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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아조레스 섬? 거기 탐사대로 간단말야?"
"응. 아무래도 내가 벌어놓은 돈이 없으니깐."
나인철은 탐사대 출정계획을 밝히며 슬쩍 담배를 물었다.
처음 탐사계획에 대해서 들었을땐 무모한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가진건 BOPE 근무경력밖에 없는 나인철에게 10억이라는 돈은 어마어마하게 큰 돈이었다.
사실 그는 금전감각이 거의 없었다.저축따윈 해본 적이 없었고 미래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도 몰랐다.1년넘게 브라질에서 근무하며 꽤 많은 월급을 받았지만 돈을 받을때마다 해변에서 원나잇을 한다고 전부 써버렸고 결국 빈털터리로 귀국했다.그런 생활은 귀국하고 나서도 거의 그대로였는데 최근에 생각이 바뀌었다.
그가 생각이 바뀐건 바로 용철때문이었다.
자신은 귀국해서도 여전히 전세방을 전전하고 있었지만 용철은 벌써 부촌이라는 서초구에 집을 샀고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고급 외제차를 끌고 다녔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그도 차츰 돈의 중요성에 대해서 알았고 하룻밤에 몇백만원을 쓰던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게 됐다.BOPE라는 같은 직장에서 일했지만 지금 자신과 용철의 처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용철은 집도 있고 차도 있고 도와줄 부인도 있었지만 자신은 아무 것도 없었다.결국 그렇게 나이값 못하던 나인철도 최근에는 정신을 차리게 됐다.
한때는 하루가 멀다하고 나이트에 들락거렸지만 최근엔 발길을 끊었고 그 대신 적금을 들기 시작했다.사실 나인철도 돈을 모으려면 얼마든지 모을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때문에 아낀만큼 통장엔 돈이 불기 시작했고 요즘은 통장에 돈 찍히는 재미를 알았다.
"수아야. 조금만 기다려. 오빠가 돈 많이 벌어올게."
"위험할텐데 조심해서 다녀와."
"그래."
나인철은 용철처럼 차차 돈을 모으고 평범한 가정을 꾸리려 했다.
문제는 그가 선택한 여자였다.
그는 이제껏 살면서 제대로 된 여자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그에게 여자란 그저 돈을 주고 하룻밤을 빌리는 존재였다.돈이나 선물을 안겨주면 여자는 알아서 몸을 줬고 그렇게 실컷 즐기다가 헤어지고 또 다른 여자를 찾았다.그러니 제대로 된 여자를 만날 기회도 없었고 또 그럴 이유도 없었던 셈이다.그는 다른 남자들처럼 실패와 좌절을 경험한 적이 없다.여자때문에 상처받은 적도 없었고 배신당한 적도 없었다.
그가 돈을 주면 항상 여자는 몸을 줬다.
그때문에 자신이 잘해주면 여자도 알아서 자신을 믿어줄거라 생각했다.하지만 그건 엄청난 착각이었다.자신이 생각하는 결혼과 수아가 생각하는 결혼은 너무도 달랐기때문이다.
탐사대에 참가하기로 결정하고 그가 가장 먼저 찾은건 애인인 수아였다.
그는 늘 그랬듯이 근처 모텔에서 수아를 만나 뜨거운 밤을 함께했다.용철을 보고 깨달음을 얻은후로 그는 수아외의 다른 여자를 만난 적이 없었다.이 여자 저 여자를 끝없이 전전하던 그가 드디어 수아라는 한 여자에게 정착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옆에 앉은 수아를 조용히 바라보던 인철이 문득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봤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가야 돼?"
"응. 일단 내일 저녁에 출발할거니까 지금부터 준비 해야지."
"그래. 내 걱정 말고 잘 다녀와. 오빠~ 화이팅."
"고맙다. 수아야."
"돈 많이 벌어와~"
수아가 생긋 웃으며 인철의 목을 꼭 껴안았고 인철은 입을 헤벌렸다.
