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레커닝-166화 (166/215)

166====================

운명

용철은 우선 샬럿을 데리고 조금전 그 포로들을 찾았다.

그녀는 원래부터 용철이 무슨 말을 하던 믿을 기세였지만 그래도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고 신뢰를 얻는게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물론 세뇌당한 포로는 용철 앞에서 했던 그 말을 샬럿 앞에서도 똑같이 반복했다.

"리처드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인걸까요."

모든 진실을 알게된 샬럿은 입술을 꾹 깨물며 화를 참지못하는듯 했다.

사실 그럴만도 했다.그녀는 이제까지 미국의 이익이 곧 세계의 이익이라 생각했고 협회를 이끄는 리처드를 누구보다 신뢰했었다.말하자면 그녀가 그토록 중시하던 그 믿음을 리처드가 보란듯이 저버린 셈이었다.

"일단 대원들에게 알리고 대책을 논의하는게 급선무같네요."

"아무래도요...뭐....충격을 받을지도 모릅니다만."

이런 상황에선 샬럿보단 오히려 용철이 더 조심스러웠다.

샬럿은 리처드의 배신을 확인하자마자 동료들에게 진실을 알리고 당장 대응책을 마련하려 했지만 용철은 약간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게 낫다고 생각했다.그건 협회의 힘이 아직 건재했고 현재 중동에 파견된 미군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대원들에게 알리고 평화유지군 지휘부에도 이 사실을 알려야해요."

"잠시만요. 지부장님."

"네?"

"서두른다고 모든 일이 해결되는건 아닙니다.

우리 대원들이야 믿을수있다고 쳐도 평화유지군의 간부들까지 믿을순 없어요.

일단 리처드와 협회는 군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파즈르 조직이 리처드와 어떤 관계가 있다면 군인들을 기만하는 행위라는건 분명합니다.하지만 리처드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그게 군 전체의 공분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별로 없어보입니다."

"그럼....?"

"군 내부의 리처드 끄나풀들이 우리 말을 거짓이라고 몰아붙이면 어쩔겁니까? 진실을 밝히고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한채 모든걸 덮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럼 대체 어떻게 하자는거죠?"

"우선 이에 관련된 사항은 대원들과 논의할겁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군 수뇌부와 파즈르 조직이 교류하고 있다면 여기서 떠들어봐야 별 효과가 없습니다.그러니 일단 여기선 맡은바 임무를 다하고 차후에 리처드 일당의 진정한 속셈을 알아내서 그들을 두들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답답하군요. 알면서도 속아주는척 해야하나요?"

"어쩔수 없습니다. 우리 둘이서 모든걸 해결할순 없는 일이니까요."

둘은 이런저런 말을 주고 받으며 대원들이 모여있는 막사로 들어갔다.

마침 대원들은 다들 저녁식사를 마치고 난로옆에 둘러앉아 있었다.인철과 존슨은 벌써 오리털 침낭속에 들어가 있었지만 그외의 대원들은 벌써 이 생활에 익숙해진 모양이었다.마침 난로 옆에서 잡담을 하고있던 제임스가 샬럿을 보고 반색을 했다.

"다들 식사는 하셨어요?"

"네. 저희는 방금전에 먹었습니다. 지부장님은?"

"저도 조금전에 용철씨하고 같이 지휘막사에 가서 먹었어요."

"네에."

그러고보니 기름난로위에 몇개의 스테인레스 컵이 보기좋게 놓여있었다.

지휘막사를 비롯해서 모든 막사에는 커다란 기름난로가 있었는데 병사들은 그 난로위에 마른 꽁치같은걸 올려놓고 구워먹기도하고 차를 끓여먹기도 했다.

"마침 차를 끓이고 있었습니다."

"제임스씨답군요."

제임스는 능력자가 되기전부터 특수부대 소속으로 세계각지를 돌아다녔다.그런데 그가 어딜가나 빼놓지 않았던게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차였다.차 마시는걸 영국인의 정체성이라고 말한다면 그건 너무 지나친 비약일지도 모르지만 그는 그만큼 차를 즐겼다.

"두분도 이쪽으로 앉으시죠.

