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호리병을 기울여 안에 든 술을 마신 승현은 몸에 활력이 치솟는 걸 느꼈다.
게임 내에선 계륵이었지만 현실에서는 이만한 아이템을 찾기 힘들다.
그렇기에 기어 안에서 팔지 않고 가지고 있었던 거지만.
휴식과 진행을 몇 차례 반복하던 중 승현은 뒷목이 서늘한 느낌을 받았다.
“좋지 않아. 좋지 않아······.”
이건 기술 중 하나인 육감이 알려주는 경고였다.
아무래도 이대로 진행했다간 큰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느낌이 안 좋아. 모두 단단히 준비하도록 해.”
승현의 경고에 다들 바짝 긴장했다.
그렇게 조금 더 앞으로 진행하자 불길함의 원인과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맙소사. 저건 스켈레톤 나이트? 50레벨짜리가 갑자기 튀어나온 거지?”
병후는 비명과도 같이 외쳤다.
그들을 발견한 스켈레톤 나이트는 흉흉한 안광을 뿌리며 돌진해오기 시작했다.
“소혜! 강한 기술을. 다연은 소혜를 보호하고 병후는 날 서포트해.”
“아, 이건 계획에 없었는데.”
병후는 작게 중얼거렸다.
“온다!”
그러는 동안 빠르게 접근한 스켈레톤 나이트가 승현에게 대검을 휘둘렀다.
피하기엔 속도가 너무 빨랐다. 그 검을 룬이 둘러진 왼팔로 막자 승현이 저 멀리 벽으로 날아갔다.
그 모습을 본 병후는 갈등하던 표정에 무언가 결심이 서렸다.
조금 뒷걸음질을 치던 그는 바로 뒤를 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너!”
“미안! 다 죽을 순 없잖아요. 누나들도 빨리 도망치는 게 좋을 겁니다!”
그의 돌발행동에 소혜와 다연은 황당함을 느꼈다.
설마하니 저렇게 바로 도망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한 두 사람은 배신감마저 느꼈다.
만약 평소였다면 승현은 이런 배신을 바로 응징했겠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두 사람이 배신감을 느꼈다면 승현은 어느 정도 이런 상황을 예상했다.
그가 합류하고도 신뢰를 주지 않았다.
처음엔 소혜와 다연을 보호할 괜찮은 인물이라 판단해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적중해 공격력이 약한 둘을 잘 보좌했다.
허나 분명 김병후와 같은 인물은 기회가 있다면 배신을 서슴없이 할 거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김병후는 과거의 승현과 상당부분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후우, 저 녀석 말이 맞을 수 있어.”
“그럴 지도 모르죠. 하지만 적어도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치는 건 제 성미에 맞지 않아요.”
“하아, 솔직히 전력으로 도망치고 싶지만. 함께할게요.”
소혜와 다연의 말에 승현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저 두 여인이라면 충분히 뒤를 맡길 수 있을 것 같다.
‘원래는 혼자 다닐 생각이었지만. 저 둘은 신뢰해도 되겠어.’
승현은 두 사람을 완전히 신뢰하기로 했다.
다시 달려드는 스켈레톤 나이트를 본 승현은 놈의 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하고는 바로 전력을 다하기로 했다.
“소혜야. 나한테 버프를 걸어!”
대답을 듣기도 전에 승현은 바로 신수화를 사용했다.
그와 동시에 승현의 주변에 불길이 일어나며 스켈레톤 나이트를 뒤로 밀었다.
모든 능력치가 배로 올라가며 몸에 강한 힘이 솟아났다. 이로서 어느 정도 격차가 줄어들었다. 여기에 더해 승현은 오랜만에 마의 불꽃을 꺼내들었다.
대인에게 있어서 이만큼 치명적인 무기는 찾기 힘들 것이다.
“크오오오!!”
“고작 졸병 주제에.”
승현은 땅을 박차고 돌진했다.
동시에 승현은 자신의 몸을 감싸는 포근한 느낌을 받았다.
소혜의 버프가 들어온 것이다. 승현은 마의 불꽃에 마력을 불어넣어 검은 불꽃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검으로 스켈레톤 나이트를 베었다.
마의 불꽃이 가진 높은 절삭력으로 갑옷에 상처가 났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큰 피해가 아니었다. 진짜 공격은 마의 불꽃 그 자체.
화르륵!
검은 불꽃이 빠르게 스켈레톤 나이트를 집어삼켰다.
불길에 휩싸인 스켈레톤 나이트는 고통스러운 건지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언데드에게 고통이 있겠느냐만 보기엔 무척이나 괴로워보였다.
승현은 암왕의 기술인 배신을 사용해 놈의 움직임에 제약을 걸었다.
기술이 발동됨과 함께 놈의 그림자가 쭉 늘어나 놈의 몸을 붙잡았다.
