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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크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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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첫 여행의 첫 목적지인 알크마르는 조용했다. 상상했던 그 모습이 아니었다.
“조용하네? 난 토마스가 주변의 농장과 목장의 물건들이 전부 모이는 상업중심지라고 해서 떠들썩할 줄 알았는데.”
에흐몬트에서 알크마르까지가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거친 길에 달구지를 끌고 왔기에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알크마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넘어가기 시작했을 때였다. 해가 넘어간 것도 넘어가지 않은 것도 아닌 상태의 앞이 잘 보이는 것도 안 보이는 것도 아닌 상태. 아. 그걸 뭐라고 해야 하지. 잘 표현을 못하겠다. 여하튼 어둡다. 거기에 사람까지 보이지 않으니 스산해 보이기까지 했다.
“지금은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입니다. 대부분이 집에서 쉬거나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있을 테니 당연히 사람이 없지요. 내일 아침에는 도련님께서 원하던 그 장면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그대로 거리를 가로질러 여행자 거리로 향했다. 역시나 교역이 발달한 도시라 그런지 여관이 2개나 있었다. 에흐몬트에는 하나도 없었는데 말이다. 빛 한 점 새어나오지 않는 다른 집들과는 달리 여관은 창문사이로 희미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여관의 아이에게 노새를 맡기고 달구지를 천으로 덮어 꼼꼼하게 싸맨 후 여관으로 들어갔다.
여관의 1층은 간단한 술을 파는 카운터와 홀이 있었는데 홀이 넓지는 않아 4개의 테이블이 있었다. 4개의 테이블 중 2개의 테이블에 사람이 있었는데 각각 3명, 4명이었다. 그들은 간단한 음식과 술을 마시며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일행 중 요한이 앞장서서 카운터로 가 방과 음식을 주문했다. 노예인 토마스나 어린 내가 주문을 하기는 어려운 일이니 말이다.
방은 2층에 있었다.
방 2개를 빌려 요한이 따로 독방을 쓰고 나와 토마스가 2층침대 있는 작은 방을 썼다. 방의 3분의 2를 침대가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작은 방. 이야기를 들어보니 요한의 방도 똑같은 구조였다.
“2층 내꺼!”
말만 들었지 태어나서 처음 본 2층침대다. 나는 바로 달려가서 침대에 물건을 던지며 선점했다. 별것 없는 여행이었지만 집을 떠나 보는 모든 것이 처음 보는 것들이니 묘하게 들떠 있었던 것 같다.
침대를 찜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하루 종일 날 갑갑하게 만들었던 가죽갑옷을 벗는 일이었다. 그때는 가죽갑옷이 얼마나 답답했는지... 누가 날 밧줄로 묶어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혹시나 토마스의 제지가 있을까봐 잽싸게 벗은 거였지만 토마스는 가죽갑옷에 대해서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내가 2층침대에 던져놓은 스틸레토에 손을 뻗었다.
“이건 품안에 집어넣으세요.”
“왜? 여기는 안전한 곳 아냐?”
“집밖으로 나오면 안전한 곳은 없습니다.”
그러곤 스틸레토를 들어 내 품속으로 보이지 않게 집어넣어 준다. 귀찮았지만 토마스가 하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스틸레토정도는 들고 다녀도 그다지 귀찮지 않으니까. 나는 갑옷을 벗었지만 토마스는 벗지 않았다.
토마스는 하프아머를 입고 있었다. 몸의 상반신을 가려주는 금속 갑옷이다. 팔부분이 없는 약식갑옷이기는 하지만 금속인 만큼 무겁다. 사실 가죽갑옷을 입는 이는 거의 없다. 만드는 것이 귀찮은 데도 방어력이 금속갑옷에 비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싸다는 장점도 있지만 사실 가죽갑옷만 해도 평민이 사기엔 비싼 가격이다. 평민은 대부분 천으로 만든 클로스 아머를 입으니 말이다. 방어력도 어중간하고 가격도 어중간한 가죽갑옷. 당연히 입는 사람이 거의 없다. 요즘은 힘이 별로 없는 노인이나 아이를 보호할 때나 맞춰서 입히는 정도의 갑옷이 되었다.
문 앞에서 요한을 기다렸다가 함께 1층 홀로 내려갔다. 요한도 그의 갑옷과 무기를 그대로 가진 채 밖으로 나왔다. 1층으로 내려가 잠시 기다리니 음식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주변 농장, 목장의 물건이 전부 몰리는 상업중심지라고 했는데 정확히 뭘 파는 거야?”
