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64 / 0290 ----------------------------------------------
발트해
과거-1587년 4월 8일 수요일
“쿨럭. 쿨럭.”
빌럼 공작이 피를 쏟아냈다. 곁에 있던 하녀가 급히 다가와 그의 피를 닦아주었다.
“역시 안으로 들어가시는 게.... 바깥바람이 너무 찹니다.”
완연한 봄이 온 프랑크. 바람은 찬 것보다는 시원하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날씨였지만 빌럼 공작은 그런 시원함도 버틸 힘이 없었다. 겨우 죽음의 고비를 넘기기는 했지만 상처의 회복이 너무 느렸다. 능력을 사용하면 이런 바람 정도야 충분히 견딜 수 있겠지만 능력으로 부상을 멈추면 회복도 멈추기에 얼마 전부터 능력의 사용을 자제하고 있었다.
“후후. 아냐. 딱 좋은데 뭐가 차다고 그러나.”
“그럼. 산책을 하는 동안만이라도 능력을 사용하고 계시죠.”
“괜찮아. 난 정말 괜찮아. 후후후. 피를 좀 뱉어내고 있기는 하지만 내 인생에서 지금보다 더 편안했던 적이 없어. 그동안 너무 바빠서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내 나이가 올해로 53살이더군.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지.”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이십니까. 공작님은 앞으로 3~40년은 거뜬하실 겁니다. 빌어먹을 알바 공작을 보십시오. 그런 악마도 80가까이 살고 있는데 신께서 공작님을 데려갈리 없지 않습니까.”
“그럴 수도 있지.”
빌럼 공작이 고개를 들어 멀리 떨어져 있는 숲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사냥도 해보고 싶군. 사냥을 해본지 20년은 된 것 같아.”
“에스파냐 놈들 때문에 시간이 없었죠. 한시라도 공작님이 없으면 네덜란드가 멸망할 상황이었으니까요.”
“후후.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지. 그래서 이번에 부상을 입어 이곳으로 오면서 조금이지만 신을 원망하기도 했어. 결국 이렇게 네덜란드를 에스파냐의 손에 넘기려고 하시는 거냐고 말이지. 하지만 말이야. 지금 상황을 봐봐. 내가 네덜란드에서 사라진지 시간이 꽤 흘렀는데... 네덜란드가 사라졌나?”
“영토의 3분의2가 사라졌죠.”
“아냐. 그건 내가 있었어도 똑같았을거야. 아니, 오히려 더 많은 영토를 빼앗겼을 수도 있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공작님께서 제자리에 계셨다면 이미 알바 공작과 파르마 대공을 네덜란드 땅에서 쫓아내셨을 겁니다.”
“후후. 과거 알바 공작 한명한테도 연전연패를 하던 나에게 너무 아부를 하는군. 하지만 냉정히 보게. 네덜란드는 나 없이도 잘 돌아가고 있어. 그리고 난.... 30년만에 여유로움을 만끽하고 있지.”
“.............”
“정말 이런 여유를 가져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어. 그동안은 휴식을 취한다고 하면서도 실은 네덜란드를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할지 혼자 생각할 시간을 가졌었지. 일의 연장이었어. 식사를 할 때도 잠을 자기 전에도 마차를 타고 이동 중에도. 한시도 제대로 휴식을 가질 수 없었지. 내가 쉬면 네덜란드가 위험해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보면 정말 교만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었어. 나 없이도 저렇게 잘 돌아가는 것을.”
그렇지 않다고 하고 싶은 디르크였으나 할 수 없었다. 오랜 기간 빌럼 공작과 함께한 그는 알 수 있었다. 빌럼 공작은 그런 말을 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정말.... 정말이지 너무 편해. 몸이 아프기는 하지만 마음이 너무나도 편해. 피를 흘리면서 이런 말을 하면 이상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이 내 인생에서 가장 몸이 편한 시간이야.”