하지만 인철은 그녀가 대체 어떤 여자인지 아직까지도 모르고 있었다.만약 제대로 된 여자라면 사랑하는 애인을 그런 곳에 보내진 않았을 것이다.
제대로 된 여자라면 조금 적게 벌더라도 안전한 일을 찾아보라고 만류했을 것이다.하지만 수아는 아조레스 섬이 위험하다는걸 잘 알면서도 인철을 말리지 않았다.그건 수아가 10억이라는 그 엄청난 돈에 혈안이 됐기 때문이다.
그녀에겐 인철의 안전보다는 돈이 더 중요했다.교미를 댓가로 암컷에게 뜯어먹히는 수컷 사마귀처럼 인철은 그렇게 수아에게 골수까지 빨아먹히고 있었다.
"오빠~! 화이팅! 힘 내!"
인철이 옷을 주워입고 모텔을 나서자 수아는 모텔 입구까지 따라와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인철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지자 수아의 표정이 곧 180도로 바뀌었다.그녀는 나인철이 죽던말던 상관없다는듯 차디찬 얼굴로 홱 돌아섰다.
"그래. 네가 돈이라도 잘 벌어와야지.
꼴에 애새끼 좋은줄은 아나보네. 대체 안에다 몇번을 싸지른거야."
한참 궁시렁대던 수아는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용철이 마리엘에게 정착했듯 인철도 수아에게 정착하려 했다.원나잇을 즐기던 인철은 늘 콘돔을 소지하고 다녔지만 최근엔 항상 콘돔없이 수아를 안았다.
그건 수아와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싶은 소망때문이었다.
수아가 자신의 아이를 낳아주길 원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는 수아의 그 웃는 얼굴 뒤에 숨겨진 끔찍한 본 모습을 모르고 있었다.
"아...요즘 피임약은 대체 왜 이래. 머리가 왜 이렇게 아파."
수아는 모텔 방으로 올라가자마자 명품백 속에서 피임약을 꺼내 먹었다.
어젯밤에 인철이 찾아오자마자 감기약을 먹는다면서 몰래 피임약을 먹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직 불안했다.그녀는 피임약을 먹자마자 욕실로 들어가 아랫도리를 씻기 시작했다.
"내가 미쳤다고 임신을 해? 기분이 얼마나 좃같은데."
수아는 아랫도리를 박박 문질러 씻으면서도 끊임없이 입술을 씰룩거렸다.
그녀는 나인철을 만나기전에 이미 나이지리아 흑인들과 동거하면서 임신한 경력이 있었다.그 아이를 무기로 흑인들을 꼼짝 못하게 옭아매려 했지만 그놈들은 만만한 놈들이 아니었다.수아와 동거한 놈은 세 놈이었는데 그 세 명 모두 아이에 대해선 모르쇠로 일관했고 급기야 얼마전에 연락을 끊고 나이지리아로 달아나버렸다.
수아 입장에선 엄청나게 손해보는 장사를 한 셈이다.
호구 용철을 상대할땐 그래도 두달에 한번쯤은 100만원치 이상의 선물을 받아냈다.그런데 그 흑인들은 수아에게 해준게 아무 것도 없었다.결국 수아가 애꿎은 자궁을 축내가면서 그 놈들을 상대해준 결과 얻은 것이라곤 일시적인 쾌락뿐이었다.
수아는 그 흑인들이 도망가자마자 이를 갈며 낙태수술을 받았다.
그때부터 그녀는 흑인을 비롯한 외국인은 쳐다보지도 않았다.가진건 대물밖에 없는 그놈들보다 순진하고 돈 잘버는 한국인이 최고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그녀는 우선 성남의 한 무면허업자를 찾아가 자신의 몸뚱이를 대대적으로 개조했다.10년전에 없어진 처녀막을 깔끔하게 재생했고 유두에 복원수술을 받는걸로 임신흔적을 지웠다.
