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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이제 슬슬 문재나 상재도 올려야 할 텐데 말이야. 무재 12, 문재 1, 상재 1. 정말 기형적인 재능 단계다. 예전에 이쯤 되면 무재도 꽤 오른 것 같아서 언제쯤이면 브론즈 등급에서 벗어나 실버로 올라갈까 물어본 적이 있다. 그때 처음 알았다. 등급을 올리기 위해서는 한 가지 재능만 올리면 안 되고 다른 재능도 함께 올려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실버 등급이 되기 위한 조건이 무재 10, 문재 10, 상재 10이었다.
나쁜 넘버127. 주인이 이상한 짓을 하고 있으면 조언을 해줘야지. 물어볼 때까지 가만있다니. 내가 얻은 직업도 ‘경호원’하나 뿐이었다. 브론즈 등급으로 오를 때 들은 이야기론 브론즈에서 얻을 수 있는 직업이 총 5개라고 하는데 아마 다른 직업은 문재나 상재를 올려주어야 생기는 모양이었다. 전투용 직업이라고 나온 경호원도 딱히 지금의 내게는 필요 없는 특수능력을 가지고 있고 말이다. ‘무언가를 지킬 때 방어력 5% 상승.’ 지금의 내게는 정말 쓸모없는 능력이다. 그래서 그냥 직업을 바꾸지 않고 수습상인을 그대로 달고 있었다.
앞으론 문재와 상재도 신경 써야겠어. 무술만 익힐 거라면 무재만 올려도 되겠지만 등급의 상승으로 얻는 혜택과 아직 얻지 못한 직업들의 특수능력이 탐난다. 사실 경호원의 특수능력도 지금의 나에게 필요 없는 특수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나중에도 필요 없을 것은 아니다. 언젠가는 나도 직접 상단을 이끌다가 도적을 만나가 될 터. 그때 제법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다른 직업들도 마찬가지다. 살면서 닥칠 갖가지 상황에 맞는 여러 가지 특수능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것들을 얻기 위해 문재와 상재를 올려야 한다.
가이드 미션에 의하면 분명 문재는 도시 발견이었고 상재는 일정 금액 이상의 거래를 하는 거였다. 하지만 내가 사냥이 아닌 수련을 해서 무재 포인트를 얻은 것처럼 문재나 상재 포인트를 얻는 방법도 그것들만 있을 리는 없다.
문재는..... 문재니까 공부가 관련 있을 것 같다. 책 한권 구해서 읽어봐야겠다. 아니면 가정교사를 구해서 수업을 받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내가 사부에게 수련을 받는 것과 똑같은 방법이니 분명 포인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돈이 거의 없으니까. 가정교사를 고용하는 것은 힘들지. 역시 읽을 책을 하나 구해야겠어.
상재는 음....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다. 역시 거래밖에 없는 건가.
“도련님!”
“음? 아. 토마스! 왔다는 말은 들었어! 잘 갔다 왔어?”
“네. 도련님께서 걱정해주신 덕분에 안전하게 다녀왔습니다. 편지는 받으셨습니까?”
역시 자신이 맡은 일은 끝까지 책임지는 토마스. 애니가 가져갔으니 더 이상 자신의 책임이 아닌데도 끝까지 확인한다. 믿음직한 녀석.
“받았지. 무슨 내용인지는 알아?”
“네. 대충은요. 도련님의 생일에는 본가에 와서 지내라는 말씀이 적혀있지 않았습니까.”
“응. 그렇지.”
“어떻게 하실 예정입니까. 마님께서 수련이 급하다면 꼭 올 필요는 없다는 말도 하셨습니다.”
“아니. 뭐. 수련은 평생 동안 해야 하는 건데 지금 급하고 안 급하고가 어디 있어.”
옆에서 사부가 듣고 있으니 사부가 좋아할 만한 말 한마디 정도는 해주자. 역시나 평생 수련해야 한다는 대목에서 흐뭇해하는 사부. 내가 원래 이런 녀석이 아니었는데 1년 동안 워낙 많은 고문과 학대를 받았더니 사부의 눈치를 보는 데는 도사가 되어버렸다.
“오늘과 내일은 준비하고 3일 뒤에 출발하기로 결정했어. 그리고 스승님도 함께 가실 거다.”
“아. 그렇군요. 혹시 가는 중간에 다른 일정이나 계획이 있으십니까?”
“음... 스승님께서 조합에서 적당한 의뢰를 하나 받아가겠다고 하셨는데 난 잘 모르겠어.”
“그러면 여행이 생각보다 길어질지도 모르니 그렇게 알고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응. 부탁해.”
여행준비라고 해봐야 다 아랫사람이 하는 거다. 나나 사부는 전혀 준비할 것이 없다. 아까 사부가 준비해야겠다고 이야기한 것도 자신이 직접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애니가 들으라고 한 이야기다. 이제 애니가 하인들에게 가서 사부님이 여행할 준비를 하라고 시킬 것이다.
