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레커닝-180화 (180/215)

180====================

잠입

다음날.

이곳은 도쿄도 지요다구에 위치한 일본 국회 의사당 앞.

국수정(國守政) 소속 국회의원 마츠야마 헤이타로(松山 兵太郞)는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관용차로 기다리고 있었다.그가 속한 우익 국수정 의원들이 발의한 '새로운 다케시마 법'이 방금전에 상임위를 통과하고 본회의 표결을 앞두고 있다.

최근 일본 국회에서 세력을 확장한 국수정은 제국정파(帝國政派)로 불리는 일본 우익 정치인의 집합소였다.이들은 과거사를 반성하던 전대 일왕이 있을때는 사실 별 힘을 못썼지만 전왕이 실종되고 어린 조카가 왕좌에 오르면서 세력을 급속히 확장됐다.그들이 주장하는건 일본이 과거의 강한 국가로 돌아가는 것.즉 다시 말하면 대동아공영권을 외치며 침략을 일삼던 그때로 돌아가는 것이었다.때문에 이들이 발의하는 법안은 과거 일본에 의해 피해를 입은 이웃나라들이 보면 하나같이 이가 갈리는 것들이었다.

조금전 상임위를 통과한 '다케시마 법'도 그랬다.

독도 분쟁이 시작된건 1905년부터였다.

일제는 독도의 동도에 군사용 망루를 세웠는데 그 당시 독도는 무인도였다.

이에 당시 일본은 내각회의를 열어 독도를 주인없는 섬으로 규정하고 무주지(無主地:주인없는 땅) 선점을 근거로 영토편입결정을 내렸다.하지만 주인없는 섬과 무인도는 원칙적으로 다르고 독도가 여전히 대한민국의 영토라는건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었다.

이때문에 독도를 건드리는건 사실상 국내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위한 정치적 쇼였다.

이미 경찰까지 파견해서 지키고 있는 섬을 빼앗을수 있을까?

그들은 이 문제로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를 시도하는등 계속 징징거렸지만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진 못했다.그건 그들도 독도를 빼앗는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통과한 '다케시마 법'은 이전 일본정부의 태도와는 사뭇 달랐다.

독도를 완전한 일본의 영토로 선언하며 현지에 주둔하고 있는 한국사람들을 몰아낸다는게 바로 그 법의 골자였다.즉 독도 사태는 기존의 정치 쇼에서 서서히 전쟁의 불씨로 변하고 있었다.사쿠라이(櫻井) 마츠야마(松本) 기노시타(木下)등을 주축으로한 제국정파의 요인들은 다케시마 법을 통과시키고 일본 국회에 욱일승천기를 내걸었다.

그들은 드디어 군국주의 국가로의 회귀를 선언한 것이다.

"이제 드디어 우리 일본이 과거의 힘을 되찾을때가 왔다.

다케시마를 시작으로 잃어버렸던 영토를 하나하나 되찾을 것이다."

마츠먀아 의원은 잿빛으로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중얼댔다.

어제부터 내리던 부슬비때문에 의사당 인근의 길바닥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약간 서늘한듯 하면서 축축한 공기.마츠야마의 입가에서 흘러나온 하얀 김이 마치 희미한 안개처럼 천천히 흩어져갔다.그는 어느새 후줄근해진 코트를 툭툭 털며 시계를 들여다봤다.

"미시마 보좌관. 관용차는 아직인가?"

"네. 방금전 주차장을 출발했다고 합니다만..."

"아까도 방금전이라고 했잖아."

의원은 초조한 얼굴로 보좌관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인가? 의원이 부르면 재깍재깍 와야할거아냐?"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연락을 하겠습니다."

그 보좌관은 얼굴이 사색이 된채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

바로 그때. 새까만 승용차 한대가 국회의사당 앞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섰다.그걸 보자마자 보좌관은 살았다는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마츠야마 의원은 어떻게든 화풀이를 할 모양이다.그는 대번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면서 관용차쪽으로 마구 달려갔다.

"빠가야로! 왜 이렇게 늦어!"

"죄송합니다. 주차장 인근에서 시비가 붙어서..."

"어떤 미친 놈이 의원 관용차에 시비를 걸어?! 누구야!"

"그게. 제가 따지니 말 없이 차를 몰고 도망치더라구요.

