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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해
“오오. 아론! 오랜만이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공작 각하.”
빌럼 공작이 과장스런 동작과 말투로 나를 맞아준다. 왜이래.
내 옆에 항상 토마스가 있듯 항상 빌럼 공작 옆에 붙어 있는 디르크와도 인사를 나눴다. 저 사람이 기사장이니까. 직책상으론 일단 내 상사다.
“최근 자네의 활약은 귀가 따갑게 듣고 있네. 청어잡이라니. 난 상상도 못했을 일이야.”
내가 아니라 어머니가 한 일인데..... 여하튼 대외적으로는 나랑 사부님이 상단주니까. 그리고 사부님은 소문난 무인이고 나는 그나마 상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니 청어잡이는 내가 시작했다고 알려졌겠지. 그래도 사부님은 진실을 알고 계신데.... 사부님의 얼굴을 힐끗 봤다. 언제나 그렇듯 무표정이다. 자기 주군이라도 집안일 이야기는 하지 않는 건가.
“과찬이십니다. 겨우 물고기 잡이일 뿐입니다.”
“그 물고기 잡이 하겠다고 네덜란드의 온 상인들이 어선을 구하려고 난리라지. 하하하.”
진짜 왜이래. 빌럼 공작이 원래 아랫사람에게 친근하게 대하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과하게 하는 사람은 아닌데.
“절 찾으셨다고....”
“아. 그렇지. 괜히 바쁜 사람 앞에서 흰소리 하고 있었구만.”
“아. 아닙니다. 제가 무슨... 항해도 끝나서 보름 정도 주구장창 쉬기만 할 예정입니다. 각하께서 바쁘시지 저는 한가한 사람입니다.”
“나도 한가하네. 일단 거기 앉게.”
“네.”
빌럼 공작의 암스테르담 사저의 집무실은 빌럼 공작 개인의 책상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앉을 수 있도록 쇼파와 높이가 낮은 탁자가 배치되어 있다. 식사하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간단한 다과를 즐기기 위한 공간이다. 보통 다른 높은 사람들의 집무실에는 주인 외에는 앉을 공간이 없는 것이 정석인데 빌럼 공작은 사람 만나기를 워낙 좋아하니 자기 집무실에 이런 것까지 만들어 놓은 듯했다.
집무실 한쪽에는 분명 내가 가져왔을 것이 분명한 호랑이 모피가 있다. 같은 호랑이 모피라고 해도 가져오는 곳에 따라 줄무늬가 조금씩 다른데 저건 분명 모스크바 공국산이다. 내가 가져온 모피가 빌럼 공작의 집무실에 깔려 있다니. 뭔가 뿌듯한데.
“차는 카카오차로 미리 가져다 달라고 해놓았네.”
“아.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카카오차 맛 좀 보겠구나. 내가 배에서 내리자마자 루이웨 상관으로 달려가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 카카오차다. 일반적인 식당에서는 구할 수 없는 차니까. 루이웨 상관에는 사부님을 위해 카카오차가 항상 배치되어 있다. 내가 그걸 뺏어 마시는 거지. 하도 많이 마셔서 가끔은 애니 이모가 ‘돈 내고 마셔!’라고 말할 정도다.
“보어경이 휴대하고 다니면서 매일 마시기에 한잔 달라고 해봤다가 나도 중독되어 버렸어. 거의 설탕물이나 다름없는 차인데 카카오만의 특유의 향이 정말 멋지단 말이지.”
“저도 사부님 덕분에 처음 마셨었습니다.”
“하하. 보어경이 카카오차 전도사구만.”
그러게. 이제 빌럼 공작에게까지 퍼뜨렸으니 온 네덜란드 귀족에게 퍼져나갈 거다. 빌럼 공작은 귀족들 유행의 선두주자니까. 빌럼 공작이 즐겨 마신다고 소문나면 모든 귀족들이 궁금해서라도 구해서 한 번씩은 마셔볼 거다. 그럼 빠지는 거지. 이 카카오차의 고급스런 달콤함은 감히 거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으으. 이때가 카카오를 유통할 기횐데. 카카오는 에스파냐 상인들이 다루는 상품인지라 내가 구할 수 없다는 게 안타깝네.
“보어경은 카카오차 전도사고 아론은 모피 전도사군요.”
디르크가 나와 사부를 엮어서 말했다.
