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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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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마리아.
“공주님. 너무 빠르세요.”
한 소녀가 왕궁 정원을 빠르게 달리고 있다. 뒤에서 그녀를 따라 2명의 시녀가 달리고 있지만 소녀를 따라잡기엔 너무 느렸다.
“그렇게 달리시면 나중에 시녀장에게 혼나요.”
소녀가 멈추기를 바라며 불경한 말까지 뱉었지만 소녀는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소녀가 시녀들을 따돌리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헤헤.”
시녀들을 따돌린 소녀는 자신만의 비밀장소로 향했다. 주변이 나무로 들러싸인 작은 공간. 성인 한명이 들어가 겨우 앉아있을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지만 몸집이 작은 소녀에게는 충분한 그녀만의 비밀 공간이었다.
소녀는 두 손에 꼭 쥐고 있던 작은 찻잔을 보며 미소 지었다. 요즘 그녀는 비밀 공간을 꾸미고 있었다. 며칠에 한 번씩 작은 물건 하나 가져다 놓는 것이 전부지만 언젠가 하녀들이 꾸며놓은 방처럼 예쁘게 꾸밀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행복했다.
-미야옹.
“어라?”
몸을 숙이고 나무들 틈으로 비밀공간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그녀보다 먼저 온 선객이 있었는지 어떤 소리가 들렸다. ‘뭐지?’ 처음 듣는 소리였다. ‘혹시 무서운 동물이면 어쩌지?’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런 작고 귀여운 소리가 무서운 동물일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의 비밀공간에 작고 예쁜 요정이 찾아왔을 거라 생각했다.
자신이 꾸민 방이 마음에 들어 요정이 탄성을 지르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비록 작은 주전자와 그릇 몇 개 있는 것이 다지만 그녀에게는 가장 아름다운 비밀공간이었으니까.
“와아~.”
그녀의 생각과 달리 요정은 없었다. 하지만 요정 못지않게 작고 귀여운 어떤 동물이 있었다. 그 동물은 힘이 없는지 비틀거리며 주변을 둘러보며 울고 있었다.
-미야옹.
“와.... 넌 천사님의 동물이니? 아니면 요정의 친구?”
너무 귀여운 동물의 모습에 소녀는 이 세상의 동물이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미야옹.
“그래. 넌 천사님이 나에게 보내준 친구구나.”
소녀는 조심스레 아기 동물을 안아들었다. 동물은 따스함을 느꼈는지 소녀의 품에 파고들어 안겼다. 그것을 보는 소녀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안녕. 친구야.”
소녀에게 친구가 생겼다.
***
소녀. 마리아 공주가 새끼 고양이들 들고 돌아오자 시녀들은 난리가 났다. 당장 죽여야 한다. 병사들은 저런 더러운 동물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지 않고 뭐하는 거냐 등. 시녀는 당장 공주에게서 새끼 고양이를 넘겨받으려 했다. 그 후 버리거나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공주는 막무가내였다.
고양이를 품에 안고 절대 놓지 않았고 누군가가 새끼 고양이를 뺏으려면 공주의 몸에 손을 대야 하는 데 그럴 수 있는 이는 같은 왕족밖에 없었다. 겨우 고양이를 뺏자고 왕족을 불러올 수는 없는 법.
계속해서 실랑이가 벌어졌고 그 일은 결국 왕비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왕비가 찾아와 새끼 고양이를 내놓으라고 했다. 하지만 공주는 내놓지 않았고 결국 강제로 고양이를 빼앗으려던 왕비는 공주가 울면서 하는 말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 아이는 제 친구란 말이에요. 내가 하느님에게 열심히 기도해서 천사님이 보내주신 친구란 말이에요. 내 단 하나뿐인 친구. 친구는 친구를 버리지 않아요.”
결국 왕비는 공주에게 고양이를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
“네 이름은 마리아야. 내 친구니까 내 이름을 쓰는 걸 허락해줄게.”
왕비의 허락을 받아 공식적으로 새끼 고양이를 키울 수 있게 된 공주는 고양이의 이름을 마리아라 지었다.
“나는 나중에 콜론 같은 위대한 탐험가가 될 거야. 인디아스 대륙에도 가보고 동방 어딘가에 있다는 원제국에도 갈 거야.”
‘비록 지금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이 방과 요 앞의 정원이 다지만.’이란 말은 하지 않았다.
“마리아 너는 내 친구니까. 특별히 같이 데려가 줄게.”
-미야옹.
“그렇게 고마워 할 필요는 없어. 넌 내 친구니까. 친구끼리 같이 가는 건 당연한 거야.”
-미야옹.
“그래. 꼭 함께 가서 많은 걸 보자. 아. 맞다. 오늘은 내 친구에게 선물이 있어.”
