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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토마스.”
1시간가량 더 움직였을 때 사부가 토마스를 불렀다. 토마스가 멈췄다. 사부는 주변을 살피더니 한쪽을 가리켰다. 바위와 큰 나무가 많고 풀도 우거져 있어 움직이기 힘들어 보이는 곳이었다.
“발견했다. 저쪽으로 가서 몸을 숨기고 나 혼자 주변을 살피고 오는 게 좋겠어.”
사부의 감각에 적들이 감지된 듯 했다. 반대는 없었다. 일행에서 사부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사부가 혼자 가는 것이 위험해 보일 만도 하지만 우리 중 그런 걱정을 하는 사람은 없다. 사부의 감각은 적들에게 사부가 들키지 않도록 만들어 줄 것이고 만약 들킨다 할지라도 사부가 쉽게 당하지는 않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은신처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큰 바위 뒤, 양 편에 길게 풀이 자라 있는 곳. 우리가 숨어 있을 바위 뒤에도 풀이 자라 있었지만 칼로 베어버리고 쉴 곳을 마련했다. 적들이 우리를 발견하려면 큰 바위를 지나서 풀을 가르며 다가와야 할 것이다. 우리가 바위 뒤에 숨어 있으니 절대 보이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우린 풀을 가르며 다가오는 적들을 소리로 알 수 있을 것이고 기습을 준비할 수 있다. 그리고 바위가 우리 몸을 가려주니 석궁과 같은 무기로 공격하는 것도 힘들겠지. 우리도 석궁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자주 사용하던 무기가 아니니 석궁을 이용해 적을 공격하는 것은 위험도가 높다. 맞힐 수 있다는 확신이 없으니 말이다.
“금방 다녀오마.”
“네. 조심하세요. 사부님.”
“그래.”
사부가 정확한 사정을 알기 위해 떠났다. 나와 토마스는 가져온 짐에서 치즈를 꺼내 끼니를 때웠다.
“토마스. 석궁 쓰는 법 좀 알려줘.”
어차피 사부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할 일이 없을 것 같아 석궁 쓰는 법이나 배워두기로 했다. 석궁은 수많은 무기 중에서 반칙에 가까운 무기다. 누가 사용하든 똑같은 위력을 내며 그 위력은 컴뱃아머에 체인아머까지 걸친 중갑보병을 한방에 무력화시킬 정도다. 30년을 수련한 기사를 어린아이도 죽일 수 있게 만들어주는 그런 무기인 것이다. 물론 어린아이의 힘이라면 반동 때문에 바로 앞에서 쏘지 않으면 맞추기 힘들 테지만.
연사가 느리고 무기의 가격이 비싸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처음 한발은 그 어떤 무기보다도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다. 내가 노리는 것도 그것이다. 지금 내가 석궁 사용법을 배운다고 해서 멀리 있는 적을 저격하거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장전을 해놓은 상태로 들고 있다가 바로 앞에서 적을 향해 쏜다. 맞추면 좋고 빗나가도 좋다. 맞추면 적은 무력화될 것이고 빗나가도 볼트를 피하느라 자세가 흐트러질 것이니 내가 파고들 틈이 생긴다.
“간단합니다. 이 시위를 잡아당겨서 도르래너트에 걸어줍니다. 그 다음 도르래를 이용해 활시위를 한계까지 잡아당깁니다. 그 다음 이 홈에, 이 홈을 그루브라 부릅니다. 그루브에 볼트를 올려줍니다. 당겨진 시위에 걸리도록 말이죠. 그 다음 적을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기면 되는 겁니다.”
활이나 석궁은 활시위를 당길 때 생기는 장력을 볼트나 화살에 전달해 날리는 무기다. 당연히 장력이 강력할수록 볼트나 화살의 위력도 강력해진다. 석궁은 이 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사람의 힘이 아닌 도르래를 이용해 활시위를 당겨 기계장치에 고정한다. 이때 생기는 장력은 사람의 힘으로 당기는 활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 상대가 통짜 쇠로 만들어진 갑옷을 입고 있어도 10~20mm 안쪽이라면 종잇장 뚫듯 뚫어버린다.
“웃샤.”
