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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해
“오히려 내가 영광이지. 광휘의 기사 열을 상대하셨다고. 과연 보어경의 제자답소. 이미 사부님과 비슷한 경지에 오르신 것 같구려.”
“과찬이십니다. 아직 사부님에 비하면 부족할 뿐입니다. 그저 사부님의 명성에 먹칠하지 않도록 노력할 뿐입니다.”
사부님과 진심으로 대련한지 몇 년이나 됐지? 꽤 오래된 것 같다. 여하튼 그 때는 감히 공격할 생각도 못하고 방어만 하다가 끝났다. 공격할 틈을 노리며 방어한 것이 아니라 공격을 할 수가 없어 방어만 한 것이긴 했지만 그래도 당시엔 사방에서 덮쳐오는 불꽃을 막아낸 것만 해도 잘한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실 그냥 막기만 한다면 지금도 죽을 둥 살 둥 겨우 불꽃을 막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못하겠지만 공격을 한다면.... 적어도 사부님께 반격을 가할만한 방법을 몇 개정도는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입 밖에 내보낼 수는 없지. 그러면 사부를 무시하는 제자라는 소문밖에 더 나겠어?
“그렇게 생각하시오? 흠... 뭐 직접 보지를 못했으니 잘 모르겠지만 절대 약하지는 않으실 것 같은데. 빌럼 공작님께서는 쉽게 칭찬하는 분이 아니니 말이오.”
빌럼 공작님은 내 상인으로서의 능력을 칭찬해주신 것일 텐데 말이야. 그분도 내가 싸우는 것을 본 적이 없으니 내가 어느 정도 무력을 가지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쓸데없는 말은 끝내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소. 내 듣기론 시급한 일이라 들었소만.”
“네. 그렇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지만 앙주공이 스타텐 헤네랄에 무리한 요구를 했다는 말은 들었소이다.”
스타텐 헤네랄. 쉽게 이야기해서 암스테르담 시청 의회의 확장판이라 생각하면 된다. 암스테르담 시청 의회는 암스테르담에 지분을 가진 자들의 모임이지만 스타텐 헤네랄은 네덜란드 각지를 다스리는 영향력있는 귀족과 영주들의 모임이다. 제법 힘있다 싶은 귀족들 대부분이 암스테르담에 지분을 갖고 있으니 그냥 암스테르담 시청 의회에 몇몇 귀족이 추가 된 모임이다.
그 덕분에 보통 작은 일은 스타텐 헤네랄이 모일 것 없이 암스테르담 시청 의회에서 처리한다고 들었다.
“그런 일이 있었고 굳이 위험한 이쪽 길을 택한 것을 보면 프랑크를 가는 이유가 대충 어떤 일인지 상상은 되오.”
“상상하신 그대로이실 겁니다.”
여유가 있었다면 신성로마제국을 거쳐 프랑크로 향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일이 급하니 로테르담에 와서 바다의 거지들의 배를 타고 프랑크로 들어가려는 것이지. 여정의 기간은 반정도로 줄어들겠지만 위험도는 몇 배 아니, 몇 십 배로 늘어날 것이다. 에스파냐가 점령하고 있는 지역 앞바다를 지나야 하니 말이다.
그래도 최근 앙주공에게 네덜란드 총독 자리를 넘기면서 상당수의 에스파냐 군이 철수했다고 들었기에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이다. 예전 같았으면 감히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그럼 바로 출발하는 것으로 하지요. 가실 수 있겠소?”
“지금 바로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그대만 준비되어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으니 말이오.”
과연 기동력으로 에스파냐군을 막아내고 있다고 하는 바다의 거지들. 그 엄청난 기동력의 이유는 빠른 배가 아니라 이런 거침없는 행동력에 있을 것이다. 사실 바다의 거지들이 사용하는 배라고 해봐야 어선을 개조한 것들이니 빨라봐야 얼마나 빠르겠어.
‘우린 준비되어 있으니 너만 준비하면 된다.’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요한과 그 외의 거지들. 흠. 거지들이라 부르니 어감이 묘하네. 하지만 딱히 다르게 부를 수 있는 호칭이 없잖아. 애초에 이들 스스로가 거지라고 부르고 있으니까.
“저는 언제든 괜찮습니다.”
“그럼. 바로 출발하도록 하지. 갑시다.”
요한이 앞장서서 밖으로 나섰다. 허. 참. 성격 정말 급한 사람이구나. 급히 그를 따라나서며 옆에 선 남자에게 나와 토마스가 타고 온 마차는 가지라고 이야기했다. 딱히 장소도 묻지 않고 알겠다고 대답하는 걸 보면 이미 어디에 있는지 아는가 보다. 아니면 찾을 자신이 있거나.
이정도면 딱히 부두에 가서 서 있을 필요도 없는 거였잖습니까. 빌럼 공작님. 밥도 못 먹었는데.... 로테르담 생선 요리가 맛있다고 들었는데....
