 넘는 이들이 모여 있었다.
유저로 신상 정보를 등록하니 얼마 안 있어서 앞으로 지낼 텐트가 정해졌다.
가족이 아닌 한 남녀가 구분되기에 승현은 잠시 소혜와 다연과 떨어졌다.
기본적인 보급품을 받고 텐트 안으로 들어가자 이미 모포 등을 깔고 누워 있는 다른 사람들이 보였다.
유저는 따로 텐트를 지정 받는다고 하니 이들 모두 유저일 것이다.
이곳에 오고 튀는 반가면을 잠시 넣어둔 터라 시선이 모이진 않았다.
딱 새로운 사람이 또 왔구나 하는 정도?
잠시 텐트 안을 둘러본 승현은 쓸 만한 이들이 있는지 살폈다.
서울 인근에 있는 이들이 다 모여서 그런지 나름 장비가 좋은 이들이 많았다.
여기까지 살아서 왔다는 것부터가 어느 정도 자격이 있다는 소리였다.
그러던 중 승현은 얼굴이 익숙한 한 사람을 바라봤다.
‘어디서 봤더라.’
화려한 갑옷에 방패를 든 청년.
대략 기사로 보이는 그의 모습이 익숙하여 잠시 바라보고 있자니 그와 눈이 마주쳤다. 승현은 그런 청년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그러자 청년에게서 묘한 기류가 흘러나오며 주위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젠장, 어떤 또라이가 여기서 기술을 쓰는 거야?!”
“힘 자랑 할 거면 나가서 해!”
승현은 자신을 압박하려는 힘을 가볍게 떨쳐냈다.
그러면서 드디어 청년이 누군지 기억해냈다.
씩 웃은 승현은 청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이지원 씨. 여기서 다시 보게 되네요.”
“날 압니까?”
“시간이 좀 흐르긴 했어도 구면입니다. 그리고 잊혀지기엔 서로 인상이 꽤 깊었죠.”
“그렇습니까? 난 당신 같은 얼굴은 기억하지 못하는데. 미안하게 됐네요.”
“그때 이후로 랭킹에서 쭉 추락하시고 회복을 못하시기에 좀 미안했습니다.”
“······?”
아직까지 승현이 누군지 눈치채지 못한 이지원을 보며 승현은 더 짙은 미소를 그려보였다. 그리고는 슬쩍 힌트를 던졌다.
“방칼 대전이라고 하면 아시려나?”
“잠시만. 설마. 아니. 그러니까······.”
“이제 감을 잡으신 것 같네요. 검에 대한 건 조금 유감입니다.”
“너, 너!!”
순간 자리에서 일어난 이지원은 바로 주먹을 날렸다.
그러나 승현은 여유롭게 그의 주먹을 잡고는 그를 진정시켰다.
“여기서 이러면 곤란해져요. 나중에 진하게 상대해드릴 테니까 일단은 진정해요.”
“으으······.”
이지원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승현도 약 올리려고 말을 건 게 아니기에 그가 상황을 파악한 것 같자 쥐었던 주먹을 놔주었다.
“내게 뭔 볼일입니까?”
“글쎄요. 이지원 씨한테 관심이 좀 있어서요.”
“나한테요? 잘나신 분이 나한테 뭔 볼일인지 모르겠네.”
“혹시 길드나 파티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설마 그걸 제안하려고 하는 겁니까?”
“맞습니다. 제 파티가 탱커와 힐러는 있는데 딜러진이 없어서요. 이지원 씨라면 충분히 근접딜러로서 훌륭할 것 같더라고요.”
“하! 내가 당신 밑에 들어가고 싶겠습니까?”
“일단은 리더지만 파티에서 누가 위고 누가 아래는 없습니다.”
자신을 노려보는 지원에게 승현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이지원 씨를 높이 평가해서 드리는 말입니다. 물론 제가 마음에 안 드실 순 있겠습니다만 꽤 특별한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자신을 높이는 거 아닙니까? 여긴 더 이상 기어가 아닙니다.”
“그렇죠. 다른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제 레벨은 현재 41레벨이고 저와 같은 파티원은 32레벨과 34레벨입니다. 잘 생각하시고 나중에 제게 의사를 말해주세요. 그럼.”
승현의 말에 이지원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