“......”
디르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만큼 빌럼 공작이 그동안 가지고 있던 책임감이 막중했던 탓이다. 세계 최강국 에스파냐에 맞서 네덜란드를 지키기 위해 그가 한 마음 고생이 얼마나 컸는지.... 디르크는 알지 못했다. 그는 그저 영웅 빌럼 공작이니까 이 정도는 당연히 가볍게 견뎌낼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빌럼 공작이 보여준 모습들도 그런 듯 했고 말이다.
하지만 빌럼 공작도 인간이었다. 견뎌내고 표현하지는 않고 있었지만 그가 겪어온 심적 고통은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
빌럼 공작은 프랑크에 내려온 초기에는 침대위에서도 네덜란드를 위해 무언가를 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침대위에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고 얼마 가지 않아 아무 일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너무 답답했다. 이까짓 부상. 감수하고 다시 네덜란드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부상이 너무 심해 그럴 수 없었고 시간이 흘러 결국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받아들여야 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자각하는 순간 무력감이 몸을 지배할 것 같았다. 하지만 무력감이 찾아오기보다는 오히려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네덜란드는 자신이 없어도 잘 버티고 있었고 굳이 자신이 돌아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마음이 편안해지자 부상으로 인한 고통도 달콤하게만 느껴졌다.
빌럼 공작은 단언할 수 있었다. 지금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편안하고 여유있는 시기라고 말이다.
“정말 너무 좋군.”
빌럼 공작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넓고 푸른 하늘이 자신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것 같았다.
***
현재-1587년 9월 7일 월요일
빌럼 공작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마우리츠. 나는 죽어서 네덜란드를 하나로 뭉치게 했지. 그리고 너는 나를 뛰어넘는 네덜란드의 영웅이 되었다. 이제와 내가 돌아와봐야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하기만 할 거다. 어쩌면 우리가 자신들을 속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차라리 나는 이대로 죽어있는게 나을 거다. 그리고 아직 부상도 완치되지 않았지. 언제 완치될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공작가를, 네덜란드를 제대로 통치할 수 없어.”
“그렇지 않아요. 사람들은 영웅의 귀환에 환호할겁니다. 아버지는 반드시 돌아오셔야 해요. 그리고 전 여자잖아요. 언제까지고 남자의 역할을 하고 있을 수는 없어요.”
마우리츠는 빌럼 공작의 말에 불안해졌다. 혹시 자신에게 남자의 역할을 계속하라고 하는 것은 아닐까. 약속했던 아론과의 결혼을 취소하려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고 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네 생일에 오라녜 공작가는 공녀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아론과의 약혼 또한 함께 발표할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굳이 네덜란드 총독이자 총사령관인 마우리츠를 지울 필요가 있겠느냐. 지금 네덜란드는 마우리츠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뭉쳐있다. 그런데 마우리츠가 사라진다면 분명 흩어질 것이고 다시 하나로 뭉치는 것은 요원한 일이 될 테지. 그러니 네가 공녀로서의 삶도 되찾되 총독과 총사령관의 삶도 함께 살아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종국에는 오라녜 공작으로서의 삶도 함께 말이다.”
마우리츠는 생각도 못했단 빌럼 공작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마우리츠만이 아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방안에 있던 모두가 크고 작은 충격을 받았다. 마우리츠에게 공작위를 맡아달라는 저 말은 다르게 말하면 빌럼 공작의 은퇴선언이었다. 빌럼 공작이 은퇴한다니. 이대로 자신이 죽은 것으로 하겠다니. 당연히 그가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은 충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 저에겐 너무 큰 짐이에요. 제가 할 수 있을 리 없잖아요.”
“그게 무슨 말이냐. 지금까지 잘 해와놓곤 말이다.”
“그건 보어 남작이나 아론이 도와줬기 때문이에요. 제가 한 일이 아니란 것을 잘 알고 계시잖아요.”
