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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트협약
1576년 10월 7일 토요일
에흐몬트에 도착했다. 서두르면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었을 테지만 어차피 한동안 상행 나갈 일도 없을 텐데 급하게 이동할 필요 없다는 생각에 느긋하게 왔다.
일꾼, 아니 이제는 소작농으로 전직할 아저씨들의 표정이 밝아진다. 2달 약간 넘은 시간 만에 겨우 돌아온 것이다. 2달이나 집을 떠나 있었으니 얼마나 반가울까. 나도 반가울 지경인데. 나중에 배를 타게 되면 1~2년씩 고향을 못 보게 될 텐데 그때가 걱정되기는 한다.
아저씨들과 내 표정이 밝아지는 반면 집시여인들과 플로라의 표정은 점점 경직되어 간다. 대충 이유가 짐작은 간다. 어머니를 만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애니 이모가‘너희 주인마님이 될 쟤 엄마가 얼마나 무섭고 깐깐한 사람인지 알아? 너흰 이제 죽었다 생각해야 돼.’라는 수준 낮은 말을 하며 겁을 잔뜩 준 것이다. 장난으로 한 것이겠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장난이 아니다. 앞으로 평생 의탁해야할 집의 주인인데 무섭고 깐깐하다고 하면 겁이 날 수밖에 없지.
그리고 나도 ‘아냐. 어머니는 그런 분이 아니야.’라고 말하지 못하는 걸 생각하면 애니 이모의 말이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한 것 같다.
내가 어머니 밑에 있는 하인이었다면? 흠... 생각해 보니 딱히 무서울 건 없네. 어머니는 귀족의 의무를 다하는 좋은 주인이니까. 특별히 트집을 잡고 화내지도 않고, 아니. 화내시는 걸 본적이 없는 것 같네. 제대로 일을 가르쳐준 후 제대로 못하면 잘라버리시긴 하는데 화를 내시지는 않았다. 그리고 일만 제대로 하면 휴식도 보장해주고 일하는 환경도 최대한 좋게 해주기 위해 노력해주신다.
말하다 보니 정말 좋은 주인이네. 애니 이모가 겁 줄 때 아니라고 바로 말해줄 걸. 지금은 말해 줘봤자 안 믿을 거 같다. 직접 겪어봐야 믿겠지.
“다녀왔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집에 도착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어머니를 찾아 인사를 드리는 일이다. 언제나 그렇듯 딱히 살갑게 오가는 대화는 없다.
“그 뒤는.... 집시인거냐?”
어머니가 내 뒤에 있는 집시여인들과 플로라를 발견했다. 어머니도 집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는 건가. 표정변화는 별로 없으셨다.
“이들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잠시 들어가시죠.”
“그러자.”
문 앞까지 날 마중 나왔던 어머니다. 들어가 작은 탁자에 마주 앉았다. 그리고 플로라에 대한 이야기를 해드렸다.
“그렇구나. 초인이라.... 중히 쓸 생각이더냐.”
“초인이니까요. 상단의 간부로 쓸 예정입니다.”
“그럼. 노예에서 풀어주겠고 다른 집시여인들은 어쩔 생각이더냐. 초인의 가족이라면 중히 여겨야 할 듯싶은데.”
“그냥 다른 하녀들처럼 여기면 됩니다. 특별히 더 대우해줄 필요도 없습니다. 아직 플로라가 초인으로서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는 못하는 상태니까요.”
“알겠다. 그럼 그 플로라라는 아이를 제외한 다섯의 집시여자들은 내가 다루도록 하겠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집시여인들을 특별 대우할 필요는 없다. 나중에 플로라가 초인으로서 제 역할을 하는 날이 온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
오랜만의 휴식을 즐기기로 했다. 지난 몇 달간은 쉬지 않고 상행을 다녔으니 말이다. 잠시 쉬면서 다음에 어떤 상품을 다룰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알크마르산 치즈가 가장 만만한 품목이지만 이번 달에 치즈시장이 닫힌다.
