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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용
갑판에 올라갔던 샬럿이 다시 플레이 룸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방 안은 아주 난장판이었다.
용철의 무사귀환과 생일을 축하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축하주가 너무 과했던 탓이었다.제임스는 이미 만취했는지 존슨의 허리를 껴안은채 코를 골았고 존슨과 나인철도 탁자위에 엎드려 있었다.여기저기 널부러진 그릇과 조금전 터트린 폭죽의 잔해까지.게다가 아직까지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제임스의 그 바다표범 요리에선 괴상한 냄새가 진동했다.
방안을 둘러보던 샬럿의 얼굴이 조금씩 굳기 시작했다.
"곧 중요한 손님이 오십니다. 일단 취한 사람들을 객실로 옮기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지부장님."
복도에 있던 수병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제임스와 존슨을 부축했다.얼마나 퍼마셨는지 그놈들은 걸음도 제대로 못걸었고 할수없이 병사들이 들것에 싣고 가야했다.
"왜 그러십니까?"
탁자에 턱을 괸채 반쯤 졸고있던 용철은 갑자기 병사들이 들어와 제임스와 존슨을 끌어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용철도 술을 마시긴 했지만 그놈들처럼 대책없이 마시진 않았다.때문에 약간의 졸음을 느꼈을뿐 거동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중요한 손님이 오셨어요."
"중요한 손님이요?"
"네. 공주님이 오셨어요."
"헛!"
공주라는 말에 용철은 얼른 일어나 옷을 툭툭 털기 시작했다.
샬럿은 공주의 방문을 알리곤 이번엔 수병들을 돌아봤다.그들은 제임스와 존슨을 비롯한 취객들을 각자의 객실로 옮겨놓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청소를 좀 부탁할게요."
"알겠습니다."
미군 수병들은 너저분하게 널려있던 빈 접시를 치우고 탁자를 깨끗하게 닦았다.빗자루와 대걸레를 든 병사들도 여기저기를 정신없이 쓸고 닦았다.취객들이 사라지고 갑자기 병사들이 나타나 부산을 떨자 주방에 있던 마리엘과 세희가 슬그머니 밖으로 나왔다.
"누가 오시나요?"
"공주님이 오세요. 그래서 준비를 하는거에요."
공주라는 말에 세희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지만 마리엘은 약간 멍한 얼굴로 눈만 깜빡거렸다.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아직 아가사 공주를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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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청소가 끝나고 모든 대원들이 탁자에 둘러 앉았다.
조금전 생일파티 음식은 마리엘과 샬럿이 거의 전담했지만 이번엔 미군 취사병들이 주방을 차지했다.그건 생일 파티가 어디까지나 용철의 지인들에 의한 사적인 모임이었다면 공주와의 대면은 다분히 공적이기 때문이다.
이전같으면 괴수 나라의 공주가 찾아온다는건 상상도 못했겠지만 용철은 이미 그들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다.그 공주가 용철을 도와준걸 보면 그녀가 기존의 괴수와 전혀 다른 존재인 것만은 분명했다.때문에 그녀가 대체 무슨 제안을 하려는건진 모르지만 그게 어떤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 같지는 않다.샬럿이 공주를 데려오기에 앞서 시끄러운 취객들을 내보내고 방을 치운건 바로 그때문이었다.
샬럿도 괴수가 기본적으로 사악한 존재라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먼저 호의를 보이는 상대를 무작정 배척할만큼 꽉 막힌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공주는 이곳 괴수들을 다스리는 우두머리.
그 우두머리와 친해질수만 있다면 최악의 잠재적인 위협을 제거하고 예정된 위기를 기회로 바꿀수 있을 것이다.이 만남이 가지는 의미가 그만큼 중요하니 최대한 격식을 차릴 필요가 있다.
그녀는 실수로 와인을 흘려 더럽혀졌던 옷을 갈아입었다.