***
1581년 2월 29일 일요일 저녁
“우리가 어떻게 싸우는지에 대해 들어 본 적 있으시오?”
로테르담을 떠난 지 이틀. 좁은 갑판위에서 하늘에 촘촘히 박혀 있는 별을 살피던 내게 요한이 물었다.
지금 나와 요한은 10톤급도 되지 않아 보이는 배를 타고 바다에 나와 있었다. 이런 작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근해에선 별 상관없겠지만 이런 배로 먼바다의 바람을 견딜 수 있을까...하는 불안감이 생길 정도다.
“잘은 모르지만 치고 빠지는 전술이 주라고 들었습니다.”
“그렇소. 하지만 이런 배로는 바다 위에서 치고 빠지는 전술을 한다는 것은 자살행위지.”
그럴 것 같기는 하다. 배에 대포 하나 없다. 그렇다고 엄청 빠른 것도 아니다. 누누이 말했지만 어선을 개조한 배니까. 물론 수십 척의 배를 운용한다 들었으니 몇 척 정도는 대포에 가라앉을 각오를 한다면 가능하겠지만 바다의 거지들처럼 규모가 작은 곳에서 희생을 각오하고 공격해왔다면 지금처럼 십년 넘게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의 특기는 바로 항구 습격이오.”
“항구 습격?”
“그렇소이다. 항구. 에스파냐 군이 보급을 위해 들리는 항구를 습격해 배를 태우고 빠져나오는 것이 우리의 주전략이오.”
“허. 그럼 적진으로 들어가는 것 아닙니까. 위험할 텐데요.”
늑대굴로 스스로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는 짓이다.
“후후. 군함이 무서운 것은 바다에 떠 있을 때요. 우리가 가진 배로는 도저히 바다 위에서 군함을 상대로 싸울 수 없었지. 근처에 가기도 전에 대포를 맞아 침몰당하거나 절벽처럼 높은 군함위로 기어오르다가 핸드캐논이나 석궁에 맞고 죽었을 것이오. 하지만 그 무서운 군함도 부두에 묶여 있으면... 그냥 바다에 떠있는 오크통이나 다름없지.”
그렇긴하다. 군함이 무서운 것은 수많은 대포가 달려있다는 것이다. 먼 거리에서부터 수십 문의 대포를 쏴서 공격해오는데다가 대포를 피해 접근한 후 갑판전을 벌이려 해도 에스파냐의 군함에는 세계 최강이라 불리는 육군이 탄 채로 기다리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군함이 무서운 것이다. 포격전이나 갑판전이나 바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전투의 종류를 모두 완벽히 대비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대포는 배의 양 옆에 달려있다. 바다에서는 항상 파수꾼이 사방을 살피니 접근해오는 배를 일찍 발견하고 배를 틀어서 대포를 쏠 준비를 하지만 부두에 정박해 있을 때는 그럴 수 없다. 뒷꽁무니만 보이고 있는 상태. 적이 나타난 것을 확인하고 배를 출항시키려 해도 배를 출항 시키는 데에는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 사이에 도착해서 멀리서 공격한 후 도망간다면.... 그러면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무방비상태로 있는 배에 올라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지르고 부두에 있는 물자를 훔쳐오기만 하면 되오.”
“하지만 그것도 이 배에 대포가 있을 때나 가능한 방법 아닙니까. 아무리 배가 묶여 있다고 해도 적 병력은 온전할 텐데 말입니다. 대포가 없으니 공격할 방법은 직접 오르는 방법밖에 없을텐데요.”
“그렇소이다.”
“그럼. 적들과의 전투는.... 아. 그쪽.. 아니. 당신이 있으시군요.”
“후후.”
스스로 이름을 버렸으니 이름을 부르기도 그렇고 그쪽분이라 부르려했지만 너무 무례한 것 같고 해서 ‘당신’이라 불렀다. 항상 스스로를 거지라 부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 내가 요한을 거지라 부를 수는 없지 않나.
여하튼 근접전투로 간다고 해도 걱정 없을 것이다. 네덜란드 5강에 드는 그가 있으니까. 만약 그를 상대하려면 이름난 자들이 와야 할 텐데 그런 자들이 온다면 요란할 것이다. 그러면 요한의 이목을 벗어나지 못할 터. 감당 못할 적이 있는 동안은 잠시 숨어 있으면 된다.
그런데 접근해서 기름을 뿌려 불을 지르거나 약탈하고 나온다고? 아까 이 배에 열심히 기름이 담긴 오크통 2개를 실었는데...
“그렇다면 혹시 이 배에 기름을 실은 이유가....”
“후후. 가는 길에 에스파냐 보급항이 하나 있어서 말이오. 가는 김에 배 한 척만 정도만 태우고 가려고 하오. 지나는 길인데 인사는 해줘야 하지 않겠소.”
마치 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주점에 들려서 술 한 잔만 하자고 말하듯 이야기하는 요한.
