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레커닝-114화 (114/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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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

"젠장...."

중국 지부장 왕텐하이(王天海)는 모선으로 돌아와서도 내내 기분이 언짢았다.

젊은 놈에게 삿대질을 당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그의 가슴을 울렁이게 만들었고 얼굴에선 열이 훅훅 올라왔다.그는 모선의 식당으로 들어오자마자 커다란 생수병을 들고 통채로 들이키기 시작했다.그들은 물과 식량을 핑계로 한국 배에 불범침입을 감행했지만 사실 이들의 배에는 물을 비롯한 여러가지 물자가 아주 풍부했다.

"지부장님. 그새끼를 그냥 놔둘겁니까?"

"그냥 안 놔두면 어쩔거냐?"

"그건...."

옆에 있던 한 녀석은 아직도 불만이 남았는지 입술을 씰룩거렸지만 그 뿐이었다.

왕텐하이는 그 녀석을 잠시 쳐다보다가 다시 탁자쪽으로 눈을 내리깔았다.이런 놈일수록 별 볼일 없다는건 그가 제일 잘 알았다.만약 그 젊은 놈에게 참을수 없을만큼 의분을 느꼈다면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기 전에 그놈의 멱살이라도 잡았어야 했다.그런데 이 녀석은 지부장이 삿대질을 당하는데도 그저 옆에서 구경만 했었다.그때는 아무 말도 못했던 주제에 일이 끝나고 나서야 이러는걸 보니 그저 한심하기만 했다.

"그만 닥치고 네 할 일이나 해."

"죄송합니다. 그럼..."

"겁쟁이 자식."

왕텐하이는 그 겁쟁이 부하를 내보내고 아틀란티스 지도를 꺼내들었다.

미국의 동맹국들은 전부 미국에서 촬영한 위성사진으로 작전을 수행하고 있지만 중국은 그런 혜택을 전혀 받지 못했다.할수없이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아틀란티스 상공을 촬영하고 지도를 만들었는데 이게 미국에서 만든 것과는 비교할수 없을만큼 조잡했다.

"S-901 S-908 S-917...."

왕텐하이 지부장은 그 지도 여기저기에 색연필로 표시를 했다.

중국 팀이 점령한 섬은 무려 70개에 달했는데 그들은 아틀란티스 본도에서 겨우 1.5km떨어진 S-476을 점령하면서 진즉에 본도 진출 준비를 마쳤다.그런데도 그들은 계속해서 배를 몰고다니며 근처의 섬을 닥치는대로 점령했다.

미국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섯불리 건드릴수도 없는지라 일단 그들을 주시하면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능력자의 숫자나 질만 따지면 중국에 비할바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국가와 국가간의 문제는 단순한 힘의 논리만으로 해결할수 있는게 아니었다.

"젠장. S-105때문에 더이상 서쪽으로 못나가잖아."

왕텐하이에게 한국 팀이 점령한 S-105는 눈에 가시였다.

얼마전에 그들은 수십척의 배를 보내 필리핀과 대만 팀을 압박하면서 초기 출발지점에 묶어놓고 근처의 섬들을 싹 점령했다.원래 대만은 15개, 필리핀은 10개의 섬을 배정받았지만 중국은 미국의 눈치를 봐가면서 그 섬들중 절반이상을 빼앗았다.

대만 팀의 경우에는 초기 출발지점인 S-816을 시작으로 그 북서편에 있는 S-820과 다시 그 북동쪽에 있는 S-829로 지그재그로 올라가도록 되어 있었다.그런데 중국이 자신들의 출발지점과 가깝다는 이유로 S-820을 점령하면서 대만 팀은 2번째 거점인 S-829에서 무려 170km나 떨어진 S-1007까지 배를 끌고 가야 했다.

중요한 거점을 다 빼앗긴 대만 팀은 분한 마음을 금할수 없었지만 일단 전체적인 전력이 중국의 상대가 안됐다.이제 그들이 믿을건 오직 미국뿐이었는데 미국도 일단 사태를 지켜보며 방관하는 추세였다.다급해진 대만은 결국 일본에 손을 내밀었다.

그렇다.

이들이 제네럴 피에르 호에 침입한건 한국 팀을 염탐하기 위해서였다.

물과 식량 운운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핑계였을뿐이다.

그들은 만약 한국 팀이 저자세를 보인다면 필리핀과 대만에게 그랬듯 협박할 작정이었다.미국은 중국과의 쓸데없는 분쟁을 원치 않았고 이번에 본격적으로 탐사팀에 참여한 러시아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중국은 미국을 궁지로 몰지 않는 한도에서 자신들의 실리를 다 챙기려고 했다.대만과 필리핀에 배당된 섬을 마구 빼앗으면서 몇개는 남겨둔게 바로 그 때문이었다.만약 그 섬까지 다 빼앗으면 대만과 필리핀은 본도로 갈 길이 막히게 되고 그건 미국이 정한 규칙을 정면으로 무시하는 짓이 된다.그럼 미국도 더이상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 놈들이 섬을 30개나 받았는데 그만큼 필요가 있나?"

"그 조그만 나라엔 과분하죠."