“그렇군. 요즘 네덜란드 귀족 중에 모스크바 공국 산 모피 하나 구하지 못하면 귀족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돌 정도더군. 아마 네덜란드 귀족 대부분이 자네가 모스크바 공국에서 가져온 모피를 하나씩은 가지고 있을 거야. 정말 대단해. 나도 저기 하나 가지고 있지 않나. 그리고 내 부인들은 여우 모피로 만든 옷을 하나씩 가지고 있더군.”
“그러게 말입니다. 각하. 처음 봤을 때는 달구지 4개 가지고 있었던 소상인이었는데.... 참 빠르게도 성장했어. 몇 년 만이지? 거의 3~4년 만인 것 같은데. 처음 봤을 때는 그냥 시골의 작은 상인이었는데 말이야. 세월 참 빨라.”
“대단할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각하. 저는 그저 모스크바의 모피를 이곳으로 옮겨왔을 뿐이지요.”
빌럼 공작이 나를 칭찬하자 디르크가 이어 받아 말을 한다. 디르크 이 양반이. 나 처음에도 시골 상인 정도는 아니었거든.
“이번에도 모피를 가져온 겐가?”
“네. 그렇습니다.”
“모스크바 공국에서 가져온 것이겠지?”
“네. 아무래도 모피의 품질은 모스크바 공국이 가장 뛰어나니까요.”
“그렇지. 그곳 모피의 품질은 정말 좋지. 그런데 말이야...”
음? 빌럼 공작의 표정이 진지해진다. 드디어 본론이 나오는 건가.
“자네가 모스크바 공국과 거래하는 것을 탐탁지 않아 하는 곳이 몇 있더군.”
어.... 설마?
“스웨덴 왕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 내게 항의가 들어왔어. 네덜란드 상인 한 명이 자신들의 적국인 모스크바 공국과 거래를 하고 있다고. 그 때문에 자신들이 취하고 있는 봉쇄정책이 무용지물이 되고 있으니 당장 멈추라고 하더군.”
아. 젠장. 진짜 그거였냐. 상상도 못했다. 이번에 나에게 직접 경고했으니 나라에 압박을 가하는 것은 적어도 몇 개월 후일 줄 알았는데. 나에게 경고함과 동시에 빌럼 공작에게도 압박을 가했다는 건가.
솔직히 나는 초인으로서 남부 전선에 힘을 보태달라고 하거나 전쟁에 필요한 후원금을 내라고 할 줄 알았다. 그래서 전쟁에 합류하는 것은 힘들고 후원금으로 1~2천만 오션 정도 낼 생각까지 하고 있었는데.
다른 나라의 압박이라면 몰라도 빌럼 공작이 하지 말라고 하면 정말 하지 말아야 한다. 네덜란드에 있으면서 빌럼 공작의 명령을 거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 그는 공작의 직함을 가지고 있지만 왕이나 다름없는 인물이니까.
아무리 빌럼 공작이라고 해도 두 나라의 압박에서 버티기는 쉽지 않겠지. 괜히 나라는 상인 하나를 지키기 위해 강대국 두 곳과 척을 질 수는 없을 테니까. 그래도 모피 거래가 거의 끝났을 때쯤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모스크바 공국과의 교역으로 자본금을 충분히 확보했으니 말이지.
“그렇습니까. 빠르군요.”
“예상하고 있었나 보군.”
“예상은 했지만 한 몇 개월 정도 후에나 일어날 거라 생각했습니다. 이번에 저에게 직접 경고를 했으니까요.”
“자네에게 직접 경고를 했다?”
빌럼 공작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네. 탈린 항에서 출항하고 하루 정도 지났을 때 스톡홀름 한자동맹 소속의 배가 접근하더군요. 그리곤 저에게 모스크바 공국과의 교역을 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그게 언제쯤 일이지?”
“한 달 정도 되었습니다.”
“그렇군. 내가 거절하니 자네에게 직접 간 모양이군. 허. 참.... 나도 꽤 얕보인 모양이야. 분명 건들지 말라고 이야기 했는데도...”
에... 뭐지. 뭔가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르다. 거부했다고?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면 빌럼 공작이 거부했다고 한 거 같은데. 나는 내게 경고함과 동시에 빌럼 공작에게 압박을 가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다. 빌럼 공작에게 압박을 가한 후 나에게 경고를 했다는 건가.
