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레커닝-172화 (17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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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

얼마후.

용철일행은 중동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능력자들 덕분에 파즈르 조직을 몰아내고 다마스쿠스를 수복한 시리아 정부는 용철 일행을 외국 대통령 이상의 예를 갖춰 극진히 대접했다.그리고 그 모습이 전파를 타면서 한국의 구용철이라는 한 능력자는 세계의 영웅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됐다.

사실 이런 용철이 귀국하면서 정부에선 특별한 환영식을 계획했지만 용철은 이를 사양했다.이런 식으로 외국에 나갔다와서 환영받는게 한두번도 아니니 환영식도 이젠 귀찮았고 그런 별 의미도 없는 행사때문에 더이상 국민세금을 낭비하는걸 원치 않았다.

용철이 환영식을 사양하고 훈장만 받아 조용히 집으로 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기자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용철을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들었어? 이번에 구용철이가 환영식을 사양했다는거?"

"저번에도 그랬잖아. 그게 뭐가 새삼스럽나?"

"그게 아니고 생각을 해봐. 누구나 영웅이 되면 우쭐대잖아.

세상사람들이 전부 자신을 우러러본다고 생각해봐.그게 얼마나 신나는 일이야?"

"그렇지."

"그런데 구용철이는 안그렇단 말이지.

정부에서 주는 훈장만 조용히 받아서 집에 갔데."

"대단하네. 어떻게 그렇게 담담할수가 있지?"

"환영식하는데 비용이 많이 들잖아.

저번에 구용철이가 귀국했을때 기자들이 왜 환영식을 거부하는지 물어봤나봐.그때 구용철이가 하는 말이 자기때문에 세금을 낭비하는게 싫데."

"역시 우리같은 사람들하곤 뭔가 틀려도 틀리다니깐."

"그러니까 영웅이지."

용철은 분명 세계적인 영웅이었지만 단지 힘만 센 영웅은 아니었다.누구나 힘을 가지면 우쭐하기 마련이고 나중에는 거의 틀림없다고 할만큼 거만해진다.하지만 용철은 결코 그러지 않았다.용철의 그 소탈한 성품은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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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영웅이 되고 최고의 훈장을 받았지만 서초동 구용철 자책의 일상은 이전과 별로 다를게 없었다.용철은 전사로서의 일이 없을때면 늘 그랬던 것처럼 해가 중천에 떠서야 일어났다.일어나자마자 부인이 챙겨주는 따뜻한 밥을 먹고 운동을 했다.애완토끼의 먹이를 주고 옥상에 있는 화단에 물을 주는 것도 영웅의 중요한 일상중 하나였다.

중동만큼 덥지는 않았지만 서울에도 여름이 한창이었다.

저 높푸른 하늘과 둥실둥실한 뭉개구름은 여름의 증거.

한낮에 모자없이 다니면 얼굴이 따가울만큼 햇살이 강렬했지만 나무 그늘에 들어오거나 마루위에 몸을 눕히면 시원하고 기분이 상쾌하다.단지 그늘에 들어왔을뿐인데 기분이 좋아지는건 이 계절이 여름이기 때문이다.공사장에서 일할때 여름은 가장 짜증나는 계절이었지만 사회적인 성공을 이뤄내고 삶의 여유를 찾은 지금은 더없이 즐거운 계절이었다.

용철은 옥상정원 한켠의 등나무 밑에 벌건 고무통을 갖다놨다.

딱 여름 한철만 사용할 용철의 전용 욕조였다.브라질에 있을때는 초호화 발코니 욕조에서 세상을 굽어보며 목욕을 했지만 지금도 나쁘지는 않다.브라질의 하늘과는 또다른 조국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빨간 고무다라이에서 목욕하는 것도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아아...좋구나....좋아....."

보통의 고무통이라면 용철의 그 커다란 몸뚱이가 다 들어갈리가 없었지만 이건 용철이 특별히 주문한 물건이었다.이제 돈도 벌만큼 벌었고 그에 걸맞는 명성을 얻었으니 설령 황금욕조를 쓴다고 해도 누가 뭐랄 사람도 없었지만 용철은 고무다라이를 더 좋아했다.