"쳇! 우리 중국은 대국이야. 대국은 대국답게 해외영토도 많이 가져야 해."

"그 지부장이 미국에서 힘을 좀 쓰던 여자랍니다."

"흠."

미국은 자국 팀을 포함한 모든 팀에 출발지점을 정해주고 섬을 배당했다.

배당한 섬의 숫자는 나라마다 천차만별이었는데 주로 국제사회에서 목소리를 낼수있는 강국일수록, 또한 해당국 지부장의 세력이 강할수록 많은 섬을 받아냈다.왕텐하이가 얼마전에 상대했던 대만 지부장은 미국에서 워싱턴 지부장을 지내던 사람이었는데 미국 지부장중 비교적 서열도 낮았고 중국을 겁내는 사람이었다.그는 대만의 이익을 대변할 의무가 있었지만 중국의 기세에 눌러 쩔쩔 매다가 결국 섬을 다 내주고 말았다.

그런데 이번에 만난 한국 지부장은 만만치 않았고 그 옆에 있던 놈도 꽤 하는 놈 같다.

왕텐하이는 대만과 필리핀 배에도 똑같은 짓을 했는데 지부장 앞에서도 성적인 농담을 하면서 식량과 물을 요구했다.대만 지부장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채 어쩔줄 몰라했고 필리핀 지부장은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었다.

결국 두 팀은 이들이 요구하는 식량과 물을 내놓아야 했다.지부장이 버티면서 일을 해결하려고 해야하는데 그 두 사람은 왕텐하이를 상대하긴 너무 약했다.이들의 요구조건을 들어주면서 두 팀의 대원들은 중국에 맞설 힘을 잃어버렸고 눈 앞에서 섬을 빼앗아가는걸 그냥 두 눈뜨고 지켜봐야 했다.

"그 지부장이 나름대로 힘을 쓰는 여자라면 방법을 달리해야겠지."

"무슨 말씀이신지?"

"자칫 계속 행패를 부리다가 미국이 열 받으면 곤란하거든?"

왕텐하이는 옆에 앉아있던 사내를 슬쩍 돌아봤다.

그 사내는 왕텐하이와 부하들이 떠드는 와중에도 팔짱을 낀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전성호씨. 당신이라면 할수 있겠죠?

한국 지부에 있었던 당신이라면 저 지부장의 약점을 알거라 생각하는데?"

전성호.

대민과에서 일했던 능력부의 전직 공무원이었다.그는 기수열외를 당하다가 사표를 쓰고 공무원을 그만뒀는데 지금은 중국 팀과 함께 하고 있었다.전성호는 그런 왕텐하이를 잠시 바라보다가 옷속에서 뭔가를 조심스럽게 끄집어 냈다.그건 착착 접힌 편지였다.

"이건..?"

"미국 제니퍼 지부장의 편지입니다.

우리들의 공통목표가 한국 지부장 샬럿의 제거라면 제니퍼 지부장 역시 우리를 도와줄수 있는 사람이죠.샬럿에게 감정이 아주 많으니까요."

전성호는 한국 지부장 샬럿과 용철을 떠올리며 이를 뿌드득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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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철은 컨테이너 위에서 기다리던 마리엘을 구출해서 방에 데려다 놓자마자 지부장의 호출을 받았다.숨 돌릴틈도 없이 수송선의 3층에 위치한 지부장실로 헐레벌떡 뛰어오니 샬럿 지부장은 회전의자를 돌려놓고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건 기분이 나쁘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누가 찾아오던 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웃는 얼굴로 인사를 했다.그런데 회전의자를 돌려놓고 먼 산을 보고 있다면 상황이 심각해진다.그건 그 사람에게 뭔가 추궁할 일이 있다던가 그게 아니라도 좋은 말이 나올 상황은 절대 아니라는 소리였다.

용철은 그녀의 책상에서 약 5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발소리가 멎자마자 지부장이 회전의자를 홱 돌리며 용철을 날카롭게 노려봤다.

"구용철씨."

"네."

"이쪽으로 오세요."

"네."

그녀가 대체 왜 기분이 나쁜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이쪽에서 뭔가 잘못한게 있다면 굳이 변명할 생각은 없었다.

"용철씨는 국가와 국가간의 관계가 뭐라고 생각하나요?"

용철이 책상 옆으로 다가왔지만 샬럿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또한번 회전의자를 홱 돌리면서 턱을 쳐들었다.순간 가슴이 뜨끔했지만 용철은 애써 침착한 척 했다.처음 호출을 받았을때부터 그 중국인들 문제때문이라고 생각했다.때문에 여기 오면서 나름대로 준비도 했지만 막상 이렇게 추궁을 받게되니 약간 떨렸다.

하지만 그때는 그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물을 내주고 자시고 하는게 문제가 아니라 자존심만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국가와 국가간의 관계는 믿음입니다."

"믿음?"

"네. 국가간에도 믿음과 예의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저희가 이웃나라 일본을 진심으로 믿지 못하는 것도 그들이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발뼘하기 때문입니다.거짓말만 늘어놓는 사람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오늘 그 중국선원들도 마찬가지입니다.만약 그들이 정중하게 물을 요구했다면 외면할 이유는 없었겠죠."