용철과 세희도 옷을 갈아입었고 마리엘은 주방에서 밴 음식냄새를 제거한다고 탈취제까지 뿌렸다.다들 깔끔하게 차려입고 공주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흠. 이제 모시고 올게요."
"부탁드립니다."
"네."
탁자의 정중앙에 앉은 용철은 옷매무새를 고쳤다.
동석한 마리엘과 세희도 약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주방에서 쉴새없이 뚝딱거리던 수병들이 곧 준비한 음식들을 내왔다.
대다수의 승조원들이 평소엔 냉동식품으로 끼니를 때웠지만 아틀란티스의 공주쯤 되는 귀빈이 찾아왔는데 그딴걸 내놓을순 없었다.
곧 복도에서 또각거리는 구두소리가 나더니 샬럿이 플레이 룸으로 들어왔다.
"공주님이 오셨습니다."
탁자앞에 앉아있던 용철과 두 여자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고 음식을 나르던 병사들도 그 자리에서 근엄한 표정으로 거수경례를 했다.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하얀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공주.
그녀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아름다웠다.그 화사한 미모에 마리엘은 한순간 넋이 나간듯 멍하게 서있었고 세희도 눈이 마주치기 무섭다는듯 슬쩍 시선을 피했다.
"어서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샬럿이 공주에게 자리를 권하자마자 용철이 얼른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되서 기뻐요. 구용철씨."
"영광입니다."
용철은 공주가 오자마자 악수를 준비했는데 그녀와 눈이 마주치고나서 한 5초정도 머뭇거렸다.그건 그녀의 등에 이제까지는 보지못했던 하얀 날개가 달려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를 비롯한 아틀란티스 사람들 전원이 변신 능력자라는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일단 그녀가 변신한 모습을 처음봤고 그 변신체도 용철이 상상하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괴수들은 그 성향이 어떻든 겉모습은 대체적으로 추악하기 마련인데 공주는 원래의 모습을 거의 유지하면서 등에 날개만 돋아났다.그러니 이건 변신체치고는 정말 아름다운 변신체였다.그러고보니 그녀의 변신체는 세희와 닮은 면이 있었다.
리리스로 변신한 세희도 원래의 얼굴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까만 날개만 생겼었다.
세희가 악마라면 공주는 천사.
그런데 세희는 인간, 공주는 원래부터 괴수다.
"아참. 제가 변신한 모습은 처음 보시죠?"
공주는 샬럿이 권하는 상석에 앉자마자 자신의 날개를 돌아봤다.
그녀의 날개는 생각보다 부피가 크다.그런게 여러 장이 겹쳐있으니 마치 의자 뒤에 두툼한 쿠션이라도 놓은 것 같다.어쨌든 그녀가 자리에 앉자마자 날개에 대해서 물은건 혹시나 그걸 보고 불쾌해하지는 않을까하고 걱정하는 마음 때문일거다.
"네. 근데 전혀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네요. 잘 어울립니다."
"그래요? 고마워요."
"별 말씀을. 공주님 날개에서 반짝반짝 빛이 나네요. 정말 멋져요."
"홋."
공주는 기분이 좋은지 한손으로 입을 가리고 생긋 웃었다.
그녀가 날개를 살짝 움직이자 깃털 몇개가 떨어져나와 근처를 날아다녔다.날개에선 은은한 향기가 났고 떨어져 나온 깃털도 LED조명의 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거렸다.날개 자체는 마치 양털처럼 푹신푹신해보였지만 깃털 하나하나는 금속성 광택으로 번들거렸다.
그녀는 겉모습부터 특이한 존재였다.
대다수의 괴수가 동물의 모습을 하고 있음에도 그녀의 변신체는 동물과는 거리가 멀다.게다가 무슨 로봇도 아닌데 깃털에서 번들대는 그 금속성 광택은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용철은 한참동안 넋을 놓고 공주를 바라봤다.
공주도 그 시선이 싫지는 않았는지 쌕 웃으며 눈을 맞췄다.
"흠! 귀빈께서 오셨는데 차를 대령하지 않는 실례를..."
