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레커닝-74화 (74/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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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이곳은 서울의 능력 개발부.

한국 지부장 샬럿은 집무실 창문을 열어놓고 봄 기운이 약동하는 뒷동산을 바라보고 있었다.끝도 없이 펼쳐진 대평원과 로키산맥의 웅장한 산들만 보고 자랐던지라 한국의 조그맣고 아기자기한 산들은 샬럿의 눈엔 그저 귀엽기만 했다.

집무실 안은 약간 어두웠다.

요즘 전국적으로 절전 캠패인을 벌이면서 그걸 관공서에서 앞장서서 실천하라는 대통령 지시가 있었다.하지만 이 능력개발부 공무원들중에 낮에 불을 끄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정말 몇 안되는 사람만이 대통령의 지시를 곧이곧대로 따랐다.

차관급 고위공무원인 샬럿도 그중 하나였다.

그녀는 숄더 백안에서 보온병을 꺼냈다.

집무실 안에 전기 포트가 있었지만 대통령 지시가 내려온 이후로 그걸 써본 적이 없었다.모든 국민들은 대통령을 비롯한 높으신 분들이 항상 솔선수범해야한다고 생각했지만 높으신분 치고 솔선수범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샬럿은 그게 불만이었다.이 나라의 지도층은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뭔지도 모르는거 같다.

그녀가 보온병에 들어있던 커피를 잔에 따르고 있을때 직통전화가 울렸다.

"능력개발부 지부장 샬럿 베르나르입니다."

샬럿은 집무실 의자에 앉아 능숙하게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미국에 있을때도 메인 주 전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능력자 관련 사항을 혼자 처리해왔다.이런 직통전화가 걸려온다는건 능력자에 관련된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다는 증거.전화를 건 사람은 대구지방 경찰청장이었다.그거 흔한 묻지마 살인사건이었다면 중부경찰서에서 알아서 했겠지만 괴수사건은 대구지역 전체의 문제였다.

"대구 괴수가 이미 처리됐다구요?"

"지나가던 능력자가 괴수를 처리한 모양입니다만 그 능력자의 상태가 위독합니다."

"제가 조금전에 힐러를 보강한 능력자 부대를 대구로 파견했습니다.일단 출혈만 막을수 있으면 나머지는 힐러가 알아서 할거에요.능력자들은 보통 사람보다 훨씬 강하니깐요."

"그게...출혈은 없습니다만...그 능력자가 혼수상태에 빠졌습니다."

"혼수상태?"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던 샬럿은 혼수상태라는 말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출혈이 없을리가 없을텐데요? 혹시 그 능력자가 혼자가 아니었나요?"

"중상을 입은 사람은 젊은 남자고 그 옆에 능력자로 보이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럼 그 여자가 힐러라는 소린데....

청장님. 그 능력자가 죽인 괴수 시체를 회수하셨나요? 어떻게 생겼나요?"

"네. 그게...피부가 시퍼렇고 코가 엄청 크고 눈이 붉은.."

"고블린인데.."

청장은 경찰들이 찍어온 시체 사진을 보고 더듬더듬 대답했지만 샬럿은 청장이 말하는 괴수가 고블린이라는걸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아참. 그리고 토끼가 한마리 있었습니다. 머리가 날아갔던데..."

"토끼?! 설마!"

고블린 이야기를 듣고 실눈을 뜨던 샬럿이 깜짝 놀라며 커피 잔을 떨어트렸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그 토끼 털 색이 어떤 색이었나요?"

"회색이었죠. 주위에서 흔히 볼수있는 그런 토끼였습니다. 근데 왜 그러시는지?"

"그놈은 맘보토끼라는 놈입니다.

특히 털 색깔이 잿빛이라면 맘보토끼중에서도 최상급에 속하는 놈이에요.

털이 흰색인 놈은 하급능력자들도 잡을수 있습니다만 잿빛이라면 그건 우리 최정예 미국전사단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해요.그런 놈을 단 둘이서 퇴치했단 말인가요?"

샬럿이 갑자기 흥분하자 청창은 당황했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부상당했다는 그 남자는 대체 누구죠? 신분증이 있었을거 아닙니까?"