몸을 개조한 수아는 나이트 여러곳을 돌아다니며 삐끼와 웨이터에게 돈을 주고 능력자 손님이 찾아오면 즉시 연락하도록 부탁했다.그런 수아의 마수에 꼼짝없이 걸려든게 바로 나인철이었다.인철은 행복한 결혼생활을 꿈꿨지만 수아는 누군가의 아내로 정착할 생각이 아예 없는 여자였다.그녀가 원한건 돈이었고 또한 성적인 쾌락이었다.
"씨발 좃같네. 얼마나 싸지른거야. 안에서 뭉쳤잖아."
아랫도리를 씻던 수아는 욕을 씨부렁거리기 시작했다.
바깥쪽은 대충 씻었지만 질 안쪽을 씻어내는건 의외로 힘들었다.한참 샤워기를 갖다대고 물을 뿌려대던 수아는 급기야 손가락 두개를 쑤셔넣고 안을 긁어댔다.
그때 침대위에 놔뒀던 수아의 휴대폰이 큰 소리로 울리기 시작했다.
"씨발. 누구야?"
수아는 한참 욕을 씨부렁거리더니 수건을 걸치고 밖으로 걸어나왔다.
그녀는 전화를 받자마자 욕을 퍼부을 기세였지만 휴대폰 액정에 찍힌 번호를 보자마자 표정이 급변했다.얼마전에 클럽에서 만난 남자의 전화번호였기 때문이다.
"여...여보세요. 아~ 석주오빠.
웬일이야? 뭐하냐구? 나는 공부하지. 공부. 아잉~ 진짜야."
수아는 전화를 받으면서 온갖 아양을 떨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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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바람은 제법 소슬했다.
10시가 되자 버릇처럼 자리에 누웠지만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용철은 막 정원쪽으로 나가다가 베란다 문 옆에 놓여있던 라면박스 안을 무심코 들여다봤다.
"맘보...맘보...."
때는 초여름이었지만 이상기후탓인지 밤에는 제법 쌀쌀했다.
그때문에 라면박스로 토끼 집을 만들어주고 그 안에 헌 옷을 깔아줬다.황색토끼는 용철이 입다버린 헌옷을 덮어쓴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토끼도 꿈을 꾸는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간혹 몸을 뒤척이며 귀를 쫑긋거리는걸 보니 그만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잠시 토끼를 살펴보던 용철은 곧 뒷짐을 진채 정원으로 나갔다.
저 하늘에서 빛나는 별들만이 이 어둠과 외롭게 싸우는 까만 밤.간혹 차가운 바람이 주변을 스칠때면 절로 몸이 부르르 떨렸다.문득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유난히 커다란 달이 새하얀 후광을 등에 업고 홀로 빛나고 있었다.
"비가 오려나..."
달무리가 끼면 비가 온다고 했었다.
여름치곤 유난히 소슬한 바람은 곧 내릴 비의 징조였을까.용철은 어둠속에서 조용히 웅크린 꽃나무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정원을 거닐었다.비록 밤이었지만 정원 곳곳에 세워진 정원등 덕분에 주변이 그렇게 어둡진 않았다.용철은 그 등불들을 하나하나 체크하면서 등나무 벤치쪽으로 걸어갔다.
"음?"
그런데 그 벤치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멀리서 봐도 키가 큰게 마리엘은 절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피할 이유는 없었다.용철은 천천히 그쪽으로 다가갔다.세희가 넋 놓은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대체 이 시간에 왜 나와있는지는 모르지만 그 분위기가 왠지 모르게 처연했다.
"아직 안 잤어?"
"아...용철 오빠."
비록 같은 집에서 살았지만 단둘이 마주칠 기회는 별로 없었다.
