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31 / 0290 ----------------------------------------------
발트해
두 자루의 검. 초인 둘을 죽이고 얻은 것이다. 둘 다 흰 빛으로 변해 하늘 저 멀리 날아가려는 것을 넘버127이 억제한 것이다. 물론 둘 다 주인이 죽은 것에 대한 반발인지 내 보조 아이템이 되는 것을 거부했기에 자세한 정보는 알 수 없었다. 이 두 유물에 대해 자세히 알려면 각각 100일씩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반지나 팔찌 같은 휴대하기 편한 물품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가지고 다니기 힘든 검의 형태라니. 유물이니 버릴 수도 없고 상당히 귀찮다. 리스본 시장에서 얻은 잔도 들고 다니는 상황인데 말이야. 잔은 버릴까? 음. 아냐. 귀찮다고 해서 특수한 능력을 가질 물품을 버릴 수는 없지.
솔코를 먼저 동북쪽으로 보내 사부님 일행을 찾도록 하고 그 뒤를 마리아와 함께 쫓았다. 마리아에게 안겨 있는 소녀는 찬 밤공기를 견디지 못하는 것 같아 숨 쉴 구멍만 남겨두고 이불에 똘똘 말려 있는 상태다. 소녀를 한계까지 쥐어짜긴 했지만 이불의 품질은 상당히 좋았다.
우리 집에 있는 어머니가 준비해준 내 최고급 침구세트에 버금간다고 할까? 하긴 알바 공작의 저택인데 질이 나쁜 침구가 있을 리는 없지.
잠깐 그런 생각도 들었다. 저 아이를 죽였어도 넘버127이 광휘를 잡아둘 수 있지 않았을까? 나를 거부한다고 해도 말이다. 물론 생각만 했다. 이미 죽이지 않기로 결심한 이상 최대한 살리기 위해 노력할 생각이었으니까. 그래도 생각은 해볼 수 있지 않나.
생각해본 결과. 알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지금까지 넘버127이 잡아둔 유물들은 전부 넘버127보다 출력이 낮은 것들이었다. 반면 광휘는 신화급이었다. 넘버127보다 출력이 높을 가능성이 충분하지.
‘넘버127이 과연 자기보다 출력이 높은 유물도 잡아 둘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물론 고민한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넘버127에게 물었다. 그러자 넘버127은 평소 잘하던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라는 말이 아닌 ‘모르겠습니다.’라는 말을 했다. 넘버127도 알 수 없는 일이라니. 그 말은 잡을 수 없을 수도 있지만 잡을 수 있을 수도 있다는 뜻.
그래서 소녀와 최대한 함께 움직일 생각이었다. 원래는 마리아를 따로 떨어뜨려 움직일 생각도 했었다. 마리아와 광휘를 가진 소녀에 대한 정보를 숨길 겸 해서 말이다. 하지만 만약의 경우, 물론 난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프랑크 국경으로 가는 길에 소녀가 죽을 경우를 대비해 내가 곁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광휘를 잡아 둘 가능성이 있으니까.
‘돌아가면 빌럼 공작님께 소녀에 대해 알리고 최대한 협조를 구해야겠어.’
발터, 요한 등이 살아남았으니 그들은 당연히 갑자기 등장한 마리아와 소녀에 대해 궁금해 할 것이다. 그러면 마리아는 몰라도 소녀는 어떻게든 이용하려고 하겠지. 하지만 나는 소녀의 체력이 회복된 후 네덜란드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자원자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은 그녀에게 광휘를 강요할 생각이 없었다.
이렇게 데려가서 광휘를 강요한다면 내가 알바 공작과 다른 게 뭐겠어. 빌럼 공작님이 막아 준다면 그 누구도 강요하지 못할 터. 정 힘들면 빌럼 공작님께 소녀를 아예 맡겨버리는 수까지도 생각하고 있다.
숨소리가 아까에 비해 제법 안정되어 있었다. 마리아가 최대한 조심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빠르게 달리고 있으니 제법 흔들리고 있을 텐데도 잠든 건가. 꽤 피곤했던 모양이야. 그러고 보니 소녀의 이름도 모르고 있네. 소녀가 깨어나면 이름부터 물어봐야겠어.
***
1582년 8월 2일 월요일 아침
“당했군.”
텅 빈 방안을 보며 알바 공작이 말했다. 쿤라트의 처형을 위해 리스본 시내에 가 있던 알바 공작이었지만 새벽에 알프레지디의 저택에서 온 전령에게 보고를 받고는 말을 타고 미친 듯이 달려 저택으로 돌아왔다.
“1시경 시녀 중 하나가 마캄프에게 식사를 전해주러 왔다가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녀에 의해 이곳에서 일어난 일이 병사들에게 알려졌고 상황을 파악한 병사가 말을 달려 알바 공작에게 간 것이었다. 덕분에 꽤 멀리 떨어져 있는 알프레지디인데도 불구하고 일이 일어나고 7~8시간 만에 알바 공작이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빨리 왔다고는 하나 이미 7~8시간이 지난 후다. 범인이 이 근처에 있을 리 없다.