블랙박스에 다 녹화됐으니 곧 잡아서 뜨거운 맛을 보여주겠습니다."

"나참...별 미친. 알았어. 확실히 해야 해."

"네."

마츠야마 의원은 그제서야 분을 풀고 관용차 뒷좌석에 올라탔다.

성격이 괄괄한 의원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단 몇달만에 볼살이 홀쭉하게 빠진 미시마 보좌관이 얼른 조수석 문을 열고 탑승했다.마침내 의원과 보조관을 싣고 관용차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마츠야마 의원의 집은 여기서 제법 떨어진 에도가와에 있다.

의원은 의자에 몸을 기댄채 슬며시 눈을 감았다.

그가 하는 일이라곤 의사당에서의 말싸움외엔 거의 없었으니 딱히 피곤할 이유가 없었지만 그를 비롯한 의원들은 항상 아주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생색을 내고 다녔다.백미러를 통해 의원의 눈치를 보던 미시마 보조관도 그제서야 안심하고 눈을 감았다.사실 별로 하는 일도 없는 의원보단 보좌관이 더 피곤한 법이지만 권위주의의 산실이라고 할수있는 일본 국회에서 아랫사람이 목소리를 내는건 지극히 힘든 일이었다.

그들이 조는 사이에 운전사는 말없이 차를 몰았다.

도쿄 시내를 벗어난 차는 사이타마 현의 한적한 도로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서류가방을 껴안고 한참 꾸벅꾸벅 졸던 미시마 보좌관은 차가 덜컹거리자 본능적으로 눈을 뜨고 주변을 살폈다.의원의 등쌀때문에 날마다 힘들었지만 아무리 피곤해도 마음대로 잘수도 없는게 바로 직속 보좌관이었다.

"응?"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던 보좌관은 그만 화들짝 놀라며 운전수를 돌아봤다.

조금전 잠결에도 참 오래 달린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사이타마로 나왔을줄이야.사이타마는 의원의 자택이 있는 에도가와하곤 완전 정반대였다.그러니 운전수가 완전 미치지 않은 이상 하필이면 사이타마쪽으로 돌아갈리가 없었다.

"자네. 대체 뭐하는 짓이야? 길 몰라?

의원님이 깨어나면 어떻게 될줄 몰라서 이래?"

보좌관은 의원의 눈치를 살피며 운전수를 닦달하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의원은 아직 자고 있었지만 그가 깨어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불보듯 뻔했다.멍청한 운전수의 해고는 기정사실이었고 보좌관과 둘이서 복날 개 맞듯이 얻어맞을 것이다.겁에 질린 보좌관은 운전수의 옆구리를 마구 쥐어박았다.

"빨리 차 돌려! 뭐하는 짓이야!"

그런데 옆에서 아무리 발광을 해도 운전수는 여전히 핸들을 꾹 잡은채 미동도 없었다.미시마 보좌관은 사태가 뭔가 심상치않다는걸 본능적으로 알아챘다.운전수는 조금씩 굳어가는 그의 얼굴을 슬슬 곁눈질하며 낄낄거렸다.

"크크크큭!"

"뭐야? 너 미쳤어? 왜 웃는거야? 내가 지금 장난하는줄 알아?"

"넌 내가 아직도 운전수로 보이나?"

"뭐야? 이 자식이?! 돌았나!"

보좌관은 강제로 차를 세울 생각으로 핸들을 냅따 낚아챘다.

그런데 아무리 힘을 줘도 핸들은 꿈쩍도 안했다.놀란 보좌관은 마치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찔끔하면서도 그 운전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러고보니 운전수의 얼굴이 좀 이상했다.

그 운전수는 결코 살아있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피부는 마치 말라붙은 점토처럼 쩍쩍 갈라지고 있었고 흩날리는 머리카락 속에서 유난히 시뻘건 안광이 번쩍였다.그 기괴한 몰골에 보좌관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사이에 차는 어느덧 고속도로 외곽의 험준한 산길로 접어들었다.

"이쯤이면 인적이 드물겠지? 안그래?"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거야!"

"너희 둘을 조용히 처리하긴 안성맞춤 아니겠어?"

"무슨 짓을!"

