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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해
아론, 루이웨, 마우리츠, 리아, 크리스틀, 토마스. 6명만이 있는 별채. 조용한 가운데 마우리츠의 악소리만이 들려오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 소리마저 끊겼다. 갑작스레 찾아온 정적에 아론의 가슴이 철렁했다. 혹시 뭔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불안해졌다.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오라 하기 전에는 들어오지 말라고 했던 리아의 말을 되새기며 겨우겨우 참아내었다.
1분이 하루 같았다. 진즉에 유물을 구해서 마우리츠의 몸을 강하게 만들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그때. 조용하던 방의 문이 열렸다. 아론과 루이웨의 시선이 조금씩 열리는 문에 집중되었다. 보통의 속도로 문이 열리고 있었지만 그 둘에게는 너무 느리기만 했다.
문이 열리고 모습을 보인 사람은 리아였다. 그녀는 품에 벨벳 천으로 감싼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아론과 루이웨에게 환한 웃음을 지어주었다. 그 웃음에 아론의 마음 한쪽을 점령하고 있던 불안감이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아론은 ‘어머니가 저렇게 환하게 웃는 것은 처음 보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아들이다.”
“아....”
아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작게 감탄사만 내뱉었다. 그는 가까이 다가가 리아가 안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쭈글쭈글 못생겼지만 아론은 아이에게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아...안아 봐도 됩니까?”
아론이 망설이며 물었다. 안아보고 싶었지만 아이에게서 감히 다가가기 힘든 오오라같은 것이 나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혹시 자신이 안았다가 아이가 잘못될 것 같다는 불안함도 있었고 말이다. 물론 그의 생각일뿐이다.
“물론이지.”
리아가 아이를 감싼 벨벳 천 채로 아론 쪽으로 내밀었다. 아론이 아이를 받아들었다. 아이를 처음 안아본 아론은 어쩔 줄 모르며 ‘이렇게 안으면 되는 겁니까? 아니면 이렇게?’ 혹시 아이가 불편할까 자꾸 안은 자세를 바꿔가며 리아에게 물었다. 리아는 그런 아론을 보며 작게 웃으며 ‘어떻게 안아도 괜찮다. 힘만 주지 말거라.’라고 대답해주었다.
겨우 자세를 잡은 아론이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 역시 아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론은 아이의 두 눈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석고상처럼 멈춰서 아이를 바라보고 있던 아론. 그런 아론을 깨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리품이 주인을 선택하고 싶어 합니다. 허락하시겠습니까?
갑자기 들려오는 넘버127의 목소리. 아론은 ‘뭐라고?’라고 되물었다.
-이번에 획득한 전리품 중 3개의 아이템이 주인을 선택하고자 합니다. 대상은 아론님이 안고 계신 아이입니다. 허락하시겠습니까?
‘유물들이 내 아이를 주인으로 선택하고 싶다고?’ 처음 겪는 갑작스런 상황에 아론이 당황했다. 하지만 곧 ‘그래. 허락한다.’라고 넘버127에게 말해주었다. 아이가 유물을 얻게 되어 나쁠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혹시 잘못될 것 같으면 나중에 포기하게 하면 된다.
전리품으로 얻은 유물들은 아론이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 허벅지 보호대와 팔찌는 제자리에, 귀걸이는 주머니에 넣고 다녔고 강철 방패는 항상 들고 다녔다. 그 4개의 유물 중 팔찌를 제외한 세 개의 유물이 빛이 되어 날아올랐다. 그리고 아이의 주변에 머물렀다.
“무슨 일이냐.”
루이웨와 리아가 갑자기 일어난 일에 아론에게 물었다. 아론은 넘버127이 말해준대로 설명해주었다.
“그럼. 아이가 세 개의 유물을 전부 갖게 되는 것이냐?”
루이웨의 질문은 아론도 궁금하던차였다. 아론은 바로 넘버127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보조 아이템은 아론님 외의 사람에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이제 아이템들이 아이에게 의사를 물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 아이의 선택을 받은 하나의 아이템만이 아이에게 귀속되게 됩니다.
아론은 그대로 리아와 루이웨에게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그들 마음에 동시에 떠오른 생각은 ‘제발. 강철 방패를 선택해라.’였다.
그리고 잠시 후. 아이는 아론, 루이웨, 리아의 바람대로 알바 공작의 유물이었던 강철 방패를 선택했다. 허벅지 보호대와 귀걸이는 다시 아론에게 돌아왔고 강철 방패가 변한 하얀 빛은 아이의 몸에 스며들더니 사라졌다. 알바 공작이 사용할 때도 그렇더니 평소에는 모습을 숨기고 있다가 주인이 원할 때 모습을 드러내는 모양이었다.
“태어나자마자 유물을 얻다니. 신께서 이 아이를 축복해주는 모양이구나.”
