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안개 지옥에 입장합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을 걷는 기분을 또 느낄 줄은 몰랐다.
베타테스트 이후로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는데 그때의 유쾌하지 않은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이라면 그 놈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텐데.”
그때는 요행으로 처리했지만 지금이라면 실력으로 찍어 누를 수 있을 것이다.
승현은 나침반을 보며 빠르게 움직였다.
이곳에 오래 머물 이유가 없다.
다행이도 나침반은 일정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끝도 없이 이어진 안개 사이를 지나치니 서서히 어깨를 짓누르는 중압감이 느껴졌다.
‘아직은 미약하다. 어차피 빠져나갈 수도 없으니 끝까지 가봐야지.’
승현은 다리에 더욱 힘을 주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갑자기 나침반이 다른 곳을 가리켰다.
그런 변화는 총 스무 차례 더 이어졌다.
“역시 헤매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군.”
안개 지옥의 면적은 대략 5킬로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일직선으로 걸으면 반나절도 안 되어서 통과할 수 있음에도 누구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게 이상했다.
그런데 안으로 깊이 들어오니 방향이 이리저리 바뀌었다.
승현은 나침반 덕분에 길을 잃지 않고 중심부로 갈 수 있었다.
그렇게 안개가 점차 옅어지고.
“손님이 아닌 불청객이 왔군.”
“당신이 이곳의 수호자입니까?”
“수호자를 알고 있다면 불가해를 얻은 이인가.”
안개가 사리지고 작은 동산이 하나 나왔는데 동산에 도착하니 한 노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려 기다란 지팡이 위에 앉아있는 노인은 승현을 불청객이라 표현했다.
“욕심을 버려라. 불가해를 한 사람이 여러 개 가져서 좋을 것이 하등 없으니.”
“그러기엔 미래는 암울하더군요. 승자독식이라고 했습니다.”
“암울한 미래라. 마치 미래를 보고 온 듯 이야기하는군.”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
“음? 허허, 그런가. 너는 되돌아온 거로구나. 기구하다, 기구해.”
“시작의 돌. 그것으로 인해 전 되돌아왔죠. 그러면서 깨달은 게 있다면 여러 명의 초인보다는 한 명의 영웅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래, 미래를 본 너라면 그리 판단해도 이상할 건 없지.”
노인은 허허롭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웅이라. 좋다. 특별히 네게도 기회를 주마. 자격 증명을 해보아라.”
“어떻게 자격을 증명하면 됩니까?”
“네게는 어둠이 느껴져. 아마도 그 어둠을 깨운 무언가 때문이겠지. 다시 한 번 어둠과 싸워라. 그리고 그 어둠을 이겨라.”
노인은 지팡이에서 내려와 승현의 이마를 지팡이로 툭하고 건드렸다.
그러자 승현은 갑자기 시야가 멀어지며 주위가 어두워지는 걸 느꼈다.
그렇게 완전히 주위가 어두워지고 승현은 또 다시 어둠뿐인 공간에 홀로 서 있었다.
‘어서와. 다시 만났군.’
“또 너인가.”
‘마치 다른 걸 말하는 것 같군. 나는 너야.’
“듣기 싫다. 썩 꺼져.”
‘큭, 조금 힘이 생겼다고 우쭐대긴. 네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것 같지? 마치 영화의 주인공처럼.’
어둠뿐인 공간에 또 다른 최승현이 등장했다.
승현은 그런 놈의 말을 철저히 무시하기로 했다.
놈의 말은 들어서 좋을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놈의 말은 승현의 본심을 정확히 찔러왔다.
‘네가 아무리 발악해도 결국 넌 썩은 고기나 뜯는 하이에나에 불과해. 명심하라고. 네 위치를.’
“웃기지 마. 난 달라졌어.”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지. 설령 죽음을 겪어도 바뀌지 않아. 너도 알잖아?’
“······.”
‘무시하려고 해도 이게 너의 본심이고 무의식이다. 난 그저 그것을 의식시켜줄 뿐이야.’
또 다른 승현의 말에 조금씩 부동심이 흔들거렸다.
끊임없이 속삭이는 놈의 말은 때론 달콤하고 때론 잔인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승현은 무극심법을 외우면서 잡념을 지우고 명상에 잠겼다.
‘후후후, 자기 관조라. 나 자체가 너인데 그럴 필요가 있어?’
“닥쳐라. 넌 잡념의 찌꺼기일 뿐.”
승현은 끝도 없는 자신과의 싸움을 이어갔다.