겁에 질린 보좌관이 다시한번 핸들에 달라붙었지만 그 운전수는 보란듯이 액셀을 힘껏 밟았다.강렬한 엔진소리와 함께 계기판의 바늘이 무서운 속도로 움직였다.근처를 달리던 차들이 뒤로 휙휙 달아나고 차창을 때리는 바람소리가 고막을 찢을거 같았다.

"우하하하하! 아가사 공주님 만세! 아틀란티스 만세!"

운전수는 핸들을 힘껏 꺾었다.

마츠야마 의원의 관용차는 그대로 가드레일을 힘껏 들이받았다.

그 아래는 50미터 높이의 벼랑이었다.가드레일을 뚫고 나간 차량은 속절없이 공중제비를 돌며 까마득한 벼랑으로 굴러떨어졌다.벼랑으로 굴러떨어진 차량은 바윗덩이와 부딪치며 마치 종이조각처럼 찌그러졌고 곧 대폭발을 일으켰다.

=======================================================

마츠야마 의원의 관용차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사이타마의 산길에서 전소된채 발견됐다.그는 다케시마 법을 발의한 당사자였으니 새로운 일왕의 등극과 더불어 한참 기세를 얻고있던 국수정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그런데 그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국수정 의원들을 대상으로 한 의문의 사건사고가 줄을 잇기 시작했다.마츠야마 의원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그 다음날.국수정의 최고위원중 하나인 기노시타 의원이 출근길에 한 청년으로부터 피습을 당했고 대한(對韓)강경파로 유명하던 마쓰이 의원도 자택에서 숨진채 발견됐다.

마츠야마 의원의 죽음이 불러온 연쇄적인 죽음.

일본 경찰은 마츠야마 의원의 차량에서 반파된 불랙박스를 수거해 정밀감식에 들어갔지만 손상이 너무 심해서 영상을 확보하는데는 실패했다.

의원들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국수정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의문사가 꼬리를 물면서 국수정 의원들이 바깥출입을 자제하는 가운데,

일본에 잠입한 용철 일행은 여전히 유휴인 온천지대에서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유휴인지역은 해발1584m의 유우다케산이 빙 둘러싼 산간분지다.

이 분지의 가장 낮은 곳엔 긴린코(金鱗湖)라는 호수가 있다.이 호수엔 옛부터 잉어가 많아서 그 잉어들이 수면위로 뛰어오를때면 석양을 받은 잉어의 비늘이 반짝반짝 빛난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용철일행의 숙소는 호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여행코스와 인접해있었기에 어떤 시간에도 사람들을 볼수 있었다.

"아함~"

용철은 숙소를 나서자마자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간밤에 너무 거하게 놀았는지 몸 여기저기가 쑤셨다.여자들 등쌀에 같은 숙소를 쓰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어울리지 않을수는 없는지라 술마시고 노는 방을 따로 얻었다.그 거점여관은 맴버들이 묵고 있는 숙소에서 5분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벳부의 명성때문에 최근까지 유휴인을 찾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일본 여자들이 가장 즐겨찾는 온천이 됐고 요즘은 외국인들도 자주 찾아온다.용철도 대학때 벳부를 가본 적이 있지만 여행하는 내내 사람때문에 곤욕을 치뤘다.그러서인지 상대적으로 조용하면서 아가자기한 이곳이 더 마음에 들었다.

숙박업소 밀집지역에서 호수로 가는 길은 딱 승용차 한대 들어갈만큼 좁은 길이었다.

그나마 길 양옆으로 민가를 개조해서 만든 온갖 가게들이 즐비했고 거길 들락거리는 사람들때문에 차량이 진입할 여유는 전혀 없었다.도쿄를 비롯한 대도시를 다녀보면 항상 사람들이 쓸데없이 바빠보였다.그런데 이곳에서만은 일본인들도 느긋했다.

시간이 멈춘 곳.

지금의 이곳이 딱 그랬다.

"아! 용철씨!"

그 관광객들 사이에 끼어 호수쪽으로 터덜터덜 걷다보니 멀리서 샬럿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니 20여미터쯤 뒤에서 그녀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굳이 오던 길을 되돌아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녀가 오기까지 기다려줬다.

"어디가요? 식사는 하셨어요?"

"네. 우리 숙소에서 먹었습니다."

"범석씨는요?"

"그놈은 아직 자요. 어제 쳐먹은 술이 아직까지 안깬다나 어쩐다나."