“무기를 다뤄볼까?”
“그것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러자면 네덜란드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현재 네덜란드는 전쟁이 없으니까요. 무기류는 가격이 좋지 않습니다. 이익이 나지 않을지도 모르지요.”
“아버지는 치즈시장이 끝나면 어땠어?”
“보통 삭힌 청어나 곡물을 다루셨습니다. 전 주인께서는 다룰 수 있는 상품이 식료품 밖에 없었으니까요. 허가증을 가지고 계신 주인님이라면 그런 것보다는 이익이 날만한 것들을 다루는 것이 좋습니다. 보석류나, 직물류, 주류나 향신료 등을 다루는 것이 좋겠지요.”
“향신료? 그건 좀 힘들지. 250만 오션으로는 택도 없어. 흠... 주류나 다뤄볼까? 이번에 와인으로 제법 재미 봤잖아.”
“그것도 괜찮지요. 그리고 직물류도 괜찮습니다. 피렌체산 벨벳은 알아주는 품목이지요. 주인님은 벨벳도 다룰 수 있으니 국경에서 벨벳을 구입한 후 귀족들을 대상으로 거래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인맥 늘리기에도 좋은 품목입니다.”
“그것도 괜찮네.”
흠.... 다루고 싶은 품목은 전부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선택을 할 수가 없네.
“지금은 모르겠다. 일단 암스테르담 가서 분위기도 살피고 야콥에게 정보도 좀 얻은 후 생각해봐야겠어.”
상관을 하겠다고 준비 중이니 잘 팔리는 상품을 알고 있겠지. 그런 거 가져다가 야콥에게 팔아도 되니까.
“좋은 생각이십니다. 상인에게 신중함은 미덕이지요.”
그러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일주일간 휴식을 가졌다. 무재, 문재에 관련된 수련도 하지 않고 말이다. 휴식이란 것이 정말 필요하긴 한가 보다. 딱히 몸의 변화가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더 상쾌함이 느껴지고 무겁던 머리가 가벼워졌다. 정말 오랜만에 홀가분함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는 휴식이었다.
일주일간의 휴식을 가진 나는 다시 집을 나섰다.
상단의 구성은 나와 토마스, 플로라, 그리고 정식 일꾼이 되기로 한 3명과 새롭게 들어온 두 명의 일꾼. 기존에 가지고 있던 달구지 셋에 예전에 의뢰해놓았다가 이번에 받은 새로 만든 달구지 2개였다.
***
1576년 10월 17일 일요일 암스테르담
주일에 맞춰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 오늘은 제대로 된 교회에서 제대로 된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암스테르담은 원래 항상 저런 상태인건가?”
“으음.... 이상하군요.”
암스테르담으로 들어가는 성문에는 행색이 초라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긴 행렬이 만들어져 있었다. 다들 보따리를 두세 개씩 들고 있거나 달구지에 온갖 가정 물품을 올려놓고 있는 것이 피난 행렬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인다.
“잠깐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토마스가 길게 늘어져 있는 행렬로 달려갔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뭔가 질문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는지 노예일 것이 분명한 토마스에게 험한 말이라도 하는 듯 고함을 치거나 거칠게 대하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가야하나?
토마스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반짝 빛나는 은화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하지만 누구도 선뜻 나서지는 못했다. 노예에게 돈을 받고 뭔가를 해준다는 것이 꺼림칙한 것이겠지. 그때 토마스가 있는 곳에서 좀 떨어진 위치에 있던 아이가 잽싸게 달려와 토마스 앞에 섰다. 그리곤 뭐라 이야기를 한다.
토마스는 그 이야기의 대가로 아이에게 은화를 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이쪽으로 데리고 왔다. 왜 데려오지?
“주인님께 직접 설명하겠다는군요.”
“그래?”
