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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레커닝-44화 (44/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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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초인의 몸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고 삶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전같았으면 이런 산을 혼자 올라오기도 힘들었을지 모른다.여자를 안고 뛰어오는게 아니라 여자 손에 이끌려서 산을 올랐을지도 모른다.허나 그런건 이제 옛날 이야기였다.

"아싸좋구나. 이런 산쯤이야 이 구용철님에겐 아무것도 아니지."

용철은 별 어려움없이 산 정상까지 올라왔다.

사실 예수상 자체는 별거 아니었다.멀리서 봤을때는 엄청 커보였는데 실제로 올라와보니 규모가 생각보다 작아서 좀 실망스러웠다.정상에는 예수상을 중심으로 난간으로 둘러싸인 상당히 넓은 공간이 존재했다.분위기가 전체적으로 팔공산 갓바위와 유사했다고나 할까.그렇게 넓지 않은 공간에 관광객들이 꽉꽉 들어차니 무슨 콩나물 시루같았다.

사람들은 예수상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대고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마리엘을 안은 용철도 그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섰다.

"오빠. 이제...내려줘요. 사람들이 막 쳐다보잖아. 응?"

"아. 그래."

여자를 안는게 생각보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그녀의 몸은 마치 깃털처럼 가벼웠다.다른 남자들에겐 여자를 안는게 일종의 봉사개념일지도 모르지만 용철은 아니었다.전혀 무겁지도 않았고 그녀를 안고 여기까지 뛰어오며 승리감과 함께 뭔가를 해냈다는 성취감도 맛봤다.

잃은거라곤 하나도 없이 충분히 만족을 느꼈으니 전혀 손해본게 아니다.

이 여자를 안으면서 그녀를 보란듯이 보호해냈고 또한 완전히 자기 수중에 넣었다고 확신했다.그녀가 자신에게 의지하고 보호를 받는걸 보며 이 몸속에서 꿈틀대던 수컷의 지배욕은 한없는 만족을 느꼈다.

간간히 느껴지는 향긋한 숨결과 그녀의 따스한 체온도 너무 좋았다.

생각같으면 계속 안고 다니고 싶었지만 이목이 문제였다.용철은 남들 시선따윈 별로 신경 안썼지만 마리엘이 너무 부끄러워했다.

"이리 와. 오빠 손 꼭 잡아."

"응."

사진찍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지만 디카를 가져온김에 찍기로 했다.

우선 예의상 예수상을 먼저 촬영하고 그걸 배경으로 마리엘을 찍어줬다.처음엔 멀뚱히 서있던 그녀가 사진기를 들이대는걸 알았는지 한손으로 귀엽게 V를 그렸다.

"와우."

찍힌 영상을 확인하던 용철이 입을 딱 벌렸다.

원래부터 예쁘다는건 알았지만 사진발이 이렇게 잘받을줄은 몰랐다.실물보다 오히려 이 사진이 더 이쁜거 같았다.마리엘은 약간 부끄러웠는지 혀끝을 살짝 내밀더니 쪼르르 달려왔다.

"잘 나왔어요?"

"응. 엄청 잘 나왔어."

"너무 작아보이는데....."

"아냐. 작기는.."

아무래도 키에 컴플랙스가 있는거 같다.

물론 이곳에선 그게 결코 크다고 할수없는 키지만 한국에선 충분히 먹힐만했다.그건 그렇고 항상 존댓말로 일관하던 마리엘이 오늘은 웬일인지 갑자기 반말을 쓰기 시작했다.그게 단지 오빠랑 놀러온게 너무 좋았고 그때문에 갑자기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서 그러는건지 그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건지는 모르지만 예의바르게 존댓말을 쓰던 그녀만큼이나 반말을 쓰는 모습도 의외로 귀여워서 좋았다.

"이제 같이 한번 찍을까?"

"응!"

같이 찍는다는 말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용철이 막 주변을 둘러보니 마침 사진기를 든 커플 관광객이 보였다.그들에게 다가가 서로 사진을 찍어주기로 했다.

"자. 이쪽을 보세요. 두 분..다정하게 손 잡고...찍습니다."

용철은 그녀와 손을 꼭 잡고 사진기를 바라봤다.

어찌 손을 잡는게 날이가면 갈수록 자연스러워졌다.이전엔 그저 손을 건드리기만 해도 얼굴을 붉히면서 어쩔줄몰라 했는데 요즘은 그냥 눈만 마주치면 손을 잡았다.단지 인종이 다를뿐이지 그 분위기만 보면 이제 누가봐도 오빠랑 친동생이었다.그런데 그렇게 스스럼없이 다가갈수있게된게 과연 좋은일인지 아니면 나쁜일인지 지금도 애매했다.