용철은 목욕통안에 고급 입욕제와 말린 장미 꽃잎을 뿌리고 노란 고무 오리를 띄웠다.

고무통의 테두리를 베게삼아 베고 파란하늘과 뭉게구름을 올려다보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화단 한켠의 해바라기 꽃잎을 스친 바람이 용철의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용철은 이 더운 여름을 시원하게 지낼수있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용철이 물속에 몸을 담그고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있을때 부엌에선 두 여자가 식사준비에 한창이었다.

돈에 쫓기지 않아도 될만큼 사회적인 성공을 이루고 느긋하게 쉬면서 부인의 헌신적인 보살핌을 받는건 아마 모든 남자들의 꿈일지도 모른다.

용철은 부엌쪽에서 흘러나오는 맛있는 음식냄새에 코를 킁킁대면서도 짐짓 관심없다는듯 슬그머니 눈을 감았다.

"오빠. 간식 시간이에요."

"응. 거기에 둬."

부르는 소리가 나자마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봤다.

아무리 관심없는척하려 해도 그녀가 순순히 속아주지 않는걸 보면 아마 그녀에 대한 애정이 늘 얼굴에 드러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늘을 찌를듯 솟구친 해바라기 그늘아래 하얀 쟁반을 든 마리엘이 수줍게 웃고 있었다.브라질에서부터 함께한 최초의 동지였고 지금은 베게를 나눠베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됐다.그런데 그렇게 가깝게 지내면서도 뭐가 그렇게 부끄러워서 항상 저렇게 수줍은 웃음을 짓는건지는 여전히 알길이 없었다.

"흐!"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갑작스럽게 터지는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사실 이미 이꼴저꼴 볼만큼 다 본 사이였으니 그녀가 그렇게 설레는 여자는 분명 아니었다.설레는 존재라기보단 오히려 잘아는 만큼 마음 편한 사람이었다.그런데도 용철에겐 그녀가 볼때마다 늘 새로운 존재였다.왜그럴까 왜그럴까 하면서 곰곰히 생각을 해봐도 여전히 그 이유를 알수가 없었다.

한가지 분명한건 그녀가 용철에겐 참 잘맞는 여자였다는 것이다.

그녀는 질투심도 별로 없고 순종적인 여자였다.

용철이 무슨 일을 하던 태클걸지 않고 옆에서 도와줄수 있는 여자였다.

"이건 뭐야?"

용철은 한참동안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그제서야 그 접시로 눈을 돌렸다.그녀의 피부만큼이나 하얀 접시위엔 콩나물이 수북하게 얹혀있었다.

"아구찜요. 오빠가 매운거 좋아한다고 어머님께 들었거든요."

"네가 아구찜을 했어?"

"네에~"

조금전 그 반응이 약간 기분 나빴는지 그녀는 살짝 눈을 흘켰다.

그런데 이렇게 살짝 토라지는듯 하면서도 남자를 난감하게 만들지 않는게 바로 그녀의 매력이었다.한번씩 삐치기도 했지만 살살 달래주면 금방 풀렸다.

"미안해. 네 솜씨를 의심해서 그런게 아니고...

아구찜은 상당한 숙련도를 요구하는 요리라서 그러지."

"맛 없어 보인다는거네요?"

"그게 아냐."

"그럼 뭐에요? 제가 평해구씨 집안의 며느리가 됐으니 음식을 배워야죠."

"알았어."

용철은 찔끔하며 손사레를 쳤다.

아직 목욕이 다 끝나지 않았지만 용철은 허겁지겁 고무통 밖으로 나왔다.화단 옆에 놔둔 탁상시계를 확인하니 벌써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어마....좀....가려요."

용철이 물밖으로 나오자마자 마리엘이 두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대단한 대물이 마리엘을 보고 잔뜩 고개를 들고 있었다.

"뭐 어때."

"남들이 볼지도 모르잖아요."

"누가봐. 여기서..."

"그래도..."

마리엘은 한번씩 손가락사이로 용철을 살피다가 또 찔끔하며 눈을 감았다.

용철의 벗은 몸을 침실이 아닌 정원에서 보니 뭔가 좀 민망했고 오랜만에 본 그 물건이 이전보다 더 커진거 같았기 때문이다.