마침 존슨이 자리를 비워서 말이죠. 하하하!"

"근데 존슨씨는 괜찮을까요? 여기오면서부터 내내 안색이 안좋은데.."

샬럿은 제임스가 권하는 자리에 앉으면서도 오리털 침낭속에서 미동도 없는 존슨을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봤다.그는 흑인이라 그런지 추위에 극히 약한 편이었다.

"인간은 죽기전까지 자기 능력의 반의 반도 못쓰고 죽습니다.

잠재력은 무한하지만 그걸 개발하는건 보통 일이 아니라고나 할까요."

제임스는 걱정하지말라는듯 어깨를 으쓱했다.

"추위타는거하고 잠재력은 무관한거 같은데...."

옆에있던 범석이 태클을 걸었지만 제임스는 아예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그는 유난히 느끼한 표정으로 눈을 반짝이며 샬럿을 바라봤다.늘 그랬지만 예나지금이나 그의 관심사는 샬럿뿐이었다.비록 늘 강조하던 그 영국신사의 자존심때문인지 적극적인 공세는 펴지못하고 있었지만 그가 샬럿에게 관심이 있다는건 누가봐도 알수 있었다.

"자. 제가 정성껏 끓인겁니다. 다들 맛 한번 보세요."

"어머. 고마워요."

제임스는 샬럿에게 제일 먼저 차를 권하곤 다른 사람들에게도 찻잔을 돌렸다.

"그런데 지휘막사에서 뭔가 중요한 브리핑이라도 있었나보죠?"

찻잔에 입을 갖다대고 한참 차맛을 음미하던 범석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는 원래부터 과묵한 편이라서 웬만해선 입을 열지 않는 편이었지만 조금전 용철과 샬럿의 출타가 생각보다 길었던 탓에 모든 대원들이 궁금해하고 있었다.

"아뇨. 작전문제때문에 간건 아니구요."

샬럿은 그렇게 운을 떼곤 슬쩍 용철의 눈치를 봤다.

원래 그런 중요한 일에 대해선 지부장이 이야기하는게 상례였지만 지금 팀을 이끄는 실질적인 리더는 샬럿이 아닌 용철이었다.그건 그만큼 그녀가 용철의 의지하게 됐다는 증거이기도 했지만 그건 그만큼 용철의 기량이 향상됐기에 가능했다.

"제가 이야기하죠. 이제부터 다들 잘 들으세요."

용철은 드디어 동료들의 앞에서 모든 진실을 밝히기 시작했다.

====================================================

한편. 이곳은 아틀란티스.

공주 아가사는 타 대륙에서 유입된 괴수들을 처단하기 위해 북부 원정을 떠났지만 다른 영웅 아테발트의 도전에 직면해야 했다.두 세력은 본도 중앙부의 펜-아필레이 계곡에서 한달내내 격전을 벌였지만 끝내 승부를 내지못했고 전선은 끝없는 교착상태에 빠졌다.

"큰일이에요. 이대로 시간을 끈다면 우리쪽이 불리해질건 자명한 이치."

"그러게나 말입니다.아테발트가 왜 갑자기 깨어나 우리를 공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을 빠른 시일내에 밀어버리지 않는한 북부지역이 괴수의 소굴이 될건 안봐도 뻔하죠."

"난감하군요. 그래도 한때는 저와 뜻을 같이하던 동지였는데 왜 이렇게 됐는지."

공주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부하들은 전부 영체(靈體)라서 원칙적으로 죽음과 무관하지만 그건 아테발트쪽도 마찬가지였다.다만 공주의 부하들이 영이 깃든 돌인형의 형상이었다면 아테발트쪽은 전부 되살아난 시체라는 점이 다를뿐이었다.이때문에 서로 죽고 죽이고를 숱하게 반복했지만 양측의 전력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다를게 없었다.

다만 아테발트가 길을 막으면서 공주 군대의 진군이 사실상 차단됐고 본도의 북부로 모여든 괴수들은 지금도 빠른 속도로 세를 불리고 있었다.만약 그들이 본도에서 정비를 마치고 다시 다른 대륙으로 넘어간다면 상당히 골치아프다.

