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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해
“뭐해. 전투 끝났어. 변신 안 풀어?”
적을 놓치고 마차가 있는 곳으로 터벅터벅 걸어 돌아가는 길. 난 이미 할버드로 변해있던 워리어와 퀴버를 원래의 모습으로 돌렸는데 토마스는 250cm에 가까운 크기의 짐승인간으로 변신한 채 그대로의 모습에서 돌아올 생각을 안하고 있었다.
“여분의 옷을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허. 그래? 그럼 그대로 있어. 변신을 풀었다가는 노예를 발가벗겨서 데리고 다니는 이상한 놈이라고 소문나겠다.”
원래도 190cm에 가까운 토마스지만 변신을 하면 250cm 가까이 커진다. 원래 저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점점 커지고 있다. 사부님의 말에 의하면 토마스가 점점 유물에 적응해서 위력이 강해지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 덕분에 변신할 때마다 옷이 갈기갈기 찢어진다.
보통 위급한 상황에서 변신을 하게 되니 옷을 벗어둘 시간도 없고 말이야. 그래서 평소에 항상 온몸을 덮는 로브를 하나 들고 다니는데 오늘은 놓고 온 모양이다. 사실 도시 내에서 변신해서 싸울 일이 생길 줄 누가 알았겠어. 나라도 놓고 오겠다.
음. 갑자기 갈등이 찾아왔다. 이 기회에 물어볼까? 그 동안 계속 물어보고 싶었는데 못 물어봤던 질문이 하나 있는데... 도저히 말할 수가 없어 몇 년 동안 묵혀뒀었다. 아무리 나와 토마스 사이라도 하기 힘들었던 질문이다. 으으음.... 에이. 하자. 지금 안하면 또 몇 년 동안 기회가 없을 거야.
“근데 너.... 암컷으로 변신해?”
“..... 그르륵. 그게 무슨 헛소립니까.”
내 질문이 어이가 없었는지 잠깐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입을 열었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잠시 본분을 망각한 모양이다. 주인한테 저런 상스런 말투라니. 그래도 이왕 운 뗀 거 끝까지 물어보자.
“아니. 그... 너 옷 다 찢어졌는데 남자의 상징이 보이질 않잖아. 그 부분이 밋밋하다고.”
아무리 털이 길다고 해도 그 부분을 다 가린다는 건 힘들잖아? 그리고 변신을 해도 가슴부분부터 사타구니까지 이르는 구간의 털은 상당히 짧은 편이고 말이야.
“.... 그르르르르르.”
사냥개가 사냥감을 보고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를 낸다. 솔직히 좀 무섭다.
“후우.... 변신 시 몸 안쪽으로 들어갑니다. 아마 급소를 보호하기 위한 작용이겠지요. 크륵.”
“아. 그래? 그렇구나. 이제 이해가 되네.”
분명 한 대 칠까 말까 고민했을 거다. 그래도 이성을 잃기 전에 내가 주인이란 걸 떠올렸는지 순순히 대답해줬다. 음... 여기에서 ‘그럼 거기가 안쪽으로 들어간 자리에 구멍이 있겠네?’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걸 물었다가는 정말 맞을 거다.
“이렇게 터놓으니까 얼마나 좋아. 내가 그 동안 얼마나 궁금했는지 알아? 물어보기도 힘들고 말이야. 전에도 그래. 앞에 딱 하고 에스파냐의 초인 10놈이 나타났는데도 네가 변신한 걸 보고는 신경이 얼마나 쓰이...”
“그르르르... 그만하시죠.”
“응. 그만할게.”
계속 말했다가는 한 대 칠거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저 큰 주먹에 맞으면 얼마나 아프겠어. 마차 근처로 오니 마차 멀리 뒤에 있던 일행이 어느새 마차 앞으로 이동해 있었다. 우리가 걱정됐었나보다.
“수고하셨습니다. 단주님.”
“고생하셨어요. 다치신 곳은 없으시죠?”
“응. 너희도 다친 곳은 없지?”
“네. 싸움은 두 분이 다 했는데 저희가 다칠리가요. 아. 토마스 아저씨. 저한테 맡기신 물건이요.”
“고맙습니다. 플로라 아가씨.”
