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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해
갤리온의 선장실은 넓고 화려했다. 이 배만 그런 건가? 아냐. 갤리온 자체가 거주 공간에 많은 신경을 썼다고 들었다. 선장실뿐만 아니라 간부실도 꽤 괜찮게 제작되어 있고 일부 선원들이 머무를 수 있는 방도 있다고 들었다. 카락에는 일반 선원이 머물 방 같은 것은 없다.
쉴 때도 아무 데나 자리 잡고 앉으면 그곳이 바로 휴게실이고 졸릴 때 아무 곳에나 누우면 그곳이 바로 침실이다. 으으. 나도 갤리온 하나 갖고 싶다.
“앉아라.”
이반4세가 앉아 있는 식탁에는 간단한 몇 가지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나랑 같이 밥이나 먹자고 부른 건가. 방안에는 나와 이반4세뿐이다. 친위대와 토마스 모두 문 밖에 있다. 밥 먹는 걸 도와줄 시녀 정도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긴 음식이 워낙 간단해서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기도 하다. 간단한 음식 중에는 단연 청어가 눈에 띈다.
이반4세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 청어라는 거. 제법 맛이 있더군.”
“네덜란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먹는 음식 중 하나입니다.”
식탁에 있는 청어는 내가 아는 청어의 모습은 아니다. 우리는 그냥 통째로 생양파와 함께 먹는데 식탁에 있는 청어는 여러 소스를 뿌려 구웠다. 하긴 그걸 그냥 먹는 건 네덜란드 사람이 아니면 힘들긴 하지.
그나저나 왕을 외국인이랑 단 둘이 있게 하다니. 정신 나간 거 아냐? 내가 암살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반4세가 강력한 초인이니까 괜찮다 이건가. 나도 초인이거든.
“얼마 전 생일이었다고 하더군.”
“아. 네. 그렇습니다.”
이반4세가 내 생일을 알다니. 내 생일은 5월 17일. 일주일 전 선상에서 맞이했다. 이제 18살이 됐지. 나도 꽤 나이를 먹었구나. 원래는 교역을 떠나지 않고 생일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그냥 어머니께 편지만 보내고 끝냈다. 생일파티를 하겠다고 고향으로 갔다가 오면 또 보름이 사라져버릴 테니까.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어머니한테는 죄송하다. 내 생일에 많은 의미를 두시는 분이니까. 작년에도 그랬듯 이번에도 많은걸 준비하셨을 텐데 그냥 와버렸으니... 그래도 생일 되기 10일 전에 편지 보냈으니 많이 준비하지는 않으셨겠지....라고 믿고 싶다.
혹시 나중에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가면 혼나는 거 아냐? 어머니한테 혼나는 건 좀 무서운데....
“먹어라.”
“감사합니다.”
이반4세가 청어를 하나 가져가 먹기 시작했다. 포크와 나이프로 썰어 먹는다. 네덜란드에서는 꼬리를 잡고 한입에 먹는다. 특별한 조리를 하지 않은 상태로 말이다. 그리고 생양파를 꼭 곁들여 먹는다. 생양파가 청어의 비린내를 잡아주고 맛을 깔끔하게 만들어준다.
이반4세처럼 조리된 청어 한 마리를 가져와 썰어먹었다. 이것도 나쁘지 않군.
“요즘 내 백성들이 이렇게 청어를 먹는다고 하더군.”
“아. 그렇습니까. 네덜란드와는 방식이 좀 다르군요. 네덜란드에서는 절인 청어를 그냥 먹습니다.”
“들었다. 하지만 내 백성들은 그렇게 먹는 것에 익숙하지 않으니까.”
그렇긴 할 테지. 모스크바 공국의 백성들은 청어와는 인연이 없을 테니까. 사실 모스크바 공국만이 아니라 신성로마제국 사람들도 절인 청어를 그냥 먹지 않는다고 한다. 나름의 방식으로 조리해서 먹는다고.
그냥 먹는 건 힘든가? 괜히 힘들게 조리할 필요도 없고 가격이 제법 비싼 조미료들을 사용할 필요도 없을 텐데 말이야. 청어만 먹기 힘들면 빵에 싸서 먹어도 괜찮은데 말이야.
“이렇게 먹는 것도 괜찮군요. 맛이 좋습니다. 저도 돌아가면 절인 청어를 구워서 먹어봐야겠습니다.”
