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레커닝-205화 (205/215)

205====================

종언

바람이 멈췄다.

서울 하늘을 뒤덮었던 먹구름도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샤르테의 각성으로 일어났던 모든 이변은 그녀가 힘을 잃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불안과 공포에 떨던 생존자들도 맑아진 하늘을 보며 잠시나마 마음의 평정을 찾았다.

"어떻게 된거지?"

"구름이 어디갔지? 저거 봐! 갑자기 밝아졌어!"

폐허로 변해버린 서울 여기저기서 생존자들이 걸어나왔다.

괴수의 습격과 불바다의 뒤를 이은 온갖 이변 앞에 시달리며 지칠대로 지친 얼굴들.삶의 터전이던 서울은 이미 완전한 폐허로 변해버렸다.하지만 그 서울의 지하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살아있었고 그들은 지금도 끊임없이 희망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어두웠던 하늘이 이전처럼 밝은 빛을 되찾았고 천지를 울리던 폭음도 그쳤다.

물론 이변이 사라졌다고 해서 서울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고 이 앞에 펼쳐진 시련의 길은 아직은 멀고도 멀었다.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사람들은 파랗게 빛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어찌보면 작디 작은 변화에 감사하며 안도하는 그 마음은 최후의 순간에도 결코 희망을 잃지 않는 삶의 원동력이었다.

먹구름이 사라진 하늘은 불안과 절망속에 떨던 서울에 한줄기 광명이었다.

하지만 폐허속에서 기뻐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오직 한 사람만은 밝아진 하늘을 불만스런 표정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아프로스.

아틀란티스에 잠들어있던 샤르테를 비롯한 영웅들을 깨우고 이 세상에 능력자와 괴수들을 나타나게 했던 장본인.

그는 샤르테와 용철이 격돌하자마자 남산에 올라 그 싸움을 구경했다.

모든 이가 죽음의 공포에 질린채 울부짖고 절망하는 와중에 혼자 피식피식 웃으며 이 모든걸 지켜봤던 아프로스.그는 몰라보게 밝아진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다가 이를 뿌드득 갈았다.저 하늘은 결코 원초(原初)의 하늘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초.

이 세상이 처음 생겨났던 그때.

칠흑처럼 어두운 하늘에선 거대한 운석이 쉼없이 쏟아졌고 땅이며 바다며 모든 것이 지독한 유황증기로 뒤덮였다.지구 전체에서 뜨거운 용암이 끓어올라 발디딜 곳이 없었고 그 용암을 가득 품은 대지는 마치 거대한 뱀처럼 요동치며 끝없이 뒤틀렸다.

그 원초의 하늘이 바로 심판자 '더 레커닝'의 고향이다.

샤르테가 모든 힘을 개방하고 이 땅이 검은 구름에 뒤덮였을때.

이 세상은 원초의 그 순간을 재현했다.저 하늘에서 수백 수천의 별이 내리고 곤죽처럼 변한 땅은 정신없이 뒤집히고 솟구치기를 반복했다.그 거대한 이변 속에서 지상의 모든 생명체는 한줌의 재로 변해 사라져갔다.그 원초의 순간은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려놓는 멸망과 재창조의 순간.지구가 묵은 때를 벗고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다.

병든 지구가 다시 살아나기 위해선 지금 이 땅을 뒤덮은 인간들을 없애야 한다.

더 레커닝은 모든 것을 원초의 순간으로 되돌리고 병든 지구를 살릴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두 패로 나뉜 그들은 끊임없이 적대하고 싸워야 한다.초월자들이 두 패로 나뉘면 모든 지상의 생명체도 두패로 나뉘고 그들은 서로 싸우며 개체수를 조절할 것이다.

그러기위해선 샤르테와 발레리누스 중에 누구 하나도 죽어선 안된다.

"말도 안돼. 계산은 완벽했는데?"

아프로스는 샬럿, 존슨, 제임스등이 발레리누스의 옛 동료들이라는걸 알고 있었다.

그는 그걸 알고 있음에도 용철과 그들이 만나도록 놔뒀다.그건 샤르테와 함께 이 세상의 균형을 만들 발레리누스가 그녀를 혼자 상대할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아프로스의 계산에 따르면 샤르테의 힘은 발레리누스와 그 동료 전부를 합친 것과 똑같다.

그 어느 쪽도 결코 우위에 설수 없기에 그 싸움은 영원히 이어져야 했다.