나는 왼손으로 석궁을 잡고 오른손으로 시위를 당겨 도르래너트에 걸었다. 이거 제법 뻑뻑한 걸. 꽤 힘을 줘서 겨우 걸었다.
“대단하시군요.”
“응? 뭐가?”
“보통 어른들도 너트에 활시위를 걸기 위해 석궁 몸체를 무릎사이에 끼우고 양손으로 당겨서 겁니다. 어느 정도 적응이 된 숙련사수들이나 한 손으로 활시위를 너트에 걸 수 있죠.”
“아. 그래?”
뭐. 내가 힘이 좀 세긴 세지. 1년간 수련하는 족족 그대로 쌓여서 내 힘이 되어버리니 약할 수가 없지. 넘버127이 운용하는 시스템 ‘대항해시대’는 내 수련효율을 올려주면서 육체의 한계까지 같이 올려버리니까 말이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내 수련효율은 다른 사람들의 4~5배 이상은 될 거다. 한계도 비슷하겠지. 물론 지금 내 나이 또래 애들의 4~5배인 거다. 어른의 4~5배면 이미 인간이 아니지.
지난 1년간 매일 16시간 가까이를 고문에 가까운 수련에 매진했다. 처음 시작할 때의 무재는 1단계였으니 평균적으로 2~3배 정도의 효율로 수련했다고 치면 다른 녀석들로 쳤을 때 3년 정도 지옥훈련을 행한 것이다. 물론 다른 녀석들이라면 육체의 한계가 있으니 3년을 수련했다고 해도 처음 1년 수련한 정도의 효과만 몸에 쌓였을 것이다. 그 뒤에는 강해진다 하더라도 아주 조금만 더 강해졌겠지. 하지만 난 유물에 의해 보정을 받는 몸. 평범한 녀석들과는 다르다.
아직 사부보다 약하긴 하지만 힘만이라면 앞으로 1년 안에 따라잡을 자신이 있다. 수십 년을 수련해온 사부의 힘을 따라잡는다니. 정말 내 유물 최고다. 물론 내 유물은 수련효율과 한계만 늘려줄 뿐 특수능력이 없고 사부의 유물은 다른 특수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선 사부의 몇 배에 달하는 신체를 가져야 하겠지만 말이다.
매일 사부에게 얻어터지고 있으니 어떻게 해야 사부를 이길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한다. 사부의 유물은 감각계열이다. 내 공격이 어떻게 행해질지 보지 않고도 알아낸다. 어쩔 때는 미래를 보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런 상대를 어떻게 이겨야 할까.
넘버127이라는 유물을 가지고 있는 내가 내놓은 답안은 알고도 못 막는 공격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디로 공격이 올지 아는데도 막을 수 없을 정도의 스피드, 막아도 데미지를 입을 정도의 파워. 그걸 갖추는 것이다.
물론 먼 미래의 일이다. 지금은 당연히 얻어맞는 것 외엔 답이 없다. 대충 5~6년은 더 수련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넘버127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그 미래는 무조건 온다. 한계가 정해져 있고 절대 불가능한 보통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말이다. 정말 유물하나는 잘 줏...아니 잘 얻은 것 같다.
“고맙다. 넘버127.”
-갑자기 의미불명의 감사표시를 하시는군요.
“날 선택해줘서 말이야.”
-제 사용자가 되기에 적합했기 때문에 선택한 것일 뿐 감사를 받을 일은 아닙니다.
“아. 그러고 보니 계속 궁금했어. 왜 날 선택한 거야?”
-그건...
“아. 젠장! 대장은 뭐하러 그 새끼들을 마중 나가라고 하는 거야? 알아서 잘 오겠지.”
토마스에게 배운 대로 석궁을 장전하고 풀고 하는 것을 반복하며 넘버127과 대화하고 있는데 갑자기 저 멀리서 누군가의 불평 섞인 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토마스는 시간이 정지하기라도 한 것처럼 움직임을 멈추고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감각을 집중했다.
“그러게 말이다. 시간 되면 알아서 돌아올 놈들을 왜 마중 나가야 하는 거야.”
“중늙은이 하나에 꼬마, 노예밖에 없는 놈들 잡으러 갔는데 말이야. 대장도 걱정이 참 많아졌어.”