공주는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작은 네클릿을 끌렀다.
“자. 이거야. 어머니에게 받은 건데 어머니도 외할머님에게 받은 거래. 아주 중요한 거라고 들었어.”
-야아옹.
“아냐. 사양하지 않아도 돼. 넌 내 친구잖아. 원래 친구는 그런 거야.”
공주는 네클릿을 고양이 마리아의 목에 걸어주었다. 공주의 목에 딱 맞는 네클릿이었지만 아직 새끼인 마리아에게는 좀 컸는지 헐렁했다. 조금만 움직이면 빠질 것처럼 보였다.
“예쁘다. 마리아. 근데 너무 크다. 나중에 시녀를 시켜서 조금 줄여야겠어.”
그때 네클릿이 작게 빛을 내며 크기가 줄어들더니 고양이 마리아의 목에 딱 들어맞았다.
“와아...”
누군가 보았다면 ‘유물이다!’라고 소리칠 상황이었지만 공주는 아니었다.
“역시 마리아는 천사님이 주신 내 친구야. 그렇지 않으면 이런 게 가능할리 없잖아? 헤헤.”
공주는 마리아를 꼭 끌어안았다. 마리아도 공주의 품이 좋아 더욱 파고들었다. 공주와 마리아. 둘은 지금 이 순간 너무나도 행복했다.
***
“흑흑. 흐흐흑.”
공주가 침대 위에서 서글프게 울었다. 하녀도 다녀가고 몇몇 왕족도 다녀갔지만 그 누구의 위로도 공주의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결국 모든 이가 돌아갔고 공주는 혼자 남은 방에서도 여전히 울음을 그칠 수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 왕비가 죽은 것이다.
-갸르릉.
몇 년이 흘러 이젠 꽤 자라난 마리아가 울고 있는 공주를 바라보다가 침대위로 훌쩍 뛰어올라 그녀 옆으로 갔다. 그리고 머리를 비벼 그녀를 위로했다. 평소라면 울고 있더라도 마리아가 가서 머리를 비벼주면 웃음을 보여주던 공주였다. 하지만 오늘은 마리아의 비비기도 그녀의 울음을 멈추기엔 부족했다.
마리아는 난감했다. 그녀의 울음을 멈추고 싶었지만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던 마리아의 머릿속에 한 가지 기억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릴 적 어떤 일 때문에 서럽게 울던 그녀를 왕비가 안아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곧 울음을 그치고 잠들었던 기억. 하지만 고양이일 뿐인 마리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를 안아주기엔 마리아의 몸이 너무 작았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 또한 고양이의 발로는 힘들었다.
‘인간. 인간의 모습이 필요해.’
공주의 울음을 멈출 수 있는 모습이 필요했다. 서럽게 울고 있는 공주, 그녀의 모습을 보며 마리아는 인간의 모습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마리아의 목에 있는 네클릿이 빛을 냈다.
잠시 후. 공주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누군가의 손길을 느꼈다. 분명 방에는 아무도 없을 텐데. 의아한 그녀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이를 보았다. 흑단 같은 진한 검은 머리를 가진 알몸의 소녀였다. 공주는 잠깐 혼란에 빠졌지만 곧 그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목에 있는 네클릿. 그것은 자신이 마리아에게 준 것이다.
“마..리아야?”
끄덕.
인간의 모습이 된 마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공주를 안으려 했다. 하지만 인간의 모습으로 움직이는 것이 서툴러 잘 되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품으로 공주가 안겨들었다.
“역시 마리아는 천사님이 주신 친구구나. 그럴 줄 알았어. 하녀들이 널 그냥 고양이라고 할 때마다 내가 얼마나 화났는지 몰라.”
마리아의 몸은 작지만 따뜻하고 포근했다. 공주는 그녀의 품속에서 곧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마리아는 자신의 품속에서 잠든 공주를 보며 역시 인간의 모습이 된 것이 정답이었다는 생각을 하며 계속해서 공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그럼 저는 돌아가 공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알바가 막사를 나갔다. 막사에는 다시금 그녀 혼자 남게 되었다. 아니. 혼자가 아니다. 공주 마리아의 친구인 고양이 마리아가 있었으니까.
갸르릉.(괜찮아?)
알바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어둠속에 숨어있던 마리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양이 마리아는 공주를 보며 안쓰럽게 물었다. 그녀의 부름에 공주가 힘없는 표정으로 마리아를 바라보았다. 마리아가 폴짝 뛰어 전승공주의 무릎위로 올랐다. 그리곤 그녀의 몸에 볼을 비비기 시작했다. 우울해하는 그녀를 위로해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고맙구나. 마리아.”
공주는 마리아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리고 미안하구나.”
갑자기 사과하는 공주. 마리아는 그녀의 갑작스런 사과에 ‘왜 사과를 하는 거야?’라는 생각을 하며 공주를 올려 보았다.
