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6 / 0290 ----------------------------------------------
발트해
귀족 임명식이기는 하나 단촐했다. 파티도 없었고 몰려든 영주와 귀족도 없었다. 빌럼 공작님과 필립 대공자, 마우리츠, 사부님, 디르크와 10명 정도의 기사단, 그리고 마지막으로 축복을 위해 찾아온 교회의 사제. 그래도 디르크와 기사단이 의장을 갖춰 입고 있어 제법 임명식 분위기가 나기는 했다.
약식으로 진행된 임명식이 끝나고 자리를 지키던 이들이 축하해주었다.
“쯧. 이젠 네가 나보다 높구나. 도대체 몇 계단을 건너뛴 거야? 그 사부에 그 제자로군. 아. 이젠 존댓말을 해야 하나?”
디르크가 웃으며 이야기했다. 내용은 기분 나쁘다는 것이었지만 표정과 말투에는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진정 축하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달까. 그의 말대로 나와 사부님은 조금씩 작위를 올려서 귀족이 된 것이 아니라 기사가 된 후 많은 단계를 뛰어넘어 바로 귀족이 되었다.
비록 어제까지만 해도 나도 기사고 디르크도 기사였지만 그 높이가 달랐다. 뤼베크의 감옥장이 상급기사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기사에도 여러 단계가 있으니 말이다. 디르크는 남작에 가장 가까운 기사의 최고봉에 위치해 있지.
반면 사부님이나 나는 그렇지 않았다. 둘 다 평기사가 된 후 직급을 유지하다가 몇 년 되지 않아 모든 단계를 뛰어넘어 남작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사부님은 네덜란드 3강이란 이름이 있으니 그 이름의 무게에 맞게 당연히 귀족이 되었지만 난 아직 그런 이름이 없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기사장님. 이건.... 제가 아직 이루지 못한 업적에 대한 보상으로 받는 것이니까요. 아직은 제대로 된 작위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후후. 겸손하지 않아도 된다. 다 될만하니까 된 거야. 공작님의 눈은 정확하니까.”
평범한 기사가 바로 귀족이 되는 경우는 단 하나다. 업적. 귀족이 되어도 누구도 의아해하지 않을 정도의 업적. 그것을 세우는 것이다. 나는 최근 몇 가지 일을 하기는 했다. 네덜란드인으로서 최초로 발트해에 상관을 세웠고 청어 산업에 중요한 소금광산 두 개에 대한 지분을 가지고 있다.
제법 괜찮은 업적이다. 하지만 바로 귀족이 될 정도의 업적이었나? 아니다. 업적이라고 부를 수는 있겠지만 바로 귀족작위를 얻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잘해야 상급기사정도의 위치에 오를 정도의 공적이랄까.
그런데 남작 작위를 받았다. 왜일까. 전부 어제 알게 된 일 때문이다.
에스파냐의 포르투갈 합병.
그 때문에 더 이상 발트해 진출에 대해 지원해주지 못한다며 그 일을 진행함에 있어 작위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하지 말라고 주는 작위다. 남작위를 주며 빌럼 공작님께서 이런 말을 하셨다.
‘원래 주게 될 작위였지만 시기가 좀 빨라졌구나.’
말 그대로다. 한마디로 미리 받은 작위인거다. 내가 발트해 진출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다른 네덜란드 상인들도 안전하게 발트해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을 때쯤에야 받았을 작위를 미리 받은 것이다.
“그래. 말은 이대로 하마. 나도 곧 남작이 될 거니까. 에스파냐 놈들 잡아 죽이다보면 남작이 되어 있지 않겠냐.”
“물론입니다. 디르크 기사장님이라면 남작이 아니라 자작도 가능하실 겁니다.”
“훗. 말은.”
빈말이 아니라 정말이다. 빌럼 공작님의 최측근을 한명 꼽으라면 자신 있게 사부님이 아니라 디르크를 뽑을 수 있다. 비록 무력은 사부님보다 약할지 몰라도 여러 방면으로 재능이 있으니까. 아직 이렇다 할 큰 업적이 없어 작위를 받지는 못했지만 분명 얼마가지 않아 남작위를 받을 것이다.
