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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
그런 장치에 대해 물어볼 사람은 오직 비밀상인 뿐이었다.
평범한 일반인을 능력자로 각성시키고 전투에 도움이 되는 여러 장비를 지원한게 바로 비밀상인이었기 때문이다.요즘 비밀상인의 개입영역은 능력자 개개인에서 벗어나 지부운영에서 더 나아가서는 국가차원으로 확대되는 추세였다.
경기가 있었던 그날의 늦은 오후.
지금 일본을 비롯한 전세계 언론이 한국 팀의 승리로 떠들썩했지만 막상 그 기적적인 승리의 장본인인 한국 팀은 여느때와 다름없이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마리엘과 제임스를 비롯한 다른 맴버들은 협회에서 마련해준 숙소로 들어갔고 용철과 샬럿은 일단 뉴어크를 떠나 브룩클린의 한 찻집으로 향했다.
오늘 여기서 아주 중요한 사람을 만날 예정이었다.
"아! 여기에요! 여기!"
찻집에 들어서자마자 창가 자리에 앉아있던 한 여자가 일어서며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입니다. 미사씨."
"네. 정말 오랜만이네요. 구용철씨."
윤기가 번들번들하는 까만색 정장차림의 그녀는 샬럿의 거래상인인 미사였다.
원칙적으로 모든 상인들은 단 1명의 능력자와 거래할수 있으며 다른 능력자를 만나는건 암묵적인 금기였다.다만 여긴 몇가지 예외가 있었다.지금의 용철과 샬럿처럼 두 능력자의 이해관계가 완전히 일치할 경우엔 해당 비밀상인들도 자연스럽게 교류할수 있다.
"음! 흠!"
미사 옆에 앉아있던 밀리아는 그 꼴을 보자 헛기침을 하며 새침하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오. 밀리아씨."
용철은 오랜만에 밀리아를 만나 반가웠고 그녀를 보자마자 즉시 반색을 했다.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창쪽으로 돌린채 딴청만 피웠다.
"미안해요. 미사씨가 먼저 보이길래 인사를 한거뿐이에요."
"흥! 흥! 흥!"
콧방귀를 뀌려면 한번만 하면되는데 굳이 세번씩 할 이유가 없었다.
그건 겉으로는 삐친척하면서도 속으론 반가워서 저러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자리에 앉죠. 용철씨는...."
샬럿이 미사의 옆자리에 핸드백을 내려놓았다.그건 그 자리를 찜하겠다는 소리였다.그런데 미사가 갑지기 씨익 웃으며 그 가방을 바닥에 내려놨다.
"용철씨는 이쪽에 앉으세요. 창가가 좋으시면 제가 통로쪽에 앉을게요."
"장난은 좀 그만 치시죠?"
미사가 용철에게 꼬리를 치자 밀리아가 금새 발끈했다.
그녀는 조금전까지만 해도 용철따윈 관심밖이라는듯 창밖만 내다봤지만 그러면서도 옆에서 하는 말을 듣기는 다 듣는 모양이었다.
"어머. 왜 그래요? 구용철씨한데 침이라도 발라두셨나? 별꼴이야."
"남의 남자에게 그게 무슨 해괴한 짓거립니까?"
"어머나~ 남의 남자?"
"엇! 그...그게...남의 능력자라고 하면 좀 어색하잖아요. 흠!"
그녀는 당황했는지 잠시 얼굴을 붉히다가 또 고개를 홱 돌렸다.
물론 이 둘이 당장 싸울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그걸 옆에서 보고있는 용철은 꽤나 난감했다.미사가 샬럿의 핸드백을 치우면서까지 자리를 권했지만 그렇다고 그 옆에 앉는건 단골 거래상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용철은 미사에게 잠시 고개를 숙여보이곤 밀리아의 옆에 앉았다.자리에 앉자마자 옆에서 들릴듯말듯 휴~ 하고 한숨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용철따윈 관심없다는듯 내내 창밖만 내다봤지만 실은 창문에 비친 용철의 일거수일투족을 꼼꼼하게 살피고 있었다.그걸 알면서도 미사옆에 앉는건 그녀를 무시하는 행위였다.다만 조금전에 그녀가 살짝 한숨을 쉰건 의외였다.상인이 능력자에게 연애감정을 가지는건 금기라고 말했던게 바로 밀리아 본인이었다.그런데 지금 그녀는 꼭 남자친구가 바람피울까봐 전전긍긍하는 그런 평범한 여자처럼 보였다.