"아틀란티스를 더럽힌 배신자들을 빨리 처단해야 합니다."

공주는 옥좌의 팔걸이를 꾹 움켜쥐며 좌중을 둘러봤다.

"음!"

"으흠!"

공주는 뭔가 대책을 내놨으면 좋겠다는 눈치였지만 신하들은 대답대신 헛기침만 했다.아침부터 대책회의를 열고 있었지만 딱히 좋은 의견이 나오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유적의 탐사팀은 아직 소식이 없습니까?"

"얼마전에 전서구를 보내긴 했습니다만 아직 답신이 오지 않고 있습니다."

"난감하군요."

잠시 일어섰던 공주는 곧 옥좌에 털썩 걸터앉으며 한숨만 내쉬었다.

얼마전 그녀는 민첩한 부하들을 뽑아 아틀란티스 중부의 한 유적을 조사하게 했다.중앙평원에는 옛 아틀란티스 민족들의 정신적인 고향인 아르카디아가 있다.그곳은 아틀란티스의 성지이며 또한 이 땅의 기반인 이 세상에서 제일 높은 탑이 서있던 곳이다.비록 대륙의 침몰과 함께 그 탑도 자취를 감추고 모든게 전설속으로 묻혔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가 오천년전 그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 아틀란티스의 대신관이 이 대륙의 멸망을 예언했을때.

그 당시 이 대륙을 통치하던 최강자들은 스스로의 목숨을 댓가로 대륙의 멸망을 늦추려했다.여섯명의 최강자는 각자의 목숨을 '어떤 그릇'에 담아 그 탑안에 봉인했는데 그 그릇안에는 과거 이 땅을 지배하던 그들의 완전한 힘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여섯명의 최강자가 스스로의 목숨을 담아 그 탑에 봉인한후.

탑 주변에서 숱한 이적이 일어났다.칼날이 무디어진 검이 반짝반짝 빛을 내며 의지를 가졌으며 추위를 막기위해 꼈던 귀마개로 다른 이와 말을 주고 받을수있게 됐다.그렇다.비밀상인이 파는 물건들은 이때 그 탑을 중심으로 생겨났던 아틀란티스의 유산.

대륙의 여섯영웅이 삶을 포기한 댓가로 만들어낸 지구상의 마지막 신기(神器)였다.

결국 능력자들이 가진 모든 것의 기반은 바로 이들.

그리고 이들이 성지의 탑에 봉인한 힘이었다.

공주기사 아가사.

평원의 대왕 아테발트.

홍염의 마도사 지그하르트.

서안(西岸)의 여제 샤르테.

불멸의 지도자 길버트.

대현자 아프로스.

그들은 아틀란티스의 육망성이라 불리며 본도를 통치하던 왕들이었다.

아직 능력자가 나타나기전.

괴수들의 공격으로 전세계가 거의 멸망직전에 몰렸지만 그 괴수들은 어디까지나 위대한 왕을 버리고 도망친 겁쟁이들이었다.능력자를 탄생시키는 원천이 됐고 또한 모든 신기한 물건들을 만들어낸 이들의 힘에 비하면 괴수들은 지극히 하찮은 존재였다.

"시간이 얼마가 걸려도 좋습니다.

우리 힘만으로 아테발트를 제압할수 없다면 '생명'을 가진 자에게 맡길수밖에 없죠.그가 어떻게 지상인으로 다시 태어났는지는 모르지만 이건 분명 대단한 인연이에요."

"그 구용철이라는 지상인 전사를 말씀하시는겁니까?"

"물론."

공주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용철을 처음봤을때부터 언젠가 만난적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건 분명 단순한 착각은 아니었다.비록 자신의 목숨을 탑에 바치고 몇천년동안 잠들어 있었지만 살아생전의 기억은 되살아난 지금도 여전히 또렷했다.

"전사 구용철이 제가 아는 '그 사람'이 맞다면.

지금의 혼란을 잠재울수 있는건 아마 그 사람뿐일겁니다.그리고 그 유적에 숨겨져 있는 유산이야말로 그 사람의 힘을 극한까지 끌어낼수 있을겁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