“이게 다 슈탈 놈들 때문이지. 돌아오다가 혹시 그놈들한테 당할지도 모르니까. 뒤를 봐주라고 우리를 보내는 거잖냐. 빌어먹을 슈탈 놈들. 그놈들만 아니었어도 벌써 유물 얻고 전선으로 돌아갔을 텐데.”
목소리가 점점 선명해진다.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토마스를 보며 ‘어떡하지?’하고 입모양으로 물었다. 토마스는 석궁을 가리키고는 활시위를 당겨 장전하기 시작했다. 나도 토마스를 따라 석궁의 활시위를 당겼다.
끼긱. 끼긱.
도르래를 돌릴 때마다 작은 소음이 일었다. 아주 작아서 멀리 있는 불청객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지만 긴장한 상태의 나에게는 천둥소리나 다름없었다.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도르래를 돌려 겨우 장전을 완료했다.
“그만 좀 떠들어라. 니들이 그렇게 떠들면 그냥 대로로 가지 뭐 하러 길도 없는 산등성이로 이동하냐.”
“아. 우리 진지가 바로 앞에 있는데 이 근처에 적이 있겠냐. 걱정마. 저 바위만 지나면 알아서 입 다물 테니까.”
떠들던 2명 외에 그들을 나무라는 새로운 목소리까지. 총 세 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길게 자란 풀과 나뭇가지를 헤치는 소리도 들려왔다. 목소리로는 세 명이지만 더 있을지도 모른다. 풀을 헤치며 다가오는 소리로 사람 수를 확인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내가 그 정도로 경험이 많지는 않다. 나는 토마스를 보며 입모양으로 ‘3명? 4명?’이라고 물었다. 토마스는 고개를 흔들며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입을 뻐끔거렸다. 토마스도 몇 명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 모양이다.
어떡하지. 사부가 없으니 내가 책임자다. 내가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이런 상황을 처음 맞닥뜨리다보니 판단이 서지 않는다. 일단 저 녀석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우리를 공격했던 녀석들을 마중 나가는 것 같다. 그렇다는 건 저들도 ‘요앵 용병단’ 소속이라는 것. 우리의 적이라는 뜻이다.
저자들의 이동방향에 우리가 숨어 있는 바위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대화에도 바위라는 말을 했고 저들의 목소리와 풀을 헤치는 소리도 전부 이쪽을 향해 있다. 저들은 우리의 적이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으며 곧 우리와 마주칠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먼저 공격한다.’
소리 없이 입모양으로 토마스에게 의사를 전달했다. 토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 없이 토마스와 나 단 둘이 전투의 프로인 용병들에게 싸움을 건다는 사실이 약간 긴장되기는 한다. 하지만 토마스가 있으니까 뭐.... 나도 아까 상대했던 남자정도의 실력이라면 한두 명 정도는 상대할 자신이 있다.
토마스와 나는 장전한 석궁을 들고 바위에 바짝 붙어서 적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우선 석궁으로 두 명을 무력화 시킬 생각이다. 그 다음 남은 적들을 상대로 싸운다. 대충 나 한명 토마스 두 명 정도는 가뿐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아냐. 나 두 명, 토마스 세 명하자. 그러니까 총 7명까지는 문제없이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8명만 아니면 돼. 그러면 무조건 이겨.
“이제부터는 정말 조용히 해라.”
“아. 알았어. 알았다고. 잔소리 많네.”
목소리가 근처에서 들려왔다. 적이 거의 근접했다. 바로 앞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적이 어디에 서 있는 지까지도 느껴질 정도로 바로 앞이었다. 드디어 적이 바위를 지나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바로 공격하지는 않았다. 아직 보이는 적은 한명이다. 나와 토마스가 각각 공격할 수 있도록 최소 둘이 모습을 드러내야 했다. 다행이도 모습을 드러낸 남자가 바위 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고 있기 때문에 바위에 바짝 달라붙은 우리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자. 이제 입 다문다. 그러면 되냐?”
앞서던 남자가 멈추고 몸을 돌려 뒤를 보면서 말을 했다. 그리고 다시 앞으로 몸을 돌린다. 젠장. 방금 전에는 바깥쪽으로 돌아놓고 이번엔 바위 쪽이 보이도록 몸을 돌렸다. 그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어?”
