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레커닝-213화 (213/215)

213====================

미래 (에필로그 파트)

1년이란 시간이 훌쩍 흘러갔다.

보쉬 대통령의 갑작스런 암살과 리처드의 등극.

그리고 세계 각지를 공격한 날개달린 괴수와 미 태평양 함대의 출격.사이비 종교인들은 세상의 종말을 부르짖었고 지구촌 사람들은 공포에 몸을 떨어야 했다.그리고 한동안 세상을 떨게 했던 그 모든 혼란은 리처드 대통령과 함께 마치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그건 인간의 기억력이 결코 완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인간의 기억이 단 한치의 망각도 허락치 않았다면 지금의 인류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슬프고 아픈 기억.그리고 절망하고 고통스러웠던 그 기억들.그 기억들을 잊을수 있었기에 인간은 지금도 힘든 이 세상을 꿋꿋하게 살아갈수 있다.

종말의 사자로 여겨졌던 그 날개달린 괴수는 마치 바람처럼 사라졌다.

갑작스런 기기 고장으로 바다 한복판에서 멈춰버린 태평양 함대와 백악관 근처의 지하 벙커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리처드 대통령.그 모든 것이 당시엔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지만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모든건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 몇달동안 수많은 사람이 죽고 세계 각지의 도시들이 폐허가 됐다.

하지만 신이 인간에게 선물한 그 망각의 힘은 고통과 절망을 잊게했고 새로운 희망을 찾아줬다.파괴된 자리엔 새로운 건물들이 올라갔다.세계 각국에서 죽은 사람들만큼 많은 아이들이 태어났다.미국의 폭주와 심판자의 강림에도 인류는 멸망하지 않았다.

뉴욕 브룩클린의 브라운스빌(brownsville)에서도 복구작업이 한창이었다.

브라운스빌은 갱과 마약 중독자들이 우글거리는 빈민굴이었다.뉴욕에서도 최악의 치안을 자랑하는 곳이었고 이곳의 거주민들조차도 답이 없다고 했었다.하지만 심판자의 공격으로 뉴욕의 대부분이 파괴되면서 그 복구의 손길은 여기까지 미치게 됐다.

"어이! 거기! 거기야! 빨리빨리 좀 날라!"

"야야! 거기 머리 조심해!"

음침한 건물들이 사라진 자리엔 새로운 건물들이 자리를 잡았다.

낮에도 사람구경하기 힘들었던 이곳에 수많은 인부들과 건설기계가 돌아다녔다.어딜가도 망치소리와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로 귀가 먹먹했다.

그 브라운스빌의 한복판에 우뚝 선 커다란 대리석 건물.

바로 존슨 센터였다.

가난과 범죄의 유혹을 피해 이곳을 떠난지 2년.

가난한 거리의 음악가 존슨은 고향에 빌딩을 올리고 어엿한 사장님이 됐다.그는 리처드 일파의 학살을 피해 도망쳤던 흑인들을 불러들여 일자리를 줬다.리처드 행정부의 실책으로 정부의 재원은 거의 고갈되다시피 했지만 존슨을 비롯한 귀국 능력자들의 도움으로 쓰러지기 직전의 미국은 다시 살아났다.

존슨은 센터의 옥상에서 멀리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난을 피해 이 브라운스빌에서 도망치듯 나왔다.

운 좋게 능력자가 됐지만 협회에선 받아주지 않았었다.

갈 곳을 잃고 방황하다가 브라질까지 갔고 거기서 구용철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만났다.

그때부터 기적이 시작됐다.

지금도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구별이 안됐다.

그만큼 지금의 이 순간은 이제껏 꿨던 어떤 꿈보다도 더 멋졌다.

단지 가난뱅이에서 벗어나는걸 인생의 목표로 삼았었다.그런데 그런 자신이 지금은 이 커다란 빌딩의 주인이 됐다.마약 갱이 우글대던 브라운스빌은 이제 없다.미래의 희망에 가득찬 새로운 마을이 있을뿐이다.오늘따라 유난히 맑고도 맑은 브라운스빌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존슨은 비로소 자신의 삶이 헛되지 않았다는걸 실감했다.

"구용철. 진짜 멋진 놈이지.구용철이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

미국에서의 너무 일이 급해서 자주 찾아가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죽을때까지 그 인연을 잊지 않을 셈이다.하긴 오천년의 인연이 그렇게 쉽게 끊어지는건 아닐테니까.

