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레커닝-66화 (66/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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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

그로부터 1주일의 시간이 훌쩍 흘러갔다.

이곳은 리우 시외에 위치한 구용철 자택.

용철은 마당에 의자를 갖다놓고 BOPE 본부에서 발송한 계약해지 통지문을 읽고 있었다.언젠간 이렇게 될줄 알고 귀국 준비를 철저히 했지만 막상 BOPE에서 짤리고 보니 이제까지 흘려보낸 시간들이 그저 허망하기만 했다.킬러 쿠의 악명과 그 영웅적인 활약도 곧 세인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갈 것이다.마약 카르텔이 사라지면서 브라질엔 평화가 찾아왔고 한때 BOPE의 활약을 반기던 시민들도 이제는 이 폭력적인 조직을 꺼리게 됐다.

이제 브라질에서 능력자가 설 곳은 더이상 없다.

더이상 갈 곳을 잃어버린 용철에게 남은건 아내와 100억에 가까운 재산뿐이었다.

"언젠간 이렇게 될줄 알았다만 막상 짤리고보니 영 기분이 좋지만은 않구만."

"하긴 빨리 짤려서 다행인지도 몰라.

혹시나 여기 괴수가 나타난다면 마리엘을 빼앗으려고 할지도 모르니까."

용철이 짤리면서 마리엘도 덩달아 계약해지됐다.

사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면 모든 파벨라가 정리됐다고 BOPE를 해산할게 아니라 인원을 좀 줄이더라도 그대로 유지해야한다.마약 카르텔을 비롯한 범죄조직들은 바퀴벌레같아서 설령 한번 정리를 끝낸다고 해도 언젠간 다시 나타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정부 사람들은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걸 아까워한다.

예산을 아낀답시고 능력자들을 전부 해고하고 나중에 괴수가 나타나면 또 부랴부랴 능력자들을 소집하면서 난리를 칠게 뻔했다.그런식으로 능력자를 운용한다면 이 나라에 끝까지 남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때문에 설령 BOPE에서 계약기간을 더 연장해준다고 해도 여기 있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다.물론 그놈의 의리때문에 남았을 가능성은 있지만..

용철은 지포라이터를 꺼내 그 통지문에 불을 붙였다.

"너희는 나를 짜른걸 언젠간 후회하게 될거다."

불 붙은 종이는 너풀너풀 허공으로 날더니 곧 새까만 재로 변해갔다.

조금씩 하얀 재로 사위어가는 통지문을 보면서 문득 계약해지된 동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미래에 대한 계획없이 무분별하게 살다가 직장을 잃은 그들은 벌써 반쯤 패닉상태였다.계약해지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던건 오직 용철뿐이었다.

그건 앞으로 있을 모든 일을 점치고 그 나름의 준비를 했기에 가능했다.

지금의 용철은 처음 브라질 땅을 밟았을때와는 도저히 비교할수없을만큼 강해졌다.많은 돈을 벌었고 평생을 함께할 부인도 생겼다.현실에 안주하던 자들은 그 현실이 무너지자 좌절하고 절망했지만 미래를 생각하는 자에게 지금의 이 현실은 거쳐가는 길일뿐이다.

용철은 우선 브라질에 있는 재산들을 전부 현금화했다.

우선적으로 자동차와 오토바이를 정리했고 집과 농장도 부동산 업자에게 맡겨놨다.

만약 이 재산들을 현금화해서 국내로 들고간다면 세금폭탄을 맞겠지만 그냥 브라질에 놔뒀다가 다 잃는거보단 훨씬 나았다.브라질은 현재 능력자를 체계적으로 운용하지 못하고 있다.필요할때만 끌어쓰고 필요없으면 내팽개치는데 여기 붙어있을 놈이 몇이나 될까.만약 본격적으로 괴수가 나타난다면 브라질 전국이 개판이 되는건 시간문제였다.

통지서를 태워버린 용철은 뒷짐을 진채 잠시 하늘을 올려다봤다.오늘따라 하늘은 정말 시리도록 새파랗다.