그녀는 마리엘과 친 자매이상으로 친했지만 용철은 단순한 동거인으로 선을 긋고 있었다.물론 그건 용철도 마찬가지였다.같은 집에 사는 사람이니 분명 친구나 동료이상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마리엘과 동등한 존재로 인정한 적은 없었다.
"날씨가 제법 춥다. 그렇게 입고 다니면 감기걸려."
"그럭저럭 견딜만 해요."
"그래도 조심해야지. 몸 축나는건 순식간이야."
"네. 조심할게요."
처음엔 갑자기 나타난 용철때문에 약간 놀란듯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용철이 바로 옆에 앉았지만 그녀는 도망치지도 숨지도 않았다.그건 아마 그가 마리엘만큼이나 따뜻한 사람이라는걸 그녀도 알았기 때문이리라.하긴 친자매이상으로 친근한 마리엘의 남편이니 딱히 그를 경계할 이유도 없었다.
"별자리 보는거야?"
"아뇨. 그냥요."
"그냥?"
"네. 능력자가 되기전부터 이랬어요.
가슴속이 답답하거나 슬프거나 괴로운 일이 있을때면요.이렇게 하늘이 잘보이는 곳에 올라와서 몇시간이고 이렇게 있었어요.뭐...왜 그러는지는 저도 몰라요."
"흠. 출격때문이야?"
"글쎄요...."
세희는 이쪽을 돌아보며 쌕 웃었다.
그녀는 빼어난 미모를 지닌 여인이었다.그런 여자가 웃는걸 보자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용철은 애써 헛기침을 하면서 자신을 다스렸다.이미 마리엘이 곁이 있는데 다른 여자를 힐끔거릴수는 없었다.지금 그녀는 마리엘과 친자매처럼 지내면서 이 집의 식구가 됐다.그런데 자신이 이상한 짓거리를 해서 마리엘을 곤란하게 만들순 없었다.
"하긴 무서워 하는 것도 당연해. 미지의 세계는 항상 두려운 법이니까.
처음 능력자가 됐을때 나도 그랬었어.앞으로 잘할수 있을지 어떤 일이 있을지 온갖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히면서 아주 사람을 미치게 만들더구만."
용철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씨익 웃었다.
그녀가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내일 출격때문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그녀가 무서워하고 있다면 우선적으로 그 두려움을 떨치게 만들어야 했다.
"걱정 하지마. 너만 그런거 아냐.
처음 가보는 곳을 아무렇지도 않게 간다면 그게 더 이상한거 아냐? 그러니까 동료들을 믿어.이전엔 혼자였지만 지금은 더이상 혼자가 아니잖아?"
"네...그건 알지만 그래도 좀 많이 무섭네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그게 좀 부끄러웠는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이렇게 단 둘이 앉는게 처음이었기 때문인지 오늘따라 그녀가 무척 귀여워보였다.
"근데 생각해보니 꽤 의외네.
그렇게 무서워 하면서도 마리엘을 위해 아조레스 행을 결정했다는게.."
"누군가 나를 믿어주는거만큼 좋은 일은 없으니까요.
마리엘이 저를 믿어주는만큼 저도 마리엘에게 보답하고 싶었어요."
"그래...."
용철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은 이익을 위해서 배신을 밥먹듯이 하는 사악한 생물이다.
그런데 위험하다는걸 알면서도 누군가를 위해 사지에 뛰어들수있는 것도 오직 인간뿐이다.배신이 뭔지를 알기에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수있고 또한 그 믿음이 가진 무게를 통감할수 있기 때문이다.
아픈만큼 성숙해진다고 했던가.인간은 처절한 배신도 겪고 또한 사무치는 외로움도 겪으면서 자신이 대체 어떤 존재인지 똑똑히 알게 된다.그리고 그 아픔을 씻어주고 달래줄수 있는 대상을 찾게 된다.그게 바로 믿음의 원천이다.
믿음은 원칙적으로 주고 받는 것이다.