옆에서 뭐라고 떠들던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둠을 이기라고 했지만 그 방법을 알 길이 없었다.
승현은 자신이 취한 무관심이 답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놈에게 대항해야 해. 그렇지만 어떻게?’
승현은 놈의 말에서 답을 찾았다.
‘놈과 나는 본디 하나. 즉, 내 의지에 따라 모든 게 달라질 수 있어.’
그 사실을 인지한 승현은 우선 이 캄캄한 공간부터 변화시키기로 했다.
이곳이 하얀색으로 물드는 생각을 하자 물에 잉크를 떨어트린 것처럼 한 공간에서부터 서서히 하얀색이 퍼지기 시작했다.
‘소용없어. 포기해. 변하는 건 없어.’
승현은 놈은 자신의 부정적인 면이라고 규정했다.
말 그대로 어둠.
나태, 절망, 분노, 질투와 같은 감정과 상념이 모인 인격인 것이다.
그렇다면 놈에게 대항하기 위해선 행복, 희망, 열정, 자비와 같은 감정과 상념에 집중하면 된다.
‘이 칙칙한 공간부터 바꾸고 나서.’
승현의 마음이 굳건해질수록 공간은 더욱 빠르게 변했다.
그렇게 완전히 하얀 공간으로 변모한 세계에서 오직 하나.
또 다른 자신만이 어둠을 유지하고 있었다.
승현은 이어서 긍정적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전투의 열광과 투쟁심을.
목표를 달성했을 때의 성취감을.
‘자기 위로를 해봤자다. 현실은 냉정해. 그러니 그런 헛된 망상은 그만 둬.’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며 얻는 즐거움을.
행동에 따른 결과로 얻는 환희를.
‘그만, 그만해. 그렇게까지 아이템이 탐나는 거냐? 너 혼자 강해져선 아무것도 안 돼.’
승현은 온갖 긍정적인 상황과 기억을 떠올리며 자신을 흔드는 놈에게 대항했다.
승현은 놈의 말을 겸허히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자신은 보통보다는 못하게 자라나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길을 걸었다.
그래, 그걸 인정하지만 그 안에서 오직 절망과 분노만 있던 건 아니다.
인연을 쌓고 성장을 하고 발전했다.
궁극적으로 더 나은 자신이 되고자 노력했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이에 대해서는 놈 또한 침묵했다.
‘최승현. 네가 언제든 절망할 때. 나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기억해라.’
결국 놈은 삼류 악당처럼 후일을 기약하며 사라졌다.
놈이 사라지는 순간 시야가 빠르게 돌아오기 시작했다.
“어둠에 대항하는 법을 약간이나마 터득했나?”
“그런 것 같습니다.”
“어둠 또한 결국은 너 자신. 언제든 널 잠식할 수 있다는 걸 명심해라. 넌 자격을 증명했다. 자, 이제 저 위로 가봐라.”
승현은 노인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동산 위로 올라갔다.
동산 위에는 성인 남성 크기의 대검이 하나 꽂혀 있었다.
[아이템]
아우성치는 탐식
-등급: 불가해
-내구도: 85,001/90,000
-모든 검을 먹어치우는 검. 검을 먹으며 성장하며 검을 먹을 때마다 내구도가 상승한다. 먹은 검의 능력을 증폭되며 검신에 닿은 모든 검은 서서히 잠식당해 먹힌다. 단, 유일함 등급 미만의 검은 내구도만을 높여준다
-먹은 검의 숫자: 4개. 중력검 : 바론, 마력을 불사르는 마검, 무능한 검사의 소도, 절망의 소나기.
“이거 그 미친놈이 가진 검 같은데?”
승현은 한때 자신이 몸 담갔던 조직의 어느 인물을 떠올렸다.
그는 중력을 자유로이 다루며 이와 같이 생긴 대검을 휘둘렀는데 그 파괴력이 어찌나 강하던지 놈과 싸우는 이들 모두 버거워했다.
“놈이 여기서 이 검을 얻었구나. 그런데 이게 최강의 검?”
승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최강의 검을 찾아 왔는데 이것이 어째서 최강인지 이해가 안 됐기 때문이다.
“닿은 검을 잠식해서 그런가? 그보다 전설적인 등급의 검 하나랑 유일함 등급의 검 세 개를 먹었는데 그 세 개의 검 이름이 영······.”
일단은 이 중압감의 정체는 바로 저 중력검의 능력일 것이다.
남은 세 개의 검이 가진 능력은 뭔지 모르겠지만 결코 좋아보이진 않았다.