“훈련장으로 갔던 놈들이겠지?”
“네. 그럴 가능성이 높... 아니 확실할 겁니다. 에흐몬트 백작과 그 일행의 흔적은 동북쪽 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견됐다고 하니까요. 지금도 발견되는 흔적에 대해 계속해서 보고를 받고 있는데 그들이 일을 행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러니 훈련장으로 갔던 나머지 네덜란드 녀석들이 저지른 일이겠지요.”
그들말고는 없다. 감히 에스파냐에 들어와 알바 공작을 공격하고 있는 자들이 더 있을 리는 없으니까.
“대담하군. 그리고... 엄청난 실력자들이야. 마캄프가 이렇게 당할 줄이야.”
마캄프는 어제 새벽 알바 공작 일행과 발터 일행이 맞붙었을 때 헤르트를 몰아붙였던 자다. 전승 1.5등급의 실력자로 알바 공작의 휘하에 있는 자중에서도 마우리시오 다음으로 강한 자였는데 그런 그가 당할 줄이야.
“반항한 흔적이 없습니다. 아마도 습격에 용이한 능력을 가진 자겠죠. 마캄프의 시체에 남은 흔적을 보면... 짐승 계열의 소환수를 다루는 자일지도...”
“그렇다는 건 훈련장을 습격했던 자들이 둘이 아니라 셋이었을 수도 있다는 거군.”
“우리가 프란시스코 백작을 예비대로 활용했던 것처럼 그들도 예비대를 활용한 것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알려진 대로라면 저택과 훈련장 양쪽에 이루어진 습격에서 네덜란드 반역자 놈들이 압도적으로 승리했어야 했으니까요. 각하의 빛나는 계책으로 그들의 공격을 예상해 반역자 놈들의 습격을 분쇄해버렸지만 말입니다.”
“정말 어처구니없군.”
말만 내뱉은 것이 아니라 알바 공작의 표정은 정말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미 드러난 녀석들만 해도 엄청난데 그들 못지않은 실력자가 하나 더 있어? 아니지 침실에서 잠자다가 죽은 후안 녀석에게 난 상처도 다른 종류의 무기가 사용되었으니 어쩌면 둘이 더 있을지도 모를 일이군. 허. 정말.... 말이 안 나오는군.”
“...... 혹시 왕께서 하신 일은....”
마우리시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럴 수도 있겠지.”
알바 공작은 마우리시오의 말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펠리페2세와는 최근 들어 제법 좋은 관계가 되었지만 그 전에는 수십 년간 적대 관계에 있었으니까. 그리고 네덜란드에 이런 강자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펠리페2세에게 알바 공작이 모르는 초인이 있었고 그들이 알바 공작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광휘를 납치해갔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납득이 갔다.
“그래도 우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움직여야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생각해야 한다. 오랜 기간 전쟁터를 오가며 알바 공작이 터득한 것이 있다. 승리를 원한다면 적이 운용할 가능성이 있는 최대한의 전력을 상상한 다음 그 전력을 깨부술 준비를 해야 한다.
이번에 마주하게 된 네덜란드 암살대 중 살아남은 자들의 전력은 확신이 드는 것만 해도 전설 1등급 초인 셋에 전설 1.5등급 초인 둘이다. 거기에 저택에 들어와 광휘의 주인을 납치해간 자들까지 합치면 전설 1~1.5등급 초인 둘이 더 늘어난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 어이가 없었다. 네덜란드에 그런 강자들이 있다고? 알바 공작은 펠리페2세의 짓일지도 모른다고 한 마우리시오의 말에 더욱 공감이 가기 시작했지만 정말 펠리페2세가 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일단은 외환부터 처리해야 한다. 내환은 외환을 처리한 후 천천히 처리해도 늦지 않는다.
“왕성에 연락해라. 에스파냐에 최대 전력 전설 1등급 다섯, 전설 1.5등급 둘. 최소 전력 전설 1등급 셋, 전설 1.5등급 넷의 적이 침입했다고 말이다.”
“.... 네. 알겠습니다.”
마우리시오로서는 상당히 싫은 일이었다. 이미 적의 침입을 예견하고 왕의 신하인 프란시스코와 20인의 초인 부대까지 데려다가 썼는데 실패했다고 알려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반발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리고 말미에 이런 말을 덧붙여라. 에스파냐 전군을 동원해야한다고.”
“네. 알겠습니다.”
어제까지만해도 알바 공작이 아는 네덜란드 암살대의 남은 전력은 크게 부상 입은 세 명이 포함된 다섯 명의 초인이었다. 하지만 오늘 부상없이 온전한 적이 넷일 가능성이 늘어났다. 그것도 전부 전설 1등급으로.
어제까지는 포르투갈에 파견나와 있는 군대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오늘 그것이 힘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전력으로 불어났다. 그것이 전설 1등급 초인의 위력이다. 쉽게 말해 빌럼 공작 네 명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되는 일이다.