그 그림자를 떨쳐내도 다시 뻗어오는 그림자는 놈의 행동을 현저히 느리게 만들었다.
동등하게 상대할 정도로 놈의 움직임이 느려지면서 승현은 탐식으로 검을 교체했다.
승현은 그림자밟기를 사용하며 철저히 뒤를 노리며 기습을 가했다.
스켈레톤 나이트의 반응은 빨랐지만 그뿐이었다.
점점 타오르기 시작하는 방어구를 뚫고 유효 공격이 들어갔다.
‘마력이 별로 없어. 빠르게 끝내야해.’
크게 도약한 승현은 그대로 탐식을 이용해 내려찍었다.
카앙!
힘겨루기에선 분명 지겠지만 승현은 놈과 마주한 검에 힘을 주며 버텼다.
이건 시간만 끌어도 이길 수 있는 게임이다. 이런 힘겨루기는 이쪽도 환영이다.
서서히 밀리기 시작할 때 소혜의 기술이 놈에게 작렬했다.
꽤 오래 기술을 준비한 걸 보면 상급 기술임이 분명했다.
‘리커버리인가.’
순간 놈을 휩쓰는 하얀 빛에 승현은 대충 기술을 짐작했다. 상위 회복 기술로 힐러라면 가져야 할 필수 기술이다.
기술에 적중한 놈의 몸이 경직되자 검을 쳐내고 그대로 취약한 목뼈 부분을 베었다.
승현의 검에 그대로 머리가 날아갔지만 언데드답게 끈질긴 생존력을 보여주었다.
“마무리!”
승현은 남은 마력을 통해 몇 가지 기술을 중첩해 놈의 가슴에 탐식을 박았다.
커다란 대검이 박히면서 놈의 갑옷이 부서지고 몸통 대부분이 잘려나갔다.
치명적인 공격에 드디어 스켈레톤 나이트의 움직임이 멈췄다.
동시에 세 사람의 몸에서 옅은 빛이 일어났다.
레벨이 오른 것이다.
50레벨의 보스 몬스터로 추정되는 스켈레톤 나이트를 잡았으니 레벨이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승현은 아직도 잔재에 타오르는 불꽃을 껐다.
스켈레톤 나이트가 가진 장비는 거의 모두 쓸모가 없었다.
그나마 남은 게 있다면 검이다.
이곳은 기어가 아니기에 친절한 설명이나 메시지를 볼 수 없다.
그렇다고 완전히 볼 수 없는 것도 아닌 게 한 가지 기술을 익히고 있다면 기어에서처럼 아이템을 확인할 수 있다.
이때를 대비해 배워둔 기술인 감정을 사용했다.
[아이템]
명예로운 기사의 검
-등급: 특별함
-내구도: 301/1,000
-명예를 중시하는 한 기사가 사용하던 검.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용맹해지며 마음을 안정시킨다.
아쉽게도 등급이 특별함이었다.
유일함 등급의 검만이 탐식에게 추가 효과를 주기에 이 검은 그저 탐식의 먹이가 될 것이다. 승현은 거리낌 없이 탐식에 검을 가져다 댔다.
‘주인. 맛있게 먹을게.’
탐식의 목소리가 들리자 승현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때 소혜와 다연이 다가왔다.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
“멀쩡해. 그래도 나 랭킹 1위였다고?”
“다행이네요. 그런데 저희 아무래도 레벨이 오른 것 같아요.”
“그렇겠지. 레벨이 오르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
“오빠는 신기하지 않은가 봐요? 꼼짝도 안 하던 레벨이 올랐어요.”
“난 이미 레벨이 오른 적이 있어. 조금이지만 연구도 했지.”
승현은 선의의 거짓말로 레벨 업 조건에 대해 알려주었다.
의식적으로 기술을 쓸 것, 직업에 대한 확실한 마음가짐.
승현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는 소혜와 다연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승현은 말을 마치고 조금 더 앞으로 전진했다.
그러자 곧 커다란 석문이 앞을 가로막았다.
아마도 2층으로 내려가는 통로이리라.
“일단 내려가는 건 보류. 여기서 레벨을 좀 더 올리자.”
비록 약한 스켈레톤만 나온다지만 레벨을 못 올릴 건 없다.
세 사람은 석문 앞에서 텐트를 쳤다.
승현이 원래 가진 텐트 하나와 백화점에서 교환한 텐트를 쳤다. 그리고 버너를 틀어 오랜만에 요리다운 요리를 먹기로 했다.
“아, 오빠. 야채 좀 더 꺼내주세요.”
“어떤 야채?”
“카레에 들어갈 거요. 다연아. 밥은 잘 되가?”
“으응. 그럭저럭.”