“아니. 네가 한 일이다. 보어 남작과 아론은 네 가신이고 가신이 한 일은 군주가 한 일이다. 가신이 실수를 해도 군주가 실수를 한 것이고 가신이 성공을 해도 군주가 성공을 한 것이다.”
“하지만 전 능력이.... 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걸요.”
“후후. 쓸데없는 걱정이구나. 보어 남작.”
“네. 각하.”
“자네 마우리츠를 떠나서 다른 곳으로 갈 건가?”
“저는 오라녜 공작가의 가신. 죽음이 찾아오지 않는 이상 전 항상 이곳에 있을 것입니다.”
“그래. 고맙네. 아론. 자네는 어떤가. 자네는 마우리츠를 떠날 건가?”
“제 반쪽입니다. 반쪽 없이 제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렇다는구나. 네가 말했다시피 이 둘이 너를 도왔기에 지금의 영웅 마우리츠가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이 둘이 있는 한 영웅 마우리츠는 존재하지 않겠느냐. 들었다시피 이 둘은 다른 곳에 갈 생각이 없다고 하니 괜찮겠구나.”
“하지만.....”
“그리고 앞으로 나와 디르크도 함께하며 도울 것이다.”
“그렇다면 그냥 아버지가 하시는 것이 좋...”
“네 아이를 생각하거라.”
빌럼 공작이 함께 있을 거라면 그냥 당신이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려는 마우리츠의 말을 끊고 빌럼 공작이 말했다.
“아이요?”
“그래. 빌럼 주니어. 강력한 군주의 아들인 것과 갑자기 사라진 수십 년 전의 군주의 아들인 것. 어느 쪽이 오라녜 가를 물려받는 것에 도움이 되겠느냐.”
“.......”
당연히 전자다.
“주니어를 생각해서라도 받아들이거라. 네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저 평소에는 네 본래의 모습으로 생활하다가 공식석상에만 군주 마우리츠로서 참여하면 된다. 그러기만 한다면 네 아들은 자연스럽게 오라녜 공작이 될 것이다.”
빌럼 공작은 그저 마우리츠가 공작위를 지키다가 물려주는 것이 빌럼 주니어에게 좋을 것이란 뜻에서 한 말이었지만 마우리츠에게는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빌럼 주니어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겠다는 협박으로 들렸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될까요?”
“물론이다.”
생각해보겠다 하기는 했으나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며칠의 시간이 지나고 결국 마우리츠는 빌럼 공작의 말대로 하겠다는 대답을 했다. 빌럼 공작은 크게 기뻐하며 오라녜 공작의 자리도 네덜란드가 안정을 되찾는 대로 바로 물려주겠다고 하였다.
***
아론은 마스크를 벗었다. 그는 빌럼 공작이 마우리츠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며 물러나겠다는 말을 했을 때 자신도 빌럼 루이스로서 살게 되겠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빌럼 공작이 마우리츠의 곁을 지켜주겠냐고 묻기까지 했으니 그 생각은 확실해지는 듯 했다. 하지만 빌럼 공작은 아론을 놓아주었다.
-그 동안 내 억지를 따라주어 너무 고마웠다. 자신을 밝히지 못하고 남의 이름으로 산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나는 상상도 할 수 없구나. 이제 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거라. 나사우 백작가는 약속했던 대로 곧 렐리 백작가가 될 것이다.
의외로 빌럼 공작은 시원하게 아론을 놓아주었다.
-다만 빌럼 루이스는 네덜란드의 영웅. 가끔 빌럼 루이스가 필요할 때 도와줄 수 있겠나?
아론은 당연히 그러겠다고 했다. 그리고 나사우 백작가도 포기했다. 대신 나사우 백작가를 아들인 빌럼 주니어에게 물려주겠다는 빌럼 공작의 약속을 받아내었다. 빌럼 주니어는 10살이 되기 전에 나사우 백작가를 물려받을 것이다. 그리고 차근차근 오라녜 공작가를 물려받을 준비를 하게 될 것이다. 아론 자신이 그렇게 만들 것이다. 필요하면 빌럼 루이스가 되어서라도 말이다.
