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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입
산 정상을 둘러싸고 수십개의 워프 게이트가 나타났다.
일본에 있던 모든 비밀상인이 이 이름없는 야산으로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그들의 목표는 바로 정상에 주둔하고 있는 아가사 공주와 그 호위병들이었다.
"생각보다 숫자가 많은거같군요."
검은 양복을 입은 여자 하나가 정상쪽으로 목을 쭉 뺐다.
그녀는 산꼭대기에 있는 아가사 공주의 진영을 대충 훑어보곤 게이트쪽으로 뒤돌아섰다.그곳엔 지휘관으로 보이는 상인이 한손에 지휘봉을 들고 다른 상인들에게 뭔가를 지시하고 있었다.아가사 공주의 토벌을 위해 모인 상인은 대략 400며명.각 게이트마다 간부급 상인들이 존재했고 모든 상인들은 간부를 중심으로 체계적으로 움직였다.
"그래봐야 영웅을 제외한 나머지는 잡병에 불과해.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이 저 영웅을 처리할 절호의 찬스다."
"정치인들을 해친 것도 저놈들일까요?"
"그럴 가능성이 높지.
과거엔 모든 영웅이 우리의 군주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우리의 군주는 미래의 혼돈을 섬기는 샤르테님뿐이다.그외의 모든 영웅을 없애야 한다.다들 전투 준비를 해라.적들의 숫자가 꽤 많아보이지만 영웅을 제외하면 별볼일 없다."
그 간부는 지휘봉을 들어올리며 부하들을 돌아봤다.
보통 높은 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대기하는 적을 공격하기위해선 빈틈없는 작전이 필요했지만 상인조직의 간부들은 그냥 부하들을 모아서 일제히 돌격시킬 작정이었다.이건 공주의 부하들과 비밀상인간엔 절대 극복할수 없는 힘의 격차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비밀상인들은 모두 과거 주술사의 힘을 이어받은 자들이다.
아틀란티스의 일반 전사와 비교했을때 그 힘의 격차는 하늘과 땅차이였다.
"저 영웅을 해치우고 일제히 한반도를 치는거다.
정치인들을 앞세워서 전쟁을 일으키려했지만 지금은 그것도 여의치않군.
뭐...상관없어. 굳이 전쟁을 일으키는게 일본 정치인일 필요는 없으니까."
간부는 산위에 주둔한 아가사 공주의 부대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때 근처를 살피러 갔던 전령상인이 도착했다.전령은 간부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곤 다른 부대 간부들의 움직임을 보고했다.
"지금 모든 부대가 배치완료 됐습니다.
명령만 내린다면 즉시 공격할수 있습니다. 어서 명령을..."
"완전히 포위했다면 더이상 기다릴 이유는 없는거지."
간부는 힘껏 칼을 뽑아들었다.
"모두 일제히 돌격!
적대 영웅의 목을 베고 이대로 한반도로 넘어가는거다!
이 싸움은 오로지 우리의 새로운 군주 샤르테님을 위한 것! 샤르테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두 목숨을 바쳐 싸우는거다! 알겠나!"
"옛!"
"돌격! 전 부대원 돌격하라!"
간부가 선두에서 뛰쳐나가자 수많은 상인들이 창칼을 들고 그 뒤를 일제히 따랐다.
한 게이트를 통해 나온 상인은 대략 20여명.
아가사 공주의 진영을 중심으로 사방에서 소환된 게이트는 20개.도합 400명의 상인들이 일제히 함성을 내지르며 산정을 향해 달려들었다.그들은 전부 웬만한 특수 능력자이상의 힘을 갖고 있다.인두겁을 쓴 괴수들을 조종하며 일본을 좌지우지하던 그들이 아가사 공주의 목을 노리고 일제히 공격을 감행했다.
산등성이 곳곳을 밝게 비추는 수십개의 마법진과 순식간에 달려오는 수많은 적들의 기척.산꼭대기에 주둔하고 있던 아가사 공주는 적들의 공세를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드디어 작전 시작이군요."