"구용철. 전부 네 덕분이다. 넌 최고다. 구용철."

존슨은 멀리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그렇게 용철을 추억했다.

=======================================================

리처드가 사라지고 아프로스의 야욕도 한줌의 재로 변하면서 세상엔 다시금 평화가 찾아왔다.날개달린 괴수의 공격으로 멸망직전에 몰렸던 유럽도 마찬가지였다.파괴된 도시엔 복구의 망치소리가 울렸고 사람들은 과거의 아픔을 잊고 오늘도 힘차게 살아가고 있다.

날개달린 괴수들이 자취를 감추면서 전세계를 공격하던 괴수들도 덩달아 사라졌지만 그들이 언제 또 인류를 공격할지는 아무도 모른다.그때문에 사람들은 개인의 생존에 많은 관심을 갖게됐고 제임스의 귀국을 열렬히 환영했다.제임스는 왕텐하이 일당의 음모를 밝혀내고 파즈르 조직의 격멸에도 큰 공을 세운 영국의 자랑이었다.

영국 여왕은 제임스가 귀국하자마자 최고의 훈장을 내렸고 옥스포드 대학에선 그를 초청해서 강연회를 열었다.그때 제임스는 극한 상황에서 살아남는 방법에 대해 설명했는데 그의 연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대학측에선 그를 아예 교수로 초빙했다.

이곳은 옥스포드 대학의 야외 강의실.

제임스는 야외강연장에 학생들을 모아놓고 생존학 강의에 한창이었다.

앳되보이는 학생 10여명이 약간 긴장된 표정으로 제임스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한참 바닥을 뒤지던 제임스는 흙속에서 커다란 애벌레를 꺼냈다.

"자. 이건 장수하늘소 애벌레랍니다. 이건 먹을수 있어요."

그 애벌레는 지독하게 컸다.

생존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방법을 불문하고 살아남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때문에 학생들은 제임스가 시키면 흙이라도 먹을 기세였지만 그 애벌레는 너무 컸다.

"이래봬도 단백질 함량이 쇠고기의 6배랍니다.

생존에 꼭 필요한 필수 아미노산과 비타민도 많이 들어있죠."

제임스는 그 학생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다가 그 애벌레를 입안에 쑤셔넣었다.

그는 애벌레를 꼭꼭 씹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지만 학생들은 전부 얼굴이 굳어있었다.

"애벌레의 체액은 맛이 고약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남으려면 애벌레의 체액을 전부 먹어야합니다.이런 애벌레는 주로 습기가 많고 더운 지방에서 발견되는데 그런 곳일수록 물을 조심해야합니다.때문에 깨끗한 물을 구할수 없다면 필요한 수분은 이런 애벌레에게서 취해야 하죠."

"네. 그러니까....맛은 고약해도 먹어도 탈이 나거나..."

"인간은 몸은 그렇게 약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사냥꾼으로 태어났으니까요."

"아...네....그렇군요."

"애벌레를 먹을때는 숨을 참고 무아의 경지에서 씹어 삼켜야합니다.

처음 먹는 사람들은 그 체액의 고약한 냄새를 버티기 어렵거든요."

제임스는 씨익 웃으면서 한 학생에게 장수하늘소 애벌레를 내밀었다.

"머...먹어야 하나요?"

"살기위해선 먹어야 합니다.지금 익숙해진다면 어떤 곳에서도 살아남을수 있어요."

"아....네!"

학생은 애벌레를 보자마자 뒷걸음질 쳤지만 제임스의 눈은 생존의지로 불타고 있었다.

"교수님. 시간 다 됐는데요?"

"헛? 벌써 시간이 이렇게."

그때 다른 학생 하나가 강의시간 종료를 알렸다.

제임스 교수는 가르치려는 열의가 너무 강해서 항상 이렇게 쉬는 시간을 잡아먹었다.제임스의 강요에 못이겨 막 애벌레를 입에 넣으려던 학생은 지옥에서 살아나온 얼굴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다들 수고했어요.

다음시간에는 거북과 맹금류를 안전하게 먹는 법을 가르치겠습니다."

"교수님. 수고하셨습니다."