그때 샬럿이 옆에있던 수병을 돌아보며 인상을 썼다.
원래부터 손님이 오면 차 대접을 하는게 예의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지금 그 말을 꺼낸건 순전히 다른 이유때문이었다.그건 용철이 공주랑 눈을 맞대고 있는게 영 마음에 안들었기 때문이다.그녀는 일부러 공주 바로 옆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건 자신보다 더 예쁜 여자를 견제하고 싶어하는 여자 본연의 질투심때문이었다.
물론 공주는 샬럿의 의도같은건 애초에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흑인 수병이 조그만 찻상을 들고왔다.
그 위엔 향긋한 냄새와 함께 하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예쁜 찻잔 다섯개가 놓여있었다.샬럿은 우선 공주의 앞에 찻잔을 놓고 그 다음엔 용철앞에 놨다.
"어머나.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공주는 차를 보자마자 두 손을 꼭 모아쥐며 예쁜 미소로 보답했다.
"별 말씀을."
샬럿은 공주가 별로 마음에 안들었지만 굳이 내색하진 않았다.
잠시 티 타임을 가지고 있으니 취사담당 수병들이 여러가지 요리를 잔뜩 내왔다.물론 용철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벌써 식사를 했으니 이 모든건 오직 공주를 위한 것이었다.
"어머. 무슨 음식을 이렇게..."
"사양하지 마시고 많이 많이 드세요."
"고마워요. 이렇게 환대를 받는게 몇천년만인지 모르겠네요."
차에 이어 음식까지 나오는걸 보고 공주는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용철의 마법안경은 그녀는 영(靈)으로 분류했지만 실은 영체보단 죽었다 살아난 자에 더 가깝다.골램으로 변한 공주의 부하들은 아무 것도 먹고 마실수 없었지만 공주는 차를 무척 즐겼고 궁전에 있을때도 늘 용철과 세희에게 차를 대접했었다.그건 그녀가 원래의 몸을 그대로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주님. 이 푸딩을 한번 드셔보세요. 갓 만든거라 정말 맛있어요."
"음...정말이네요. 정말 맛있네요."
그녀는 샬럿이 권하는 푸딩을 한 숟갈 떠먹더니 얼굴 가득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그녀는 푸딩을 떠먹으며 또 날개를 움직였는데 그걸 보면 기분이 좋을때 무의식적으로 날개를 퍼덕거리는거 같다.
"공주님."
"네에~"
공주는 기분이 좋았는지 살짝 콧소리를 섞어가며 대답했다.
그 꼴을 보자 샬럿은 절로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꾹 참았다.공주가 일단 이곳 괴수들의 대장이고 용철의 은인인만큼 무조건 예의를 갖춰서 대해야 했다.지금 자신의 행동에 따라서 한국이 엄청난 이득을 볼수도 있고 또 그 반대의 상황이 생길수도 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건 도리가 아닌줄로 압니다만."
"괜찮으니 말씀하세요."
"그...저희에게 제안할게 있다고 하셨습니다. 거기에 대해서...음."
샬럿은 말을 다 잇지못하고 헛기침으로 대신했다.
그건 호의를 갖고 찾아온 사람에게 뭔가를 독촉하는게 예의에 어긋난다는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은근히 대답을 요구했던건 용철과 공주의 은근한 시선교환을 더는 두고 볼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네. 그렇죠. 저는 그 이야기를 하러왔죠.
갑자기 이렇게 환대를 받으니 너무 좋아서 잠시 깜빡했나봐요."
"죄송합니다. 무례가 됐다면 너그럽게 용서해주십시오."
"아니에요. 지부장님 접견을 청한건 저에요. 제가 먼저 말을 꺼내는게 맞죠."
용철을 비롯한 다른 세 사람은 공주와 샬럿의 말을 그저 듣기만 했다.