그들은 싸움과 회복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이 지상 생태계의 정점에서 인간의 수를 줄이는 역활을 수행해야 한다.그런데 거의 도움도 안되는줄 알았던 아가사와 인간 능력자들이 생각보다 강했고 발레리누스의 강함도 아프로스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이대로 샤르테가 소멸한다면 코어와 역 코어의 균형은 완전히 깨진다.

'안돼! 이대로 코어가 밀린다면 이 세상의 균형은...'

아프로스는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했다.

'기왕 이렇게 된 이상! 어쩔수 없지! 너희가 새로운 코어가 되어야겠다!'

그는 정신을 용철의 동료들을 떠올리며 정신을 집중했다.

발레리누스의 유일한 대항자인 샤르테가 힘을 잃었으니 남은 방법은 오직 하나.발레리누스의 동료들을 세뇌해서 그들을 새로운 악을 만드는 수밖에 없다.

아프로스의 입이 흉하게 벌어졌다.

앞으로 벌어질 참극이 눈앞에서 생생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능력자와 괴수는 동전의 앞 뒷면과 같은 존재다.

그들이 가진 욕망을 나쁜 쪽으로 발전시키면 역 코어를 코어로 만드는건 식은죽 먹기다.이제껏 괴수를 가늠하는데 쓰였던 그 코어란 물질은 실은 아틀란티스의 후예임을 상징하는 증표일뿐이다.그러니 아무리 정의로운 능력자라도 그 머리속엔 코어가 있다.단지 그 코어는 역 코어라는 이름으로 기존의 코어를 미워하도록 프로그래밍 됐을뿐이다.

"뭐지...이건?"

한참 정신을 집중하던 아프로스가 갑자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는 샬럿과 제임스등을 조종해서 괴수로 만들려고 했지만 아무리 뇌파를 조종해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그건 그들의 의지가 그만큼 굳건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이제 손을 댈수도 없겠구만!"

아프로스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

반쯤 잘려나간 산 허리를 뿌연 먼지구름이 감싸고 있었다.

불암산 높은 봉우리는 이미 완전히 박살나 그 흔적도 없었다.

"크억! 쿨럭!"

샤르테는 힘겹게 몸을 뒤틀며 고통스럽게 피를 토했다.

그녀의 몸은 불암산의 두터운 바위층을 깨고 깊숙히 쳐박혔다.그녀는 한때 저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니던 지상의 지배자.그 강인한 몸은 마치 거대한 탄환처럼 불암산에 직격하며 일대를 흔적도 없이 날려버렸다.샤르테가 추락한 곳엔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겼고 크레이터를 중심으로 견고한 바위층이 동심원을 그리며 내려앉았다.

"큭....흐윽! 크윽......!"

그녀는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여러 명에게 협공을 당하며 그 강인했던 몸도 이미 만신창이가 됐다.용철의 그 마지막 일격은 샤르테의 갈비뼈 대부분을 날려버렸고 부러진 갈비뼈가 폐를 찔렀다.그녀의 폐는 급속히 쪼그라들며 서서히 기능을 잃어갔다.

그녀는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겨우겨우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미 바위를 뚫고 큰 대자로 누웠으니 하늘을 올려다본다고 할 것도 없었지만 그녀는 의식적으로 목을 움직였다.

"샤르테...."

추락한 그녀를 쫓아 주변을 샅샅이 뒤지던 용철은 끝내 그녀를 발견했다.

단단한 암반층을 뚫고 마치 걸레조각처럼 쳐박힌 그녀의 모습.세상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웠던 그녀의 날개는 이미 흔적도 없었다.자신을 죽음직전까지 몰아갔던 그 강자가 지금은 모든 날개가 잘려나간채 겨우 숨만 붙어있었다.

"하아...하아....좋으냐? 내가 이렇게 박살났으니 가슴이 후련하냐?"

"무슨 소리를 하는거냐."

"암. 그렇겠지. 아가사랑 결혼하는데 내가 방해가 됐을테니까.

하긴 나같이 늙은 년보단 저 어린 계집이 훨씬 낫겠지."

용철은 샤르테가 누운 크레이터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잠시 혼잣말을 중얼대던 샤르테는 그런 용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돌려버렸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분명히 말했잖아. 오해라구."

"이제 변명할 필요 없어. 모든건 끝났잖아.

너는 이겼고 나는 이렇게 졌다. 이제 내게 남은건 죽음뿐이다."

용철은 크레이터 앞에 꿇어 앉았다.

어떻게든 샤르테의 오해를 풀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용철이 하는 말을 여전히 믿어주지 않았다.

"일단 좀 있다가 이야기하자. 마리엘! 치료를 부탁해."