빌럼 공작이 네 명이라니.. 마우리시오는 몸을 살짝 떨었다.
***
알바 공작은 곧바로 리스본으로 돌아갔다. 알프레지디에는 더 이상 지킬 것이 없었기에 모든 인원을 리스본으로 철수시켰다. 그리고 곧바로 쿤라트의 처형을 집행했다. 원래는 시간을 들여 쿤라트의 처형을 널리 알린 후 집행하려 했었다. 혹시나 쿤라트를 구하기 위해 네덜란드 초인들이 올지도 모르니 말이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적의 전력이 전설 1등급 네 명에 전설 1.5등급 두 명일 가능성이 생겼다. 그럴 경우 리스본에 있는 병력만으로는 방어가 힘들 수도 있다. 지금 리스본에 있는 초인 중 전설급 이상의 실력자는 알바 공작과 마우리시오, 프란시스코 3명이 전부이니 강자의 숫자에서 밀린다.
그래도 전승 혹은 명품급 초인들은 약 30명 정도가 있으니 정면으로 붙는다면 에스파냐의 초인들이 백전백승하겠지만 상대가 바보가 아닌 이상 정면에서 공격해올 리 없다. 분명 뭔가 수를 쓸 터. 거기에 도시 내에서의 전투는 소수인쪽에 유리하게 흘러갈 가능성도 있으니... 애초에 세웠던 유인작전은 폐기하고 쿤라트라도 서둘러 처형해 적의 숫자를 최대한 줄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반역자 쿤라트 히벤달의 죄는 다음과 같다!”
처형식이 있다고 하니 구경을 위해 리스본 시민들이 몰린 광장. 그 가운데 있는 처형장에는 쿤라트가 결박된 채로 있었고 그 옆에 서 있던 법관은 급조한 죄목을 읊었다.
“이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도자이시자 에스파냐과 포르투갈의 왕이시며 인디아스, 아프리카, 인도의 지배자이신 위대하신 펠리페1세 이름하에 사형을 명령한다. 집행하라!”
펠리페2세가 포르투갈의 군주가 되며 얻은 이름이 펠리페1세였다.
사형 집행인은 쿤라트의 목을 밧줄에 걸었다. 순간 주변의 병사들과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는 초인들이 긴장했다. 적들이 쿤라트를 구하기 위해 올 것이라면 지금 이 순간 말고는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쿤라트를 구하기 위해 공격해오는 자들은 없었다. 정보부대인 고트론 상단은 힘이 없었고 발터 일행은 도망치고 있었으며 아론 일행 또한 발터 일행에 합류하기 위해 동북쪽 멀리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에흐몬트가의 제1가신으로서 네덜란드와 에스파냐의 전쟁에서 항상 앞섰으며 수많은 전공을 이룩한 수호기사 쿤라트 히벤달. 생전 처음 밟아본 포르투갈 땅에서 목숨을 잃었다.
***
1582년 8월 2일 월요일 점심 무렵.
끼야악!
“솔코구나.”
루이웨가 하늘을 나는 솔코를 발견했다.
“곧 아론이 오겠구나. 여기서 기다리도록 하자. 우리를 따라 잡느라 식사도 못했을 테니 아론이 먹을 음식도 준비하도록 해라.”
“네. 루이웨님.”
루이웨가 준비하라 한 것은 조금씩 가져온 건량을 아론에게 주라는 뜻은 아니었다. 건량은 아론도 가지고 있을 터였으니까. 잠깐 쉬며 제대로 된 식사를 하자는 뜻. 토마스에게 주변의 짐승을 잡아오라는 뜻이었다. 그 속에는 주변을 살펴봤으나 몇 km내에는 적이 없으니 안심하고 불을 펴도 된다는 뜻도 담겨 있었다. 플로라의 신체능력 강화를 받은 토마스가 조용히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는 있으나 변신 상태에는 못 미쳐도 상당한 후각과 청력을 보유하고 있는 토마스는 완벽한 사냥꾼이었다. 그는 순식간에 사슴 한 마리를 잡아 돌아왔다. 토마스는 능숙하게 뒷다리를 잘라 가죽을 제거한 후 플로라가 모아둔 나뭇가지에 루이웨가 불꽃을 일으켜 만든 모닥불에 굽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론이 도착했다.
“다녀왔습니다. 사부님.”
“그래. 수고했다. 저 아이들은 어떻게 된 일이냐.”
루이웨는 아론이 자신의 감각권에 들어왔을 때 아론 혼자가 아니라 처음 보는 둘이 함께 한다는 것을 감지해냈다. 갑자기 뭔가 확인할 일이 있다며 사라진 아론이었기에 내심 왜 갔는지 궁금했는데 두 명의 소녀를 데리고 나타났으니 아론이 사라졌던 이유가 이 두 명의 소녀에게 있다고 생각해 그 둘에 대해 물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