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목표는 인근 백화점이 있던 장소였다.
워낙 강진이라 거의 모든 건물이 무너졌긴 했지만 저 멀리 기적적으로 백화점이 무사한 게 보였기 때문이다.
꽤 많은 사람이 모여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기도 하다.
식량도 충분할 테고 잠자리나 안전도 보장된다.
백화점만큼 좋은 거점도 찾기 힘들 거다.
푸욱.
“크르륵······.”
“후우, 레벨이 거의 오를 생각을 안 하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이렇진 않았는데.”
마지막 몬스터를 처치한 파티원들의 대화에 승현은 속으로 생각했다.
현실과 동화되면서 변화 중 하나가 바로 레벨 업의 질이었다.
기어였던 시절엔 게임의 특성을 받아 빠른 레벨 업이 가능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게임이기 때문이다.
레벨은 영혼과 관련이 있다.
자세히는 나오지 않았지만 영혼의 격이라고 할까?
그런 것이 올라가는 거라서 레벨을 올리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대신 보상은 확실한 게 하나의 레벨이 오를 때마다 모든 능력치가 사용한 만큼 오른다는 점이다. 이는 추가 능력치와는 별개로 올라가는 것이다.
기어에서 레벨이 낮았던 이들은 낮은 만큼의 추가 능력치를 얻는 셈이지만 100의 능력치마다 1씩 능력이 오르니 이걸 따지면 어느 정도 균형이 맞다.
어쨌든 레벨을 올리는 건 그냥 몬스터만 잡는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는 거다.
다들 5레벨에서 7레벨 정도임에도 레벨이 전혀 오르지 않는 건 다 그런 이유에서다.
그렇게 반나절을 이동해 백화점에 도착했다.
“정지! 여긴 헤라클레스 길드의 구역이다!”
“백화점 정문에는 여러 명의 유저가 지키고 서 있었다.
아무래도 미리 선점한 길드가 있나 보다. 길드 모두가 모인 건 아닐 테니 아마도 길드장이 있거나 급조한 길드이겠지.
파티원들은 승현에게 시선이 던졌다.
승현은 리더로서 먼저 나섰다.
“백화점의 실질적인 소유주가 있을 텐데요. 또 안에 있는 것들을 한 곳이 독점하는 것도 우습군요. 이런 건물은 공공건물서 사용하는 게 적합합니다.”
“우린 일반인라면 무조건 받아들이고 있다. 유저라면 길드에 가입하는 게 아니고선 안으로 들여보내줄 수 없어.”
“흐음?”
승현은 뜻밖의 말에 살짝 놀랐다.
헤라클레스 길드의 길드장은 퍽 사람을 생각하는 것 같다.
일반인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걸 보면 생각은 있는 듯 보였다.
그러면서 유저는 길드에 가입해야 받아준다.
힘 있는 유저를 자신의 통제에 두면서 세력을 형성하는 것이다. 생각이 있다면 백화점에 얼마나 많은 물자가 쌓여 있을 지는 누구나 알 수 있다.
승현은 함께 온 파티원들에게 의사를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는 길드에 가입할 겁니다.”
“저도······.”
소혜와 다연을 뺀 나머지는 모두 길드에 가입 의사를 밝혔다.
당연한 결과이기에 승현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다음으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두 여인에게도 현실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소혜 씨, 다연 씨. 잘 생각하세요. 이 백화점엔 몇 천 명이 먹을 식량이 있을 겁니다. 지하엔 대형 마트도 있으니 확실할 겁니다. 그러니 혹시라도 제가 구해드린 것 때문에 망설이시는 거라면 주저 없이 선택하세요.”
“저는, 남을게요.”
“으으, 저, 저도요.”
의외의 대답에 오히려 주변 유저들이 충고를 해왔다.
하지만 둘의 눈빛을 보는데 어떤 확신에 차 있었다.
그렇게 결정이 끝나자 두 사람을 뺀 나머지 유저들은 바로 길드 가입 의사를 밝혔다.
한 유저가 백화점 안으로 들어가고 한 유저를 데리고 등장했다. 고레벨 장비를 입은 걸로 봐선 길드 간부나 혹은 길드장일 테다.
“환영합니다. 길드장인 한규석입니다. 게임처럼 절차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규율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그쪽은?”
길드장이라 자신을 밝힌 남자를 보며 승현은 가볍게 웃어보였다.
“거래를 원하는 사람이라고 할까요?”“흐음, 거래라. 장비라도 주시게요?”