나름 상인집안이라고 교역물품에 대해 약간의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상업에 대해 교육을 받지 못했고 1~2년 후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수업을 받을 예정이었기에 당시의 나는 바로 옆 지역인 알크마르의 특산품에 대해서도 알지 못할 정도로 상업에 대해선 백지상태였다.
“에흐몬트에서 우리가 거래하던 물품이 무엇이죠?”
“청어랑... 옷감?”
그나마 에흐몬트는 살던 곳이니 무엇이 특산품인지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대량의 삭힌 청어와 약간의 옷감이다. 에흐몬트는 어촌마을인 만큼 청어는 썩어날 정도로 생산된다. 그리고 각 가정의 아낙네들이 틈틈이 짜는 약간의 직물. 우리 집은 그것들을 사들여서 타지로 가지고 나갔었다.
“어촌마을인 에흐몬트이니 당연히 청어가 특산물이죠. 그리고 귀족과 상인들이 많이 있는 도시가 아닌 이상 어느 곳이나 약간이나마 옷감을 만들어 팝니다. 그 종류의 차이는 있겠지만요. 알크마르는 상업중심지이기는 하지만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농장주들이 모여 있는 도시이지 직물을 소비할만한 귀족이나 상인의 수는 적습니다. 그러다보니 각 가정에서 틈틈이 만드는 옷감이 남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기도 직물이 특산품의 하나로 들어가겠네.”
“맞습니다. 우리 에흐몬트처럼 양이 적지만 말이죠. 그리고 제가 낮에 이곳이 주변 농장과 목장의 상품이 모이는 곳이라고 말씀 드렸죠?”
“응.”
“보통 우리 네덜란드의 목장이라하면 무엇을 기릅니까.”
“아마도.... 양이나 소...겠지?”
내 대답에 확신이 없었다. 당시의 나는 태어나 에흐몬트를 벗어난 적이 없었고 글을 읽을 수 있게 된지 얼마 안 된 나이였기에 읽은 책도 거의 없었다. 그래도 에흐몬트에서 약간의 양과 소를 본 적이 있기에 찍었다.
“소입니다. 정확히는 젖소죠. 닭과 오리를 기르는 곳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소규모에 시장에 나와도 알크마르에서 전부 소비하는 정도입니다. 농사를 짓기도 하지만 곡물은 언제나 부족한 곳이 네덜란드입니다. 생산되는 곡물의 대부분이 알크마르에서 자체 소비되니 곡물은 특산품이 될 수가 없죠. 즉, 알크마르의 특산품은 아까 말한 약간의 직물에 젖소를 이용한 무언가가 됩니다.”
거기까지 말한 토마스가 지긋이 나를 바라본다. 그 뒤의 대답은 내가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젖소. 토마스는 젖소라는 것을 강조해서 말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유?”
젖소하면 우유다. 우유가 아니라면 젖소를 키울 이유가 없지 않나. 그냥 다른 소를 키우고 말지.
“우유도 맞습니다. 지금 도련님께서 드시고 계신 그 우유가 바로 그것이죠.”
음료수로 술을 택한 요한, 물을 택한 토마스와 달리 나는 우유를 마시고 있었다.
“하지만 틀렸습니다. 우유는 특산품이 되기에는 큰 단점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에흐몬트의 청어와 같은 단점이 말이죠.”
“청어라면.... 금방 상한다는 거구나.”
“맞습니다.”
토마스의 저 ‘맞습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약간의 뿌듯함이 느껴진다.
“우리는 청어를 삭히거나 소금에 절여 팔고 있으니까.... 우유도 삭히거나 소금을 치나? 우유를 삭히고 소금을 뿌린다? 그러면..... 치즈?”
“맞습니다.”
같은 ‘맞습니다.’지만 아까와는 달리 미소가 함께 하고 있었다. 내가 느끼는 뿌듯함은 두 배가 되었다. 당시의 나는 ‘역시 나는 특별해. 역시 에흐몬트인들의 축복을 단 둘이 받은 사람 중 하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추가로 약간의 고기도 있습니다. 젖소는 암컷만 있으면 되니까요. 수컷은 고기로 만들어 팔지요. 하지만 고기 역시 금방 상한다는 단점이 있으니 보통은 살아 있는 상태로 운송하게 됩니다. 도축은 팔린 지역에서 자체적으로 하게 되죠”
소고기 역시 내가 먹고 있었다.
