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기억이 맞는다면 이곳은 썩은 묘목들이 주로 나오는 곳이다.
화염 속성과 성수에 약하며 사제와 마법사를 대동해야 클리어가 가능한 던전이다.
그러나 승현은 이 던전을 혼자서 클리어 할 생각이다. 그것이 가능한 건 역시 아이템과 기술 덕분이다.
정령술과 불꽃이 깃든 권갑의 힘을 볼 생각이다.
던전 안으로 들어가니 역시나 썩은 묘목들이 어기적거리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내 검에 깃들어.”
화르륵.
불의 정령은 승현의 명령에 따라 검에 휘감겼다.
그와 함께 검이 붉은색 아우라를 뿌리기 시작했다.
“그럼 어디 보스까지 달려볼까?”
“키에엑!”썩은 묘목 사이를 휘저으며 검무를 펼치기 시작했다. 끝없이 쏟아지는 썩은 묘목들은 승현의 검에 베이자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승현은 검무를 추는 틈틈이 주먹을 뻗어 내장 기술을 사용해 불덩이를 날렸다.
불덩이가 날아간 곳에는 폭발이 일어나며 썩은 묘목들이 불에 탔다.
이 썩은 호수의 무서운 점은 이 묘목들이 끝없이 나온다는 점이다.
쉴 틈 없이 쏟아지는 묘목들에 의해 진입한 파티는 필사적으로 파도처럼 몰려드는 묘목들을 상대해야 했다.
승현도 슬슬 지쳐가기 시작했지만 묘목들은 그칠 줄 모르고 등장했다.
떨어지는 아이템을 주울 사이도 없이 앞으로 전진했다.
한참을 안으로 들어갔을까.
[보스가 등장합니다]
“후, 드디어 도착인가.”
승현은 숨을 들이마시며 돔 형태의 넓은 공간 가운데 있는 커다란 고목을 바라봤다.
지금은 움직이지 않고 있지만 저것이 바로 이 썩은 호수의 보스인 깊은 호수의 고목이다.
발목까지 오는 썩은 물에 발을 담그며 조심히 검을 들어올렸다.
푸스스, 쿵!
사방에 뻗은 뿌리가 들썩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승현은 그 움직임에 곧장 앞으로 달렸다.
놈을 상대하는 건 저 뿌리가 아니라 중앙에 있는 본체다.
저기에 데미지를 가하지 않으면 놈은 평생이고 공격을 가할 것이다.
촤르륵.
“저리 비켜라!”
화르륵, 펑!
권갑에서 뻗어 나온 불덩이가 앞을 막는 뿌리에 적중했다.
그와 함께 훌쩍 뛰어 넘은 다음 그대로 다시 달렸다.
서서히 놈의 본체와 가까워지는 동안에도 고목은 열심히 그 뿌리를 뻗어 공격을 해왔다.
몸을 회전하며 베어버린 다음 앞으로 굴러 뿌리의 공격을 피했다.
그렇게 빠르게 접근한 끝에 고목의 본체에 다다랐다.
“하아압!”
썩은 고목에 그대로 검을 박았다.
쉽게 박히는 검이 깊이 들어가자 여성의 비명소리가 고목에게서 들렸다.
승현은 여기서 끝이 아님을 잘 알기에 정령과 이어진 마력에 모든 마력을 불어넣으며 명령을 내렸다.
“화력, 최대로!”
화르르, 파아아!!
검에 깃든 정령은 넘치는 마력을 받아 불꽃을 일으켰다.
검이 내부에서 깊이 박혔기에 안에서부터 불꽃이 일어나 고목을 태웠다.
꺄아아악―!!
촤르륵, 촤르륵.
“칫.”
승현은 사방으로 날뛰는 뿌리에 검에서 손을 놓고 그대로 뒤로 물러났다. 그렇지만 사방에서 휘둘러지는 허벅지 크기의 뿌리들 때문에 급히 방어구 효과를 발동시켰다.
“은빛 가호!”
승현의 외침에 그대로 은색 보호막이 생겨나며 고목이 휘두르는 뿌리를 막아냈다.
쿵, 쿵, 쿵!
“빨리, 빨리!”
승현은 불길에 잡아먹히고 있는 고목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정령이 일으킨 불꽃은 내부에서부터 터졌다. 그저 겉 부분을 태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치명적인 데미지를 입고 있을 테다.
그러니 이리 미친 듯이 뿌리를 휘두르는 것이겠지.
파직.
“이것도 한계인가.”
은빛 가호에 금이 생겼다.