한규석의 눈에 탐욕이 서렸다.
아무래도 승현의 장비를 바로 알아본 것이다.
하지만 승현은 가볍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건 다른 게 아닙니다. 바로, 이겁니다.”
승현은 그림자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그걸 알아본 한규석의 눈이 커졌다.
“포, 포션?”
“힐러가 있더라도 포션은 늘 여분의 목숨이라고들 하죠. 그 이유는 잘 아실 테고. 거래하시겠습니까?”
한규석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포션은 확실히 여분의 목숨이라 불린다.
사제 클래스의 유저들의 치료는 시간이 꽤 걸리고 또 마력도 많이 들어 긴급한 전투 때엔 사용하기가 힘들다.
또 완전히 치료를 하는 것도 아니라서 순식간에 상처를 치료하고 체력을 회복시키는 포션은 기어에선 필수 아이템이었다. 지금처럼 현실이라면 더더욱 필요한 물건이 아닐 수 없었다.
“뭘 원하십니까?”
“여분의 옷과 가방 그리고 생필품 등등 필요한 물자입니다.”
“원하는 게 너무 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제가 언제 포션이 한 개라고 했습니까?”
시종일관 여유로운 승현을 보며 한규석은 군침을 삼켰다.
지금 시점에서 포션을 여러 개 얻을 수 있다면 놓쳐선 안 되는 기회였다.
“몇 개의 포션을 가지고 있습니까?”
“5개입니다만. 5개 모두를 드리죠. 이제 생각이 드시는지요?”
“좋습니다. 안으로 들어오세요.”
“소혜 씨 다연 씨. 함께 들어가죠.”
승현은 한규석의 안내를 받아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카트를 끌고 백화점을 돌며 그녀들과 자신이 입을 옷과 생필품 등을 챙겼다.
그중에는 캠핑 용품도 있었는데 재고가 별로 없다는 이유로 4인용 텐트 한 개만 가져갈 수 있었다.
“불편하시겠지만 아무래도 함께 자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요. 축축한 바닥에서 자는 거에 비하면 거의 호텔이죠.”
“헤헤, 맞아요. 승현 씨가 엄한 짓을 하실 분도 아니고.”
“······너무 절 믿는데요?”
이제 겨우 하루 반나절 봤을 뿐이라 이런 신뢰가 조금 부담스러웠다.
자신도 남자인데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엄한 짓을 한다는 건 아니지만.
생활용품을 챙긴 후엔 식료품 저장고로 향했다.
거기서 식수와 인스턴트 음식을 넉넉히 챙겨서 나왔다.
그렇게 카트 한 가득 물건을 챙긴 승현은 바로 한규석에게 포션을 넘겨주었다.
상급 포션 5개를 받아들자 묘한 표정을 짓는 그와 작별한 승현은 물건을 가방에 담고 백화점을 나섰다.
“저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글쎄요. 아마 이런 곳은 대부분 집단이 차지하고 있을 겁니다. 저희가 할 건 소규모 상점에서 물자를 확보하고 괜찮은 거점을 얻어서 레벨을 올리는 거겠죠.”
“전 승현 씨만 믿고 따를게요.”
소혜는 승현에게 깊은 신뢰를 보여주었다.
그건 다연도 마찬가지였는데 조금 망설이는 듯 보이면서도 승현을 전적으로 따르겠다고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대충 주변에 사람도 없는 것 같으니 짐은 제게 주십시오.”
“네? 아니에요. 이미 승현 씨도 잔뜩 들고 계시잖아요.”
“아아, 괜찮습니다. 저는 이렇게. 이런 게 가능하거든요.”
승현은 들고 있던 짐을 그대로 내려놓았다.
그와 함께 땅에 지는 그림자를 통해 짐이 그대로 그림자 안으로 들어갔다.
그 광경을 토끼눈으로 보는 두 사람에게 승현이 가볍게 이야기했다.
“제 기술 중 하나입니다. 물건을 그림자에 넣고 뺄 수 있는데 그때마다 마력이 꽤 들긴 하지만 아주 편리하죠.”
“그렇구나. 대단하네요. 도대체 어떤 직업이기에.”
“도적 클래스에 속하긴 합니다. 좀 특별해서 그렇지.”
승현은 짐들을 모두 그림자에 넣고는 가벼운 걸음으로 움직였다.
애초에 승현의 최종 목적은 인류 구원이나 영웅 놀이가 아니었다.
만약에 인류 구원이 목표였다면 최대한 경고를 하고 어떻게든 현재 상황을 대비했을 거다.