“........”
대답은 없다. 이반4세는 먹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내 말을 못 들은 건가? 그 뒤로 잠시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이반4세는 나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식사만 할 뿐이었다. 뭔가 할 말이 있어서 부른 게 아니었나. 내가 먼저 말을 꺼내야겠어.
“전에 주신 모피가 네덜란드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모스크바 공국의 질 좋은 모피가 오니 많은 귀족들이 서로 사려고 난리더군요.”
그런 일은 없지만 어차피 이반4세는 모를 일이니까. 원래 높은 사람과의 대화는 약간의 과장이 필요한 법이다. 자신을 칭찬하는 데 침묵을 유지하고 있지는 않겠지.
“그렇군.”
“.....”
그게 끝이다. 대화하기 싫은 건가. 음... 묵묵히 먹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을 보면 식사 중 대화하는 것을 싫어하는 스타일일 수도 있겠어. 나도 조용히 먹자. 그 후로 식사 중 들리는 소리라고는 음식을 덜어가는 소리와 음식 씹는 소리, 음식 써는 소리 등 식사에 관련된 것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내가 하는 일은 이반4세가 음식을 먹는 것을 구경하는 것뿐이었다. 최대한 천천히 식사를 마쳤는데 이반4세는 여전히 식사가 한창이었던 것이다. 내가 조금 먹거나 이반4세의 식사속도가 느린 것은 아니었다. 우적우적 한 번에 제법 많은 양을 덜어가서 접시에 놓고 먹는데도 식사가 끝나지 않는다. 아마 이반4세가 지금까지 먹은 음식이 내가 먹은 양의 3~4배는 될 것이다. 엄청난 대식가네.
그나저나 식탁 중앙에 음식이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먹는 사람이 직접 덜어먹다니. 이런 방식으로 먹는 것은 처음이다. 보통은 음식을 접시에 담아서 그 사람만이 먹을 수 있게 가져다 주니까.
책에서 북유럽의 음식문화에 대한 지식을 접하지 못했다면 처음에 꽤 당황했을 것이다. 하지만 보통 노르웨이나 스웨덴 사람들만 이렇게 먹는 줄 알았는데 모스크바 공국의 사람들도 이렇게 먹었었나.
결국 산더미같이 쌓여있던 음식을 전부 먹고 난 후에야 이반4세의 식사가 끝이 났다. 저 많은 양이 어떻게 몸 안에 전부 들어갔지. 유물 능력 중 하나가 음식 저장인가.
“전에 가져왔던 청어의 양. 실은 별로 많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존에 먹던 것에 혼합해 같이 먹으니 배불리 먹는 것은 무리여도 배 곯는 정도는 면할 정도였다고 하더군.”
이반4세가 식사를 마치고 입 주변을 정리하며 말했다.
“그렇습니까. 제가 가져온 청어가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이번에도 1,400통을 가져왔다고.”
“더 가져오고 싶었으나 제 배에 실을 수 있는 양은 그것이 한계인지라....”
설마 더 가져오라고 떼쓰는 건 아니겠지? 그러면 난감해지는데. 보어&렐리의 어선을 빌려다가 끌고 오기라도 해야 하나. 어선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이라 물건을 많이 실을 수는 없겠지만...
“아론 보어 렐리.”
“네. 차르.”
갑자기 날 직시하며 내 풀네임을 부른다. 뭔 말을 하려고....
“너는 내 것이 될 발트해에서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하겠다.”
에? 갑자기 뭔 말이야. 하마터면 ‘에?’하는 소리를 입 밖으로 낼 뻔했다. 겨우 참았네. 즉, 자기가 발트해를 점령할 건데 나는 그곳에서 장사를 할 수 있게 허락해준다는 건가.
.... 그런 건 점령하고 말해 이인간아.
“이해를 못했나보군. 아론. 너는 내 발트해에서 활동하는 유일한 외국 상인이 될 것이다.”
그러곤 빤히 쳐다본다.
..... 뭘 원하는 거야. 에이. 모르겠다. 일단은 장단을 맞춰주자.
“죄송합니다. 뜻밖의 일이라 잠시 정신을 놓았습니다. 어찌 저에게 그런 영광을.... 정말 대단한 혜택입니다. 차르께서 저에게 베풀어주시는 자비로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처럼 청어를 가져오너라. 그거면 된다.”