자신이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일정치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엔 단지 힐이 필요해서 데리고온 동료.그이후엔 엉겁결에 생긴 여동생정도로 여겼다.그런데 요즘들어서 그녀를 단지 여동생으로 삼기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오빠와 동생사이의 애정을 넘어서는 뭔가가 지금도 용철의 마음을 끊임없이 괴롭게 만들었다.

어느새 마리엘을 동생이 아닌 여자로 보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차마 그 말을 입밖에 낼수가 없었다.그녀는 아직 어리고 철도 없다.이쪽에서 마음먹고 꼬시면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할 이유도 없었지만 그런 생각을 할때면 이런 어린 애를 욕정의 대상으로 삼는거 같아서 크나큰 죄책감을 느꼈다.

만약 그 마음이 지금 이순간이 아닌 1년...아니 2년후에도 그대로 이어진다면...

그녀가 어른이 됐을때 그 의향을 물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 기다린다고 생각하니 너무도 가슴이 아팠다.

지금 잘하고 있는지 아니면 기회를 놓치는 바보짓을 하고 있는지 자꾸만 헷깔렸다.

"됐습니다. 와우! 아가씨가 정말 미인이네요."

사진을 찍어준 여자는 촬영된 영상을 확인하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그냥 봤을때도 마리엘이 너무 귀엽고 이쁜 이미지라 질투가 날 정도였는데 사진은 더 예뻤다.

"감사합니다."

사진을 찍고 리우 시내를 내려다보니 어느새 주변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저 해변의 은모래처럼 하얗게 빛나던 건물들이 어느새 꿀빛으로..그리고 조금씩 짙은 회색으로 물들어갔다.어두워진 건물 여기저기에서 주황색 불빛들이 하나둘 올라왔다.관광객들은 저마다 환호성을 지르며 멀리 내려다보이는 리우시내를 향해 카메라를 들이댔다.

조금씩 밤이 찾아오며 예수상에도 조명이 켜졌다.

좌대의 아랫쪽에서 조명이 비치면서 하얗게 빛나던 예수상이 조금씩 연보랏빛으로 물들어갔다.문득 고개를 돌려 시내쪽을 바라보니 아까 점점이 보이던 주황색 불빛들이 이젠 시내 곳곳으로 이어지고 있었다.저 멀리 기력이 다한 태양이 조금씩 빛을 잃어가자 도시의 불빛들은 태양의 쇠락을 애도하듯 더더욱 강하게 타올랐다.

주황색 불빛들이 뭉치고 뭉치면서 짙은 꿀빛으로 도시 여기저기를 물들였다.

일제히 불이오르며 시내를 가로지르는 고가도로와 코파바카나 해변이 찬란한 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마치 금가루를 뿌린거 같다.리우의 상징인 해변과 조금전 헤엄쳤던 그 바다 건너편으로도 수많은 불빛들이 군락을 이뤘다.조금씩 어둠이 드리우며 불빛의 기세도 더더욱 강렬해졌다.리우의 밤은 찬란한 금빛으로 눈부시게 빛났다.

'하코다테보다 훨씬 낫구만...'

홍콩과 나폴리, 일본 하코다테의 야경을 세계 3대 야경으로 친다지만 그것들도 리우의 야경에 비할바는 아니었다.이렇게 아름다울줄은 꿈에도 몰랐다.

관광객들은 저마다 탄성을 올리며 사진을 마구 찍어댔다.

용철은 마리엘의 손을 꼭 잡고 그 야경을 말 없이 바라봤다.

이렇게 넓고 아름다운 세상이 있는데...

이제까지 좁은 새장같은 곳에 갇혀서 너무도 재미없게 살았다.용철은 무의식중에 감탄사를 내뱉으며 그녀를 살며시 돌아봤다.빛나는 야경속에 시선을 꽂은채 조용히 미소짓던 그녀도 마치 약속이나한듯 이쪽을 돌아봤다.저 뒤에서 빛나는 아름다운 야경때문인지 수줍게 미소짓는 그 얼굴은 평소때 봤던 그 귀여운 소녀의 모습이 아닌거 같다.

마치 그녀의 얼굴에서 광채가 뿜어지는거 같다.

그냥 보기만 해도 황홀했고 갑자기 눈을 마주치기가 민망했다.

"이렇게 이쁠줄은 몰랐어."

"그러네요. 정말 이뻐요."

"너 여기 올라와본 적 없어?"

"낮에만 올라왔어요. 밤엔 조금 무서워서요."

"그래. 처음으로 와보니 어때?"

"너무 좋아요."