“너와 함께 세계를 누빌 것이라 약속했는데.... 그것을 지키지 못할 것 같구나.”
공주는 품에서 작은 단검을 하나 꺼냈다.
“난.... 펠리페2세. 그 더러운 자의 여자가 될 수 없다. 정말 미안하구나. 마리아.”
그녀는 죽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후후. 이것도 알바 그 작자가 원하는 것이겠지. 난 끝까지 그의 손바닥위에서 놀아나는구나.”
공주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마리아가 최초로 변신을 해낸 이후로 강력한 초인 전승공주라는 거짓된 이름으로 살아왔는데 그것이 갑자기 끝나버린 것이다. 강력한 초인이 된다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결국은 아니었다.
사람과 고양이. 그 둘은 잠시 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전승공주의 자포자기한 표정을 보며 마리아가 작게 울었다.
갸르릉.(걱정하지마. 나와 함께 떠나면 돼.)
“고맙구나. 내 의견을 지지해줘서.”
갸르릉.(우선은 저 무서운 인간이 있는 곳만 벗어나자.)
“그래. 나도 고마웠다. 내 친구 마리아. 넌 이제 이 못난 친구를 지켜줄 필요가 없다. 넌 자유다.”
갸르르릉.(왜 자꾸 이상한 말을 하는 거야. 평소에는 내 말을 잘 알아들었잖아.)
“후훗. 그래. 그렇구나. 가고 싶었던 곳으로 가. 네가 보는 곳을 나도 보고 있을 테니 우리 함께 여행하자꾸나.”
갸릉.(그러지마. 안 돼.)
“그래. 안녕.”
그 말을 끝으로 공주는 스스로 목을 찔렀다. 그게 끝이었다. 그녀의 급소에 단검이 박혀들었고 그녀는 즉사했다. 목을 찌르고 쓰러진 공주를 마리아는 말없이 지켜보았다. 생각지도 못한 행동이다. 이렇게 갑자기 목을 찌를 줄이야.
막을 새도 없었다. 공주가 이렇게 자살할 것이라곤 생각 못했다. 만약 마리아가 인간이었다면, 인간의 마음을 잘 알 수 있었다면 그녀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고양이었고 공주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단검을 꺼냈을 때도 막연히 적과 싸우거나 다른 일을 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자살을 할 줄이야.
잠시 동안 쓰러진 공주를 지켜보던 마리아는 조용히 막사를 떠났다. 그리고 막사를 완전히 떠나기 직전 고개를 돌려 전승공주를 보며 낮게 울었다.
갸릉.(친구는 친구를 버리지 않아.)
마리아는 공주와의 이별을 용납할 수 없었다.
마리아와 공주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중에는 당연히 유물과 초인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그리고 마리아는 공주가 했던 이 말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세상에는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 있는 유물도 있대.
마리아는 그 유물을 찾아 공주를 되살릴 것이다. 그리고 공주와 마리아의 꿈인 탐험을 할 것이다.
그 유물을 찾기 위해선 자신이 살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자신과 오랜 시간 싸웠던 노인에게 들키면 살아날 자신이 없었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저 무서운 인간에게서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었다. 마리아는 막사를 떠났다.
***
마리아는 사람을 되살리는 유물을 찾으러 떠나기 전 공주가 묻히는 것을 확인했다. 원래 왕족은 며칠간의 장례와 의식과 함께 묻히는 것일 일반적이었으나 멸망한 나라의 공주의 장례는 단출했다. 그저 포르투갈의 왕족들이 묻혔던 묘지에 무덤 하나가 추가 된 것이 전부였다.
공주가 묻힌 곳을 확인한 마리아는 이번엔 원수의 얼굴을 확인하러 떠났다. 마리아는 기억력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인간의 얼굴을 잘 구분하지도 못했다. 그러니 떠나기 전 한 번 더 각인해야 했다. 그래야 잊지 않는다.
멀리서 알바의 얼굴을 확인하는 마리아의 시야에 알바의 일행에서 갈라져 다른 곳으로 향하는 펠로타의 모습이 보였다. 아론의 암살을 지시받고 광휘의 초인 열과 함께 떠나는 모습이었다.
마리아는 펠로타를 알아보았다.
-더러운 창녀 같은 년. 너 때문에 동료 둘이 죽었다. 퉤!
공주의 시신에 침을 뱉은 자였다. 다른 인간은 구분하기 힘들어도 펠로타의 모습은 마리아의 머리에 사진처럼 박혀 들었기에 구분해낼 수 있었다.
‘내 친구를 모욕했어.’
마리아가 유물을 찾는 모험을 떠나기 전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친구를 모욕한 자를 벌주는 것. 마리아는 펠로타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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