그리고 이반4세는 방을 나갔다. 뭐야. 그 말이 하고 싶어서 부른 거였냐. 이상한 인간이야.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는 인간이다.
***
“차르께서 생일 선물이라 이야기 하셨소.”
죄송합니다. 차르. 제가 또 불경한 마음을 품었습니다. 이렇게 자비롭고 은혜로운 분께 불경한 마음을 품다니. 정말 저는 멍청한 놈입니다.
친위대를 따라간 창고에는 전에 받았던 모피의 거의 두 배가 쌓여있었다. 양이 많다고 해서 질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상재를 통해 표시되는 정보에 의하면 전부 1등급이었다. 이반4세가 진상 받은 최고급 가죽들. 크흑. 차르의 은혜에 감동이 북받쳐 오르는구나.
내 무슨 일이 있어도 청어를 싣고 다시 모스크바로 오겠습니다. 차르. 모피를 위.... 아니. 차르를 위해 반드시!
-거래를 통해 상재 포인트 500을 획득했습니다.
받는 모피의 양이 많아지니 얻는 상재 포인트도 많아지는구나. 다음 단계까지 366포인트 남았다. 366포인트면 탈린의 상인들에게 모피를 구입하면 충분히 올릴 수 있는 양이다. 상행이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니고 상행 중간에 레벨업을 할 정도라니. 역시 선박으로 교역을 시작하니 상재 포인트가 빨리 모인다. 보너스 단계 포인트를 쓰지 않고 아끼길 잘했어. 조금 더 지켜보고 사용하자.
***
“오오. 어서 오십시오. 아론 상단주님!”
저번에 왔을 때 제법 많은 양의 모피를 거래했던 상인이 반갑게 맞아준다. 차르가 준 모피는 바로 배로 옮겨 두었다. 그리고 경비로 선원 5명을 배치해뒀다. 귀한 것이니 잘 지켜야지. 양이 얼마 안 되지만 이곳 탈린에서도 1,000만 오션정도는 나갈 정도로 귀한 모피들이다. 저걸 네덜란드로 가져가면.... 저번에 가져간 모피가 받은 가격만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3,000만 오션이다.
청어 1,400통에 대한 대가와 내 생일 선물로 이런 엄청난 것을 주다니. 역시 한 나라의 왕답다. 듣기로 모스크바 공국은 영토의 크기로만 따지면 유럽에서 손꼽힌다고 하더니 그런 넓은 영토의 지배자답게 배포도 손꼽히는구나.
“오랜만입니다. 이번에도 모피를 좀 구입하러 왔습니다. 저번에 가져간 것만큼 품질이 좋은 것이 있으면 좋겠는데....”
“흐흐. 아론님이 오실 것이라 생각하고 좋은 것들로 모아뒀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상인이 안내한 창고에는 제법 많은 양의 모피가 쌓여있었다.
“질이 좋군요.”
대부분 2등급이고 간간히 1등급도 섞여있다. 이정도면 저번보다도 더 질이 좋은 것이다.
“전에는 언제 팔 수 있을지 모르니 보유한 상품들의 질이 좋지 않았지요.”
아냐. 저번에도 좋았어. 무려 2등급짜리였는데.
“하지만 이번에는 아론님이 오실 것이니 새로 좋은 품질의 가죽들을 구매해뒀습니다.”
“감사합니다.”
결국 그 상점에서 모든 모피를 구입했다. 모피가격은 상재를 통해 보이는 적정 가격보다도 약간 더 쌌다. 애초에 저번에 모피를 구입했을 때도 가장 싸게 판 곳이기에 가장 먼저 찾은 곳인데 ‘차르의 손님이신데 비싸게 받을 수는 없지요.’라며 알아서 더 깎아주었다. 차르 정말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구나.
호랑이, 곰 가죽만 전부 구입할 수도 있었지만 여러 종류로 골고루 구매했다. 한 종류만 사가면 팔 때 힘들어지니까. 가지고 있던 2,700만 오션의 돈 중 2,000만 오션을 모피 구입하는 데 사용했다. 소금 구입 예상비용이 300만 오션정도니까 400만 오션이 남지만 이 정도는 비상용으로 남겨둬야 한다. 혹시 중간에 배가 고장 나기라도 하면 고쳐야하고 여러 가지 재난이 닥쳐올 수도 있으니까.