산정의 바위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고있던 공주가 허리춤의 검을 힘껏 뽑아들었다.
"저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이 왔습니다.
전사로서 마지막 빛을 발할 그 순간을 저희는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공주를 둘러싼 부하들도 저마다 무기를 들고 반격을 준비했다.
그들은 모두 오천년전에 죽은 자들이지만 그 강건했던 영혼은 돌인형에 깃든채 여전히 공주의 곁을 지키고 있다.비록 원래의 몸은 잃어버렸지만 그렇다고 공주를 지키고자 하는 그 마음까지 사라지는건 아니었다.
수백기의 골렘들이 공주를 둘러싸고 철저한 방어태세를 갖췄다.
"이곳은 지상인들의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있습니다.
지상인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반역자들만 처리하기엔 최적의 장소.우린 어떻게든 지금 이 자리에서 저 반역자들의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아틀란티스의 영광된 전사들이여!우리의 이름을 더럽힌 저 반역자들을 한놈도 남김없이 해치우세요!"
"오오오!"
수많은 골램들이 저마다 창칼을 쳐들고 함성을 올렸다.
기나긴 능선을 따라 마치 바람처럼 달려오는 수많은 검은 그림자.
검은 양복에 선글라스를 쓴 수백명의 비밀상인들이 아가사 공주의 진영을 향해 밀물처럼 쇄도해왔다.공주는 칼을 뽑아들고 진영 이곳저곳을 누비며 골램들을 지휘했다.
"제 1진! 앞으로! 창병들은 방어태세를 취하고 적의 돌격을 막습니다!"
공주를 중심으로 모여있던 골램들중에 창을 든 골램들이 일제히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하늘높이 쳐들고 있던 창을 정면을 향해 힘껏 겨누었다.이 창의 길이는 무려 4미터에 육박한다.적들의 육탄돌격을 막기에 이보다 좋은 무기는 없다.적 비밀상인들은 대다수가 소드마스터였다.이 때문에 골램들의 창은 능선 아랫쪽에서 달려오는 비밀상인들을 충분히 찌를수 있었지만 비밀상인들의 검은 골램에게 닿지 않는다.
"크악!"
"으아악!"
멋도 모르고 달려오던 비밀상인들은 그제서야 눈앞의 창날을 발견했다.
그들은 그제서야 속도를 줄이려 했지만 한번 가속이 붙은 몸을 제어하는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선두에서 달려오던 몇몇은 그대로 골램들의 창에 찔려 비명을 질러댔다.
"에이잇! 저따위 하찮은 창병때문에 진이 흔들리는게 말이 되느냐!"
선발대를 뒤따르던 간부상인은 골램 창병들을 보고 이를 뿌드득 갈았다.
"모두들 공격해! 계속 공격해! 검기를 써! 검기를 써서 창병을 날려버리란 말야!"
간부 상인이 창병들의 머리위로 훌쩍 몸을 날렸다.
그녀를 뒤를 따라 다른 비밀상인들도 일제히 몸을 솟구쳤다.골램 창병들은 앞으로 내밀었던 창을 황급히 쳐올렸지만 대다수의 비밀상인이 이미 창병의 방어선을 넘어선 뒤였다.곧이어 사방에서 폭음이 일어나며 골램들의 비명소리가 천지를 흔들었다.
비밀상인 소드마스터들이 검기를 날리기 시작했다.
아가사 공주의 군사들은 전부 훈련이 잘된 정예병이었지만 비밀상인을 상대하긴 역부족이었다.창병의 방어망을 통과한 비밀상인들은 골램들을 닥치는대로 쓰러트리기 시작했다.골램들은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음속으로 움직이는 비밀상인들을 치는건 거의 불가능했다.비밀상인 본진이 도착하며 공주의 골램 군단은 빠른 속도로 와해되기 시작했다.
"와! 죽여라! 한놈도 살려두지마라!"
"공주님을 지켜라!"
수많은 상인들에게 둘러싸인채 공주는 정신없이 싸웠다.
