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레커닝-167화 (167/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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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평화유지군이 바그다드를 점령한지 얼마후.

용철 일행은 이라크에 억류되어 있던 한국인 인질들을 전원 구출했다.

지부장 샬럿과 용철을 위시한 능력자들이 중동으로 파견된 진정한 목적은 바로 한국인 인질의 구출이었다.정부는 인질구출에 많은 시일이 소요될거라 예상했지만 우수한 능력자들은 무탈하게 그 목적을 달성했다.

용철 일행이 바그다드 서쪽 15km 지점에 위치한 파즈르 조직의 비밀 아지트를 부수고 모든 인질을 구출하자 전국은 축제분위기였다.

각 언론사들은 능력자들의 활약을 제1면 톱기사로 다루며 일행의 용전을 극찬했고 김덕배 대통령은 일행 전원에게 무공훈장을 내리기로 결정했다.용철은 이미 4급 무공훈장인 화랑무공훈장 수훈자였지만 이번에는 급이 훨씬 높은 태극무공훈장을 추가로 받게됐다.

이로서 용철은 과거의 전쟁영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용철과 샬럿은 태극무공훈장을 그리고 그외의 대원은 화랑무공훈장을 받게됐다.살아있는 사람이 훈장을 받는건 그 자체가 대단한 명예였고 그 복록은 반드시 후세에 이어진다.먼훗날 용철을 비롯한 영웅들이 죽더라도 그 자손들은 그 영웅의 후손으로 모든 이의 부러움을 한 몸에 사게 될 것이다.김덕배 대통령은 특별지시로 중동에서 이름을 날리고 대한민국의 힘을 만천하에 알린 용철을 국빈의 예로 맞이하도록 했다.

"본국에서 훈장을 수여하기로 했답니다."

"네? 제가 훈장요?"

용철은 이미 무공훈장 수훈자였고 샬럿도 미국에 있을때 여러 훈장을 받은 경험이 있었다.때문에 거처를 지키는 미군장교가 이 소식을 갖고왔을때도 둘은 별 반응이 없었지만 다른 대원들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특히 팀의 하위맴버인 범석과 존슨, 인철은 도저히 믿을수가 없었는지 귀를 툭툭 치는가하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대기도 했다.

"무슨 말씀인지? 제가 훈장을 받았다구요?"

"네. 명단에는 장범석씨의 이름도 있었습니다."

범석은 그 미군장교가 장난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장교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신문에서 잘라낸 종이조각을 보여주자 약간 시큰둥하던 그 표정이 급변했다.

"내가 훈장을 받는다구...?"

그는 그 종이조각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근처에 앉아있던 용철과 샬럿을 돌아봤다.그건 왠지 그들이 받을 훈장을 가로챘다는 죄책감을 금할수 없었기 때문이다.범석은 그간 열심히 싸웠지만 용철이 세운 빛나는 전공때문에 그의 공은 항상 가리워졌다.물론 그는 용철을 시기하기보단 자신의 무능력을 탓했고 또한 용철에게 늘 미안해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훈장을 받는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인철은 수아에게 자랑할 생각에 들떴고 존슨도 한국에 완전 정착했다며 기뻐했다.그런데 범석은 기뻐하기보단 오히려 미안해 했다.

"저기 용철아."

"응?"

막 자리에서 일어나던 그런 범석을 돌아보며 잠시 눈을 깜빡였다.

다른 사람들은 훈장소식으로 들떠있었지만 이미 수훈자인 용철과 샬럿은 평소때와 다름없이 차를 마시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조금전에도 샬럿과 자리를 함께하며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그때 범석이 옆에 다가와서 쭈볏거렸었다.

만약 그가 범석이 아니라 성재였다면 다가와서 쭈볏거리는 시점에서 쫓아버렸을 것이다.