물론 그게 그녀 나름의 단순한 변덕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주문은 뭘로 하실래요?"
"밀리아씨. 뭐 드실래요?"
용철은 미사가 메뉴판을 들이대자마자 밀리아를 돌아봤다.
그녀가 그렇게 쉽게 삐칠 여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가까운 사람부터 챙기는게 도리였다.그런데 그녀는 여전히 새침한 얼굴로 팔짱을 낀채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저는 아무거나요."
"그럼 저도 아무거나."
미사는 옆에 앉은 샬럿을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둘이 참 많이 닮은거 같네요."
능글능글한 미사는 또 농담을 지껄이려했지만 밀리아가 정색하며 쏘아붙였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장치 이야기나 하시죠."
"어머나. 미안해요. 우리가 만난 이유가 전부 그것때문인데..."
미사는 핸드백을 뒤적거리더니 거기서 조그만 컨트롤러를 꺼냈다.
무의식중에 그쪽을 쳐다보던 용철은 그 컨트롤러를 보자마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그건 낮에 샬럿이 주워왔던 그것과 놀랄만큼 유사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만 취급하는 물건이에요.
더 정확히 말하면 이런걸 만들수 있는 상인연합의 간부들이 전부 미국측이죠."
"미국에서만 취급하는 물건을 어떻게 일본 팀 주장이 가지고 있었을까요?"
"그건....별들에게 물어보세요."
용철은 꽤 진지한 얼굴로 물었지만 미사는 또 설익은 농담을 지껄이려했다.미사가 배시시 웃으며 시선을 피하자마자 용철 옆에 있던 밀리아가 발끈했다.
"미사씨!"
"어머나. 죄송해요. 단순한 조크였어요.
밀리아씨. 당신은 너무 과격해요. 그렇게 성질 부리다간 필경 오래 못살아요."
"시끄럽고 컨트롤러 이야기나 하세요."
"어흠. 그렇게 본론만 막 이야기하면 재미없는데.
뭐 어쩔수 없죠. 용철씨랑 좀 더 이야기하고 싶지만 성격 나쁜 여자때문에..."
미사는 밀리아의 성격을 지적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 말이 나오자마자 밀리아가 도끼 눈을 떴고 용철은 그저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그렇게 잠시 밀리아를 놀리며 시간을 끌던 미사가 갑자기 정색하며 용철을 바라봤다.
"구용철씨."
"네."
"이 컨트롤러는 미국측 비밀상인 수뇌부가 만든 병기.
바로 아틀란티스의 고대병기의 개량형입니다.이건 원래는 스파이들에게 쓸 목적으로 만든 장치에요.과거 아틀란티스에는 8개의 나라가 있었습니다.그 나라들은 서로를 침공하고 또한 침략당하며 발전하고 또한 쇠퇴했지요."
미사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아메리카노 잔에 살짝 입을 갖다댔다.
"비밀 임무를 수행하던 스파이가 적에게 잡히면 어떻게 되겠어요?
온갖 고문을 당하고 결국엔 자국의 정보를 적에게 밝힐수밖에 없겠죠.그래서 아틀란티스의 과학자들은 저런 장치를 개발한거에요.저 장치는 심장신호에 반응하는 폭발물을 옷속에 장착하고 그걸 원거리에서 조정해서 터트리기 위한거에요.스파이들이 정해진 시간안에 귀환하지 않으면 저 장치를 조작해서 그 스파이를 죽이기위해서죠.당신들이 지금 쓰고있는 모든 장치와 모든 무기 방어구는 전부 아틀란티스의 유산이에요."
"아틀란티스의....유산?"
"맞아요. 모든건 아틀란티스의 유산이에요.
그저 폭발물을 텔레포트 장치로 바꾼 것뿐이죠. 원천기술은 어디까지나..."