"이제 한국으로 가는건가요?"

"응."

언제 왔는지 아내가 등 뒤에 서있었다.

매수자가 나오는 즉시 이 집을 비워줘야했기에 가정부들도 전부 돌려보냈다.

용철은 가정부 두명을 어쩔수없이 해고하면서 10달치 월급에 해당하는 거액의 위로금을 지급했다.먹고 살길이 막막한 사람들을 구제한다는 마음으로 가정부를 두명이나 썼던건데 막상 그들을 해고해야하니 마음이 아팠다.어쨌든 가정부들이 떠나면서 식사는 모두 어린 아내가 전담하게 됐다.

그녀는 용철을 잠시 바라보더니 부엌으로 달려가 조그만 접시 하나를 갖고왔다.꽤 맛있어보이는 토스트가 접시위에서 하얀 김을 조용히 흩뿌리고 있었다.

"이건 웬거야?"

"그냥 제가 한번 해봤어요. 평소에 아줌마들 하는거 눈여겨봤었거든요."

"그래..."

가정부가 있는데도 자꾸만 부엌을 드나드는 아내가 못마땅했던 적도 있었다.

능력있는 남편을 뒀으면 부인도 그에 맞춰서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하지만 자신이 바랬던대로 그녀가 부엌과 완전히 거리를 뒀었다면 가정부가 사라진 지금, 맛없는 냉동식품을 먹으면서 하루하루를 고통스럽게 보내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보니 부엌을 드나들던 그 행동이 그녀 나름의 선견지명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귀국을 전제로 모든 준비를 마쳤듯 그녀도 주부로서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음. 맛있다."

"정말요?"

"그럼. 누가 해준건데."

그 토스트의 재료라고 해봐야 식빵과 계란뿐이었다.

계란을 풀어서 그걸로 식빵을 적시고 프라이팬에 직접 구워낸 것이다.요리라고 할 것도 없고 그저그런 간식 수준이었다.그래도 맛있었다.비록 그 가정부들만큼 솜씨가 좋진 못했지만 그 투박한 토스트엔 자신을 생각하는 아내의 마음이 가득 묻어났다.

"생각하니 지난 일들이 전부 꿈 같아."

"네?"

"처음 내가 여기 왔을땐 거의 자포자기 상태였어.

BOPE에서 일 하는게 위험하다는걸 알았지만 그래도 했던건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이었지.능력을 얻기전에 나는 정말 별볼일 없는 인간이었어.나름대로 열심히 살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나는 단 한번도 내 인생에 만족해본 적이 없어.그래서 처음 능력을 얻었을때는 이 길이 아니면 난 끝장이라고 생각했지.그래서 이 브라질을 택한거야."

"오빠...."

"목숨을 걸고 싸우고 싸우다보니 여기까지 왔다.

처음 그렇게 긴장하고 찾아갔던 BOPE도 익숙한 직장이 됐고 또 그러다보니 지금은 그 직장에서 물러났지.한치앞도 내다볼수 없는게 사람이라지만 정말 난 내가 이런 삶을 살게될줄이야 꿈에도 몰랐어.그래...제일 꿈만 같은건 바로 너를 만난 일이겠지."

그녀는 대답대신 그저 이쪽을 빤히 올려다봤다.

"처음 브라질이 왔을땐 목적이 없었다.

그저 돈을 벌어서 남들 다 하는거 나도 하고 싶었어. 그뿐이야.

그런데 지금은 내 나름의 목적이 생겼다.막연한 목적이 아니라 눈앞에 분명히 보이는 목적이 생겼어.그건 바로 누구도 넘볼수 없을만큼 강해지는거야.그 어떤 괴수가 덮친다고 해도 당당히 너를 지키고 내 가정을 지킬수 있는 바로 그런 힘."

마리엘은 그런 용철을 조용히 올려다봤다.

늘 그를 정말 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기댈수있고 의지할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오늘따라 그 넓고 튼튼한 어깨가 이상하게 좁아보였다.힘이 넘쳐 흐르던 그 몸이 너무도 왜소해보였다.