물론 지금은 친구도 아니고 뭣도 아니지만 그놈은 여자만 보면 어떻게든 수작을 걸려고 했다.그러니 만약 그놈이 능력개발부에서 쫓겨나지 않고 여기까지 따라왔다면 여자들에게 더 신경을 썼을 것이다.하지만 범석은 믿음직한 신사였고 여성에게 항상 정중했다.

즉. 그 쭈볏거리는 행동이 샬럿때문은 아니라는 소리다.

"잠시만요. 지부장님. 범석이가 할 말이 있나보네요."

"그래요? 천천히 이야기 나누세요."

"네. 죄송합니다."

샬럿과 잠시 밖을 돌아보기로 했지만 그게 그렇게 급한 일은 아니었다.

용철은 우선 샬럿을 먼저 보내고 범석에게 자리를 권했다.막사안은 조용했다.다른 맴버들은 훈장소식을 듣자마자 들떠서 흥얼대다가 핸튼 대령의 막사로 갔다.그들이 나간지는 꽤 됐지만 아직도 소식이 없는게 그 미군들과 샴페인이라도 터트리는거 같다.

때문에 마침 막사안엔 용철과 범석뿐이었다.

"왜?"

용철은 우선 범석에게 차 한잔을 권했다.

조금전에 미군측에서 개인 보급품을 갖고왔는데 그 안엔 스리랑카산 최고급 홍차가 들어있었다.샬럿과 제임스는 둘다 차를 좋아했고 샬럿은 특히 홍차를 좋아했다.

"아니. 그게 이번에 훈장말야."

"훈장이 왜?"

"네가 받아야하는걸 내가 대신 받은거 같아서."

"아~ 이 자식. 또 이상한 소리하고 있네."

범석이 꽤나 심각한 얼굴이었기에 용철은 그놈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나 궁금해했었다.그런데 자신을 불러앉혀놓고 하필 그 훈장 이야기를 하는걸 보면 아직도 자격지심을 버리지 못한거 같다.유감이라면 유감이지만 범석은 능력자가 되고부터 그 성격이 이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졌다.이전엔 호탕하고 남자답고 장난기 많은 성격이었다.그런데 능력자가 되고 같은 팀에서 활동하면서 말이 없어졌고 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게 아니고...나도 열심히 하지만 너한데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야. 이새끼야. 그딴 소리는 집어치워."

용철이 슬쩍 인상을 쓰자 범석이 찔끔했다.

사실 능력자가 되기전엔 둘의 입장은 정반대였다.체격이 좋고 성격이 호탕했던 범석이 늘 패거리의 리더였고 다른 친구들은 범석을 따르는 입장이었다.때문에 허튼 짓거리를 잘하는 성재에게 눈을 부라리며 충고하는 것도 항상 범석이었고 어려운 친구들을 챙기는 것도 범석이었다.그런데 지금은 모든게 정반대가 됐다.

그가 괴로워하고 의기소침해진 이유는 아마...

이전과는 너무도 달라진 자신의 위치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미안해서 그래."

"뭐가 미안해? 너도 할만큼 했잖아."

"하는거야 열심히 하지. 근데 늘 맘에 안들어서."

"그럼 됐지. 무슨 지랄이야."

용철은 벌떡 일어서서 그놈의 등을 툭툭 두들겼다.

"야. 이새끼야. 힘내. 충분히 도움되니까 그렇게 우거지상 하지마."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우리는 친구잖아."

용철은 그놈의 등을 토닥토닥 하다가 슬쩍 끌어당겨 안았다.

이건 이전에 범석이 친구들에게 하던 짓이었다.그 짓을 지금은 용철이 하고 있었다.모르는 사람끼리 만나서 악수를 할때도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이 심리적인 우위에 있다.친구끼리 서로를 안아주며 위로할때도 보다 강하고 큰 사람이 다른 사람을 안는 법이다.

"미안해. 용철아."

"이새끼야. 미안하다는 말 좀 그만해. 친구사이에 미안한게 어딨냐?"