승현은 그림자에서 야채와 고기 등을 꺼내주었다.
승현의 그림자 안은 정말 오만가지 물건이 들어 있었다.
어지간한 식료품점은 모두 털어서 챙겼기 때문이다.
식량을 비축하기 전에 이미 탐식을 통해 그림자 안에 있으면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걸 알아서 챙길 수 있는 거의 모든 식량은 싹 다 털었다.
덕분에 카레 말고도 비싼 한우를 원 없이 구워먹을 수 있었다.
“으, 조, 좀 탔다.”
“소혜랑 다연이는 뭔가 바뀌었네.”
“노, 놀리지 마세요!”
승현의 말에 소혜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연예인인 소혜는 생각 이상으로 요리를 잘했고 반면 자취하는 회사원인 다연은 요리에 소질이 없었다.
고기 굽기 담당인 승현은 접시 가득 고기를 올렸다.
간이 식탁을 꺼내고 의자에 앉은 세 사람은 차려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리 차갑진 않지만 맥주도 잔뜩 있으니까 마셔.”
“취하지 않는 선에서 마셔야겠죠?”
“내 예상이지만 이곳으로 스켈레톤이 오진 않을 거야. 그 반증으로 여태까지 한 마리도 안 보였잖아? 조금 풀어져도 괜찮겠지. 뭣하면 내가 덜 마시고.”
“그럼 오빠만 믿을게요.”
승현은 웃으며 술을 꺼내주었다.
맥주부터 와인이나 소주 등 다양한 술이 식탁을 장식했다.
카레로 어느 정도 배를 채우고 본격적으로 술과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승현은 꺼낸 술보단 선인의 호리병에 담긴 화주를 주로 마셨다.
그에 다연이 호기심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마셔볼래?”
“네!”
“좀 독하니까 조심해.”승현의 말을 듣긴 했지만 다연은 향긋한 꽃향기가 나는 술을 쭉 들이켰다.
그리고 목을 화끈하게 만드는 열기에 급히 기침을 토했다.
“콜록콜록! 무슨 술이 이렇게 독해요?”
“맛은 좋아. 이래보여도 이 호리병 전설적인 등급이야.”
“그 호리병이요? 술이 무한으로 나오기라도 해요?”
“잘 아네. 체력이랑 마력 회복 효과도 있어.”
“그러고 보니. 몸이 가벼워진 기분이에요.”
“승현 오빠. 좋은 건 나눠 마셔야죠.”
그때 소혜가 잔을 내밀어보였다.
그녀의 잔에도 술을 따라주고 승현은 고기와 술을 즐겼다.
상당히 많은 양이었으나 모두 먹어치웠다. 그렇게 오랜만에 포식을 하며 승현은 두 사람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주로 과거에 뭘 했고 무슨 생각을 가졌는지를 이야기했다.
상당히 취해서 그런지 진솔한 이야기와 진짜 속마음이 오고갔다.
“그런데 다들 왜 남아준 거야?”
“저는, 믿음이 있었어요. 승현 오빠라면 제가 도와주면 이길 수 있을 거라는.”
“헤헤, 전 그냥 여자의 감? 솔직히 저도 도망치고 싶었지만 차마 발길이 안 떨어지더라고요. 그래서 남았어요.”
소혜와 다연의 말에 승현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저 믿음과 감만으로 목숨을 거는 건 어리석다.
그렇지만 이 두 사람은 얼마 만나지 않은 자신을 믿고 남은 것이다.
어리석다고는 하나 가슴이 시킨 일을 그대로 할 수 있는 용기가 대단했다.
지금 상황에서는 이성적인 판단도 중요하지만 강한 용기와 자신에 대한 믿음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10점 만점에 7점 정도.’
승현은 이성적인 판단보다 용기와 믿음에 더 큰 점수를 줬다.
“다들 너무 경솔했어. 다음엔 좀 더 냉정한 판단을 내리도록 해.”
“냉정하게 판단해도 아마 남았을 걸요? 전 사제라서 체력이 떨어져서 멀리 도망칠 수 없었을 테니까요. 그러니 남아서 오빠가 이기길 돕는 게 생존확률이 더 높았을 거예요.”
“후후, 그런가. 이제 슬슬 자자. 내일부터는 미궁 안을 돌며 스켈레톤을 사냥해야 하니까.”
“안녕히 주무세요.”
“저도 자볼게요.”
소혜와 다연이 텐트 안으로 들어가고 승현은 주위를 밝혀주는 불의 정령을 가까이로 불렀다. 살짝 뾰로통한 표정의 작은 소녀를 보며 손가락으로 살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려먹기만 했네. 앞으로 잘 부탁해.”
승현의 말을 알아들은 건지 불의 정령이 표정을 풀고는 승현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그런 정령을 바라보며 승현은 호리병을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