"나도 좋아. 네가 있어서 더 좋은건지도 모르지."

그녀는 버릇처럼 얼굴을 붉히며 또 시선을 피하려 했다.

이 앞에 서있는 여자는 더이상 소녀가 아니었다.그녀 스스로 그렇게 강조했던 것처럼 이제는 다 자란 훌륭한 아가씨다.지금 보이는 그 모습은 결코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조금전 손을 잡고 사진을 찍었을때부터 마음이 들쑥날쑥했다.그런데 야경을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짓는 그 얼굴을 보니 너무 예뻐서 넋이 나갈거 같았다.

만약 그녀가 어린 아이라면 그녀를 보고 이런 감정을 느낄수 있을까?

혹시 바른생활 사나이라는 허울좋은 굴레속에 얽매인채 본질을 보지 못하고 있는건 아닐까? 그녀는 어리다고하면 무척 싫어했다.그게 단지 사춘기 소녀의 치기어린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단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그 마음의 진실성을 의심할순 없다.

자신 역시 그녀를 이미 동생이 아닌 여자로 보고있다.

보기만 하면 의식적으로 손을 잡았던 것도...그녀를 안고 계단을 뛰어올랐던 것도...전부 그때문인지도 모른다.아직은 너무 어리고 그래서 결코 자신의 반려가 될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를 그저그런 동거인이며 동료라고 냉정하게 선을 긋지는 못했다.

지금의 이 마음은 스스로 생각해도 갈피를 잡을수가 없었다.

어디선가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주변을 들이쳤다.

마리엘의 밀짚모자가 살짝 흔들렸고 탐스러운 머리칼이 살짝 흩날렸다.약간 추웠는지 그녀는 어깨를 움츠렸다.용철은 씨익 웃으며 그녀의 어깨에 슬쩍 손을 갖다댔다.오른쪽 어깨에 손을 얹고 살짝 힘을 가하자 그녀의 왼쪽 어깨가 용철의 가슴과 맞닿았다.

"추워?"

"응."

"추우면 오빠한데 더 딱 붙어봐."

그녀는 잠시 망설였지만 곧 배시시 웃으며 용철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오빠."

"응?"

"오빠가 생각하기에 나 어때요?"

"내가 생각하는 너?"

"응."

"좋아."

"핏! 겨우 그거뿐이야?"

"어떤 대답을 원하는거야?"

"그냥 좋다고 하면 내가 아무것도 아닌거잖아."

그 순간 머리속을 어지럽히던 고민들이 마치 눈 녹듯 녹아내렸다.

그녀를 끝까지 동생으로 취급했던건 무려 14살이라는 나이차이때문이었다.먼저 마음을 표해도 그녀가 받아줄지도 미지수였고 설령 받아준다고 해도 한 연인으로 맺어지긴 너무도 많은 장애물이 이 앞에 도사리고 있다.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툴툴거렸을때 왠지 그게 자꾸만 망설이는 자신을 채찍질하기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을 좋아하고 있었다.

오빠로서 좋아하는게 아니라 한 남자로서 좋아하고 있었다.

설령 친 남매라고 해도 남자가 있는 집에서 문을 열어놓고 잘리는 없다.

게다가 조금전 해변에서 있었던 그 일이 그 생각에 확신을 줬다.단지 한 집에 사는 오빠라면 오빠가 누구를 만나고 누구랑 이야기하던 질투할 이유가 없다.

그걸 알면서도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망설였다.

하지만 서로 좋아한다면 나이따위가 무슨 상관인가.

용철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봤다.

리우의 야경에 시선을 붙박은채 조용히 턱을 괴고있는 그 얼굴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마리엘."

"응?"

"오빠는......."

갑자기 가슴이 뛰고 입 안에서 말이 걷돌기 시작했다.

이런 경험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이렇게 떨어본 것도 처음이었고 여자때문에 긴장한 것도 처음이었다.이 가슴의 떨림이 보통의 떨림을 넘어서는 전율로 변해 온 몸을 찢어발길듯 격렬하게 요동치는 것도 그녀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었다는걸 알았기때문인지도 모른다.둘의 마음이 서로를 향한다는걸 알았으니 이제 최후의 선택은 자신의 손에 달려있다.

자신이 그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는걸 알았을때 그만 눈앞이 아득했다.

"왜 그래요?"

그녀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봤다.

"오빠는....."

"응?"

"오빠는.........."

갑자기 몸이 부르르 떨렸다.

"왜 그래요? 오빠?"

"오빠는 네가 좋아. 네가 동생이 아닌 여자로서..."

"에?"

"네가 좋다구."

그녀는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갛게 달아올랐고 그 시선도 정처없이 헤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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