샬럿은 한국 능력자들을 대표하는 지부장이고 공주도 괴수들의 대장이며 한 나라의 지배자다.그러니 지금 이 둘 사이의 대화는 개인대 개인의 것이 아니라 나라대 나라의 대화라고 봐도 무방했다.때문에 이들의 말에 끼어들 이유도 없었고 그럴 자격도 없었다.
"제가 이렇게 여러분을 찾아온건 다름이 아니라 제가 있는 궁전때문이에요."
"공주님의 궁전..."
"네. 이미 구용철씨에게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한번 죽었다가 살아났어요.원칙적으로 생각하면 이미 살아있다고 볼수도 없지요.원래 이 땅엔 카르티야라는 나라가 있었고 저는 그 나라의 공주였어요.저는 지금 이렇게 살아나서 여러분을 만나고 있지만 그때 저와 함께했던 모든 이는 육체를 잃고 그저 영혼만 남았죠.그러니 그 궁전은 저 혼자 쓰기엔 너무 넓다고나 할까요.그리고 일단 저희 카르티야가 외부에서 유입된 배신자들과 전쟁을 시작한만큼 저희도 여러분들의 도움이 필요해요."
"그럼...저희와 연합전선을?"
"네. 바깥대륙에서 악행을 일삼는 자는 여러분의 적이며 또한 저희의 적이에요.
우리가 있는 이상 유입된 자들이 그렇게 쉽게 카르티야의 궁성까지 다가올순 없어요.여러분에겐 아틀란티스에 상륙해서 편히 쉬고 전력을 가다듬을 기지가 필요하고 저희는 또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해요."
"그렇군요.우리 능력자들을 위해 공주님의 궁성을 개방하시겠다는 뜻이군요."
"바로 그래요. 어차피 저 혼자 쓰긴 너무 넓어요.
저는 방 몇 개만 있으면 되니 나머지는 여러분이 사용해주세요."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공주님."
"뭘요. 우린 이제 동료인걸요."
샬럿은 얼른 일어서 예를 표하곤 공주의 손을 꼭 잡았다.
물론 단순한 한 여자의 입장에서봤을땐 질투심을 억누르기 어려웠지만 나라를 대표하는 지부장의 입장에서 봤을땐 그녀가 찾아오며 천군만마를 얻은 셈이었다.
만약 차후에 본격적으로 아틀란티스를 개척한다면 분명 많은 한국 인들이 이곳에 들어올 것이다.물론 그들이 섬에 상륙하자마자 당면할 문제는 바로 괴수들의 공격이었다.그런데 이 공주의 궁성을 한국의 기지로 활용할수 있다면 최소한 기지에서만은 괴수의 공격을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공주의 궁성엔 많은 부하들이 있었기 때문이다.그들 역시 괴수고 유입된 괴수들만큼 강력한 힘을 갖고있다.
샬럿은 공주의 동맹제의를 즉석에서 받아들였다.
용철이 공주를 괴수가 아닌 똑같은 인격체로 인정했듯 샬럿도 그녀를 동료로 인정하고 포용할만한 그릇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애초에 자신과 다른 존재를 무조건 배척하고 꺼리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다른 인종과 어울리기 힘든 것이고 그게 인간대 괴수의 관계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하지만 서로 다른 존재 사이에 놓여있는 그 높디 높은 벽은 넘으려고 마음만 먹으면 실제로는 언제든 넘을수 있는 것이다.
그 벽을 만든건 어디까지나 그 개인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편견의 벽은 올려다 보면 까마득히 높아보이지만 실은 누구나 쉽게 넘을수있을만큼 낮다.허나 그게 실은 낮은 벽이라는걸 알기 위해선 실제로 넘어봐야 한다.차이를 인정하고 그걸 우열이 아닌 다양성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그게 힘들다.
만약 샬럿이 공주의 겉모습만 보고 배척했다면 동맹은 결코 성사되지 못했을 것이다.용철과 샬럿이 공주를 괴수가 아닌 같은 인격체이자 동료로 인정하면서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갔다.그리고 한국 능력자들의 앞날에도 서서히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