그건 그가 강해져야 하는 이유를 알았기 때문이다.

어떤 생각을 갖고 브라질에 왔는지 그걸 알기전까지만 해도 원래부터 강한 사람이었고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 이 말을 듣고보니 그에게도 나름의 방황의 시간이 함께했음을 알았고 고뇌의 시간이 있었음을 알았다.

저렇게 크고 강해보이지만 실은 자신과 똑같이 아픔을 느낄줄 아는 사람이다.

그녀는 조용히 다가가 용철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그 마음 제가 잘 알아요.

그래서 저도 오빠한데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은거에요."

"알아주니 고맙네.

처음 너를 봤을때는 너무 안타까워서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었어.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내가 정말로 너를 보호할수 있을지 의심하는 마음도 있었어.내 능력에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야.너한데 말을 걸고 내 숙소로 데리고 온 것도 어디까지나 답 안나오는 고집에 가까웠지.그런데 지금은 아니야.다른건 몰라도 너 하나만은 지킬수 있어."

"알아요. 저는 오빠 믿어요."

"그래..."

국내파의 방해를 예측하고 그에 걸맞는 보호막을 마련한 것도 다시는 이전의 그 힘 없는 소시민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지금의 평온을 지키기위해선 그 모든 난관을 보란듯이 돌파해야한다.사실 서문식도 샬럿도 완전히 믿을수는 없었다.백 퍼센트 믿을수있는 사람은 오직 마리엘뿐이었다.

세상은 얼핏보면 아름다워보이지만 실은 피튀기는 생존경쟁의 현장이다.

조금만 틈이 보이면 물어뜯으려고 하는게 바로 이 세상이다.

그러니 그런 세상속에서 살아남으려면 강해져야 한다.

강해지기위해선 어떻게든 힘을 얻어야 한다.

그게 육체적인 강함이든 정신적인 강함이든 그게 아니면 조직적인 힘이든..

그러기위해서 브라질에 왔고 지금은 브라질을 떠나려한다.

앞으로 어떤 고난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지금보다 강해지고 또 강해질 것이다.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아내를 지키고 가정을 지키고 자신만의 삶을 지킬 것이다.

"오빠."

"응?"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는 몰라도 저만은 오빠 곁을 꼭 지킬게요."

"그래...고맙다."

"뭘요. 오빠가 없었다면 저는 죽었을지도 몰라요.

비록 제가 세상을 오래산건 아니지만 오빠가 없는 삶은 생각할수도 없어요."

"나도 마찬가지야. 내가 여기서 성공적으로 적응할수 있었던건 다 네 덕분이야."

"고마워요. 저도 오빠 덕분에 여기까지 왔어요.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저만은 오빠 곁을 꼭 지켜드릴게요."

"그래. 한국 가서도 잘 살수 있겠어?"

"응. 외할아버지의 나라니까요. 언젠가 한번은 꼭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래. 그렇게 이해해주니 정말 고맙다."

용철은 그녀를 끌어당겨 꼭 안았다.

이제까지 쌓은 막대한 부는 이제는 한낱 작은 숫자로 변해 통장 한켠에 찍혔다.

목숨을 걸고 얻은 킬러 쿠의 악명도 BOPE의 소멸과 함께 곧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갈 것이다.이곳에서 알았던 많은 동료들과 사령관도 이제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 됐다.이곳에서 얻었던 모든 것들이 변하고 또한 사라져갔지만 그런 와중에도 이 여인만은 변함없는 모습으로 곁에 남았다.

그녀의 품은 예나지금이나 따스하고 포근했다.

지금 걸어가는 이 길의 끝에 그 어떤 전장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변함없이 기대고 쉴 곳이 있었기에 그 어떤 고난도 두렵지 않았다.

이걸로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 브라질이 성장의 발판이었다면 지구 반대편에서 기다리고 있는 조국은 최고의 능력자라는 그 꿈을 이룰 최고의 무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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