플로라가 토마스에게 회중시계를 건넸다. 토마스의 전 주인이자 내 아버지인 솔코 던 렐리에게 받은 시계다. 토마스의 보물 1호지. 음... 갑자기 아버지가 부럽다. 나도 토마스가 보물처럼 여길 선물을 하나 해주고 싶네.
***
똑똑.
마차 문을 정중히 두드렸다. 아직 진짠지 가짜인지 모르지만 정황상 엘리자베스 여왕인 듯 하니 예의를 갖출 필요가 있다.
“적이 물러갔습니다. 여왕폐하.”
곧 문이 열렸다. 문을 연 자는 엘리자베스가 아닌 다른 여성이었다. 이미 솔코의 공간감각을 통해 그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고급 옷감을 사용했지만 화려하지 않을 것을 보면 여왕을 시중드는 시녀이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여왕은 아무리 봐도 다소 마른 체형의 중년 여성에 불과했다. 피부가 유난히 하얀 것을 빼면 평범한 여성의 모습이라고 할까.
그런데 저런 평범한 모습의 여성이 25살의 나이에 여왕으로 즉위하여 즉위 1년 만에 종교분쟁을 해결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황청의 간섭에서 나라를 자유롭게 만들었으며 차별하지 않고 능력 있는 귀족들을 중용하여 20년 만에 영국의 국력을 즉위하기 전의 2배 이상으로 신장시켰다는 튜더가의 군주인가.
듣기론 더 이상 왕위를 이을 튜더가의 핏줄이 없어 최후의 인물로 그녀를 왕위에 앉혔다고 하던데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여왕의 자리에 앉은 그녀가 영국을 이 정도로 발전시킬 줄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소문이 부족하구나. 지하미로의 여섯 군주 중 하나인 그림자 군주를 이리도 쉽게 물리치다니. 대단하구나. 그자는 어찌되었느냐.”
“아쉽게도 놓쳤습니다.”
“그렇구나. 그림자 군주와 동행했던 4명의 반역자들은?”
“자결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림자 군주가 도망침과 동시에 망설이지 않고 자신들의 목에 칼을 박아 넣었다. 한치도 망설이지 않고 자살하는 모습을 보며 조금이지만 섬뜩함을 느꼈다.
“그렇군. 역시 지하미로의 아이들이구나.”
“지하미로의 아이들은 어떤 자들인지요.”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아까부터 지하미로의 아이들이라고 자꾸 이야기하는데 난 그런 이름을 들어본 적 없다.
“우리와 프랑크의 전쟁이 낳은 비극이다.”
“영국와 프랑크의 전쟁이라면.... 100년 전쟁? 그 전쟁이 나은 비극이라니...”
“쉬고 싶구나. 마부가 죽었으니 너에게 부탁해야겠구나. 왕궁까지 부탁한다.”
“알겠습니다. 폐하.”
더 자세한 것을 알고 싶었지만 여왕은 더 이상 말할 생각이 없는 듯 했다. 나중에 스스로 알아봐야겠군.
구해줬더니 마부 역할까지 시키는 여왕이지만 그건 내가 원했던 바다. 데리고 왕궁으로 가면 정말 여왕인지 아닌지 알 수 있겠지. 그리고 구해줬는데 콩고물 하나 안 떨어지겠어? 그리고 여왕의 콩고물은 크겠지.
“그럼 문을 닫겠습니다.”
“너는 타거라.”
“영광입니다. 폐하.”
일단 토마스와 플로라, 마리아와 마리아의 시종은 론 커리의 상단으로 보냈다. 왕궁에까지 고양이인 마리아를 데리고 갈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하벨은 마부석에 앉혔다. 부상단주에게 마부 일을 시키는 것이 미안했지만 이 자리에서 할만한 사람이 하벨 밖에 없었다. 다행이도 별 불만은 없는 듯 보였다. 참 고마운 녀석이라니까.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지시를 마치고 다시 여왕에게 마차 안으로 들어가겠다는 허락을 구했다.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끄덕였고 난 안으로 들어가 여왕과 시녀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음. 역방향이네. 역방향 싫은데. 하지만 익숙하다. 마우리츠와 마차를 타고 다닐 때도 내가 역방향 자리에 앉았지. 지위에서 꿀리면 어쩔 수 없는 거다.
내가 들어가자 하벨이 곧 마차를 이동시켰다.
“우선 시내로 나가 지리를 잘 아는 마부를 고용할 예정입니다. 아무래도 저나 저희 상단의 직원은 왕궁까지의 길을 모르는지라.”