다음 날. 오라녜가는 마우리츠의 후계자가 태어났음을 세상에 알렸다. 마우리츠에게 아내가 없다는 사실을 알던 사람들은 갑자기 후계자가 태어났다는 소식에 어리둥절했지만 곧 그 생각은 접어버리고 영웅 가문에 새로운 영웅이 태어났다며 축제를 벌이기 시작했다.
아이의 이름은 할아버지의 이름을 딴 빌럼. 빌럼의 탄생은 모든 네덜란드인의 축복을 받았다.
***
1587년 9월 7일 월요일
빌럼 공작이 비밀리에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왔다. 주변 모든 것이 통제되어 하인, 하녀, 가신 등 빌럼 공작의 생존 사실을 모르는 모든 이를 다른 곳으로 보낸 후 빌럼 공작의 마차가 이제는 마우리츠가가 되어버린 저택으로 들어왔다.
그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마차에서 스스로 내려와 저택으로 걸어갔다. 비록 느리고 다리를 절었지만 말이다.
“허허. 빌럼 주니어가 태어났다는 데 가만있을 수가 있어야지.”
부쩍 늘어난 흰머리에 자글자글한 주름. 말투까지 늙어버려 몇 년 사이에 10년은 늙은 듯한 모습의 빌럼이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빌럼 주니어. 빌럼 공작의 생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그냥 빌럼이지만 빌럼 공작과 그의 생존 사실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빌럼 주니어라 불리고 있었다.
빌럼 주니어는 빌럼 공작을 마중나온 마우리츠의 품에 안겨 있었다. 빌럼 공작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천천히 직접 걸어 빌럼 주니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마우리츠는 그 자리에 서서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아버지를 기다려주었다. 주니어 앞으로 다가간 빌럼 공작은 고개를 내밀어 주니어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안아 봐도 되겠느냐.”
그 말에 마우리츠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마우리츠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곁에 서 있던 크리스틀이나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루이웨, 아론 모두가 난처해했다. 그들의 표정을 빌럼 공작은 자신의 몸이 좋지 않아 주니어를 떨어뜨리거나 자신이 힘들어할 것을 걱정하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오랫동안 움직이지 못해 하체 쪽은 힘이 없지만 상체는 그래도 최근 몇 개월간 단련을 해서 제법 힘이 있으니 주니어를 떨어뜨리지는 않을 것이다.”
“아. 그것을 걱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아이가....”
“그렇다면 걱정하지 말고 줘 보거라. 잠깐. 아주 잠깐만 체온을 느껴보고 다시 주마.”
여전히 난처해하는 마우리츠. 아론이 곁으로 다가왔다.
“공작 각하. 실은 주니어가 유물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유물? 그게 무슨 말인가.”
빌럼 공작으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빌럼 주니어가 유물의 주인이 되었다는 말 같은데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
“말 그대로입니다. 주니어는 유물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허. 그게 말이 되는 것인가? 아직 태어난 지 44일 된 아이에게 유물이라니. 그럼 주니어가 초인이란 말인가?”
빌럼 공작은 주니어를 만날 날을 주니어가 태어난 이후 매일 같이 손꼽아가며 기다렸기에 주니어가 태어난 지 며칠이 되었는지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네. 그렇습니다. 자세한 사정은 이렇습니다.”
아론은 빌럼 주니어가 유물을 얻게 된 상황을 최대한 짧게 설명했다. 아론이 전리품으로서 유물을 소지하고 있었던 부분을 강철 방패가 어딘가에서 스스로 날아왔다는 것으로 수정해서 말이다. 유물은 세상에 나타난 지 100년이 넘었지만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았기에 다소 이상하더라도 충분히 우길 수 있었다.
“허. 그런 일이... 그럼 주니어가 알바 공작의 강철 방패를 다룬단 말인가?”
“한 번에 2개까지 다루는 것을 봤습니다. 낯선 사람이 다가오면 강철방패가 나타나 그 사람과 주니어 사이를 가리더군요. 저도 가끔 당합니다. 강철 방패에 당하지 않는 사람은 마우리츠와 크리스틀, 그리고 제 어머니밖에 없습니다. 강철 방패가 공격하거나 하지는 않기에 피해를 입은 사람은 없지만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속을 좀 썩이고 있지요.”
“허허....”
빌럼 공작이 다소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빌럼 주니어를 바라보았다.
“대단하구나. 대단해. 역시 오라녜가를 물려받을 후계자답다. 비록 네덜란드 최대 적의 능력인지라 껄끄럽긴 하다만 태어나자마자 전설급 유물의 주인이 되다니. 나와 같은 만들어진 전설이 아니라 진정한 전설의 주인공이 되었구나. 이는 앞으로 오라녜가가 1,000년은 갈 것이란 뜻이다.”