“그럼. 난 이만 가겠다. 공작님께서 기다리실테니까.”
“네. 어서 가십시오.”
빌럼 공작님은 임명식이 끝나고 바로 나가셨다. 아마도 바로 제국으로 가실 거다. 그곳의 왕과 귀족들을 만나 에스파냐 견제에 대한 확답을 받고 바로 프랑크로 향하실 터다. 네덜란드가 아니니 위험한 여정이 될 수 있다. 네덜란드 바깥으로 나온 빌럼 공작님은 에스파냐의 최우선 목표가 될테니 말이다.
“나도 가마.”
“네. 사부님.”
“흠.... 요즘 함께 있어 즐거웠다.”
“저도 마찬가집니다.”
“나는 네가 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힘들지 모른다.”
그러실 거다. 애초에 상단도 거의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하셨으니까. 그걸 체계를 잡아 지금처럼 발전시킨 것이 애니 이모와 야콥이다. 애니 이모와 야콥이 운영을 맡은 이후론 아예 신경을 쓰지 않고 계시니 상계의 일에 대해선 거의 모르실 거다.
“하지만 이것 한 가지는 알고 있다. 넌 할 수 있다.”
가슴 깊숙이 따뜻한 무언가가 올라왔다.
“루이웨 상단도 너를 도울 거다. 애니와 야콥을 의지 하거라. 그들은 네 가족이다.”
“네! 사부님.”
“..... 그리고 할아버지라고 불.....”
“네?”
뒤에 무슨 이야기를 하셨지만 목소리가 작아 잘 들리지 않았다. 사부님이 잠깐 숨을 몰아쉬더니 말을 이었다.
“사부가 아니라 할아버지라 불러 보거라.”
이번엔 명확하게 말했다. 그리고 똑똑히 들었다.
“........ 네. 할아버님.”
쉽게 나오진 않았다. 그리고 차마 ‘할아버지’라고 말하진 못하고 ‘할아버님’이라 말했다. 그럼에도 사부님은 만족하셨는지 옅은 웃음을 지으셨다.
“그럼. 가겠다. 수고하거라. 아론아.”
“네.”
‘네. 할아버님.’이라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뒤를 잇지 못했다. 멀어지는 사부님, 아니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다짐했다. 다음번에는 반드시 ‘할아버지’라 불러드리겠습니다.
***
1580년 7월 29일 화요일
“앞으론 이레인이 네 시중을 들거다.”
“네? 전 토마스가 있습니다만.”
“토마스도 괜찮지만 귀족의 시중을 드는 법은 모르지. 이레인은 귀족의 시중을 들도록 철저히 교육받았다고 한다.”
“으음...”
어제 임명식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예전에 기사작위를 받았을 때처럼 기뻐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반응은 ‘수고했다. 우리 가문의 영광이구나.’를 담담한 목소리로 말한 것이 끝이었다. 그 뒤에 갑자기 외출까지 하셨다.
혹시 축하파티를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상심하신걸까라는 생각까지 했다. 비록 하루 늦었지만 암스테르담에 포르투갈이 에스파냐에 합병되었다는 소문이 퍼진 상태라서 파티를 열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겨우 그런 것으로 상심할 분은 아니다.
“전 괜찮습니다. 토마스가 해주는 것만으로도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불편함의 문제가 아니다. 이제 우리 가문은 귀족가다. 귀족가는 귀족가로서 품위를 지켜야 한다. 너는 그런 것을 배운 적이 없으니 품위를 지키는 것에서 조금 부족할 것이다. 그래서 이레인이 필요한 거야. 이레인이 네 부족한 점을 채워줄 거다.”
“하지만 전 많은 여행을 해야 합니다. 여자가 그런 여정을 따라오기는 힘들 겁니다.”