학생들은 부랴부랴 가방을 집어들고 다음 강의실로 달려갔다.

제임스는 멀리 사라지는 학생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강연장 한쪽에 앉았다.

오늘따라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맑다.

"인연은 인연인가보군요. 구용철씨.

헤어진지 얼마나 됐다고 또 보고싶은지 모르겠네요."

물론 전화는 자주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성에 안 찬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해도 그래봐야 남자는 남자.그런데 아름다운 레이디도 아닌 그 구용철이가 왜 이렇게 보고싶은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이번 학기 끝나면 한국에 놀러가야겠군."

===========================================================

날개달린 괴수의 서울 대공습은 6.25 이래 최악의 참변이었다.

죽은 사람만 수십만명에 달했고 실종자와 부상자를 합치면 그 수를 헤아릴수가 없다.하지만 불가능을 가능성으로 만드는 한국인의 근성은 그 처참한 폐허위에서 또다시 새로운 희망을 싹 틔웠다.

폐허가 됐던 서울도 복구공사가 한창이었다.

완전한 복구까진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서울은 조금씩 옛 모습을 찾고 있었다.과거의 번화가였던 명동에는 사람이 붐볐고 복구된 도로위로 수많은 차들이 달리기 시작했다.심판자의 공격앞에 서울은 지옥으로 변했지만 그 지옥은 단 1년만에 생기가 넘치는 삶의 터전으로 변했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과 끝없는 공포속에서 모든 사람들은 종말을 눈 앞에서 봤다.

허나 그 종말의 순간을 잊고 새로운 희망을 찾는 힘은 살아남은 사람들을 이전보다 더 멋진 미래로 이끌어갔다.한번 종말을 겪었기에 그 어떤 고난과 역경이 있더라도 이겨낼수있는 힘이 생겨났다.이 폐허를 복구한건 뛰어난 정치인도 아니고 어떤 초월적인 존재도 아니었다.하루하루 희망을 찾아 살아가던 수많은 사람들이었다.

희망이 있기에 미래가 있다.

"야. 무슨 걸음이 그렇게 느려? 오빠 속 터져 죽겠다."

"임신한거 안보여?"

공사차량들때문에 아직은 어수선한 시내 한쪽을 바삐 걸어가는 남녀.

인철과 유라였다.

용철이 애완동물로 키우던 그 퉤깽이는 바로 유라였다.

아프로스를 비롯한 상인조직은 아틀란티스의 후손중 일부를 능력자로 또 일부는 괴수로 만들었다.물론 능력자나 괴수로 나뉘는 조건은 따로 있었지만 그 조건이 늘 들어맞는건 아니었다.성재처럼 사악한 자가 능력자로 각성하는 경우도 있었고 또 범죄와는 전혀 무관한 성향을 가졌음에도 괴수로 변하는 경우도 있었다.

유라는 바로 그런 케이스였다.

용철과 유라가 만났던 것도 전부 과거의 인연때문이었다.

발레리누스의 환생체인 용철을 감시하던 상인조직은 유라의 존재를 알고 즉시 손을 썼다.그녀의 존재로 인해 발레리누스의 운명이 바뀔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이때 유라는 괴수보단 능력자가 되어야 했지만 담당 상인의 착각으로 괴수가 되고 말았다.

물론 괴수가 된다고 해서 과거의 성향이 전부 사라지는건 아니다.

그녀는 토끼로 변하자마자 과거의 기억에 눈떴고 본능적으로 용철을 찾아갔다.그녀는 오천년전에 발레리누스를 가까이서 모시던 시녀였다.물론 그 과거의 기억이라는건 발레리누스의 휘하전사였던 다른 사람들보다는 희미한 것이었다.그 기억은 어떤 이끌림으로 변해 용철을 찾게했고 결국 용철의 집에서 애완토끼로 살게됐다.

용철이 아프로스를 쓰러트리자 부활한 영웅들을 비롯한 아틀란티스의 후예들을 간섭하던 힘도 사라졌다.능력자의 모습과 괴수의 모습이라는건 어디까지나 아프로스가 만들어낸 것이다.결국 모든 아틀란티스의 후예는 아프로스의 조종을 받으며 나름의 역활극에 충실했던 셈이다.그런데 아프로스가 죽자 그가 만들어낸 모든 것이 사라졌다.