그가 의문 섞인 소리를 내고 나는 그대로 그를 향해 조준해놓았던 석궁을 발사했다.
퉁!
용병들이 가장 선호하는 방어구는 지금 내가 입고 있는 것과 같은 하프아머다. 적당한 무게에 중요한 상반신을 보호해주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석궁을 발사한 남자도 하프아머를 입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하프아머가 보호해주는 가슴을 노리고 석궁을 발사했다. 처음 사용하는 석궁이기에 머리와 같은 급소는 아무리 가까워도 맞출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빗나가면 큰일 난다. 당연히 근접해서 발사한 볼트는 넓직한 가슴을 향해 정확히 날아갔다.
석궁에서 발사된 볼트는 명성 그대로의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고 쇠로 만들어진 하프아머를 종잇장처럼 뚫어버리고 가슴에 박혀 들어갔다.
“커허....”
볼트를 가슴 한가운데에 맞은 남자는 누가 세게 밀기라도 한 것처럼 튕기듯 땅을 향해 내리 꽂혔다.
“뭐... 뭐야!”
뒤에 따라오던 자들이 당황해서 소리쳤다. 토마스가 빠르게 달려나가 아직 바위 앞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적들 가운데 하나에게 볼트를 발사했다.
“카학!”
명중한 모양이다. 나도 토마스처럼 몸을 숨겼던 바위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적들이 있어야 할 곳을 바라보았다. 토마스가 발사한 볼트를 맞은 듯 땅에 쓰러져 있는 남자 하나에 당황한 채로 무기를 뽑아들고 있는 남자 하나. 그것이 끝이었다. 적은 총 세 명이었던 것이다.
토마스가 버클러와 쇼트소드를 들고 상대를 향해 달려갔다. 나는 중견용병이었던 요한을 순식간에 이겼던 것처럼 저 남자도 토마스가 금세 이길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롱소드를 들고 있는 남자는 토마스의 공격에 꽤 버티고 있었다. 위태위태했지만 10번 가량 공방을 주고받아도 승부가 나지 않았다.
제법 강하다. 역시 전투로 밥 벌어먹고 사는 자들인 건가. 물론 이 싸움이 길어지는 것은 토마스가 방어를 하다가 카운터를 치는 방식을 선호하기 때문인 것도 있다. 당황한 남자가 방어에만 집중하고 공격을 하지 않아 카운터를 할 수 없기에 싸움이 길어지는 것이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토마스가 이기겠지만 칼이 부딪히는 소리는 의외로 크다. 더 이상 시간을 끌다가 혹시나 다른 사람들에게 소리가 들리면 안 된다.
난 원을 그리듯 돌아서 남자의 뒤로 다가섰다. 그리고 공격을 위해 접근했다. 그러자 남자가 나를 의식하며 뒤를 돌아봤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겨우겨우 토마스의 공격을 막고 있던 남자다. 그런 상태에서 뒤를 의식하기까지 해버렸으니 더 이상 토마스의 공격을 막을 수는 없었다.
토마스의 쇼트소드가 남자의 허벅지를 찔렀고 균형을 잃고 쓰러진 남자의 머리에 버클러가 꽂히면서 전투는 끝났다.
토마스가 볼트에 맞은 적들을 마무리했다. 볼트에 맞고 무력화되긴 했지만 아직 숨이 끊어지진 않은 상태였다. 우선 한명을 죽인 토마스가 다른 한명을 가리키며 ‘직접 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토마스가 하기 귀찮아서 그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앞으로를 위해서 내가 익숙해지도록 배려하는 것이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쇼트소드를 꺼내 숨을 헐떡이고 있는 남자 앞에 섰다. 그리고 목 깊숙이 검을 찔러 넣었다. 처음엔 별 느낌 없었던 살인인데 아까 죽였던 두 번째나 지금의 이 세 번째는 왠지 마음이 무거워지는 느낌이다.
-전투를 통해 무재 포인트 27을 얻었습니다.
============================ 작품 후기 ============================
저도 도량형을 당시 사용하던 것을 할까도 생각해봤지만 우선 저부터가 이게 얼마만큼을 가리키는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더군요. 그래서 그냥 cm나 kg을 사용하기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