"아..네. 얼른 조사를...

저...그게 네. 보고가 들어왔습니다.구용철이라는 사람이군요."

"구용철?!"

놀란 샬럿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단 둘이서 최상급 맘보토끼를 퇴치했다고 하길래 처음엔 거짓말인줄 알았다.그런데 그게 구용철이라면 왠지 가능할 것 같기도 했다.용철은 샬럿이 브라질에 있을때부터 눈여겨보던 사람이었다.남보다 훨씬 뛰어난 체력과 엄청난 깡다구를 가진 자였고 혼자 힘으로 그 위험한 파벨라 몇개를 순식간에 쓸어버린 인간이다.하지만 지금은 맘보토끼를 쓰러트린게 구용철인지 아닌지가 중요한게 아니었다.지금은 어떻게든 용철을 살려야 했다.

샬럿은 전화를 끊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말도 안돼...아무리 그래도 그렇지...설마 혼자 맘보토끼와 맞섰을줄이야.."

맘보토끼는 생긴건 귀엽게 생겼지만 거대괴수급의 힘을 가진 놈이다.

얼마전 플로리다에 나타난 은색 맘보토끼는 마을 7개를 순식간에 쓸어버리고 주민 수백명을 학살했다.결국 미국전사단 10명이 출동해서 그놈을 죽이는데는 성공했지만 미국도 용감한 전사 둘을 잃었다.그때 죽은 전사는 지부의 차장급이었고 둘다 20레벨이었다.

"대체 겁이 없어도 저렇게 없을수가 있나..."

"상처가 없는데 혼수상태라고?

그럼 탈력(脫力)? 힘을 너무 써서 탈력에 걸린게 분명해."

일반적인 탈력발작은 기면증과 관련이 깊은 질병의 일종이다.

때문에 병원에서 치료를 잘 받으면 회복될수 있다.그런데 능력자의 탈력은 그런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능력자가 가진 힘의 원천은 기력(氣力)이다.그런데 그 기력이라는게 무한한게 아니라서 기력이 모두 사라지면 능력자도 목숨을 잃는다.말하자면 능력자들은 자신의 생명력을 희생해서 괴수와 싸우는 셈이다.

한 사람의 능력자가 한번에 방출할수 있는 에너지는 한계가 있고 그 한계를 넘으면 능력자의 몸은 자신의 세포를 폭발시켜 없는 에너지를 만들어내게 된다.결국 능력자가 탈력상태에 빠졌다는건 없는 에너지를 짜내며 내장과 근육이 전부 망가졌다는 소리다.

탈력상태를 벗어날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다.

바로 또다른 능력자의 생명 에너지를 불어넣어 손상된 내장을 복구하는 것이다.그런데 그게 가능한건 힐러의 2차직업인 헬퍼. 그것도 여성 헬퍼밖에 없다.

"안돼. 아직 죽어선 안돼....!"

샬럿은 허겁지겁 전화기를 들고 미국능력자 본부에 전화를 걸었다.

"한국 지부장 샬럿입니다.

헬퍼 한 사람을 지원해주실수 있나 싶어서요.한국 지부의 주력 전사중 하나가 맘보토끼를 잡고 탈력 상태에 빠졌습니다.섹스 힐링이 가능한 사람 하나를 알아봐주세요.아니..돈은 얼마든지 드릴수 있습니다. 꼭 좀 부탁드립니다. 급해요."

샬럿은 그 담당자에게 사정하다시피 매달렸지만 담당자의 반응은 냉정하기만 했다.

"지부장님은 헬퍼가 무신 창녀인줄 아십니까?

소중한 헬퍼가 그깟 돈 때문에 한국까지 가서 몸을 판다고요?"

"창녀라고 하는게 아닙니다. 제가 오죽 급하면 본부에 전화를 하겠습니까?

그러니까...혹시 급전이 필요해서 그런 치료라도 할 사람이 있으면 말입니다."

"안됐지만 한국까지 갈 헬퍼는 없는거 같군요.

안그래도 몇 안되는 헬퍼를 능력자 불모지인 한국으로 보낼수는 없습니다."