"흠."

샬럿은 피식 웃으면서 두손에 깍지를 꼈다.

처음엔 약간 굳은 얼굴이었지만 그 얼굴위로 어느새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으흠."

용철은 참고있던 숨을 슬쩍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그녀의 표정변화를 토대로 위기를 넘겼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용철씨.개인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대 국가의 문제라면 감정만으로 모든걸 해결할수는 없어요.조금 마음에 들지않는다고 해서 싸울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단지 물이나 식량때문에 우리 배에 올라온게 아니에요.

중국 팀이 첫번째 섬을 점령한게 벌써 1주일 전이고 그들은 이미 그 섬에 가건물을 세웠어요.후방물자를 담당하는 배만 거의 열 척에 육박하고 그쪽으로 배정된 인원도 실제 전투인원의 몇배를 넘어서죠.여기서 불과 5km밖에 그들이 점령한 섬이 있어요.그런데 우리 배에 올라와서 연료가 아닌 물과 식량을 요구한다는건 뭔가 이상하죠."

"그렇죠. 만약 그들이 실수로 항로를 이탈했다면 가장 중요한건 식량이 아니라 베이스캠프까지 돌아갈 연료겠죠."

"네. 정확하게 보셨어요.

그들이 우리 배에 올라온건 우리를 떠보기 위해서에요.만약 우리측에서 그들을 선제공격했다면 좋은 구실을 주게 되겠죠.미국 본부에선 문제를 일으킨 한국 팀을 본국으로 소환할 것이고 한국 팀이 철수하면서 남은 섬들은 전부 중국의 차지가 될거에요."

"으흠!"

그 말을 듣자마자 용철의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처음엔 단순히 이쪽을 만만하게 보고 꼬장을 부렸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그놈들은 일부러 시비를 걸고 이쪽이 사고를 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생각같으면 그 망할 놈들을 끝까지 쫓아가서 전부 박살내고 싶었지만 그런 짓을 하면 그놈들에게 섬을 빼앗을 구실을 주는 셈이다.생각하면 피가 끓고 속에서 천불이 솟았지만 꾹 참아야 했다.

"때문에 저는 별다른 사고 없이 그들을 쫓아보내는게 최선이라 생각했어요.

만약 그들이 저를 먼저 공격했다면 제게도 반격할 권리가 있어요.제겐 한국 팀의 대원들과 이 배의 선원들을 지킬 의무가 있으니까요."

샬럿은 마법안경을 꺼냈다.

이 안경에는 녹음과 녹화기능이 있어서 증거자료로 쓰기에 유용했다.이게 있는한 중국인들이 먼저 공격해놓고 책임을 이쪽에 덮어쒸울순 없다는 소리다.때문에 샬럿은 그들이 배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갑판에서 그들을 막아섰다.시비를 걸면서 이쪽을 염탐하는게 그들의 목적인 이상 아무리 모욕을 당한다고 해도 그 자리를 피할수는 없었다.

처음 용철이 중국인들에게 욕을 하면서 대들었을때 샬럿은 용철을 말리는척 했지만 속으로는 기뻐하고 있었다.중국인들이 막말을 한다고 해서 미국과 한국을 대표하는 자신이 같은 막말로 대응할순 없었기 때문이다.물론 용철이 그들에게 주먹을 휘둘렀다면 문제가 생겼겠지만 욕만 했다면 별 문제가 없었다.

결국 성적인 모욕을 당하고 화가 나있던 샬럿을 대신해서 용철이 그놈들에게 시원스럽게 욕을 해준 셈이다.

"용철씨."

"네."

"장난쳐서 미안해요."

"네?"

"전부 장난이었다구요."

샬럿은 쌕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용철은 아직도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머리만 긁적였지만 그녀는 안심하라는듯 용철의 손을 꼭 잡았다.용철은 샬럿의 돌발행동에 깜짝 놀라 찔끔했지만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용철의 손을 위 아래로 살살 흔들어 댔다.

"용철씨가 오자마자 인상 쓴거 장난이었다구요."

"아~"

용철은 그제서야 그 말 뜻을 이해했다.

오자마자 의자를 홱 돌리면서 놀라게 하더니 그게 전부 장난이었다니.이제보니 이 지부장도 은근히 짓궂은 구석이 있었다.

"고마워요. 용철씨.

그녀는 용철의 손을 꼭 잡으며 감사를 표했다.

하긴 그녀가 용철에게 책임을 물을 이유가 없었다.

능글맞은 중국인들을 혼자 상대하고 있을때 홀홀단신 달려와서 도와주고 자신을 대신해서 그놈들에게 시원하게 욕까지 해줬다.결국 용철이 욕을 하면서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그놈들을 쫓아버렸으니 결국 그가 혼자서 모든걸 다 해결한 셈이었다.

그녀는 강한 여자였다.

이제까지 남자에게 의지해 본 적도 없고 모든걸 혼자 해결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아무리 강한 여자라도 남자가 될순 없었다.위급한 순간에 든든한 남자가 달려와 도와주는건 모든 여성의 꿈이었고 그건 샬럿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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