그렇지만 승현은 그러지 않았다.
아마 못해도 수억 명이 이번 일로 죽거나 다쳤을 거다.
승현도 생각을 한 해본 건 아니지만 과연 수억의 인명이 죽는 마당에 과연 그의 메아리가 얼마나 전달될까?
아마 아이실이나 게일 그리고 첸을 이용했다면 어쩌면 수만까지는 살렸을 수 있다.
또 어쩌면 많은 물자를 비축할 수도 있었겠지.
그러나 그래서?
아까의 백화점 같은 건 정말 운이 좋은 경우다. 대부분은 지진과 해일에 휩쓸려 사라지고 묻혔으며 지형의 변화로 평지가 산으로 변하기도 했다.
과연 비축한 물자가, 대피한 사람들이 안전하단 보장이 있을까?
그건 미지수다.
애당초 설득이 가능하다는 전재인데 근거도 없는 말을 믿어줄 사람이 몇일지 모르겠다.
그나마 아이실에게 자신이 봤던 미래를 보여준다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을 지도,
무엇보다 목적부터가 다르다.
인류 구원에는 흥미가 없다.
그건 깨달음을 얻은 지금도 그렇고 과정에도 그렇다.
또 전면에 나서서 영웅으로 칭송 받고 싶은 마음도 없다.
승현은 좀 더 궁극적인 걸 보고 있다.
이 사태를 만든 무언가를 알아내고 할 수 있다면 그 무언가를 막는 것.
그리고 회귀 전의 악연을 끊고 명확한 복수를 이루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인류를 구원하고 영웅이로 불리게 되던 상관도 없고 관심도 없다.
상당히 냉혈한으로 들리겠지만 승현은 현 사태를 대비할 수 없는 재앙으로 규정했고 그렇기에 어떠한 것도 하지 않았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승현이란 사람이다.
물론 승현도 사람이기에 인정이 있고 연민이란 감정이 있다.
재앙에 빠진 인류에 대한 최소한의 연민과 애정이 있어 앞으로의 행보에 있어서 인류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가기로 생각할 뿐이다.
지금도 추후에 상당한 영향력을 펼칠 두 여인을 이끌고 있기도 하다.
잠시 뒤에서 따라오는 두 사람을 본 승현은 과연 그녀들이 얼마나 성장할지 궁금해졌다.
예전에 그녀들은 전면에 등장한 적이 없다.
아마 승현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그때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그녀들이 살아있으니 앞으로가 기대되었다.
‘물론 내가 어느 정도 이끌어주어야겠지만. 아마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되려나.’
재앙을 피하지 못해 죽은 이들부터 사고나 암투로 희생된 이들도 많을 거다.
그들이 살아서 인류를 위해 일한다면 아마 세상은 그가 알고 있는 것과 크게 달라질 것이다.
승현은 둘의 걸음에 맞춰 걸으며 길을 나섰다.
길을 나선지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승현은 북쪽으로 계속해서 걷고 있었다.
들르는 상점에서 식량이 있다면 모두 챙겼고 몬스터가 나타나면 모두 쓰러트렸다.
아직까지도 몬스터의 수준은 올라가지 않았다. 딱 고블린과 코볼트 수준.
종류는 달라도 레벨은 그들과 비슷했다.
그래도 야성이 살아있는 놈들이라 조금만 방심해도 위험했다.
“승현 오빠. 우리 어디로 가는 거예요?”
“북한 쪽이려나.”
“네? 거긴 왜 가는 건데요? 차라리 서울을 돌아다니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어느새 서로 편한 호칭을 사용하게 된 소혜와 다연 그리고 승현이었다.
승현이 나이가 두 살 정도 더 많아 오빠라 불리고 있다.
참고로 승현의 나이는 이제 26살이다.
승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답해주었다.
“감인데 그쪽에 뭐가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감, 이요? 그거 믿어도 되는 거죠?”
“어허, 믿어. 믿어서 나쁠 거 하나도 없으니까.”
승현의 말에 다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멀뚱히 걷는 소혜에게 말했다.
“소혜야. 넌 승현이 오빠 말이 믿음이 가?”
“응? 응. 승현이 오빠라면 믿을 수 있지.”
“정말. 너랑 알고 지낸지 꽤 됐지만 네가 이렇게 낙천적인 줄은 미처 몰랐어.”
“다연아. 그런 너도 승현 오빠를 믿잖아?”
“······에잇, 모르겠다!”
승현은 픽 웃다가 이내 자리에서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