***
1573년 5월 8일 화요일
여행준비를 하는 날이지만 그것은 토마스나 다른 하인들이 착실히 하고 있을 것이고 사부와 나는 상회를 나섰다. 조합에 가서 적당히 할 만한 의뢰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조합은 ‘뭔가를 하기 위해 사람이 필요한 고용주’와 ‘일이 필요한 고용인’을 연결해주는 곳이라고 보면 된다. 보통은 인맥을 통해 아는 사람을 고용하거나 소개를 통해 직접 고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런 인맥이 없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곳이 조합이다.
조합에 들어오는 일의 종류는 집에서 일할 고용인을 찾는 것부터 상단을 호위할 용병을 구하는 일과 필요한 물건을 구해달라는 일 등 굉장히 다양하다. 그냥 거의 모든 종류의 의뢰가 들어오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흠... 이곳도 참 오랜만이군.”
사부가 꽤 낡은 건물 앞에 섰다. 이곳이 바로 조합이다. 사부가 앞장서서 안으로 들어갔고 내가 뒤따라 들어갔다. 건물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부랑자처럼 보이는 사람과 농사꾼처럼 보이는 사람, 무기를 차고 있는 용병과 배가 두툼하게 튀어나온 상인처럼 보이는 사람 등. 도시에 있을만한 사람들의 종류가 하나씩은 전부 모여 있는 것처럼 다양했다.
“내가 할 적당한 일이 있나?”
사부가 사무원에게 다가가 물었다. 사무원은 잠시 사부를 바라보다가 ‘아. 루이웨씨!’하며 알아보았다.
“오랜만에 오셨군요.”
“이제 상행은 다니지 않아서 여기에 올 일이 없었지.”
사부는 이전에는 꽤 조합에 다닌 모양이다.
“어디로 가십니까?”
“에흐몬트 쪽으로 갈 생각이니까. 그쪽으로 가는 의뢰 있으면 좀 주게. 간단한 거라도 상관없어.”
“에흐몬트입니까? 아. 잠시만요. 조합장님께 좀 다녀오겠습니다. 북쪽으로 가는 실력 있는 분이 오시면 연락하라고 하셨거든요.”
“호. 뭔가 중요한 일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금방 갔다 오겠습니다.”
“그러게.”
사무원이 안으로 들어가자 사부가 입을 열어 지금 상황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보통 평범한 일이라면 대부분 사무원을 통해 진행된다. 하지만 의뢰비가 높거나 의뢰인의 신분이 높거나 비밀스럽게 해야 하는 일이라면 이렇게 조합장을 통해 의뢰를 받게 되지.”
“사부님처럼 신용이 높고 실력 있는 분을 골라서 의뢰를 주는 거군요.”
흐으... 이젠 아부가 입에 붙었다.
“뭐. 그렇지.”
아무렇지도 않게 긍정하는 사부. 표정을 보니 당연하다는 표정이다. 난 아부라고 한 건데 사부는 진심이구나.
잠시 뒤 사무원이 사부와 날 조합장의 사무실로 안내했다.
“어서오게. 오랜만이야. 루이웨.”
“그러게. 오랜만이군. 조합장.”
“왜 이렇게 안 온 거야. 자네가 없으니까 고난이도 의뢰를 마음 놓고 맡길 사람이 없어.”
“허. 금칠은.”
조합장은 사부보다도 10살은 더 나이 들어 보였는데 사부와 친구처럼 대화를 하는 것을 보니 노안인가 보다.
“그래. 왜 불렀나. 큰 건이라도 있는 건가?”
“흠....”
조합장이 대답은 안하고 날 지긋이 바라본다. 뭘 보세요. 할아버지.
“내 제자야. 괜찮으니까. 말해 보게.”
“양손에 차고 있는 버니팅을 보고 예상하긴 했는데 너무 어려서 긴가민가했어. 정말 제자구만. 그래. 알겠네. 루이웨의 제자라면야.”
조합장은 소파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가더니 서랍에서 봉인된 편지봉투 하나를 꺼냈다.
“받게.”
“이 봉인은.....”
“그래. 빌럼공의 봉인이네.”
빌럼공! 난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네덜란드의 살아있는 침묵공 빌럼의 봉인된 편지라니. 간단한 의뢰를 받으러 왔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빌럼 공의 봉인이 나타났다는 사실에 놀랐다.
“에흐몬트의 영주에게 보내는 편지지.”
“에흐몬트의 영주라면 그 어린.”
“라모랄의 아들 발터.”
발터. 나와 같은 날 태어나 에흐몬트인의 축복을 함께 나눠받은 자다. 6년 전 11월. 침략자 알바의 계략에 빠져 죽은 인민의 영웅 라모랄의 아들로서 현 에흐몬트의 정당한 계승자다.
“뭐. 수신인은 에흐몬트의 영주로 되어있지만 사실은 헤르트와 쿤라트에게 보내는 것일 테지.”
“그렇군.”