"하...하여간 식사부터 하세요. 제가 물이랑 좀 갖고 올게요."

"응. 그래. 너도 얼른 와서 식사해."

"네네."

그녀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채 황급히 부엌쪽으로 달려갔다.

그 거대한 거시기를 보고 이상하게 기뻤지만 그렇다고 밝히는 여자로 보이고 싶진 않았다.등나무 아래 탁자에 앉아 그 아구찜을 들여다보던 용철은 자꾸만 식어가는 고기가 너무도 안타까웠다.이럴줄 알았으면 목욕을 좀더 일찍 끝낼걸 그랬나보다.

"여보! 빨리 좀 와!"

"네네! 곧 가요!"

어린 아내는 정신이 없었는지 두 손에 밥공기를 들고 헐레벌떡 달려왔다.

"죄송해요. 제가 좀 느림보라서..."

"죄송할건 없고 얼른 밥 먹자. 당신이 모처럼 준비한건데 식으면 안되잖아."

"그렇죠. 근데 맛이 있을까 모르겠네요. 최선을 다하긴 했는데..."

"맛이 없을리가 있나."

용철은 그녀를 재촉하며 얼른 숟가락을 들었다.

얼마전 마리엘과 결혼식을 올렸다.

아직 식을 치르긴 이른 나이였지만 그녀를 더이상 단순한 동거인으로 남겨둘순 없었다.때문에 식을 치르고 나서부터 간혹 그녀를 여보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녀는 여보라는 호칭보다는 이름을 불러주는걸 더 좋아했다.

아직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몰라도 여보 호칭을 좀 쑥스러워한다고 해야하나?

처음엔 반신반의하면서 숟가락을 들었지만 마리엘의 아구찜은 굉장히 맛있었다.

콩나물은 적당히 익어서 아삭아삭했고 간이 제대로 된 고기는 아주 쫄깃하고 맛있었다.용철은 입을 헤벌리며 한참 정신없이 먹어댔지만 곧 혼자 먹고 있다는걸 알았다.

"왜 그래? 안 먹구?"

그렇게 약간 따지듯이 물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두손을 모아 식탁에 턱을 괸채 그런 용철을 그저 말 없이 바라보기만 했다.브라질에서부터 그랬지만 그녀는 용철이 뭘 먹을때마다 늘 옆에서 웃으면서 자리를 지켰다.대체 뭐가 그렇게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얼굴엔 여전히 행복한 미소가 그치지 않았다.

"저는 안 먹어도 배불러요."

"뭐야. 그건...그런데 어딨어. 얼른 먹어."

"나 살찌면 안되는데..."

"살 안찌니까 얼른 먹어."

"힝!"

그녀는 귀여운 콧소리를 내며 몸을 살살 흔들었다.

"어이구~ 콱!"

용철이 슬쩍 주먹을 들이대자 그녀가 찔끔하며 피했다.

물론 이게 장난이라는건 그녀도 아는지 주먹을 피하면서도 혀끝을 살짝 내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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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해가 저물고 밤이 찾아왔다.

용철은 저녁을 먹자마자 서재에서 잠시 책을 읽었다.

일반인으로 살때는 책을 읽을 여유따윈 없었지만 지금은 모든게 가능해졌다.

그렇게 한참 책을 읽고 있을라니 서재의 문이 빼꼼히 열렸다.

용철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문을 연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맘보 맘보...!"

"뭐야."

토끼녀석이 입에 신문을 문채 서재로 기어들어오고 있었다.

일부 똑똑한 개나 고양이가 문을 연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문을 여는 토끼에 대해선 단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인간이 괴수로 변하면 모든게 동물수준 이하로 떨어지지만 이 토끼를 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닌거 같다.이놈은 토끼주제에 주인의 감정을 헤아릴줄 알고 앞발을 마치 손처럼 자유자재로 사용할수 있다.

보통 아무리 똑똑한 개라고 해도 잠궈놓은 문을 열수는 없지만 이놈은 가능했다.

"맘보 맘보!"

토끼는 용철의 발 밑에 신문을 내려놓고 뒷발로 일어선채 코를 벌렁거렸다.