"제발 좀 부탁드립니다. 제발 좀 알아봐주세요."

샬럿은 그 담당자가 앞에 있으면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였다.

지금 전화를 받은 사람은 본부의 크리스라는 직원으로 샬럿보다 훨씬 낮은 위치에 있는 중간간부였다.그런데도 샬럿이 크리스에게 통사정을 했던건 직급을 내세울 여유가 없을만큼 급했기 때문이다.만약 여기가 미국이었다면 크리스따위를 상대할 필요없이 바로 본부장을 찾아갔겠지만 지금은 크리스의 도움이 없으면 그쪽으로 연락할 길이 없었다.

"못 들은걸로 하겠습니다.

돈 없고 백 없으면 죽는게 이 바닥이라는거 지부장님이 모를리가 없을텐데요?

한국에서 일어난 일은 한국 지부 내에서 해결하십시오.평소에 샬럿 지부장님을 좋게봤는데 오늘 대실망이군요.탈력에 걸렸다는건 그만큼 자기 관리를 못했기 때문입니다.그런 전사는 그냥 죽게 놔두세요.그게 미국전사단의 원칙입니다."

"저기...여보세요!"

담당자 크리스는 매정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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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간에도 용철은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용철은 119 구급대에 의해 인근 국립대 병원 응급실로 이송됐다.의료진들은 용철을 살리기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지만 그들의 노력도 소용없이 용철의 생명은 조금씩 꺼져가고 있었다.능력자인 헬퍼의 힐도 안 통하는 상황에서 현대의학이 통할리가 없었다.

마리엘은 응급실 밖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오빠......오빠.....!"

그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쉴새없이 흘러내렸다.

용철이 죽어가는데도 그를 살릴수 없는 자신의 무능이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난 네가 너무 좋아. 너랑 있으면 너무 편해서 말야...]

문득 용철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쳐갔다.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줬던건 오직 용철뿐이었다.그와 함께할수 있어서 기뻤고 그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수 있을거 같았다.그런데 그 얼굴을 다시는 볼수 없을지도 모른다.이대로 그가 죽는다면 더이상 살아갈 희망이 없었다.

"하느님. 제발 오빠를 살려주세요. 제발...."

"오빠를 살릴수만 있으면 저는 죽어도 좋아요......"

"부탁이에요. 제발 오빠를 제발 살려주세요.

전부 저때문이에요. 제 목숨을 거두시고 그대신 오빠를 살려주세요."

그녀는 응급실 앞에 꿇어앉았다.

콘크리트 바닥의 차디찬 냉기가 무릎을 사정없이 찔러댔지만 그런건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흘러내린 눈물이 그녀의 옷을 남김없이 적셔갔다.태어나서 이토록 울어본 것도 처음이었고 이토록 깊은 절망속에 빠진 것도 처음이었다.부모님이 돌아가셨을때도 이정도는 아니었다.이대로 그를 잃는다면 더이상 살아갈 이유도, 그럴 자신도 없었다.

그때 복도 건너편에서 요란한 발소리가 들리면서 사람들이 달려왔다.

"구용철씨라는 사람이 왔다고 하던데요?!"

선글라스를 쓴 여자가 응급실 앞에서 숨을 고르면서 주위를 살폈다.그녀는 마침 지나가던 의사를 발견하고 구용철의 소재를 물었다.

"지금 응급실에 있는데...저희도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저는 미국에서 온 힐러에요. 제가 온 이상 어떤 상처도 치료할수 있다구요!"

그 여자는 의사가 보란듯이 호언장담을 했지만 사실은 고작 3레벨 힐러에 불과했다.그 여자는 구용철이 응급실에 실려온 이유가 단지 외상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의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응급실 안으로 들어가려했다.

그 의사는 이미 처음 현장을 찾았던 형사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다 듣고 있었다.옆에 치유 능력자가 있었음에도 남자가 사경을 헤매고 있었으니 다른 힐러가 왔다고 해도 달라질건 없다고 생각했다.힐이 효과가 없다면 남은 길은 현대의학의 힘에 기대는 방법뿐인데 그것도 지금으로서는 큰 힘이 못되고 있다.