"그런가? 그래. 어쨌든 고맙다.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강해질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너한데 도움이 되고 싶네.이제부터 네가 어딜가든 나도 같이 간다.난 별 능력은 없지만 그래도 한놈이라도 더 네 옆에 있는게 낫겠지.

"뭔가 좀 말투가 끈적끈적하다? 너 게이냐?"

"미친새끼."

그놈은 피식 웃으며 용철의 등을 툭툭 두들겼다.

용철은 과거의 범석이 그랬듯 많은 사람들을 포용할수 있는 리더로 성장했다.

범석을 위로하다보니 문득 성재가 생각났다.

인간 안되는 놈이라는건 알았지만 그래도 친구라고 생각해서 그 단점까지 받아들이려했다.하지만 전성호에게 붙어 스파이 짓을 한건 도저히 용서할수 없었고 설령 자신이 용서한다고 해도 샬럿의 분노를 감당할 길이 없었다.

'성재새끼는 어떻게 됐을까.

그 병신같은 새끼.그냥 일이나 똑바로 하지.왜 하필 그런 짓을 해서...'

성재는 지금 전성호와 함께 강원도 벽지의 한 교도소에 있다.

그 교도소는 범죄를 저지른 능력자를 가두기 위해 특수하게 만든 교도소다.벽의 두께는 일반 교도소와는 비교가 안되고 경계도 삼엄하다.한때 같은 캠퍼스에서 함께 울고 웃던 친구가 지금 교도소의 차디찬 감방에 죄수의 신분으로 갇혀있다.

사실 지금의 용철에게 마음만 먹으면 죄수 하나 빼내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대통령에게 편지 한장 보내면 모든게 해결된다.범석도 성재를 죽일 놈이라고 하면서도 한편으론 늘 그놈을 걱정하고 있었고 그건 용철도 마찬가지였다.하지만 용철은 그놈을 걱정하면서도 더이상 그놈에게 관여하진 않았다.죄를 지었으면 죄값을 치르는게 도리다.

그리고 지금 권력의 힘을 빌어 그놈을 빼낸다면 앞으로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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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핸튼 대령의 막사에선 파티가 한창이었다.

평화유지군이 바그다드를 성공적으로 점령하자 보쉬 미국 대통령은 유지군의 각 지휘관을 격려하고 보급품을 풍족하게 보내줬다.게다가 얼마전엔 본국에서 든든한 지원군까지 왔으니 바그다드 주둔군들은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축제분위기로 흥청거렸다.

"오 체키럽 예!

내가 후드 티를 입었다고 물건을 훔친다고 생각하지 마!"

"오오! 흑인 아저씨. 춤 진짜 잘 추는데?"

"내가 그래도 브루클린 뒷 골목에선 날렸다구!"

"분위기 좋고! 다들 열심히 흔들어보자!"

미군들은 하나같이 술에 취한채 쉴새없이 히히덕댔다.

취흥이 오른 존슨은 그 커다란 카세트를 둘러매고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고 만취한 미군들은 서로를 끌어안고 춤을 추며 온갖 난리법석을 떨었다.인철은 벌써 뻗어버렸지만 존슨은 여전히 힘이 남아도는지 술병을 통채로 들고 들이키며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이전같으면 뒷골목 흑인의 노래따위에 관심을 가질 사람은 아무도 없었겠지만 지금은 승전의 밤이었고 존슨은 분명 영웅 구용철의 악사였다.

사실 아무리 싸움에 이겼다고 해도 위험한 테러집단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군 전체가 술에 취해 흥청거릴순 없는 노릇이었다.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가능했던건 보쉬 대통령이 보내준 지원군과 특별지시 덕분이었다.대통령은 오늘 하루를 유흥절(遊興節)로 지정하고 평화유지군의 모든 장병들에게 음주가무를 허락했다.주둔군이 술을 마시고 즐기는 동안 테러조직은 미국에서 새롭게 파견된 지원군이 맡게 될 것이다.