"그래. 그래. 고맙다. 배추줄까?"

"맘보오!!"

배추라는 말을 알아들었는지 토끼가 펄쩍펄쩍 뛰며 발광을 했다.

"그래. 그래."

용철은 우선 읽던 책을 덮어놓고 거실로 나왔다.

거실엔 냉장고가 3개나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오직 애완토끼를 위한 것이었다.이전엔 부엌에서 나오는 채소 찌꺼기를 줬지만 얼마전부터 토끼를 위한 전용 냉장고를 두고 먹이를 신선하게 관리했다.

"어마. 오빠."

마침 침실에서 나오던 마리엘이 용철을 보자마자 얼굴을 붉혔다.

조금전에 저녁을 먹고 같이 TV를 볼때까지만 해도 조용하던 마리엘이 세희가 방에 들어가자마자 샤워를 해야겠다며 욕실로 들어갔었다.물론 용철도 그렇게 눈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라서 그녀가 대체 뭘 원해서 그런 행동을 하는지는 이미 훤했다.

그녀는 분명 섹스를 원하고 있었다.

브라질에 있을때는 하루에 2번씩 했지만 귀국하면서부터 횟수가 줄었고 최근엔 단 한번도 관계를 갖지 않았다.그녀는 딱히 성욕이 강한 여자는 아니었지만 당연하게 가지던 부부관계가 요즘 딱 끊기니 슬슬 조바심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용철을 그걸 잘 알면서도 책을 읽어야 한다면서 서재로 갔고 마리엘은 잔뜩 삐쳐서 혼자 침실로 들어가버렸다.그런데 혼자 베게를 껴안고 자려니 잠이 잘 안오는 모양이다.

그녀는 분명 화장실을 가려고 나왔지만 볼일을 보고 난 후에도 침실로 들어가지 않고 근처에서 한참동안 머뭇거렸다.

"왜 그래?"

"안 주무세요?"

"아니. 공부 좀 더하다가 잘려고. 거실에서 잘수도 있어."

거실에서 잔다는 말에 그녀의 얼굴이 급격히 굳었다.

물론 마리엘이 뭘 원하는지 알면서도 서재로 간건 그녀를 조금 놀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이렇게 한번씩 속을 살살 긁어주고 그녀가 삐쳤을때 달래주는게 용철의 특기였다.

그녀는 그런 용철을 원망스런 얼굴로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곧 고개를 떨궜다.

"더워도 배는 덮으세요. 이불 갖다드릴게요."

잔뜩 실망한 그녀는 침실쪽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에헷! 마리엘!"

용철이 앙증맞은 콧소리를 내면서 뒤에서 그녀를 냅따 껴안았다.

"어마!"

"내가 당신을 두고 혼자 잘수야 있나?"

"네?"

"장난이었어! 장난!"

"진짜...너무 해요."

그녀는 조금전의 가슴앓이가 억울했는지 잔뜩 울상을 지었다.

"미안해! 미안해!"

"흥!"

용철이 손사레를 치면서 애교를 부렸지만 그녀는 택도 없다는듯 고개를 홱 돌렸다.물론 그녀의 삐친 모습은 상당히 귀여운 편이었다.친구들 마누라를 보면 한번 삐칠때 인상이 장난이 아니었는데 그런 여자들에 비하면 이 여자는 뭘해도 귀여웠다.

"여보~ 사랑해~"

"됐거든요!"

"우으으으으응~~~!!"

용철은 고개를 짤랑짤랑 흔들며 온갖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애써 용철을 외면하려던 그녀도 곧 웃음을 터트리며 순순히 백기를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렇게 웃고 장난치면서 알콩달콩 사는게 용철의 꿈이었다.

세계적인 명성을 얻으면서 평범과는 이미 멀어졌다.

아틀란티스의 타락한 영웅들을 잠재우는 사명이 지금도 이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하지만 용철은 예나 지금이나 이렇게 소탈한 사람이었다.비록 그 진정한 모습은 영웅이란 이름에 가리워져 빛을 바래고 끝내는 잊혀졌지만 오직 마리엘만은 그게 용철의 진짜 모습이라는걸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용철은 영웅 구용철이 아닌 바로 지금의 이 장난스런 용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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