“알겠다. 알아서 하거라. 그런데 너는 네덜란드인 아니더냐. 활동무대도 발트해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영국에는 어쩐 일로 온 것이냐.”
나에 대해 물을 것은 예상했다. 그렇지 않다면 마차 안에 태울 리가 없었을 테니까.
“영국의 양모가 품질이 좋다하여 조금 거래나 해볼까하여 왔습니다.”
“호오... 양모를? 하긴 그렇군. 최근 남쪽 바다에 에스파냐 해군이 기웃거리고 있으니 플랑드르와 거래하기는 힘들겠지. 그래서 별 수 없이 영국을 선택한 모양이구나.”
“아닙니다. 플랑드르와도 얼마든지 거래할 수 있지만 최근 영국의 양모 품질이 플랑드르보다 월등하다 하여 찾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확인해보니 실제로 품질이 좋더군요.”
“호호. 재밌는 농담이구나. 아직 우리가 플랑드르를 따라잡기에는 50년은 일러. 우리가 이미 앞질렀다면 플랑드르의 장인들을 빼올 생각도 안했겠지.”
“.....”
자기 나라에 대한 평가가 엄청 냉정하네.
“그래도 그리 많이 떨어지는 편은 아니니 쓸만할 것이다. 그리고 양도 많으니까 대규모로 거래하기 좋겠지. 예전에 양모의 관세를 내린 것으로 기억하는데 맞나?”
“네. 4%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관세도 적으니 가격 면에서는 플랑드르 양모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머리에 똥만 찬 프랑크 멍청한 것들은 관세가 15%일 걸?”
.... 우아하게 말하다가 갑자기 과격한 단어를 사용하니 당황스럽다.
“양모 거래처는 정했느냐.”
“네. 친분이 있는 론 커리라는 영국 상인이 있는데 그가 영국 내에서 양모를 모아 저에게 건네주기로 하였습니다.”
“론 커리? 우리나라의 상인이라면 규모가 네 상단의 반도 안 될 것인데 내가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것을 보면 더욱 규모가 작은 상인이겠구나. 그런 상인이 양모를 충분히 공급할 수 있겠느냐. 거래 규모가 얼마나 되느냐.”
“100톤 코그 한 척을 투입해 런던과 암스테르담을 오갈 예정입니다.”
“100톤 코그로 런던, 암스테르담이라.... 휴식 없이 오간다 해도 한 달에 2번 왕복하는 것이 한계일 것이고 선원들의 휴식도 생각한다면 2달에 3번 왕복하게 되겠구나. 흠.... 그럼 2달에 대략 45~50톤 정도 거래하겠어.”
“비슷합니다. 우선 처음 몇 개월은 매달 양모 30톤에 모직물 30톤을 거래할 생각입니다.”
모직물은 이번에 뤼베크에 다시 들려서 얼마에 팔리는지 확인해보고 와야 확실해지겠지만 일단 지금 생각으론 그렇다.
“흠? 런던을 오가는 선박을 늘릴 생각이더냐.”
“아닙니다. 힘들겠지만 처음 3~4달 정도는 100톤 코그 한 척으로 오갈 생각입니다. 선원들의 휴식시간이 하루나 이틀 정도로 적겠지만 먼 거리를 가는 것이 아니라 런던과 암스테르담을 오가는 것이니까 괜찮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4달 뒤에는 선박이 추가로 투입될 예정이니 그때부터는 선원들에게도 충분한 휴식을 제공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한 동안은 런던과 암스테르담을 오가면서 모직물을 만들어 쌓아둘 것이다. 그리고 4개월 뒤 조선소에서 선박 건조가 완료되면 그때부터 새로 투입된 선박들을 이용해 발트해로 모직물을 나를 생각이었다.
“그거 이상하구나. 그 코그가 선창이 유난히 큰 것인가? 거래 해보았느냐."
"아직 정식 거래는 하지 못했고 저번에 시험 삼아 300kg의 양모를 실어봤습니다.”
“그렇구나. 그 론 커리라는 상인도 양모를 실어본 경험이 없겠지?”
생각해보니 그렇다. 론 커리의 배는 작아서 모직물만 실어도 배가 꽉 차니 양모를 실을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암스테르담에서 양모의 수요가 별로 없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거군. 아마도 네 생각만큼 많은 양의 양모와 모직물을 싣고 가지는 못할 것이다.”