“걱정하지 마라. 이레인은 불의의 사태에 대비해 귀족을 보호할 수 있도록 호신술도 교육받았다. 체력은 충분할 것이다.
“그렇습니까.”
“내 모든 것을 고려해 사 왔다.”
‘사왔다.’ 잘못 말한 것이 아니다. 어머니는 이레인을 정말 사 오셨다. 노예시장에서 말이다. 어제 갑자기 외출하셨던 것이 노예시장에 가시는 거였던 건가.
“시간이 조금 더 있었으면 영국으로 건너가 오랜 시간 공을 들였겠지만 네가 내일 당장 떠난다고 하니 어쩔 수 없지. 그래도 하늘이 우리 렐리가를 돕고 계신지 괜찮은 아이가 있더구나. 가격은 제법 높았지만 노예상의 말대로라면 그 정도의 값어치는 할 것이라 생각한다. 시간이 며칠만 더 있었으면 내가 데리고 있으며 검정해봤겠지만 시간이 없으니 어쩔 수 없지. 네가 데리고 다니며 판단하거라.”
확실히 꽤 비싸 보인다. 능력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단 여자노예는 겉모습이 괜찮으면 가격도 함께 오르니까. 어두운 금발을 가지고 있는 이레인은 내가 이때가지 본 노예 중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편에 속했다. 나이는 대충 17~8살쯤 됐을까? 플로라와 비슷해 보인다.
뭐. 나보고 판단하라고 말하긴 하지만 이미 어머니가 몇 가지 검증은 하셨을 거다. 이레인을 어제 사오셨는데 오늘에서야 보여주시는 것이 그 증거지. 아마 그 사이에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대부분 확인하셨을 거다.
“가격이.....”
“30만 오션이다.”
“윽.”
어머니... 통이 크시군요. 노예 하나 구입하는 데 30만 오션이라니.
“귀족 시중과 호신술은 물론 약간의 교육도 받았다고 하는구나. 글을 읽고 셈을 할 수 있다고 하니 상가인 우리 가문에 맞는 아이지.”
“너무 비싼 것이....”
“이제 우린 귀족가다. 귀족가는 귀족가에 걸맞은 품위를 유지해야지. 비록 시일이 급해 이렇게 보내지만 네 옷과 장비, 마차 등도 새로 살 것이다. 전부 귀족가를 상대하는 장인들에게 맡길 것이야. 너는 새롭게 태어난 귀족 렐리가의 초대 수장이다. 그에 부끄럽지 않은 품위를 유지해야 한다.”
저렇게까지 말씀하시면 어쩔 수 없지. 따르는 수밖에.
“네. 알겠습니다.”
“이레인이 부족할지도 모르지만 걱정하지 말아라. 네 돌아오기 전까지 영국에 가 괜찮은 아이를 하나 더 구해올 테니. 이레인이 부족하면 그 아이로 교체하도록 하고 이레인이 나쁘지 않다면 네 시중을 두 명이 들면 되니까.”
영국에는 북유럽 최대의 노예시장이 열린다. 영국까지 다녀올 생각이신 건가. 그냥 받아들이자. 돈이 아깝긴 하지만 이정도로 어머니가 좋아하신다면야. 가기 전에 금고에 돈을 조금 더 집어넣고 가야겠어. 마음껏 쓰실 수 있도록 말이야.
“알겠습니다. 어머니.”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레인은 잠자리 시중도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이레인을 이용해 연습을 하도록 해라. 훌륭한 남편은 아내를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러지 못하면 집안의 기강이 제대로 잡히지 않을 수 있어. 그러니 노력하도록 해라.”
“..... 네. 알겠습니다.”
“처녀인지 아닌지도 확실히 확인하고. 처녀라서 웃돈을 얹어주었으니 말이다.”
으으...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진다. 그런 걸 너무 담담하게 이야기하시는 거 아닙니까.
“알겠습니다. 어머니.”
“아. 처녀 판별법은..”
“그만. 그건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
좀... 어머니......
“그래. 믿는다.”