용철은 뒤에 있던 마리엘을 돌아봤다.

그순간 그녀의 표정이 약간은 흔들렸다.용철은 과거의 연인이었던 그녀를 이렇게 보낼수 없었지만 마리엘의 입장에선 그게 좀 다른 문제였다.샤르테는 조금전까지만 해도 용철을 죽이려던 적이었다.치료를 해서 살려놓으면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괜찮아. 그러니까 제발 부탁해."

"네. 알겠어요."

잠시 머뭇거렸지만 망설임의 시간은 생각보다 짧았다.

위험한 적을 살리는건 좀 꺼림칙하긴 했지만 용철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리고 설령 샤르테가 다시 덤비더라도 용철이 반드시 이길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마리엘의 힐 마법이 샤르테의 찢겨진 몸을 따스하게 감쌌다.

"앗?! 뭐지..."

한참 치료에 집중하던 마리엘이 화들짝 놀라며 두어걸음 물러섰다.

"왜 그래?"

"이상해요. 힐이 안 통해요."

"뭐야?"

용철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샤르테를 돌아봤다.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는지 그녀의 입가엔 어느새 씁쓸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소용없어. 나를 살리려면 저 애가 대신 죽어야 할지도 몰라.

필요로 하는 생명력이 차원이 달라.아무리 힐을 퍼부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야.그러니 쓸데없는 짓 하지말고 그냥 나를 이대로 놔둬."

"샤르테...."

"됐어. 이제 다 끝났어.

난 네게 복수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지금껏 살아왔다.

어떻게든 너를 만나 분풀이를 하고 싶었다.그런데 나는 끝내 너를 이기지 못했다.복수를 하는건 고사하고 이렇게 형편없이 당했다.그러니 내게 더이상 살 이유가 있을까?"

그녀는 피로 물든 몸을 고통스럽게 뒤틀며 숨을 헐떡였다.

"샤르테. 제발 내 말을 믿어줘. 그건 순전히 오해야."

"이제 더이상 나를 속일 필요 없어.

난 이제 가망이 없다.네게 복수를 할 힘도 그럴 의지도 없어졌다.내가 사라진다면 더이상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는거 아냐? 그러니 이제 더이상 나를 신경쓰지마."

그녀는 다 귀찮다는듯 눈을 감아버렸다.

용철의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죽어가는 샤르테 앞에서 몸을 떨고 슬퍼하는건 분명 용철이 아닌 발레리누스였다.이제껏 구용철과 발레리누스는 다른 인격으로 존재했던 적이 없고 이 몸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전사 구용철이었다.하지만 구용철의 의식속엔 분명히 발레리누스가 존재했다.그리고 죽어가는 샤르테를 대면하며 무의식속을 살던 발레리누스가 용철의 몸을 장악했다.

용철은 그 크레이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 안에 마치 걸레조각처럼 구겨져있던 샤르테의 몸을 힘껏 끌어안았다.

"이게 무슨....짓이냐. 더이상 이럴 필요 없잖아?"

"오해라고 했잖아. 난 그냥 당신과 함께 있고 싶었을뿐이야.

그 무덤속에서 잠든 우리가 언젠가 깨어났을때 그 이름을 잊어버린다면 얼마나 슬프겠어? 아가사는 우리의 잃어버릴 기억을 대신해서 혼자 살아남은거야.언젠가 잠든 우리가 깨어났을때 우리가 누구인지 또 왜 잠들었는지를 가르쳐주려고 살아남은거야."

"거짓말...."

"만약 내가 거짓말을 한다면 이렇게 당신 얼굴을 똑바로 볼수도 없었겠지."

용철은 왼 팔에 힘을 빼고 무릎을 꿇었다.

그 품에 꼭 안겨있던 그녀의 몸이 용철의 왼팔위에 조용히 눕혀졌다.그녀는 그 팔에 몸을 기댄채 용철의 얼굴을 조용히 올려다봤다.용철도 묵묵히 그녀를 내려다봤다.

샤르테의 몸에서 흘러내린 피가 용철의 바지를 흠뻑 적셨다.

"남자는 말이야. 관심없는 여자는 쳐다보지도 않아."

"그래?"

"만약 내가 하는 말이 거짓이고 당신을 그저 이용했다면 이럴 필요도 없었겠지.조금전에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그냥 당신을 무시하고 아가사와 여길 떠나도 됐어.그치만 그건 진실이 아니야.내가 그때 아가사를 떠나보내며 손을 흔들었던건 나와 당신의 그 행복했던 기억을 대신 간직해줬으면 해서야."