음? 왜 그러지?“
“너는 절인 청어를 주로 거래한다고 들었다. 청어는 무겁겠지. 그러니 무게단위로 거래하는 것이 익숙했을 것이다. 하지만 양모는 다르다. 부피가 크고 가볍다. 네 옷이 가벼운 것처럼 말이다. 100톤 코그라면 식량을 최대한 줄여서 양모를 꽉꽉 눌러 담는다고 해도 15톤 정도가 한 계일 것이다.”
“그렇습니까?”
아니. 아무리 가볍고 부피가 커도 그 정도는 아닐 텐데.... 내가 직접 살펴본 바로는 양모도 꽤 무겁다. 그리 가벼운 편은 아니었는데... 보통 100톤 코그에 식량을 10일치만 싣고 절인 청어를 가득 채운다면 40톤 가량 채울 수 있다. 그런데 양모가 그 반도 안 되는 15톤밖에 싣지 못할 거란 것은 좀 과한 추측이 아닐까?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구나. 하긴 배 한 번 타본 적 없는 여왕이 뭘 알겠냐고 생각하겠지.”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호호. 당황하지 말거라. 괜찮으니까. 속으론 신도 욕하는 법 아니더냐. 내 앞에서만 하지 않으면 된다.”
참 적응 안 되는 군주다.
“너도 알지 모르겠지만 나도 목장주인이다.”
들었다. 론 커리가 말하길 왕실도 목장 사업에 뛰어들었다고 했었지.
“그리고 부왕께서 시작한 목장 사업이 내 조카와 언니를 거쳐오니 내가 부임했을 때는 왕실이 영국 최대의 목장 사업주가 되어 있었지.”
엘리자베스 여왕과 부친인 헨리 8세 사이에는 먼저 왕이었던 조카와 언니가 껴 있다. 그들이 다 죽고 나서야 마지막으로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왕위가 돌아왔지.
“그러다보니 양모도 꽤 팔았지. 우리 목장의 최대 고객이 누군지 아느냐?”
당연히 모른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대충 한자동맹의 상인들 아닐까? 고개를 저어 모른다는 표시를 했다.
“모릅니다.”
“프랑크 상인이다.”
허. 프랑크라니. 원수 아냐?
“프랑크와 우리나라 사이의 양모 수출 및 수입은 금지되어 있지만 플랑드르의 밀수꾼들이 우리나라에 찾아와 양모를 사가지. 그리곤 플랑드르산으로 위조해서 다른 나라에 판다.”
“.........”
여왕이 밀수꾼을 상대로 무역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밀수꾼 대부분은 10톤에서 20톤 사이의 작은 배를 모는데 그들이 한번에 싣고 가는 양모의 양이 얼마가 되는지 아느냐?”
모른다니까. 왜 자꾸 물어봐. 귀찮지만 인내심을 발휘해 고개를 저어줬다.
“그것도 모릅니다.”
“10톤 배를 몰고 온 자는 1톤을, 20톤 배를 몰고 온 자는 2톤을 싣고 간다. 그것만으로도 배가 가득 차지. 그러니 네 배의 선창이 아무리 넓다하더라고 15톤 이상을 싣고 가기는 힘들 것이다.”
으음.... 그 말이 정말이면 곤란한데...
“그나저나 그 론 커리라는 자 양모를 공급해줄 목장은 있다더냐.”
“지금 열심히 계약을 맺으러 다니고 있다 들었습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달에 10톤 정도 공급해줄 수 있게 계약을 맺어놓지 않았을까 생각되는 군요.”
“잘 되었구나. 나를 찾아오라 일러라. 오늘 너와 내가 인연을 맺은 것도 있으니 다른 목장에 비해 5% 싸게 공급해주도록 하마. 아마 내가 가진 목장만으로도 네가 필요로 하는 양을 얼마든지 공급해줄 수 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폐하.”
5%라니.... 애매하다. 그래도 나쁘지 않은 가격이구나. 그런데 딱히 혜택 같지는 않다. 마치 양모를 과잉 생산해서 판매처를 찾던 상인과 거래를 한 느낌이랄까? 말하는 것을 보나 행동으로 보나 지금 내 눈엔 앞에 있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군주가 아닌 상인처럼 보였다. 그것도 상당히 유능한 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