용철은 꼭 남 이야기처럼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런데 그녀에겐 그 퉁명스런 반응도 꽤 재미있었던 모양이다.용철이 채 말을 끝내기도전에 그녀는 한손으로 입을 가린채 살며시 웃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녀의 복장도 점점 서민적으로 변하는거 같다.

처음 만났을때는 시커먼 정장에 시커먼 선글라스를 써서 무슨 FBI비밀요원쯤으로 보였다.그때 느낀 카리스마가 장난이 아니라서 지금도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차림새가 위화감없이 다가갈수있는 복장은 분명 아니었다.그런데 그랬던 그녀가 지금은 현지인속에 섞여있어도 구별할수 없을만큼 수수한 복장을 하고 있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복장이 수수해지다보니 우연히 딱 마주친 사람을 제외하곤 딱히 그녀에게 눈길을 주는 사람도 없었다.사람들이 이쪽에 신경안쓰고 전부 제갈 길을 가니 오히려 그게 더 편했다.유명해지기전엔 신문에 이름석자 내거는게 그렇게 부러웠는데 한국 최강의 능력자가 되면서 사람들의 시선이 그렇게 부담스러워졌다.

"근처에 좋은 곳이라도 있나봐요?"

"네. 여기서 조금만 가면 긴린코라는 호수가 있는데 유휴인을 찾는 사람이라면 꼭 가보는 곳이죠.그냥 호수라서 별로 대단한 볼거리는 못됩니다만..."

"호수라...낭만적이네요."

"무슨 낭만까지...."

샬럿은 주변을 살살 살피더니 용철의 팔을 냅따 잡아챘다.

용철은 반사적으로 찔끔했지만 그럴수록 그녀는 팔 잡은 손에 더더욱 힘을 줬다.

"싫어요?"

"아뇨. 싫다기보단 유부남인 제가 이렇게 이러는게 좀 아닌거 같아서요."

"뭐 어때요. 우리가 불륜 저지르는 것도 아닌데."

"그건 그렇습니다만."

"밥만 먹고 어떻게 사나요? 이거 한국 사람들이 하는 말 맞죠?"

"네. 간혹 그런 말을 하죠.

익숙한게 제일 좋은 법이지만 익숙한 일만 하다보면 인생이 지루해지니까요."

"그러니까 이런 경험도 필요한거 아니겠어요?"

용철이 찔끔하자 못마땅한듯 살짝 눈을 흘키던 그녀는 금방 또 배시시 웃으며 달라붙었다.만약 밀리아가 곁에 있었다면 도끼눈을 뜨고 달려왔을지도 모르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녀는 곁에 없었다.하긴 샬럿과 잠시 같이 다닌다고 해서 그게 부인을 배신하는 행동은 아니었다.그녀와 바람을 피울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으니 말이다.만약 그녀가 남자였다면 이런 고민을 할 이유도 없었겠지만 여자라서 좀 곤란한 일이 자주 생겼다.

호수로 향하는 길가엔 유난히 상점이 많았다.

모든 상점은 민가를 개조해서 만들어졌지만 여러가지 기념품을 파는 가게에 편의점에 시내에서나 볼수있을법한 아이스크림 가게도 있었다.그 모든 가게가 하나같이 일본스럽다.

용철의 손을 잡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샬럿은 한 기념품 가게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구경 좀 하고 가요."

"귀찮..."

그냥 호수 근처에서 잠시 산책이나 할까했던 용철은 가게를 구경하는게 귀찮았다.

그런데 그녀는 그 귀찮아하는 모습이 꽤나 불만스러웠던 모양이다.귀찮은 표정을 짓자마자 그녀가 슬쩍 실눈을 떴고 용철은 헛기침을 하며 슬쩍 고개를 돌려버렸다.

'하긴 구경 좀 하고 간다고 달라질건 없겠지.'

용철은 혹시 마리엘이나 밀리아가 있나싶어서 근처를 살살 살피면서 같이 구경하는척 했다.만약 자신이 리더가 아닌 그냥 평범한 대원이었다면 이럴 일도 없었겠지만 리더는 항상 모든 대원을 챙길 의무가 있었다.그게 남자던 여자던.이렇게 잠시 시간을 내주는 것만으로도 샬럿이 만족을 얻는다면 리더로서 충분히 시간을 낼 용의가 있었다.