쿤라트와 헤르트. 라모랄의 가신으로서 아직 어린 발터를 대신해 에흐몬트를 다스리고 있는 자들이다. 쿤라트는 에흐몬트 제 1기사로서 군을 담당하고 헤르트는 에흐몬트의 내정과 외교 등을 책임지고 있다.
“위험한 건가?”
사부의 표정이 굳어져 있다. 아무리 강한 사부라고 해도 의뢰인의 신분이 범상치 않다보니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냐. 이건 혹시 몰라서 보내는 예비루트야. 이것 외에도 3가지 루트로 편지를 보냈으니 별로 위험은 없을 거야.”
“그런가?”
“그리고 의뢰인이 빌럼 공이네. 의뢰비가 꽤 괜찮아. 10만오션.”
10만오션. 내가 사부에게 선물했던 벨벳이 저 정도 가격이었는데. 꽤 괜찮은 가격인 것 같았다.
“겨우 편지배달하는 것 치고는 의뢰비가 세군.”
“꽤 중요한 내용인 것 같아. 자네도 알다시피 빌럼 공은 지금 프랑크에 있잖나. 그런데 내 정보망에 의하면 에흐몬트뿐만 아니라 대영주들 전부에게 편지를 보냈단 말이지.”
“.... 뭔가 큰 일이 일어나겠군.”
“그래. 아주 큰 일이 일어날 거야.”
“알겠네. 내가 맡도록 하지.”
“고맙네. 이것으로 한숨 덜었군.”
편지를 받아든 사부는 바로 조합을 나섰다. 오랜만에 만났다고 하더니 따로 시간을 내서 차도 마시지 않는 것을 보니 별로 친한 사이는 아닌가 보다. 대화는 엄청 친한 것처럼 하더니 말이야.
“사부님.”
난 사부를 불렀다. 사부가 왜 부르냐는 듯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아까 뭔가 큰 일이 일어난다고 하셨는데 혹시 짐작 가시는 게 있나요?”
“있지.”
“뭔가요?”
“간단하다. 알바에 의해 축출되어 도망치듯 국외로 나간 빌럼 공. 그리고 알바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대영주들. 이 두 세력이 소식을 주고받는다면 이유는 단 한가지다.”
“에스파냐와의 전쟁에 관한 것이겠군요.”
빌럼 공이나 대영주들이나 지금 공통으로 하고 있는 일이 에스파냐와의 전쟁이다. 그들이 중요한 편지를 주고받는다면 그 주제는 에스파냐와의 전쟁이 될 수밖에 없다.
“맞다. 에스파냐와의 전쟁이지. 더 정확하게는 빌럼 공의 네덜란드 복귀.”
“아.”
“빌럼 공은 6년 전 인민의 영웅 라모랄 백작과 호르네 백작이 숙청당할 때 국외로 추방당했지. 하지만 그의 기반은 네덜란드다. 그가 국외로 추방당하고도 가만 있을 리 없지. 그동안 네덜란드로 돌아오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대대적으로 연락하는 것은...”
“돌아올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것이군요.”
“그럴 가능성이 높지. 하지만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지 너무 확정적으로 생각하지 말거라. 상인은 불확실한 정보를 맹신하는 순간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항상 자신의 생각이 틀릴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한다.”
“네.”
사부는 상회로 돌아가 애니와 그녀의 남편 야콥을 불렀다. 야콥 판 베스트로프. 애니의 남편으로서 상회를 물려받을 데릴사위이지만 보어 가의 성은 물려받지 않았다. 사부가 야콥이 너무 허약하다며 성을 바꿀 필요가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사부는 애니와 야콥에게 사정을 설명하며 당분간 상단의 활동을 금지했다. 사부의 곡물 상회 같은 중소규모의 상회는 작은 사건에도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 하물며 빌럼과 대영주들이 연관되는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지금 상행을 나가고 하는 일은 너무 큰 모험이다.
“알겠습니다. 장인어른. 그럼 저희가 직접 하는 상행은 멈추고 중계 업무만 지속하겠습니다.”
“그러거라.”
중계업무는 상회를 찾아오는 소규모 상인들을 상대로 도시 안에서만 하는 일이니 딱히 위험할 것은 없다.
우리에게 이런 정보가 들어왔을 정도니 다른 규모가 있는 상단들은 대부분 이 정보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루이웨 상회처럼 몸을 사리지 않고 오히려 공격적으로 전쟁 물자를 구입하고 대영주와 영주들에게 선을 대고 있을 것이다. 나도 나중에 이런 큰 사건을 이용해서 돈을 벌 수 있는 대상인이 될 거다.
일을 마친 사부는 날 이끌고 수련장으로 갔다. 젠장. 오늘은 혹시나 수련 안하나 싶었는데. 역시 수련귀신인 사부가 수련을 쉴 리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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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3년 5월 9일 수요일
나와 사부, 그리고 토마스로 이루어진 일행은 에흐몬트를 향해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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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1일1연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