누군가를 믿을때는 그 사람을 믿음으로서 어떤 보답을 받겠다는 심리가 숨어있다.그것을 저버린 자는 바로 배신자가 된다.배신자가 될수 없다는 그 마음이 사람을 의리있는 사람으로 만들고 또한 남이 믿을만한 사람으로 만든다.
그렇다. 무턱대고 믿는건 바보같은 짓이다.
마리엘도 그녀에게 뭔가를 기대했기에 믿었던 것이고 그녀역시 그 기대를 알았기에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모습을 보이려고 하는거다.그렇게 서로를 믿고 또 보답하면서 불완전하게 태어났던 인간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완전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
남녀가 부부로 맺어져 사는걸 보고 반쪽을 찾았다고 하는 것도 바로 그때문이다.
남자던 여자던 인간은 원래부터 반쪽짜리다.
그게 바로 인간과 인간의 사이가 믿음으로 유지될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다.
세희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마리엘을 만나면서 의지할만한 반쪽을 얻은 셈이다.비록 둘이 같은 여자이기에 맺어지지는 못하겠지만 마음을 교감할 사람을 얻는다는건 언제나 기분좋은 일이다.
마리엘도...
샬럿도.....
그리고 세희도....
모두 누군가를 믿을줄 알고 또한 보답할줄 안다.
사악한 이 세상에서 믿을만한 사람들을 곁에 두고 있다는건 얼마나 큰 축복인가.자신이 그들을 떠올리며 그 존재감에 안도하는 것처럼 세희도 똑같은 마음이리라.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던 용철은 옆에 앉은 세희를 조용히 바라봤다.
세희도 고개를 돌려 이쪽을 가만히 응시했다.가끔 소슬한 바람이 옷깃을 스쳐갈뿐 주변은 조용하다 못해 적막했다.하지만 둘이 함께 있었기에 이 밤의 적막도 그렇게 처량하지는 않은거 같다.비록 손을 잡지는 못했지만 분명 둘은 친구이상의 존재였다.
더이상 대화는 없었지만 말없이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분위기는 의외로 좋았다.
"맘보! 맘보!"
"음?"
토끼 소리가 한밤의 정적을 깼다.
한참 분위기가 좋았는데 그걸 저 토끼가 망쳐버렸다.용철은 현관쪽을 돌아보며 슬쩍 인상을 썼다.세희도 영 기분이 좋지는 않은지 현관쪽을 향한 얼굴이 살짝 굳어있었다.꼴을 보아하니 내일 저 토끼가 배추를 얻어먹긴 틀려먹은거 같다.
"맘보!"
"으앗?!"
그때. 질풍처럼 달려온 토끼가 용철을 덮쳤다.
이 토끼는 용철을 쓸데없이 좋아했다.
혼자 자는게 싫은지 밤만 되면 늘 용철의 방문을 박박 긁어댔고 그래도 반응이 없으면 방문앞에서 맘보맘보 거리면서 꽤 오랫동안 울어댔다.하긴 이제껏 했던 짓을 감안하면 용철을 발견하자마자 달려들어 안긴 것도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바로...
토끼가 달려들면서 둘이 동시에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는 것이다.
"어이쿠!"
"꺗?!"
용철은 두팔을 허우적거리며 균형을 잡으려했지만 역부족이었다.
20레벨 맘보토끼의 공격따윈 한손으로도 막아낼수 있었지만 조금전엔 마음을 턱 놓고 있었다.그 장대한 몸이 일순간 균형을 잃으며 세희를 덮쳤고 둘은 한덩이가 된채 바닥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아야야! 젠장....토끼새끼가!"
"오...오빠...."
"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얼굴에 뭔가 말랑말랑하고 따스한 것이 닿았다.
깜짝 놀린 용철이 얼른 고개를 들었지만 이미 자세가 꽤나 묘했다.용철이 세희의 몸을 아주 완벽하게 덮어누르고 있었다.엉겁결에 세희의 가슴을 범했고 손은 지금도 그녀의 허리를 감고 있다.놀란 용철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세희를 내려다봤다.