그나저나 전에는 여기에 600만 오션어치밖에 없었는데 이번엔 2,000만 오션어치나 구입하고도 아직 많이 남아있을 정도라니. 작정하고 물건을 모았구나. 내가 안 왔으면 어쩌려고... 하긴 상인이라면 이정도 도박은 할 수 있어야 돈을 버는 법이지. 위험이 크면 그만큼 얻는 이익도 큰 법이니까.
-거래를 통해 상재 포인트 1,000을 획득했습니다.
상재가 15(+6)단계로 올랐습니다. 상품 지식의 범위가 늘어납니다.
직업 ‘무기상인’이 활성화 되었습니다.
상재 단계가 올랐다. 그래. 팍팍 올라라. 다음 단계까지 1,500쯤 남았으니 뤼베크를 거쳐서 암스테르담으로 가고 거기서 팔린 모피의 대금을 정산 받으면 또 단계가 오르겠구나. 정말 빠르다. 이대로 계속 올리고 대충 상재가 순수 20단계로 오를 때쯤 보너스 단계 포인트를 투자해서 다음 단계인 사파이어 단계로 진입해야겠어.
그나저나 새롭게 활성화 된 직업이 ‘무기상인’이라.... 그냥 딱 봐도 별 도움 안 될 것 같다. ‘청어상인’이나 ‘모피상인’같은 게 나오면 좋을 텐데.
***
1579년 5월 29일 월요일
탈린에 도착한지 4일 만에 다시 출항했다. 원래는 어제 출발하려 했는데 어제는 일요일이라서 어쩔 수 없이 하루 더 있다가 오늘 출항했다.
보통은 항구에 도착하면 일주일 정도는 머문다. 거래도 하고 여러 가지 정보도 알아보고 선원들에게 휴식을 주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하지만 탈린에서는 얻을 정보도 없고 거래도 이미 끝냈다. 그리고 식량사정이 좋지 않다보니 휴식을 취하기에 좋지 않은 곳이다. 그래서 일을 마무리하고 바로 출발했다. 선원들도 사정을 알고 있으니 별로 불만을 가지는 자는 없을 것이다.
“북동!!!”
파수담당 선원이 소리친다. 파수꾼은 눈 좋은 선원을 번갈아가며 올리고 있다. 다른 선박에는 파수 담당이 따로 있다고 하는데 나도 파수 담당을 따로 구해볼까.
“가거라.”
독수리를 날려 보냈다. 처음엔 하루 종일 독수리를 날려 보내 사방을 감시했지만 그래봤자 한나절에 배 한척 발견할까 말까 했다. 독수리가 힘을 쓰면 내 체력이 소비된다. 어차피 파수꾼들이 발견해도 몇 시간 이상의 거리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때 독수리를 날려서 제대로 확인해도 되니까. 괜히 하루 종일 날려서 체력 낭비하지 않기로 했다.
독수리가 금세 멀리 있는 배가 있는 지역까지 날아갔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그 배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소속기가 없다. 무국적배. 예전에 뤼베크 앞바다에서 만났던 것과 비슷한 무국적배다. 배에 탄 사람들에 집중했다. 당연히 내가 아는 사람은 없다. 생김새를 보니 북유럽 쪽 사람들 같은데.... 복장과 무장을 보면 해적은 아닌 것 같다. 해적은 가지고 있는 무기나 복장을 보면 대충 구분이 가능하다. 음... 해적도 아니면 도대체 뭐지.
그 무국적의 배는 전처럼 잠시 우리를 따라오다가 곧 사라져버렸다.
“도대체 뭘까요. 정체를 모르겠군요.”
선장이 된 야프가 혼잣말 비슷하게 말한다.
“그러게 말이다.”
나도 그놈들 정체를 모르겠다. 자세히 살펴봤지만 딱히 신분을 알만한 것은 없었다. 도대체 뭐하는 놈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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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은 1일 1연재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없는 실력을 쥐어짰더니 머릿속이 주머니에 넣어둔 이어폰 선 꼬이듯 꼬였네요. 좀 풀어야겠습니다.
ps. 무재 32단계라고 잘못 적었네요. 무재는 27단계가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