기념품 가게에서 파는 것들은 하나같이 평범했지만 그 평범한 것들을 진열하는 솜씨나 이리저리 꾸미는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다.샬럿은 이 가게 저 가게를 오가면서 정신없이 꺅꺅거렸다.능력자 지부장으로 오래있었던 사람이라 다른 여자들하곤 좀 다를줄 알았는데 이런걸 보면 이 여자도 마리엘이나 세희와 별로 다를 것도 없는거 같다.

나무로 만든 투박한 게다(일본 나막신). 꼬치에 꿴 모찌(찹쌀떡). 그리고 분을 바른듯 얼굴이 하나같이 하얀 도자기 인형까지.전부 어디서나 볼수있는 평범한 물건이지만 일본인답지 않게 느긋하게 걷는 사람들 곁에서 구경하니 이것도 꽤 색다른 재미였다.

그녀는 마치 사춘기 소녀처럼 뭔가 귀여운걸 발견하면 정신없이 꺅꺅거렸다.일본은 뭐든 귀엽게 만드는 재주가 탁월했으니 여자들에게 제일 좋은 관광지인지도 모른다.용철을 이끌고 여기저기 다니던 그녀는 한 도자기 인형 가게 앞에서 아예 넋을 놓았다.

너무너무 귀여워서 미치겠다는 표정.

"사드려요?"

"아뇨."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그 얼굴엔 벌써 사달라고 쓰여있었다.

용철은 마침내 지갑을 꺼내서 귀엽게 생긴 인형을 몇개 샀다.안그래도 마리엘과 세희에게 대체 뭘 사줄지 고민했는데 샬럿이 도자기 인형을 좋아하는걸 보니 그 여자들에게도 괜찮을거 같았다.옆에서 두손을 꼭 모아쥐고 있던 그녀는 용철이 인형이 든 봉지를 내주자 마치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어머. 고마워요."

"뭘요."

"나 어떡해. 용철씨한데 선물받았어."

그녀는 봉지를 받아들고 부끄러운지 혀를 살짝 내밀었다.

"...."

그 도자기 인형은 몇푼 안하는 물건이다.

수아같이 허영심이 강한 여자들에겐 절대로 안통하는 선물이다.그런데도 샬럿은 그 선물을 너무나 고맙게 받았다.그걸 보면 그녀도 선물 자체의 가치보다 그 마음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물질만능주의가 세상을 지배하면서 많은 여자들이 속물이 됐지만 아직도 돈보단 사람의 마음을 중시하는 괜찮은 여자들도 있다.

마리엘. 세희. 그리고 샬럿까지...

용철의 곁에 있는 여자들은 하나같이 그런 여자들이었다.

토산품 가게들을 지나서 조금 더 내려가니 약간 커브길이 나타났고 길 양쪽에 나무가 우거져있다.간소한 복장의 관광객들이 저마다 손에 봉지를 들고 그 길을 걷고있었다.용철도 샬럿과 함께 그 길을 조용히 걸었다.딱히 데이트 코스라고 할만한 곳은 아니지만 주변이 조용하고 산에서 부는 바람도 시원해서 그 어떤 유명관광지보다도 좋았다.

그렇게 걷다보니 길은 조금씩 좁아졌다.

아스팔트 길이 시멘트 길로 바뀌고 길 양쪽엔 우거진 나무대신 이상한 덩굴이 더 많이 보였다.여름의 끝자락이었지만 아직 가을은 올 기미가 없다.멀리 넘어다보이는 산은 여전히 푸르렀고 길가의 덩굴들도 여전히 왕성한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다.

그 좁은 길을 지나서 한참 걸어가니 시야가 탁 트였다.

고동색의 나무 난간이 제일 먼저 눈을 사로잡았고 그 건너편으로 조용히 흔들리는 수면이 보였다.호수라고 해서 꽤 깊을줄 알았는데 난간주변의 수위는 기껏 발목까지 찰 정도로 극히 얕았다.비록 긴린코의 상징인 잉어는 찾지 못했지만 조용히 수면을 관찰하니 여러가지 물고기들이 꽤 많이 보였다.

"앗! 용철씨! 저기 봐요! 오리! 오리!"

"아...그러네요."

샬럿이 호수 건너편을 가리키며 그 자리에서 팔짝팔짝 뛰었다.