그녀도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채 용철을 올려다봤다.
눈이 마주치면서 지금의 자세가 이상하다는걸 알았지만 그녀는 용철을 밀치지 않았다.
둘은 몸을 맞붙인채 잠시동안 서로를 주시했다.
여인의 따스한 숨결과 달콤한 살냄새가 한순간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시선을 마주하자 그녀의 고혹적인 눈 속으로 마치 온 몸이 쭉 빨려들어가는거 같았다.갑자기 아랫도리가 묵직했고 눈앞이 아득해 졌다.세희의 달콤한 살냄새를 맡고 짐승같은 야성이 불끈 솟아나며 그녀의 허리를 안은 손에도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용철은 불굴의 근성으로 성욕을 쫓아버렸다.
"미안해. 저놈의 토끼새끼가 미쳤나?"
"아니에요.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하여간 진짜 미안해."
용철은 그녀가 다치지 않게 아주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정말 미안해. 다친데는 없어?"
"아니에요. 저는 괜찮아요."
그녀는 의외로 별로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용철은 바지를 툭툭 털면서도 미안하다는 말을 몇번이고 반복했지만 그녀는 그저 상체만 약간 일으켰을뿐 여전히 엉덩이를 땅에 붙인채 용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참. 미안해. 자..."
"네. 고마워요."
용철이 손을 내밀자 그녀는 쌕 웃으면서 그 손을 잡았다.
손을 내밀기를 기다렸던걸까.그게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었던걸까.희한하게도 그녀는 조금전 그 사고를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남자가 갑자기 덮쳤으니 충분히 놀랄만한데 그녀는 전혀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어찌보면 다행이라고 할수도 있지만 용철은 여전히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신경쓰지마세요. 말 못하는 토끼가 한 짓 갖고..."
"그래도 네가 다칠수도 있었잖아."
"괜찮아요."
"그래. 음...!"
"오빠는 정말 상냥한 사람 같아요."
그녀는 용철을 바라보며 얼굴을 살짝 붉혔다.
달빛아래 약간은 흐릿하게 보이는 그 얼굴이 너무도 아름다웠다.둘은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조용한 시간을 흘려보냈다.만약 그녀가 조금전 그 사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면 그건 용철의 일생에 크나큰 오점으로 남았을 것이다.하지만 그녀가 그걸 대수롭지 않게 넘기면서 그건 지금의 이 묘한 분위기를 가슴 두근거리는 설레임으로 만들었다.
어디선가 밤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짝 흩날렸다.
유난히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용철의 뺨을 살짝 스쳐가며 은은한 향기를 흩뿌렸다.그녀의 뽀얗고 갸름한 얼굴과 유난히 큰 눈.탐스럽게 솟은 가슴이 차례차례 용철의 눈을 스쳐 지나갔다.또 한번 마른 침이 넘어갔고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본능은 지금이 기회라며 울부짖고 있었지만 용철은 짐승의 수컷이 아니라 한 여인을 책임진 남자였다.
용철은 강철같은 근성으로 또한번 성욕을 쫓아버리고 목소리를 깔았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넌 의리가 뭔지 아는 사람이야.
그래서 마음에 들고 든든해.너라면 안심하고 마리엘을 맡길수 있겠어."
"고마워요. 우리 앞으로 열심히 해봐요."
"그래."
세희가 조용히 손을 내밀었고 용철은 그 손을 꼭 잡았다.
그녀는 마리엘에게 마음을 열었듯 용철에게도 그 마음을 허락했다.용철도 그녀를 단순한 동료가 아닌 가족으로 그리고 생과 사를 함께할 진정한 전우로 인정했다.
둘은 손을 꼭 잡고 멀리 빛나는 달을 올려다봤다.
오늘따라 유난히 크고 밝은 달이 말 없이 두 사람을 비춰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