그래도 검을 먹일수록 다양한 능력을 보유하고 상대 검을 서서히 무력화시킨다는 점에선 확실히 좋은 검이다.
충분히 성장이 가능한 검이다.
실제로 그 놈은 상대하는 모든 이들의 검을 전리품으로 챙겼다.
‘여기까지 와서 내빼는 것도 우습지.’
조금 꺼림칙한 검이긴 하지만 최강이라 시스템이 인정한 검이다.
망설일 것 없이 승현은 바로 탐식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와 동시에 전신을 짓누르는 엄청난 힘에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정확히는 저절로 반응한 룬이 전신을 감싸며 지지하지 않았다면 바로 검을 놓치고 바닥에 처박혔을 것이다.
‘무, 뭐야?!’
어마어마한 중력이 승현을 잡아끌었다.
그를 룬에 의지해 버틴 승현은 룬의 힘으로 천천히 일어났다.
중력을 버티고 있자 다음은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승현의 마력을 탐식이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갑자기 마음을 잠식하는 무력감과 알 수 없는 절망감이 강하게 일어났다.
승현은 이것이 세 가지 검들의 능력임을 바로 알아차렸다.
이를 악 다문 승현은 탐식을 뽑았다.
검을 뽑자 승현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대검이 자태를 드러냈다.
승현도 결코 작은 키가 아닐 걸 생각하면 대검은 무척이나 길었다.
“크윽, 이거 언제까지 이러는 거지?”
승현은 탐식을 들고서 동산을 내려와 노인에게 향했다.
노인은 승현이 탐식을 들고 오는 걸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놈 참. 그걸 억지로 뽑은 건가. 대단하군. 오직 인연이 닿은 이만이 뽑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죄송하지만 이 놈의 능력을 끄는 방법은 없습니까?”
“없네. 능력을 상시 증폭시켜 방출하는 게 그 검의 특징이야. 검이 인정할 때까지 들고 있어 보게. 아니면 그놈이 만족할 만한 검을 먹여 달래보던지.”
승현은 노인의 조언에 따라 그림자에서 가진 모든 검을 꺼냈다.
마의 불꽃이야 같은 불가해 등급이니 아마 먹을 수 없을 테고 남은 건 유일함 등급의 검들이었다.
가장 초창기에 얻은 페른의 독니부터 시작해 최근에 맥스에게 받은 장인의 명검이란 검까지. 총 여섯 개의 검이 나왔다.
승현은 하나씩 탐식에게 가져다 댔는데 검신이 맞닿자 검이 녹아들 듯 탐식에게 빨려 들어갔다.
소환한 모든 검을 먹이자 탐식이 뿌리는 능력이 확 줄어든 걸 느낄 수 있었다.
살짝 몸이 무거운 정도였고 마력도 회복 속도가 조금 더 앞지르는 정도로 변했다.
감정 변화도 약간의 신경을 거스르는 정도로 변했다.
“당장은 진정한 것 같군. 하지만 녀석이 다시 허기를 느끼면 감당하는 게 점점 힘들어질 거네.”
“꾸준히 검을 먹이란 말씀입니까?”
“그게 그 검의 숙명이야. 세상의 모든 검을 먹어치워도 멈추지 않을 걸세.”
“정말 방법이 없습니까?”
“녀석에게 인정을 받는 방법 밖에. 하지만 까다로운 녀석이라 그게 쉬울지는 모르겠군. 일단 열심히 검을 먹여서 자아를 깨우게. 그리고 녀석의 자아에게 인정을 받으면 될 거야.”
“후, 잘 알겠습니다.”
“노파심에 충고하네만. 다른 금지에는 얼씬도 하지 말게. 금지는 모두 인연이 닿는 이들에게 주어진 것. 이번은 아직 녀석과 인연이 닿은 이가 없어서 그냥 내주었다만 다른 곳에도 이리 난입을 하면 수호자가 가차 없이 응징할 거네.”
“새겨듣겠습니다.”
“나도 이제 자유로군. 그럼 가보게.”
노인은 가볍게 지팡이를 휘저었다.
그러자 안개가 걷히며 길이 열렸다.
승현은 탐식을 그림자에 수납하고 길을 나섰다.
어찌됐든 최강의 검을 얻었으니 그걸로 만족이었다.
‘연비는 아주 비싼 놈이지만 말이지.’
속으로 한숨을 내쉰 승현은 다음으로 나침반을 꺼내들었다.
방어구야 룬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고 위력적인 무기도 여럿 있으나 평상시에 쓸 검이 문제였다.
“이번엔 제발 제대로 된 놈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