“그리고 아론 경도 오셨고 말이오. 그대 같은 강자가 합류했을 때 알차게 써먹어야 한다오. 우리 바다의 거지들에는 강자가 부족하니 말이오.”
뭔가가 생겼을 때 열심히 이용해 먹어야 한다는 것은 동의한다. 하지만 그건 거의 상인의 생각에 가까운데...
“그렇군요.”
하지만 그가 상인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는 하나. 나 또한 상인의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다. 굳이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다는 마음. 지금 이렇게 작은 배 한 척을 몰고 항구로 쳐들어가는 것은 도박에 가까운 일이다. 상대방의 군선이 전부 정박해 있을 것을 예상한 도박.
그런데 만약 한 척이나 두 척 정도가 출항하려던 참이었다면? 아니면 항구로 복귀하던 배에 발견된다면? 이 작은 배로는 위험할 수밖에 없다.
“그럼 지금 우리가 가는 곳이....”
“칼레요. 듣기론 군함 4척이 있다고 하더군.”
칼레... 칼레는 제법 큰 항구다. 그런 항구를 이 작은 배 한 척으로 습격한다고? 요한의 얼굴은 여유가 넘쳐보였지만 그는 뭔가 정보를 알고 있거나 항상 하던 일이기에 그런 것일 것이다. 하지만 난 아무것도 모른 채 끌려가고 있지.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곳에 열세인 전력을 이끌고 가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네덜란드의 영웅 앞에서 ‘위험할지도 모르니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바다의 거지들 사이에 ‘아론 보어 렐리는 겁쟁이다.’라는 소문이 퍼질지도 모른다. 어쩌면 네덜란드 전체에 퍼질 수도 있겠지. 그렇게 되면 사부님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어머니의 귀에 흘러 들어가면 앓아누우실 지도......
“제가 정확한 위치를 아는 것은 아니나 지금 시간에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면 칼레 근처에 도착한 모양이군요.”
“후후. 그렇다오.”
로테르담을 출발한지 이틀 째. 작지만 속도는 나사우에 뒤지지 않았으니 칼레 근처에 도착했을 시간이다. 그리고 어두운 밤. 달도 떠있지 않으니 우리 배에서 횃불을 켜지 않는 이상 이 작은 배를 발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터다. 어떻게 봐도 습격하기에 최적의 조건.
어쩌면 달이 없는 이 시간대를 맞추려고 그렇게 출발을 서둘렀는지도 모른다.
“앞으로 2시간이면 칼레항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오.”
“2시간이라.....”
내가 타고 있는 배가 해안선이 보이는 곳으로 이동해 있는 탓에 칼레가 어느 쪽에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해안선을 따라 이 배가 향하는 방향에 있겠지.
‘가라. 솔코.’
배로 2시간거리, 솔코로는 10분이면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솔코의 시야에 칼레항으로 짐작되는 제법 큰 항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긴장하셨나보오.”
내가 솔코의 시야에 집중하느라 입을 열지 않으니 곧 있을 습격에 긴장한 것처럼 보였나보다.
“긴장할 필요 없다오. 나는 십년을 넘게 해온 일이오. 무적함대 무적함대 이름 높지만 내가 보기엔 덩치만 큰 느리기 짝이 없는 곰에 불과하오. 접근만 안하면 무서울 것 없지.”
‘실제로 곰은 빠르고 영악합니다.’라고 말할 뻔 했지만 참았다. 상대는 전쟁영웅이다.
“갤리온 한 척에 카락 세 척이군요.”
“음? 어떻게 아셨소?”
“제 능력입니다.”
“오호. 그런 능력이. 참 편리한 능력이구려.”
“목표는 무엇입니까.”
“당연히 갤리온이오. 가져온 기름으로는 한 척밖에는 태우지 못할 테니 당연히 갤리온을 태워야지. 정보에 의하면 며칠 안으로 에스파냐 본국으로 돌아간다고 하더군. 앙주공에게 맡겼으니 더 이상 있을 필요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오.”
퇴각이라. 지난 10년간 항상 우리를 압박했던 에스파냐군이 정말 떠난다는 걸 확인하니 시원한 느낌이 들기는 한다.
“그냥 보낼 수는 없지. 후후. 그냥 보내면 우리 바다의 거지들의 대접이 너무 미지근했다 생각할 것 아니오. 평생 잊지 못하도록 배웅 인사를 해줘야지 않겠소.”
“그렇군요.”
기름이 담겨 있는 오크통을 보았다. 대략 3분의 2배럴 정도의 크기. 각각 100리터 정도의 기름이 담겨 있을 것이다. 저 정도면 갤리온을 태우기에 충분한 양이다.
으음.... 괜히 위험한 적진 깊숙이 들어가고 싶지는 않다.
“갤리온에 불 지르는 것. 저에게 맡겨주시겠습니까.”
하지만 무섭다고 내뺄 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