"능력자들이 쓰는 무기와 방어구가 모두 아틀란티스의 것이라구요?"
"그래요. 능력자들이 사냥하는 괴수는 사실은 아틀란티스의 후손.
그리고 능력자를 돕는 우리도 사실은 아틀란티스의 후손. 그리고 당신도...."
"네?"
"아틀란티스의 후손입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미사의 말을 듣자마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악질 범죄자들의 최종 종착역이라고 생각했던 괴수.그것이 실은 아틀란티스 인의 후손이라는걸 알았을때 이제껏 쌓아온 모든 지식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았었다.그런데 지금 미사의 말은 용철을 그때보다 더더욱 큰 충격속으로 몰아넣었다.평해구씨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평생을 대구에서 살아온 자신이 난데없이 아틀란티스 인이라니...
"그런 말도 안되는...저는 지구인입니다. 능력자로 선택되긴 했지만..."
"아까 제가 했던 말은 거의 농담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용철은 이번엔 밀리아를 돌아봤다.
만약 미사의 말이 단순한 농담이었다면 그녀는 분명 도끼 눈을 떴을지도 모른다.하지만 밀리아는 미사의 그 말을 담담하게 듣고 있었다.
"사실이에요. 용철씨.
이제까지 모든걸 숨기고 있었지만 지금은 진실을 밝힐수있게 됐어요.우리 상인들은 실은 모두 아틀란티스 인입니다.우리가 능력자가 될 사람을 고르는 기준도 바로 아틀란티스의 피를 갖고 있느냐 아니냐였죠.아틀란티스의 피는 곧 포식자의 운명.그 힘을 올바르게 쓰느냐 아니냐에 따라 능력자와 괴수로 완전히 상반된 길을 걷는 것이죠."
"그럼 그걸 이제서야 말씀하시는 이유는 대체 뭔가요?"
용철은 애꿎은 물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첫 만남에서부터 지금까지 밀리아는 상인조직에 대한 모든걸 숨기려 했다.포인트와 포인트를 보내주는 '그 분'에 대해 용철이 묻는 것조차도 꺼렸었다.그런데 지금은 이제껏 그토록 감추고자 했던 상인조직의 정체를 자신들의 입으로 술술 밝히고 있다.
"세상이 바뀌고 있기 때문이죠."
"세상이 바뀐다?"
"네. 곧 아틀란티스 인들이 이 세상을 뒤집어놓을 것입니다.
선한 아틀란티스 인은 능력자가 되고 악한 자는 괴수가 됩니다.그런데 지금도 선과 악의 갈림길에서 헤매는 자들도 분명히 존재하죠.그들은 선한 힘과 악한 힘을 동시에 갖고 있어요.그리고 그 어느 쪽에 무게가 실리느냐에 따라 계속해서 능력자의 길을 걸을지 아니면 괴수로 다시 태어날지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 말은 능력자 일부가 괴수가 될지도 모른다는 소리군요."
"일부가 아니에요. 상당수의 능력자가 괴수가 될 가능성이 있어요.
그리고 그건 물속에 가라앉았던 아틀란티스가 떠오르면서부터 정해진 운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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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틀란티스 인?"
미사와의 만남을 끝내고 찻집을 나섰지만 아직도 머리속이 혼란스러웠다.
자신은 분명 비밀상인에게 선택되어 악을 징벌하는 능력자였다.그런데 그런 자신이 실은 괴수와 같은 피를 가진 존재였다.그러고보니 아틀란티스에서 만났던 공주가 분명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처음엔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수가 없었지만 비밀상인들의 정체를 안 지금은 모든 의혹이 서서히 풀리는거 같았다.
[우리 언젠가 한번 만난 적이 있지 않았나요?]
[기억이 안난다? 하긴 너무 오래전 일이라서 기억이 안날지도 모르겠네요.]
[정말 인연이군요. 당신을 다시 이렇게 만날줄이야 꿈에도 몰랐어요.]
그 공주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를 생생하게 울리는듯 했다.
처음엔 단지 그 공주가 자신과 협력할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고 그때문에 그녀에게 호감을 느꼈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왠지 그게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었던거 같다.그건 아마 공주의 말대로 그녀를 어디선가 만났기 때문이 아닐까.