“그래도 각하가 거부한 일이니 그들도 직접 나서지는 못한 모양입니다. 자유상인 연합인 한자동맹을 이용했다고 한 것을 보면.”
“한자동맹이 나라의 소속이나 다름없게 된 것이 언젠데 그런 소리를 하나. 이건 나를 무시한 거야. 거 참... 그래도 한자동맹의 이름으로 나섰다고 하니 항의는 못하겠고... 이런 더러운 느낌을 받는 건 오랜만이야.”
잘못들은 게 아니다. 이젠 거의 확실하다. 빌럼 공작은 스웨덴 왕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압박에서 나를 지켜준 것이다. 나 하나를.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신 겁니까.”
“거절했지.”
“어째서.....”
나도 모르게 무례하게 혼잣말을 해버렸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바로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전부 들었겠지. 이런 실수를 할 정도로 놀랐다.
“어째서라니. 당연한 것 아닌가. 전에도 말했던 것 같은데. 네덜란드의 젖줄이었던 라인강과 마스강 중 마스강은 에스파냐에 의해 완전히 막혀버렸고 라인강도 반밖에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야. 오죽하면 네덜란드 최대항구인 로테르담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암스테르담을 만들었겠는가. 이대로 가면 우리는 말라죽을 수밖에 없어. 그리고 결국 에스파냐에 굴복하고 말겠지. 그런 우리에게 남은 길은 바다밖에 없네.”
그래. 전에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이 말을 하면서 나에게 2천만 오션을 줬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바다야. 무조건 바다야. 그 때문에 항해학교도 세운 것이고 귀족들이 돈을 모아 암스테르담을 만든 것이고 암스테르담을 자유도시로 풀어준 거야. 나는 필사적이야. 바다에 내 목숨과 나라의 운명을 맡겼어. 그렇기 때문에 암스테르담을 무상으로 내놓을 수 있었던 거야.”
목숨을 맡기다니. 그 정도 각오였었나.
“자네는 정말 잘해주고 있네. 청어가 네덜란드 근해로 이동했다는 것을 밝혀냈지. 그건 정말 대단한 일이야. 지금도 네덜란드 인민들의 배를 든든하게 만들어주고 있고 네덜란드 상인들이 외국으로 쉽게 진출 할 수 있게 만들어주고 있지. 식량을 마다할 나라는 없거든. 덕분에 영국과 신성로마제국과의 거래가 활발해졌어. 아직 발트해는 위험해서 발을 들이밀지 못하고 있지만 자네는 해냈지. 자네가 교두보야. 미래에 우리 네덜란드의 다른 상인들이 발트해에 진출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교두보.”
교두보라니. 빌럼 공작의 말에 감화되어 가슴이 두근거린다. 애국심이 강하거나 하지는 않았는데 빌럼 공작의 말을 듣고 있자니 나 자신이 애국자가 된 것 같고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자네가 발트해로 가는 길목을 닦아놓으면 그 뒤를 따라 많은 네덜란드 상인들이 발트해로 진출할거야. 그리고 발트해의 상권은 신성로마제국이나 영국과의 거래보다 몇 배는 더 우리를 부유하게 만들어주겠지. 그런데 그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자네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막는다니. 어찌 그런단 말인가.”
“감사합니다! 공작 각하!”
가슴이 두근거리고 사명감이 불타오른다. 나도 모르게 큰 목소리로 빌럼 공작에게 감사를 표했다.
“내가 감사하지. 자네가 감사할 게 뭐가 있는가. 지금처럼만 하게. 자네는 상인으로서 교역만 하면 돼. 외교적인 부분은 나와 다른 귀족에게 맡기면 돼. 상인들이 우리 귀족들보다 교역을 잘할지 모르지만 외교만큼은 우리 귀족들의 전문분야니까. 자네에게 판을 만들어주겠네. 그 어떤 나라도 자네를 방해하지 못하게 만들어주겠어. 그러니 자네는 자네가 잘하는 돈 벌기만 열심히 해주게. 그러면 돼.”
감동이다. 빌럼 공작... 아니 빌럼 공작님. 전에도 빌럼 공작님이라고 부르기로 해놓곤 시간이 지나고 그냥 대충 불렀었는데 이제는 반드시 공작님이라 부를 거다. 왜 이 사람이 네덜란드의 영웅인지 알겠다. 이 사람은 정말 네덜란드의... 아니 그냥 영웅이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저뿐만 아니라 네덜란드의 다른 상인들도 발트해로 진출할 수 있도록 터를 닦겠습니다.”