심판자 '더 레커닝'으로 세상의 종말을 위해 싸우던 영웅들도 다시금 잠들었다.

그리고 용철네 집 거실에서 살던 유라도 원래의 모습을 찾았다.

유라는 용철을 좋아했지만 결코 이어질수 없다는걸 알았다.

그의 곁에는 이미 마리엘이 있었고 세희가 있었다.그러던중에 용철의 소개로 인철을 만나게 됐다.한때는 비호감의 상징이었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성실한 남자였다.

괴수로 변한 수아에게 상처받고 절망의 나날을 보내던 인철과 새롭게 마음 둘 곳을 찾던 유라는 천생연분이었다.

"근데 우리 집 사는거야?"

"사야지."

"아직 비싸잖아? 그냥 집 사는건 좀 미루자."

"됐어. 그 좁은 전세방에서 어떻게 살아?"

인철은 능력개발부에서 일하며 많은 돈을 모았고 최근에 용철과 함께 국내의 잔존괴수를 처치하며 이제 돈 걱정 없이 살게됐다.문제는 서울 시내에 변변한 집이 없었고 그래서 돈이 있음에도 허름한 셋방을 전전했다.그러다가 최근에 서울 일부 지역이 완전히 복구되면서 새로운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고 분양권을 팔기 시작했다.

능력있는 인철이 그 기회를 놓칠리가 없었다.

한때는 브라질의 방탕아로 인간취급도 못받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한 여자의 남편이자 곧 태어날 아이의 아버지였다.

"쥑이네!"

인철은 저 멀리 우뚝 선 아파트를 올려다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괴수가 완전히 사라지면서 능력자도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져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철의 인생이 끝난건 아니었다.능력자 나인철은 이제 사라졌지만 그대신 한 가정의 가장이자 아이들의 아버지로서 여전히 이 자리에 서있다.

가끔 괴수들과 신나게 치고 받던 그때가 그리워질때도 있었지만 기댈 곳이 생긴 지금의 삶도 생각보다 만족스러웠다.

유라의 손을 잡고 모델 하우스를 둘러보던 인철은 문득 용철을 떠올렸다.

'전부 그놈 덕분이야. 그놈 덕분에 내 인생이 변했어.'

브라질에서 꽤 많은 돈을 벌었지만 그때 번 돈은 지금은 단 한푼도 남아있지 않다.시간만 나면 술을 마시고 이상한 여자들과 어울려서 그렇게 인생을 낭비했다.그러다가 한 여자의 남자로 정착한 용철을 보고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용철이 곁에 없었다면 자신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아마 결코 만족스런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을거 같다.

'인연.과거의 인연......'

'오천년의 인연이라.지금 생각해도 꿈만 같네.'

처음 밀리아에게 자신의 전생에 대해 들었을때 믿을수가 없었다.

자신이 오천년전에 용철과 함께하던 휘하전사였다니.하지만 용철이 각성하고 자신 역시 아틀란티스 인의 진정한 모습을 찾으면서 그 모든게 진실이라는걸 알게됐다.

용철은 빗나가던 자신을 바로 잡아준 은인이었다.

오천년동안 운명을 함께하던 생과 사의 단짝이었다.

"아참. 우리 집들이할때 용철이도 부를거지?"

인철은 얼른 유라를 돌아보며 그렇게 물었다.

아파트 축소 모형을 둘러본다고 정신이 없던 유라는 그 말을 듣자마자 눈을 흘켰다.

"오빠는 내가 좋아요? 용철 오빠가 좋아요?"

"다...당연히 네가 좋지."

인철은 질투하는 마누라를 달래며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어느새 기분좋게 웃고있었다.

그 오천년의 인연때문인지 몰라도 용철이만 떠올리면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여보. 여기서 잠시만 보고 있어."

"뭐에요? 또 용철 오빠한데 전화하려구 하는거죠?"

"헛?!"

막 전화기를 꺼내려는 순간 유라가 도끼눈을 떴다.

물론 그녀도 그렇게 질투하면서도 이해 못하는건 아니었다.

구용철. 그 사람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쯤 인철을 만나지도 못했을테니까.

둘은 조그만 아파트 모형을 들여다보며 또한번 용철을 떠올렸다.

한달전에 만났는데 벌써부터 또 보고 싶어진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