곧 있으면 보호막이 깨질 것이다. 몇 분 동안이나 뿌리의 공격을 막아준 보호막을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급히 창고에서 성수를 꺼내 권갑에 뿌렸다.
샤아악.
권갑에 성수가 뿌려지며 은은한 빛이 권갑에 둘러졌다.
이 효과는 그리 오래가는 건 아니지만 상당한 데미지를 줄 것이다.
“후우, 마력도 어느 정도 회복됐군.”
어느덧 전체가 불타기 시작한 고목을 보며 승현은 심호흡을 했다. 갑옷을 입어 움직임이 좀 걸리적거렸다.
‘나중에 가죽이나 천 종류로 바꿔야지.’
승현은 보호막이 깨지길 기다렸다.
이윽고 채찍처럼 휘둘러진 뿌리에 보호막이 깨졌다.
승현은 보호막이 깨짐과 동시에 주먹을 뻗어 본체를 향해 불덩이를 날렸다.
허나 이리저리 휘둘러지는 뿌리에 막혀 효과를 발휘하진 못했다.
승현도 유효 공격이 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기에 빠르게 다음 행동을 취했다.
휘둘러지는 뿌리를 권갑으로 막아 성수의 효과로 인해 뿌리가 살짝 녹아내렸다.
권갑을 앞으로 해 뿌리를 막은 후 막힌 뿌리에 주먹을 꽂았다.
뿌드득.
썩은 나무가 부러지며 뿌리가 끊겼다.
이미 본체에는 충분히 데미지가 누적되고 있으니 남은 건 시간을 끄는 일 뿐이다.
활활 타오르는 고목을 두고서 승현은 자신에게 휘둘러지는 뿌리를 모조리 쳐내며 버텼다.
주먹 한 번에 뿌리가 부서져 나갔다.
능력치만 놓고 보면 200레벨에 육박하는 승현이기 때문에 고목의 공격에 크게 밀리지 않았다. 그래도 워낙 많은 뿌리가 사방에서 출렁거려서 승현도 모두를 막을 순 없었다.
퍼억.
“큭, 끝도 없군!”휘둘러진 뿌리에 복부를 맞은 승현은 고목의 움직임이 서서히 느려지기 시작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에 바로 놈의 본체로 다가가 몸을 크게 뒤로 해 주먹을 꽂았다.
퍽! 우득, 우드득.
무극권법에 마력이 실린 주먹을 받은 고목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옆으로 서서히 넘어가기 시작했다. 고목이 옆으로 넘어가는 것을 발로 차 가속시킨 승현은 곧이어 완전히 넘어가는 고목을 바라봤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고목을 쓰러트리자 레벨이 하나 올랐다.
아직도 불에 타고 있던 고목은 서서히 사라지고 고목이 있던 자리에는 큰 구덩이 하나와 아이템이 놓여 있었다.
“그럼 즐거운 전리품 수거 시간을 가져볼까?”
따로 방 같은 게 안 열린 걸 보면 던전 보상이 아이템으로 드랍됐나 보다.
“이건 인텡글 마법 기술서고 이건 스태프네. 둘 다 나한텐 필요 없는 거군. 그래도 경매장에 올리면 잘 팔리겠네.”
보스를 잡고 나온 보상은 승현에게 필요 없는 것들이었다.
대신에 무조건 던전을 입장한 유저에 맞춰 나오는 던전 보상을 기대하기로 했다.
“망토, 라기엔 누더기에 가깝군.”
희귀함 등급의 망토가 나왔는데 승현에게 없는 부위이긴 하지만 딱히 지금 착용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망토도 창고에 넣고 검을 회수한 후 삽을 꺼내 구덩이 안을 파기 시작했다.
“여길 파면 뭔가가 나오겠지.”
열심히 땅을 파고 있자니 딱딱한 바위 같은 게 느껴졌다.
손으로 살살 털어내니 마법진이 그려진 비석이 있었다.
[조건을 만족하여 히든 던전이 열립니다. 권장 레벨 200레벨]
“뭔 직업 관련 던전이 200레벨이냐. 살벌하네.”
승현은 잠시 포션을 마시며 마력을 채웠다.
능력치만 놓고 보면 200레벨 쯤 되니까 들어가도 상관은 없을 듯하다. 직업 관련이니 1인으로도 충분히 클리어할 수 있을 테고 말이다.
마력이 충만해지길 기다린 끝에 히든 던전에 입장했다.