빌럼 공작은 진정으로 기뻐했다. 태어나자마자 전설급 유물이 날아와 주인으로 모셨다. 그것은 분명 전설이 될만한 이야깃거리였다. 이 이야기를 조금만 고쳐 네덜란드에 퍼뜨리면 빌럼 주니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큰 명성을 얻게 될 것이다. 귀족에게 명성이란 곧 힘을 말한다. 그래서 명성을 위해 목숨까지도 거는 법인데 빌럼 주니어는 태어난 것만으로도 큰 명성을 얻게 되었으니 앞날이 탄탄대로일 것이다.
“그러면 괜찮지 않느냐. 내가 안으려고 할 때 방패를 꺼낸다면 그냥 물러나면 될 것이니.”
“아무래도 실례인지라....”
무려 빌럼 공작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이기는 하나 빌럼 공작을 거부하는 행동인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걱정했던 것이다.
“무슨 소리인가. 장차 공작가의 기둥이 될 아이야. 그리고 내 손자다. 손자가 할아비에게 하는 행동에 실례가 어디 있단 말인가. 괜찮네. 그러니 시도나 해보고 싶구나.”
“뜻이 그러하시다면....”
아론이 물러났다. 빌럼 공작이 손을 내밀었고 마우리츠가 주니어를 내밀었다. 주니어는 빌럼 공작에게 안겼음에도 별 변화 없이 조용히 빌럼 공작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허허. 그래도 이 녀석이 할아비는 알아보는구나. 나를 거부하지는.. 어쿠.”
갑자기 주니어와 빌럼 공작 사이에 강철 방패가 나타나며 빌럼 공작을 밀어냈다. 빌럼 공작은 강철 방패에 밀려 주니어를 놓치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강철 방패에 밀려 비틀거리면서도 주니어가 땅에 떨어지기 전에 안아들기 위해 힘을 줘 강철 방패를 치우려 했지만 방패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강철방패 너머에서 아론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제야 빌럼 공작은 마음을 놓았다. 그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허. 어허허허허허허.”
말로만 들을 때는 실감하지 못했는데 실제로 눈으로 보게 되자 주니어가 전설급 유물을 가졌다는 것이 실감된 것이다. 그는 기쁜 목소리로 크게 말했다.
“그래. 네가 오라녜가의 계승자다. 우리 공작가에 천년의 기틀을 세울 후계자야! 허허허허허허!”
빌럼 공작은 진심으로 기쁘게 웃었다.
***
“수고했다. 정말..... 할 말이 없구나. 부족한 나를 대신해 네가 정말 잘해주었다. 네 명성이 프랑크에서도 크게 울려 퍼지고 있더구나.”
“아니에요. 제가 한 일은 없어요. 전부 아론과 보어 남작이 한 일인데요.”
“그래. 그것도 분명하지. 보어 남작과 아론은.... 정말 자네들이 네덜란드를 살렸네. 자네들이 아니었다면 이미 네덜란드는 에스파냐의 손아귀에 넘어갔을 터. 고맙네. 너무 고마워.”
“아닙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사부님이 겸양의 말을 하고 뒤를 이어 나도 했다. 하지만 솔직히 난 빌럼 공작님의 말처럼 내가 대단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알바 공작을 막아내지 못했으면 네덜란드는 아마 암스테르담만 남기고 모든 영토를 에스파냐에 빼앗겼을 것이다. 그리고 사부님이 파르마 대공을 죽이지 못했으면 지금쯤 파르마 대공의 대군이 암스테르담을 포위하고 있었겠지.
빌럼 공작님의 말대로다. 나와 사부님이 네덜란드를 구했다.
잠시 동안 빌럼 공작님이 사람들의 공을 치하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그 동안 편지로도 상당히 많이 격려하고 친찬해준 빌럼 공작님이지만 직접 하는 것은 느낌이 다르니까. 그리고 시간이 흘러 빌럼 공작님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것이 느껴질 때쯤 마우리츠가 본론을 꺼냈다.
“아버지. 돌아오셨으니 다시 오라녜 공작의 자리를 돌려 받으셔야죠.”
그 동안 오라녜 공작의 이름은 필립스였다. 실제론 필립스가 죽었지만 에스파냐를 속이기 위해 빌럼 공작님이 죽은 것으로 되어 있었으니까. 빌럼 공작님이 회복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이제 시간이 흘러 아직 부족하기는 하나 거의 회복을 끝냈다. 완치가 된 것은 아니다 충분히 활동을 할 수 있을 만큼 회복된 것 같으니 빌럼 공작님이 제자리에 돌아올 때가 된 것이다.
영웅 빌럼이 다시 돌아온다. 이것은 그렇지 않아도 에스파냐군의 총사령관 둘의 죽음에 사기가 올라있는 네덜란드 인민들을 더욱 용감한 사람이 되게 하고 안심하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그리고 빌럼 공작님이 제자리에 돌아가야 나와 마우리츠가 식을 올릴 것 아닌가. 애도 있는데 결혼은커녕 약혼도 못했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그렇군. 사실 그 일에 대해서 할 말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