뭘 믿습니까. 뭘. 표정이 안 믿고 있는데. 크으. 확인시켜줄 수도 없고 답답하구나.
***
1580년 7월 30일 수요일
드디어 비스마르로 출발하는 날이다.
“음? 노예야?”
“네. 오늘부터 제 시중을 들 이레인이라고 합니다.”
“흐음....”
마우리츠의 눈이 가늘어지며 이레인을 위아래로 자세히 훑어보았다. 역시 마우리츠도 남자인건가. 이레인은 꽤 예쁘니까.
“아론 남작 시중은 토마스가 드는 거 아니었어?”
“그렇지만 토마스도 저도 귀족으로서의 몸가짐을 모르니까요. 그제 어머니께서 부랴부랴 노예시장으로 가 귀족 시중 교육을 받은 노예를 사오셨습니다.”
“아. 어머니께서 사오신거야?”
“네. 하녀라니. 저는 생각도 해본 적 없습니다.”
“아. 그러면 그렇지. 아론 남작이 갑자기 여자 노예를 데려와서 깜짝 놀랐잖아.”
“깜짝 놀라실 것까지야....”
내가 그 정도로 여자에 대해서 모르는 것처럼 보였나. 하긴 귀족가에서 하는 교육에는 성교육도 포함되어 있다고 하니 아직 어린 마우리츠도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거다. 그래도 나도 많이 압니다. 선원들이 하는 이야기의 6~70%가 음담패설이니까요. 실전은 없지만 지식이라면....
혹시 마우리츠는 실전도 했을까? 그럼 내가 밀리는데.... 공작가의 차남이니 어쩌면 이미 치렀을지도. 갑자기 알 수 없는 뭔가에서 뒤처지는 느낌이다. 어머니 말대로 연습해야 하는 걸까.
비스마르로 가는 일행은 처음엔 단출했지만 마우리츠가 합류하다보니 조금 수가 늘어났다. 함께하지 못한 사부님 대신 2명의 기사가 호위로 참가했다. 그 2명의 기사는 8명의 병사를 데려왔고 이 10명이 합류하니 짐도 식량도 말도 늘어나 그것들을 관리하는 일꾼도 8명이 합류했다. 마우리츠가 데려온 자만 저 정도고 저렇게 숫자가 늘어나니 우리도 나름 그들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해서 물품을 늘렸고 그것을 관리할 일꾼의 수도 늘렸다.
그러다 보니 원래 10명도 되지 않았던 일행은 총원 31명의 규모를 갖게 되었다.
“이거 왠지 달구지 몇 개 구해서 청어라도 싣고 가야할 것 같은 느낌인데.”
이미 마차만 두 대에 달구지 2대, 마차와 달구지, 기사들이 타는 노새와 말이 8마리에 달한다. 그런데 상품은 하나도 없다니. 상인으로서 뭔가 엄청난 낭비를 하고 있다는 기분이.... 지금 우리 전력이라면 달구지 10~20대는 끌고 가야할 것 같은데 말이지.
에이. 며칠 전에 생각해서 준비했으면 몰라도 지금 준비하려면 또 며칠 시간이 걸리겠지. 아깝지만 그냥 가자.
“그럼. 타시죠. 공자님.”
“응.”
가장 화려하고 안락한 마차에 나와 이레인, 마우리츠와 크리스틀이 탔다. 귀족 둘과 하녀 둘. 균형이 맞네. 토마스는 이 마차의 마부석에 앉을 것이다. 마부는 따로 있지만 흑인 노예인 토마스는 마차 안에 들어올 수 없으니까.
다른 마차에는 후고와 헤르만이 탈 것이다. 작고 불편하지만 달구지에 타거나 걸어가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후고는 귀중한 자원이니까. 보호해야지.
“출발을 명하시죠.”
“응. 그래야겠지.”
마우리츠가 마차의 창문을 열어 말을 타고 있는 기사에게 출발을 명했다. 기사는 크게 출발을 외쳤고 일행 전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