[히든 던전, 그림자 수련장에 입장합니다]
[이 던전은 마력을 사용할 수 없는 특수 던전입니다]
[마력이 일시적으로 봉인됩니다]
[임무를 완료하였습니다. 보상이 주어집니다]
[임무 : 후예가 되기 위해]
-대대로 암왕을 길러낸 유서 깊은 수련장에 입장했습니다. 모든 수련을 마치고 암왕의 후예가 되십시오.
주르륵 떠오르는 메시지에 승현은 일단 창고를 열고 보상을 확인했다.
[아이템]
그림자 발걸음
-등급: 유일함
-내구도: 400/400
-그림자의 힘이 깃든 신발. 발소리가 사라지며 기척을 어느 정도 지워줍니다.
무려 유일함 등급의 아이템이 보상으로 나올 줄은 몰랐으나 뜻밖의 수확이었다.
이 신발과 은신 기술이 만나면 상당한 시너지를 낼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필요 없으니 창고에 모셔두자고.”
창고에 다시 신발을 넣은 후 주위를 천천히 살폈다.
이런 특수한 직업을 얻어 본 건 처음이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긴 통로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수백 개의 허수아비가 제각각의 속도로 회전하고 있었다.
허수아비에는 팔이 위아래로 여러 개가 달려 있었는데 아무래도 저 허수아비를 통과해 저 너머로 가는 게 이 방의 목적인 것 같았다.
“그냥 통과만 하면 되는 건가?”
승현은 가벼운 마음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이 방의 무서움을 깨달을 수 있었다.
퍼버벅, 쿵.
“크으, 이게 무슨······.”
안으로 발을 들이고 몇 걸음 가지 않아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는 허수아비에 의해 연신 치이고 치이다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승현이 원래 자리에 돌아오니 허수아비들은 언제 맹렬히 회전했냐는 듯 소리 없이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그래, 암왕의 후예 쯤 되려면 회피 능력이 뛰어나야 한다 이 말이지? 딱 기다려.”
승현은 자신을 보호해주는 갑옷을 모두 벗었다.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다시 한 번 허수아비 숲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촤르륵, 촤르륵.
팽이처럼 돌아가기 시작하는 허수아비.
그 사이를 재빨리 움직이며 피하는 승현은 이번에도 역시 얼마 못 가 허수아비에게 연신 두들겨 맞으며 뒤로 물러나야 했다.
“아파라. 상당히 아프잖아. 여기 통증 완화가 통하지 않는 것 같은데.”
기어가 일단은 게임의 형태를 하고 있으면서 몬스터가 죽으면 사라지는 것처럼 게임 시스템이 적용되어 있다. 그중 통증 완화는 일정 이상의 통증을 못 느끼도록 하는 시스템이다.
하지만 지금 느끼는 통증은 완전했다.
마력도 봉인되어 무극심법의 효능도 볼 수 없었고 기술도 쓸 수 없었다.
“이럴 거면 신수화를 고목이랑 싸울 때 썼지.”
만일을 위해 아끼고 아낀 것인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승현은 다시 힘찬 발걸음을 내딛었다.
털썩.
“하아, 하아.”
몇 번째 도전인지 모르겠다. 이미 몸 곳곳은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고 쑤시지 않는 부위가 없었다. 하지만 아직도 첫 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승현이었다.
“내가 이렇게 느렸었나. 아니, 이걸 사람이 지나갈 순 있는 건가.”
욱신거리는 통증에 미간을 찌푸린 승현은 현재 방 중앙에 누워 있었다.
어찌어찌 중앙까지 오니 이렇게 쉴 수 있는 공간이 존재했다.
던전에 들어온 지 벌써 오일 째.
이제야 겨우 중앙에 도착했다.
하지만 앞길은 아직도 허수아비가 막고 있었다.
여기서 이러는 동안 승현은 두 가지 기술을 얻었다.
하나는 육감이란 기술로 유일함 등급의 기술이었고 하나는 평범함 등급의 명상이었다.
두 기술 다 언젠가 얻으려고 했던 거지만 이런 곳에서 얻을 줄은 몰랐다.
특히 육감은 패시브 형태라서 얻는 게 무척이나 까다로운데 이 수련장은 그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시켜주었다.
사실 반쯤은 이 육감 덕분에 올 수 있었다.
육감은 마력을 사용하는 기술이 아니기에 발동이 되었고 때문에 직감적으로 어디서 무엇이 날아올지 대략적이나마 알 수 있었다.
“정신 고양만 사용할 수 있어도 조금은 더 쉬웠겠다.”
이렇게 기술이 아쉬울 때가 없었다.
포션을 꺼내 멍든 부위에 조금씩 바른 다음 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이를 악 다물고 다시 허수아비 숲으로 돌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