“나 지금 알크마르 특산품 세트를 먹고 있었구나. 치즈도 먹어야 하는데. 토마스. 치즈도 추가로 주문해.”
“네. 알겠습니다.”
토마스가 바로 카운터로 가 치즈를 주문하고 왔다.
“내일 아침이 되면 치즈랑 소고기를 팔고 사는 광경을 볼 수 있는 거야?”
“상업중심지인 알크마르라고는 하지만 매일 시장이 열리지는 않습니다. 매일 시장이 열리면 주변 농가의 사람들이 매일 시장에 와서 물건을 파느라 일을 못하겠지요. 시장은 일주일에 한번만 열립니다.”
“에. 그럼 나 시장 못 봐? 우리 내일 출발할 거잖아.”
여행 출발 전 들은 여행일정에서 알크마르에 도착한 후 다음 날 출발한다고 들은 것이 기억났다. 시장을 못 본다는 실망감에 얼굴을 찡그렸다.
토마스는 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일이 바로 그 일주일에 한번 시장이 열리는 날입니다. 알크마르의 명물 금요일 치즈시장이.”
내 생일 바로 다음 날 급하게 출발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나에게 알크마르의 치즈시장을 보여주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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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 침대 1층에 있는 토마스가 일어나 움직이는 소리다. 아무리 토마스라 할지라도 잘 때는 갑옷을 벗어놨었으니 일어나서 다시 입는 소리 일 것이다.
“몇 시야?”
눈을 감은 채 잠에 잔뜩 취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 일어날 시간이 아니면 더 자고 싶었다. 딸칵. 회중시계의 뚜껑을 여는 소리가 들린다.
“6시입니다.”
토마스가 시간을 알려준다. 회중시계는 토마스의 보물 1호다. 헨라인이라는 걸출한 독일인 시계장인에 의해 약 50년 전에 처음 만들어진 회중시계는 성당이나 시청에 달려 있는 거대한 시계가 없더라도 시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아주 고마운 도구다. 이틀에 한 번씩 태엽만 감아준다면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는 편리한 도구인데 어떻게 그 큰 시계를 저 작은 것에 담을 수 있었는지 볼 때마다 놀라게 하는 도구다.
최신 기술의 집약체라고 할 수 있는 회중시계는 당연히 비싸다. 노예인 토마스는 절대 살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이 회중시계는 원래는 아버지의 것이었다. 아버지도 직접 산 것은 아니고 누군가에게서 선물을 받은 것이었는데 토마스에게 넘겨주었다. 그 이후로 토마스는 품에서 회중시계를 떨어뜨려 놓은 적이 없다. 목욕을 할 때조차도.
“약간 늦잠을 주무셨군요. 어제의 여행이 고단하셨나 봅니다.”
평소에 보통 5시 정도에 일어나니 늦긴 늦었다.
“치즈시장은 10시는 되어야 제대로 열리니 아직 더 주무셔도 됩니다.”
음... 더 잘까? 첫 여행에 첫 장거리 이동이다 보니 꽤 피곤했었나보다. 평소보다 1시간이나 늦게 일어났는데도 피곤함이 완전히 가시지 않아있을 정도로. 그래도 고민은 잠시였다. 아버지는 항상 ‘에흐몬트 사나이는 부지런하지!’라고 말씀하셨다.
“아냐. 일어날래.”
눈을 떴다. 눈을 떴지만 보이는 것은 없다. 창문을 닫아놓아 방이 어두웠다. 내가 아직 자고 있으니 토마스도 창문을 열지 않았던 것이다. 기특한 것. 어두워서 옷 입기 힘들었을 텐데. 나무 창틀 사이로 약간의 빛이 흘러들어오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럼. 창문을 열겠습니다.”
토마스가 창문을 열어젖히자 어두운 방안으로 은은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아직 해가 완전히 뜨지 않아서인지 쨍쨍한 빛이 아닌 포근한 빛. 나를 우리 집에 있는 내 푹신한 이불처럼 감싸주는 빛이다. 여기 이불은 뻣뻣하고 얇아서 느낌이 별로다. 창문을 여니 아침의 서늘한 기운도 함께 들어온다.
“음... 좋다.”
포근한 빛에 적당히 추운 공기. 조금씩 잠도 깨고 상쾌한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