토마스가 데려온 꼬마는 아직 11~12살 정도로 보이는 유태인이었다. 플로라보다 어려보인다.
“네 이름이 뭐지?”
“하벨. 하벨이에요.”
“그래. 하벨. 말해 보거라. 저 행렬은 어떤 행렬이지?”
“네. 지금 보시는 저 사람들은 안트워프와 그 주변에서 도망쳐온 사람들이에요.”
“안트워프에서 도망을? 왜 그랬지?”
“에스파냐의 용병들이 갑자기 약탈하기 시작했어요. 집안의 귀중품은 전부 가져가고 여자들을 겁탈하고 그걸 말리는 남자들은 죽였어요. 원래는 일부만 그랬는데 하나 둘 동조하더니 모든 용병들이 약탈하기 시작했어요. 사람들도 닥치는 대로 죽이기 시작했고요. 저들은 그곳에서 약탈당하기 전에 겨우 도망쳐 온 사람들이에요. 저도 그렇고요.”
에스파냐 용병들이 약탈을? 왜 그랬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들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은 프로테스탄트보다는 에스파냐의 왕이 그렇게 지키고자 하는 가톨릭교도들이 더 많은 지역이다. 그런 곳을 왜 약탈한 거지.
“혹시 왜 용병들이 그랬는지 알고 있느냐.”
“정확히 아는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평소에 용병아저씨들이 돈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자주 화냈던 걸 생각하면 에스파냐에서 용병들에게 급여를 주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아요.”
돈. 역시나 돈이 문제다. 그나저나 에스파냐가 돈을 주지 못하다니. 세계 최강국이며 유럽에서 유통되는 금화와 은화의 3분의 1을 유통하는 곳이. 더 자세한 건 나중에 알아봐야겠어.
“그래. 고맙구나. 토마스.”
“네.”
토마스가 은화를 하벨이라는 유태인 아이에게 건네려 했다. 하지만 아이가 받지 않았다.
“왜 그러느냐. 돈이 부족해서 그러느냐?”
“아니에요. 지금 제가 그 돈을 받아도 소용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소용이 없다?”
“네. 지금 저들은 급하게 피난 온 사람들이에요. 이곳에 직장도 없고 어떤 사람들은 돈도 없이 왔죠. 그리고 어린아이가 은화를 받는 것을 목격했고요. 그 다음은 어떻게 될지 자명하죠.”
저들에게 뺏기겠지. 어쩌면 다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 내가 어쩌면 좋겠느냐.”
“저를 고용해주세요.”
“고용해달라고?”
“네. 저에게 일자리를 주세요. 사실 저는 그 은화를 받고도 안전하게 도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요. 나름의 방법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게 끝이에요. 고아인 저는 저 도시 안으로 들어간 이후에 은화로 빵 몇 개 사먹은 후에는 쓰레기통을 뒤지거나 간간히 하는 심부름으로 얻는 돈으로 겨우겨우 먹고 살겠죠. 굶는 날이 더 많을 거고요. 안트워프에서도 그랬으니까요.”
고아군. 대충 예상은 했다. 어린아이 혼자 이곳으로 오는데 신경 쓰거나 따라오는 이가 없었다. 그런 경우는 고아밖에 없지. 그나저나 이 아이 마음에 든다. 말하는 것도 명쾌하고 나를 상대함에 있어 당당하다.
“그래. 너는 무엇을 할 수 있지? 설마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데 고용해달라는 것은 아닐 것 아니냐.”
“달구지가 많은 것을 보니 편력상인이신 것 같아요.”
“맞다.”
“그렇다면 저는 셈을 할 줄 알아요.”
“호. 셈을 할 줄 안다?”
고급인력이다. 셈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용될만하다. 하지만 이 아이는 유태인이다. 유태인은 유럽 전역에서 집시 못지않게 차별받고 있는 민족이다. 그런 민족의 아이를 고용하면 우리 상단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좋지 못한 시선을 받게 될 터. 이미 집시인 플로라가 있는데 유태인까지 들이는 것은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줄 수 있다. 그러니 셈을 할 줄 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부족하다.”