용철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 눈물을 보며 고통과 한으로 얼룩졌던 그녀의 얼굴에도 조금씩 평온이 감돌기 시작했다.오천년동안 삭히고 또 삭혀왔던 그 분노때문에 그를 보자마자 눈이 뒤집혔다.그런데 막상 이렇게 모든 힘을 잃고 그를 마주하니 잘못된건 그가 아닌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돌이켜 생각해보면 발레리누스는 거짓말을 할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어쩌다가 거짓말을 해도 바로 얼굴에 표가 났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리 봐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고보니 정말로 자신을 이용했을뿐이라면 모든 힘을 잃은 지금 저런 말을 하면서 다가올 이유가 없었다.자신은 그의 적이었고 그 목숨을 노렸다.온전한 힘을 가졌을때라면 자신을 속이고 죽이기위해 거짓말을 할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랬었나...그게 내가 만든 괴물이었나?"

"샤르테?"

"당신의 그 악마같은 모습도...사실은 내가 만들어낸 착각속의 괴물이었나?"

그녀는 피가 잔뜩 말라붙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래. 전부 오해였어. 그러니까 더이상 싸우지 말자.

난 당신과 싸우고 싶지 않았어. 어떻게든 진실을 알리고 싶었어."

그 진실한 마음이 마침내 통했는지 용철을 올려다보던 샤르테의 눈에서도 한줄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그 눈물을 보는 용철의 가슴도 찢어질거 같았다.싸우기 전에 모든 진실을 알릴수만 있었다면 그녀가 이런 고통을 받지도 않았을텐데.

"그랬군요. 발레리누스...

오천년만에 다시 만났는데 이런 식으로 또 헤어져야 하다니..."

"걱정마. 내가 반드시 살린다. 얼마만에 만났는데 또 이렇게 헤어질순 없어."

"저도....이렇게 헤어지고 싶진 않아요.

그 모든게 오해라는걸 지금에서야 알았는데 이렇게 또...헤어진다는건..."

그녀는 이를 꾹 깨물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용철은 그녀의 몸을 꼭 껴안았다.

날개가 잘린 자리에선 지금도 뜨거운 피가 쉴새없이 흘러내렸다.용철은 손은 곧 그녀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용철을 쫓아 크레이터 안으로 뛰어들어온 마리엘도 그 모습을 보며 가슴을 쥐어 뜯었다.모든 오해를 풀었으니 샤르테는 더이상 적이 아니었다.그녀도 심판자의 숙명에 이끌린 불쌍한 희생자였다.

하지만 마리엘이 아무리 치료를 해봐도 소용이 없었다.

피가 흘러내리는 속도만큼 샤르테의 생명도 빠르게 꺼져갔다.

그녀는 조금씩 감기는 눈을 힘겹게 뜨며 마지막까지 용철을 올려다봤다.

용철도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그녀의 마지막을 가슴속에 새겼다.

"그래도 다행이에요.당신이 저를 버리지 않았으니까."

"내가 당신을 왜 버려. 전에 내가 꽃관 만들어준거 기억 안나?"

"기억 나죠..."

"꽃관을 만들어준다는게 무슨 뜻인지 알잖아?"

분명 그런 일이 있었다.

이름은 기억이 안나지만 어떤 언덕위에서 발레리누스가 주변의 풀꽃을 꺾어 꽃관을 만들어줬다.남자가 여자에게 꽃관을 만들어준다는건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샤르테는 피투성이가 된 몸을 힘겹게 움직였다.

그녀는 오천년전 그날처럼 용철을 올려다보며 환하게 웃어줬다.용철도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버리고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 웃음에 답했다.

그녀는 용철의 팔에 몸을 기댄채 행복했던 그때를 떠올렸다.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손을 내밀면 잡힐듯 생생했다.행복했던 시간은 이제 영영 돌아올수 없는 까마득한 과거의 일이 됐지만 그때 함께 했던 연인은 지금 이 자리에 있다.

가장 행복했던 때를 떠올리며 그녀는 육체의 고통을 잊어버렸다.

죽고 싶지 않았지만 무슨 짓을 해도 살아날수 없다는건 그녀가 제일 잘 알았다.괜히 죽기 싫다고 울부짖으며 발레리누스를 난감하고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그녀는 연인의 체온을 느끼며 곧 다가올 죽음을 조용히 기다렸다.

[고마워요. 발레리누스. 저는 이제 아무런 여한이 없어요.]

오천년전 그때처럼 행복한 미소를 띤채...

그녀는 오직 하나뿐인 연인의 품에 안겨 마치 잠자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