"대단합니다. 대단해요. 이게 전부 구용철씨 덕분입니다.

그분은 미국의 영웅이며 세계의 영웅이에요!"

핸튼 대령도 오랜만에 술을 마시고 기분좋게 취했다.

사막에서의 싸움은 긴장의 연속이었다.언제 적이 나타나 막사를 공격하고 병사들을 죽일지 모르는 곳이었다.그런데 용철이 나타나면서 근처의 테러조직이 말끔하게 정리됐다.용철은 적들의 기척을 느낄수 있었고 20km밖의 살기도 능히 간파했다.

용철 덕분에 평화유지군은 적들의 비밀 아지트를 차례로 부술수 있었고 결국은 파즈르 조직을 이라크에서 완전히 몰아낼수 있었다.

그 덕분에 이렇게 오랜만에 술을 마시고 즐길수 있게 됐다.

"아...잠깐만. 잠깐만. 본국에서 온 발렌타인 17년산이 있는데...."

반쯤 눈이 풀린 핸튼 대령은 비틀거리며 케비넷쪽으로 다가갔다.

이번에 본국에서 물자를 풍부하게 보내줬지만 발렌타인 17년산은 지휘관용이었다.때문에 그는 그걸 받자마자 혼자 먹을 생각에 케비넷에 숨겨뒀지만 존슨과 나인철이 놀러오면서 생각이 바뀌었다.그들 덕분에 테러조직을 완전히 정리했는데 그깟 술이 문젠가.

"오! 발렌타인 17년산? 그거 비싼거 아님?"

"괜찮아요. 괜찮아요. 존슨씨가 드시고 싶으면 드려야죠."

발렌타인 17년산이라는 말에 존슨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는 브루클린 최악의 빈민가인 브라운스 빌에서 태어나 늘 없이 살다보니 비싼 물건이나 사람들의 시선에 관심이 많았다.그가 공무원으로 자리를 잡자마자 홍대 근처에 가게를 연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음...이 안에 있었는데..."

핸튼 대령은 케비넷을 열자마자 그 안에 팔을 집어넣고 휘휘 젓기 시작했다.

보통때같으면 금새 찾았겠지만 술을 너무 마셔서 그런지 앞이 제대로 안보였다.

"어...잠깐만."

대령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케비넷 안에서 뭔가를 잡기는 했는데 그게 술병이 아닌거 같다.술병치고는 너무 크고 또 말랑말랑한 것이 뭔가 좀 이상했다.그는 반쯤 감긴 눈을 억지로 뜨며 케비넷 안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헛!"

케비넷 안을 살피던 대령이 깜짝 놀라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 안에 왠 여자가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한손에 술병을 들고 있었는데 그건 대령이 그토록 찾던 바로 그 술이었다.

"어머. 미안해요. 술이 있길래 저도 모르게..."

그녀는 반쯤 마신 술을 대령에게 내밀며 슬쩍 일어섰다.

대령은 여자가 술병을 내밀자 무의식중에 그걸 받고 멍하게 서있었다.어떻게 대응을 하고 싶은데 너무 놀랐기 때문인지 아직도 눈앞이 캄캄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런. 이번 포탈은 여기인가요?"

"공주님. 조심조심 나오세요. 천장이 생각보다 낮아요."

"네~네~"

조금전 술을 훔쳐먹은 그 여자가 머리를 살짝 쓸어올리며 케비넷 밖으로 걸어나왔고 그 뒤를 또다른 여자가 뒤따르고 있었다.

술을 훔쳐먹은 여자는 비밀상인 밀리아.

그리고 밀리아의 안내를 받으며 케비넷 밖으로 나오는 여자는 아가사 공주였다.

"여기 구용철씨 계신가요?"

공주는 멍청하게 서있는 핸튼 대령을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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