"이보세요. 저는 힐러라구요."

그 힐러는 무시당한게 기분나빴는지 언성을 높였다.

"알고 있습니다. 저기 울고 있는 아가씨도 힐러랍니다.

힐러에게 치료를 받았는데도 저 모양이에요.저희가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있지만.."

"뭐에요?"

그 힐러는 그제서야 응급실 앞에서 울고 있던 마리엘을 발견했다.그녀는 마리엘을 쳐다보며 무심코 선글라스를 고쳐썼다.

이 선글라스는 지부장 샬럿이 잠시 빌려준 마법안경이었다.

괴수와의 싸움은 많은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특히 상대 괴수의 힘을 가늠할 길이 없는 하급 능력자들은 첫 출전에서 죽는 경우도 허다했다.샬럿은 그걸 막아보기위해 마법안경을 빌려줬다.그녀는 본격적으로 전투가 시작되기전에 마법안경으로 괴수의 레벨을 측정해보고 힘들다 싶으면 바로 퇴각하라고 지시했다.

그녀는 이 힐러가 대체 얼마나 형편없는 힐러이기에 파트너가 병원에 실려오도록 방치했는지 그게 궁금했다.

그런데 그 마법안경이 분석한 마리엘의 레벨은 무려 22였다.

"마....말도 안돼! 한국에....22레벨 헬퍼가...."

그 힐러는 다리를 후들후들 떨더니 못볼걸 본 사람처럼 두어걸음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녀가 발광을 하던 말던 마리엘은 그저 서럽게 울기만 했다.다른데 신경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잠깐만....헬퍼가 있는데도 응급실에 실려왔다는건 혹시 탈력?'

그 힐러는 비록 레벨은 낮았지만 전투경험이 많았다.

그녀는 미국에 있을때 탈력을 일으킨 전사를 본 적이 있다.그 전사는 헬퍼의 도움을 받지못해 끝내 죽었다.애초에 자기 애인도 아닌데 탈력을 치료하겠답시고 몸을 줄 헬퍼가 있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때문에 탈력을 일으킨다는건 곧 죽음을 의미했다.

"저기...이 봐요.

당신. 그 구용철이라는 전사와 어떤 관계인가요?"

그 힐러는 울고 있던 마리엘에게 다가가 어깨를 흔들어댔다.

만약 구용철이라는 전사가 사경을 헤매는 이유가 탈력때문이라면 그를 살리기 위해선 이 여자의 몸을 빌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쯤 정신을 놓은 마리엘은 그녀가 어깨를 흔들던 말던 서럽게 울기만 했다.

"이봐요! 정신 차려요! 저 사람이 당신 애인인가요? 가족인가요?

만약 저 사람이 당신 애인이라면 살릴 방법이 있다구요!"

"네..?"

그 순간 울기만 하던 마리엘이 그녀를 돌아봤다.

북받치는 설움을 도저히 이길 길이 없었기에 옆에서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안들렸지만 용철을 살린다는 말은 그 슬픔을 뚫고 그녀의 뇌리에 정확히 와닿았다.

"그게....무슨 말인가요? 살릴수 있다구요?"

"네. 만약 저 사람이 응급실에 실려온게 탈력 때문이라면 당신과 동침하면 돼요. 동침하면 나을수 있다구요! 당신은 헬퍼니까요! 희생과 봉사를 위해 태어난 헬퍼니까요!"

그 여자는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했고 다죽어가던 마리엘의 얼굴이 조금씩 화사하게 피어나기 시작했다.처음 전직을 하고 비밀상인에게 스킬을 확인했을때 이상한 스킬이 하나 있는걸 똑똑히 확인했었다.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써먹지 못하고 쓸데없는 힐만 하다가 자책감에 빠졌던건 갑자기 쓰러지는 용철을 보고 너무 당황했기 때문이리라.

"말해봐요. 누구에요? 애인인가요? 가족인가요?"

"우리...사랑하는 오빠에요."

"애인이 맞군요! 다행이에요!"

그 여자는 벌떡 일어서더니 응급실로 뛰어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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