“안트워프에서 3년간 용병들의 심부름을 했어요. 제가 상단에 들어가면 상단주님이나 일꾼분들의 신발과 옷을 전부 수선해드릴 수 있고 식사 준비나 노새를 씻기는 일 등 모든 잡일을 해드릴게요.”
좋다. 특히 노새를 씻기는 일은 힘든 일이니까. 일꾼들도 잘 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보통 노새들은 더럽다. 만지기 거북할 정도로 말이다. 물론 우리 마론은 내가 특별관리하기 때문에 깨끗하지만 자주 씻겨주지는 못하지. 상단의 잡일을 도맡아 하겠다라.... 괜찮은 제안이다. 하지만.
“부족해.”
유태인 꼬마 하벨이 초조해한다. 발을 구르고 손톱을 물어뜯으며 눈알을 굴리는 것이 필사적으로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저는 에스파냐어, 네덜란드어, 포르투갈어를 할 수 있어요. 그리고 힘도 세요. 물건도 잘 나를 수 있어요.”
뒤에 말은 초조해서 그냥 한 말이겠지. 깡마른 네 몸으로 무슨 물건을 나르겠니. 그나저나 3개국어를 할 수 있고 셈도 할 수 있다라.... 나름 엘리트다. 그래. 글도 쓸 수 있다면 고용하자.
“네덜란드어를 읽고 쓸 수 있느냐?”
“그... 그건....”
못하는구나. 그렇다면 탈락이다. 네덜란드 상인 밑에서 일하는데 네덜란드어를 읽고 쓸 줄 모른다면 셈을 할 수 있든 없든 상관이 없다.
“미안하....”
“에스파냐어는 쓸 수 있어요!”
미안하지만 안 되겠다고 이야기 할라는 찰나.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는지 급하게 하벨이 내뱉는 말. 그 말이 내 말을 멈추게 만들었다. 에스파냐어를 쓸 수 있다. 이것은 내게 중요한 이야기다.
“얼마나 읽고 쓸 수 있지?”
“에스파냐에서 나고 8년간 에스파냐에서 살았어요. 6살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해서 8살까지 글을 배웠으며 아버지께서 환전상을 했기 때문에 상인들이 쓰는 단어는 전부 알아요.”
이건..... 상당히 매력적이다. 에스파냐어를 약간이나마 할 줄 아는 토마스 덕분에 말하고 듣는 것은 가능하도록 익혔지만 아직 글은 전혀 모른다. 에스파냐어를 배울 수 있다면.... 유태인이라도 고용 가능하다.
“임시고용이고 네가 상단의 잡일을 담당한다. 나에게 에스파냐어를 가르쳐줘야 하며 10일에 음식과 숙소는 상단에서 제공해주지만 옷은 알아서 준비해야 한다. 이런 조건으로 10일에 은화 반개.”
은화 한 개에 400오션이니 은화 반개면 200오션이다. 정식 고용한 일꾼들의 급여가 10일에 은화 한 개이니 그들의 딱 반을 받는 셈이다. 저번에 가계약한 일꾼들은 싸게 썼었는데 내 식구가 된 사람들까지 싸게 부려먹을 수는 없으니까.
“네! 할게요!”
환한 미소와 함께 열정적으로 고개까지 끄덕이며 수락하는 하벨. 그렇게 좋은가.
“네덜란드어를 쓰고 읽을 수 있게 되면 그때부터 정식으로 고용하고 10일에 은화 한 개 주마. 어떠냐.”
“네! 네! 할 수 있어요!”
어떠냐고 묻기 전부터 이미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렇게 상단에 새로운 사람이 합류했다. 유태인이라니.... 나도 참 다양하게 사람을 받아들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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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다른데는 예약해서 글 올리는 거 무료던데
왜 여긴 돈받는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