선의 아틀란티스 인. 그들은 능력자의 다른 이름.
악의 아틀란티스 인. 그들은 괴수의 또다른 이름.
그리고 선을 가장하고 있지만 실은 선과 악의 중간에 머무는 자들.
곧 다가올 혼돈(混沌).
그것은 선과 악의 정체성이 희미해졌을때의 혼돈.지금은 선을 가장하고 인간속에 섞여있지만 언젠가 중립을 지키던 자들은 능력자와 괴수중에 하나를 택해야 할 것이다.인류를 지키던 능력자의 일부가 괴수로 다시 태어난다면 이 세상에 그 어떤 혼란을 초래할지는 안봐도 뻔했다.그렇다면 그 비밀상인들도 선과 악으로 진영을 나누고 있다는 소리일까.
용철은 옆에 있던 밀리아를 돌아봤다.
앞만 보고 걷던 그녀도 마치 뭔가에 이끌린듯 이쪽을 바라봤다.
"용철씨. 그 일본 팀의 주장은 시작에 불과해요."
"그놈이 밀리아씨가 말했던 그런 놈인가요? 선과 악의 중간에 위치한..."
"그렇죠. 그는 분명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어요.
그런 자들이 하나씩 움직이면 분명 용철씨가 위험해질거라 생각했기에 모든걸 밝힌거에요.원래 거의 모든 비밀상인이 미국을 위해 움직였지만 이젠 선 진영과 악 진영으로 나뉠거에요.미국이란 세계경찰을 중심으로 뭉쳐있던 상인조직이 이젠 완전히 둘로 갈라지고 있다는 소리죠.곧 아틀란티스를 중심으로 격렬한 싸움이 벌어질거에요."
"그럼 그 컨트롤러는....
그게 미국에 협조하던 상인조직 수뇌부의 물건이라면 그걸 일본 팀의 주장에게 넘겨준건 분명 협회장인 리처드라는 소린데.그럼 협회장이 악 진영에 속한다는건가요."
"그건 아직 모르겠어요. 분명한건 그가 결코 절대 선은 아니라는거죠."
"으음...."
이제껏 세계의 모든 능력자가 미국을 중심으로 뭉쳤다.
몇몇 상인과 능력자들은 미국의 독주체제에 불만을 가졌지만 미국은 분명 모든 능력자 조직의 구심점 역활을 수행해 왔다.국가가 모든 구성원을 만족시킬수 없는만큼 조직내에서 불만이 나올지도 있지만 그래도 구심점이 있다는건 큰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이제 그 구심점이 사라지려 한다.
능력자는 인간세상을 괴수로부터 구해내는 절대 선.그 능력자 개개인의 성향은 결코 선이 아닐수도 있지만 밖에서 보는 능력자들은 분명 선한 존재였다.그런데 괴수를 토벌하고 사람들을 구하던 그들이 괴수와 비슷한 존재. 또는 괴수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
미국을 구심점으로 삼아 한덩이로 뭉쳤던 상인조직은 이제 둘로 갈라진다.그럼 능력자를 중심으로 발전했던 지금의 미국도 완전히 분해될수도 있다는 소리다.모든 능력자는 한때 같은 이익집단내에서 함께 활동하던 동지였다.모든 능력자의 목표가 괴수토벌이었던만큼 코어의 독점등 약간의 트러블이 있더라도 그것이 적대행위로 발전하진 않았다.
하지만 능력자들이 두패로 갈라지고 상인조직도 둘로 갈라진다면 한때의 동지는 곧 적이 된다.비록 궁극적인 목표는 미국의 이득이었지만 그래도 한덩어리로 뭉쳤던 그들이 이젠 완전히 갈라서게 된다.그리고 어느 한쪽은 사라져야 한다.
상인들이 이제껏 그토록 굳게 지켜왔던 비밀을 지금에서야 밝혔던건 그간 미국을 중심으로 뭉쳤던 상인조직 자체가 이젠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용철도 두가지 길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능력자로 남을 것이냐. 아니면 괴수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