골램 병사들이 공주를 중심으로 밀집대형을 취하고 있었지만 힘의 차이가 너무나 컸다.근위골램들이 순식간에 전멸하면서 공주는 혼자서 수많은 상인과 맞서야했다.
"타앗!"
공주의 검이 한줄기 검풍을 일으키며 비밀상인의 목을 노렸다.
깡!
목줄기를 정확히 노렸지만 이 비밀상인의 실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그녀는 공주의 검을 쳐내고 힘껏 몸을 돌려뺐다.양 옆에서 두명의 비밀상인이 나타나 공주를 향해 힘껏 검을 쳐들었다.
[슈퍼 스트라이크!]
오른쪽에서 뛰어온 상인이 그 자리에서 몸을 훌쩍 솟구쳤고 왼쪽에서 달려든 상인은 그대로 몸을 반회전 시키며 공주의 옆구리를 노렸다.넘쳐나는 에너지가 그들의 혈관과 관절을 중심으로 격렬한 스파크를 뿜어냈다.그들이 공격자세를 잡고 공격이 나오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불과 0.1초였다.비밀상인의 검이 전장의 하늘을 두쪽으로 가르며 격한 폭발을 일으켰다.하늘을 가르고 떨어지는 칼날은 마치 한줄기의 벼락같았다.
공주는 사방에서 날아오는 칼날을 약간은 멍한 얼굴로 바라봤다.
[빛의 이면은 어둠.어둠의 이면은 곧 빛.
수호의 의지는 선이고 파괴의 의지는 악이라지만 더 큰 악을 징벌하기위해서 나는 악이 되겠다.빛과 어둠의 혼동.선악을 가르는 경계선에 위치한 이 힘은...]
[서천(西天)의 혼동하는 그림자.]
공주의 등뒤에서 강렬한 빛과 함께 여덟장의 날개가 뿜어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한줄기 빛으로 변한 그녀가 전장을 누비기 시작했다.
"으악!"
"크아아악!"
아틀란티스의 멸망을 위해 잠들었던 과거의 영웅들은 아틀란티스가 떠오르며 다시금 역사의 전면에 나섰다.그들은 능력자와 괴수로 대변되는 아틀란티스의 피를 제어하고 또한 심판하는 통치자이며 종국의 심판자.
이 지구의 운명을 손에 쥔 그들은 더 레커닝.부활한 인류의 심판자였다.
용철이 배틀마스터라는 평범한 전사의 허물을 벗고 영웅 발레리누스의 힘을 이어받은 진정한 심판자로 각성했듯 아가사 공주도 과거의 힘을 전부 되찾았다.
빛으로 변한 공주가 곁을 스칠때마다 수많은 비밀상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 비밀상인들이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그들 역시 영웅의 밑에서 지배받으며 영웅의 부활을 꿈꾸던 백성들이었다.
아틀란티스에선 오직 강자만이 남의 위에 설수 있었다.때문에 왕족과 백성의 차이는 하늘과 땅차이.비밀상인들은 악을 쓰면서 공주를 죽이려고 했지만 그들의 힘으로 심판자로 각성한 공주를 베는건 불가능했다.
"쳇! 생각보다 강하군! 샤르테님은 어디 계시냐?!"
간부상인은 그제서야 샤르테를 거론했지만 이미 부하상인들 대다수가 죽은 뒤였다.그들은 압도적인 힘으로 골램군단을 밀어붙였지만 공주를 상대하긴 역부족이었다.
"샤르테님은 아직 도쿄에 계십니다!"
"뭐야? 아직까지 연락안하고 뭐했어?"
"그게...워낙에 정신이 없어서."
"이 바보같은 년!"
"일단 후퇴다! 생존자를 집결시켜! 게이트를 열고 후퇴한다!"
간부 상인이 명령하자마자 곁에 있던 다른 상인이 커다란 깃발을 흔들었다.
그와 동시에 공주를 공격하던 상인들이 전의를 상실하고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기척을 지우고 숨어있던 용철일행이 물러서던 일본상인들을 덮쳤다.
"우오오오오오오오!"
모든 힘을 폭발시킨 용철이 짐승처럼 포효하며 놈들을 향해 쇄도했다.