“허허. 너무 열심히 하지는 말게.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으니까. 지금처럼만. 해주면 돼.”
***
“각하를 바라보는 눈빛이 조금 달라졌군. 이제야 제대로 됐어.”
빌럼 공작님과 대화를 나누고 나오는 길. 디르크가 배웅 나왔다.
“설마요. 언제나 공작 각하께는 공경의 눈빛을 보냈습니다.”
“당연하지. 공경은 당연한 거야. 하지만 존경은 없었지.”
“......”
맞는 말이다. 나는 딱히 빌럼 공작님을 존경하지는 않았으니까. 사부님만을 존경했지.
“네가 각하 곁에서 몇 달만 지냈어도 당연히 보냈어야 할 존경의 눈빛이었다.”
“제가 공작 각하에 대해 너무 몰랐습니다.”
“몰랐지. 공작 각하의 진면목을 보려면 곁에서 지켜봐야 해. 자네는 각하께서 자신의 전 재산의 3분의 2를 네덜란드를 위해 쓰셨다는 걸 알고 있는가?”
3분의 2? 몰랐다.
“자네 같은 상인은 자신에게 돌아올 이익을 보고 돈을 투자하지. 하지만 각하께서는 바라보는 것은 단 하나. 네덜란드의 미래. 절대로 다시 돌아오지 못할 투자지. 그런 것을 위해 절대 마르지 않을 것 같았던 재산을 끊임없이 부어서 마르기 직전이 될 때까지....... 정말 대단한 분이지.”
그러고 보니 빌럼 공작님이 네덜란드를 위해 한 일이 제법 많다. 레이덴 대학을 만들고 암스테르담을 만들었다. 그리고 에스파냐와의 전쟁 내내 사비로 용병과 병사를 고용해 에스파냐에 대적하고 있다. 용병과 병사는 그 대단한 에스파냐의 왕 펠리페2세조차 파산하게 만들 정도로 많은 돈을 필요로 한다.
물론 에스파냐와 빌럼 공작님의 병사 규모는 10배 정도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그래. 대단한 분이지. 그리고 그 대단한 분이 너를 대단하다고 생각하신다. 그리고 나도 각하의 생각이 동감이다.”
“네?”
“청어잡이.”
“아...”
“청어잡이는 정말 대단하다. 이제 시작한지 3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네덜란드의 기간산업이 되었어. 네덜란드의 모든 것이 청어잡이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지. 돈 좀 있다하는 네덜란드 상인들은 너도나도 청어잡이에 뛰어들고 있어.”
어머니가 한 일인데 내가 칭찬을 받고 있다.
“최근 각하께서는 청어잡이에 대한 규칙을 만들고 계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그물코의 넓이다.”
“그물코...”
“대영주 회의에서 에흐몬트 백작이 너와 나눈 이야기에 대해 말하더군. 그 중 그물코에 대한 것도 있었다. 공작 각하께서는 정말 감탄하셨다. 아론 네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몇 번이고 이야기하시더구나. 공작 각하께서는 그 넓은 그물코에 대한 것을 다른 네덜란드 상인들에게도 적용하기 위해 준비 중이시다.”
“그렇군요.”
그것도 내 생각이라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더 많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네덜란드의 운명이 상인에게 달려 있어. 그리고 아론 너는 그 중심에 서 있고. 부탁한다.”
“네....”
내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빌럼 공작님과 디르크가 칭찬한 것들. 그것들 대부분이 내가 아닌 다른 이들이 한 일이다. 그냥 알려지기만 내가 한 것처럼 소문난 것뿐이다.
뭔가 속인 느낌이다. 다른 사람들의 공을 훔친 거짓말쟁이가 된 느낌이다.
나도.... 나도 제대로 나라를 위해 일을 하고 싶다. 다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업적이 진실로 내가 한 일이 되기를 원한다.
.... 발트해. 발트해다. 네덜란드의 다른 상인들이 발트해로 진출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거야. 그러면.... 다른 사람이 한 일이 아닌 내가 한 일로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 거야.
============================ 작품 후기 ============================
으으. 죄송합니다. 또 늦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