그쪽을 바라보니 주황색 주둥이를 가진 물새들이 수면위를 한가롭게 떠다니고 있었다.샬럿은 오리라고 했지만 생김새는 거위와 더 가까웠다.그런데 이놈들은 야생오리가 아니었는지 관광객을 보자마자 알아서 다가왔다.

야트막한 호수위로 산그림자가 조용히 드리우는 곳.

화려한 볼거리는 없었지만 넋을 놓고 호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곳이었다.호수 건너편 유우다케 산자락에는 란푸샤 레스토랑을 비롯한 몇몇 건물이 서있었는데 차라리 그 건물들은 없는게 나을뻔했다.호수 주변의 풍광은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좋았지만 그 건물들이 뭔가 이상하게 눈에 거슬린다고나 할까.

용철은 난간에 몸을 기댄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산바람이 너무 시원해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곳이었다.

"근데 우리...."

"네."

사실 같은 팀원이었기에 우리라는 말이 익숙할때도 됐지만 그녀에게 들으니 뭔가 기분이 묘했다.만약 이 말을 남자의 입에서 들었다면 어땠을까.

용철은 멀리 유우다케 산을 바라보며 힘껏 심호흡을 했고 샬럿은 그런 용철의 곁에서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제 밤에 작전이 시작됐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근데 우리는 참가하지 않는건가요? 어제 술 마시고 노는거 즐겁긴 했는데 이대로 계속 시간만 보내기엔 뭔가 좀 불안할 생각이 들어서요."

"우린 그냥 놀러온게 아닙니다."

"그건 알아요."

"우린 어디까지나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여기 있는겁니다.

작전은 어제 저녁부터 빈틈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용철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구겨진 신문 한장을 꺼냈다.

제 1면 기사로 마츠야마 의원 사건을 다룬 바로 그 신문이었다.

"지부장님. 모든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최대한 선량한 일본인들의 피해없이 군국주의자들만 처단해야 합니다.현재 일본 국회를 장악하고 있는 국수정 의원들은 대다수 괴수나 다름없는 놈들입니다.그렇다고 우리가 일본 국회로 난입해서 놈들을 없앤다면 분명 문제가 생기겠죠."

"그럼 설마...이 사건이..."

"네. 어제 저녁에 밀리아가 후쿠오카 인근에서 워프게이트를 열었다고 했죠? 대마도 인근에 있던 아가사 공주님의 군사들이 그 게이트를 통해 전부 일본으로 넘어왔습니다.후쿠오카인근 야산에서 집결한 군사들은 게이트를 통해 오사카로 도쿄로 넘어갔습니다."

"그럼 아틀란티스 전사들이 일본 의원들을 하나하나 없애고 있다는거군요."

"네. 우리가 처치할 놈들은 일본의원이 아니라 의원들을 돕고있는 비밀상인들입니다.그놈들도 누가 의원들을 죽였는지 아직 모르고 있겠지만 곧 진실을 알게 되겠죠.그럼 국수정이 세력을 잃기전에 어떻게든 전쟁을 일으키려고 할겁니다.그럼 후쿠오카 인근에서 게이트를 열고 부산으로 넘어가려고 하겠죠.우리가 아무리 스텔스 포션을 마시고 기척을 지운다고 해도 후쿠오카 시내에 있으면 언젠간 놈들에게 발각될겁니다.그때문에 후쿠오카에서 멀지않은 이곳에서 놈들의 공세를 기다리고 있는겁니다."

"그렇군요. 몰랐네요."

"앞으로 얼마 안남았습니다.

군국주의의 망령들을 싹 쓸어내고 전쟁을 막을겁니다."

용철의 눈은 굳은 의지로 불타고 있었다.

샬럿은 늘 그랬듯 그런 용철을 바라보며 두손을 꼭 모아쥐었다.

그녀는 이제껏 미국의 패권을 위해 모든걸 바치며 살아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미국이 아닌 한국을 위해 일하기 시작했고 용철을 단순한 부하가 아닌 동급의 존재로 인정하기 시작했다.지금은 용철이 기쁘면 그녀도 기뻤고 그가 슬프거나 좌절하면 그녀역시 마음이 편치못했다.

단순한 동료를 넘어서는 어떤 감정이 그녀의 가슴속에서 격류를 일으키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