"아니?! 저놈은 대체 뭐야!"
허겁지겁 후퇴를 준비하던 간부상인은 갑자기 달려드는 용철을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그녀는 정면의 용철과 산정에서 설치는 공주를 번갈아가며 쳐다보다가 곧 입술을 꾹 깨물었다.조금전에 후퇴명령을 내리긴했지만 게이트까지 제대로 찾아온 부하는 소수였다.나머지는 아직도 저 산위에서 공주의 칼에 도륙당하고 있다.
'속았다! 저건 미끼였나?
저놈에게서 느껴지는 기척도 분명한 왕의 기운.'
간부 상인은 용철을 보자마자 그가 영웅중 하나라는걸 알았다.
하지만 그걸 알았다고 해도 이미 어떻게 대응해보긴 너무 늦어있었다.간부상인이 칼을 뽑아들기도 전에 용철의 주먹이 그녀의 복부를 강타했다.
"크악!"
이 일격은 10톤의 바위를 가루로 만든다.
아무리 강한 비밀상인이라고 해도 이 일격을 버티는건 불가능했다.단 일격에 상인의 몸은 마치 종이조각처럼 구겨졌고 앙다문 입에선 붉은 피가 분수처럼 터져나왔다.
그들도 한국에 영웅의 피를 이어받은 구용철이라는 자가 있다는걸 잘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가 일본에 들어와 있을줄은 꿈에도 몰랐다.그들은 용철이 그냥 한국에서 자리를 지킬줄 알았다.그 상인은 두팔을 허우적거리며 어떻게든 버티려했지만 완전히 망가진 몸은 속절없이 주저앉고 있었다.
간부상인이 일격에 쓰러지자 남은 상인들은 얼굴이 사색이 됐다.
"괴수들을 조종해서 전쟁을 일으키려한 네년들!
이 구용철님이 단 한 년도 남김없이 지옥으로 보내주마!"
용철은 손에 잔뜩 묻은 피를 휙 털어내고 다른 상인들을 노려봤다.
"에잇! 반격! 반격하라!"
궁지에 몰린 비밀상인들은 도주를 포기하고 칼을 뽑아들었다.
그들은 전원 소드 마스터.십여명의 소드 마스터가 일제히 검기를 발출하며 달려들었다.용철도 두 주먹을 꾹 쥐고 놈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땅을 박차고 몸을 날리기까지 불과 0.01초.
비밀상인들은 전부 맘보 킹 이상의 힘을 갖고 있었지만 용철의 힘은 그 비밀상인들을 까마득히 넘어섰다.
상인들의 검에서 강력한 검기가 쉴새없이 쏟아졌고 강렬한 폭음이 천지를 뒤흔들었다.한줄기 빛으로 변한 용철이 그들의 검기를 뚫고 맹렬하게 쇄도했다.
일섬(一閃).
용철의 주먹이 한 비밀상인의 배를 향해 작열했다.
"쿱! 크악!"
배를 맞은 상인은 배를 감싸쥐고 주춤거렸다.
살짝 열린 입가에서 검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더 레커닝으로 전직하면서 용철의 주먹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무기보다 강력한 살인병기가 됐다.아무리 강한 비밀상인도 이 주먹을 버티는건 불가능했다.그 상인은 눈을 까뒤집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동료 하나가 순식간에 죽어나가자 남은 상인들은 이를 악물고 최후의 발악을 준비했다.물론 그래봐야 그놈들은 용철의 상대가 아니었다.
용철은 전장을 누비며 그들을 닥치는대로 쳐죽였다.
몇몇은 겁에 질려 도망치려 했지만 옆에서 미리 기다리고있던 인철과 범석에게 걸려들었다.최강자 용철 앞에서 그들은 너무도 무력했다.용철이 돌격하자 그들의 전열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시체가 마치 낙엽처럼 널렸다.
용철이 움직이자 산정에 있던 아가사 공주도 산 밑으로 내려와 합류했다.
양쪽에 끼인 비밀상인들은 오도가도 못하고 숱하게 죽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