빌럼 공작은 아론의 그런 결정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걱정하지 말거라. 빌럼 주니어는 반드시 역사상 가장 강력한 오라녜 공작이 될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고 렐리가에 아무런 보상도 주지 않을 수는 없지. 백작의 자리는 더 이상 줄 수 없지만 위트레흐트 동북쪽에 바른이라는 자작 영지가 있다. 1391년에 도시 인정을 받은 곳으로 7~8천명이 살고 있는 곳이지. 이제 그곳은 아론 네 땅이다.
그렇게 아론은 단승 남작에서 계승 자작이 되었다. 아직 정식으로 받지는 못했지만 빌럼 공작이 약속한 이상 그의 말대로 이루어질 터였다.
루이웨 역시 상당한 보상을 약속받았다. 루이웨 역시 단승 남작이었는데 그 역시 계승 귀족의 자리를 약속받은 것이다. 루이웨는 아론과 달리 자신의 이름으로 활동을 해왔고 파르마 대공을 죽이는 등 수많은 공을 세웠기에 이번에 공석이 된 네덜란드의 영지 중 하나를 받아 주겠다고 빌럼 공작이 약속했다. 물론 실행은 마우리츠가 해야겠지만 계획은 빌럼 공작이 알아서 짜줄 것이다. 빌럼 공작은 자작위는 간단할 것이고 운이 좋으면 백작위도 가능할 것이라 이야기했다.
“아론 보어 렐리 바른이라니. 이름이 너무 길어.”
오랜만에 빌럼 루이스라는 이름 대신 아론 보어 렐리로서 집에 돌아온 아론. 그는 자신의 방에서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혼잣말이기는 했으나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자신의 아들이 나사우 백작가와 오라녜 공작가를 물려받는 것도 좋기는 했으나 렐리라는 가문이 정식 계승 귀족이 되었다는 것 역시 기쁜일이었다.
비록 작고 발전 가능성이 없는 도시의 영주가 되는 것이었지만 상관없다. 애초에 아론의 기반은 땅이 아니라 상단이었으니까. 그의 상단은 그 어떤 영지보다도 후손들에게 큰 기반이 되어 줄 것이다. 그러니 영지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계승 귀족이 되었다는 것이 중요하지.
“손님이 오셨습니다.”
토마스가 방으로 들어와 알렸다. 아론의 방이 있는 저택 최상층에는 하인이나 하녀가 없다. 그 동안 아론이 빌럼 루이스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취한 조치였다. 이제 다시 아론으로 돌아왔으니 이제 다시 하인과 하녀를 들여야겠지만 아직은 토마스가 대부분의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손님?”
자신을 찾아온 손님이라니. 자신을 찾아온 손님이라면 항상 있었지만 웬만하면 자신에게 알리지않고 되돌려보낸다. 그런데 토마스가 직접 찾아와 알려야할 정도의 사람이라니. 아론은 토마스에게 묻기보다는 직접 보자는 생각에 솔코와 심령을 연결하여 공간파악을 실행했다. 곧 친숙한 인물들이 아닌 3명의 인물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자들이니 저들이 손님일 터.
“음?”
아론은 그들이 누군지 바로 알아보았다. 만나본지 꽤 오래되기는 했으나 과거에 몇 번 만났던 인물이었다. 바로...
“이반4세?”
“맞습니다.”
아론의 혼잣말을 토마스가 확인해주었다. 아론을 찾아온 손님. 그는 모스크바 공국의 왕. 뇌제 이반이었다.
============================ 작품 후기 ============================
역시 공지를 못보고 기다린 분들이 계시네요.
조아라 공지 시스템 너무 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