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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레커닝-40화 (4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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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착

"그래? 그런 일이 있었어?"

"그럼. 내가 쫓아버린다고 아주 혼났지. 그래도 내가 누구냐? 나인철 아니냐?"

BOPE 본부 뒷뜰의 나무 아래서 용철과 마리엘 그리고 나인철이 마주 앉았다.

나인철은 용철을 만나자마자 마리엘이 당했던 일들을 아주 장황하게 떠벌리기 시작했고 그 말을 듣자마자 용철의 눈이 이글거렸다.처음 마리엘을 BOPE 본부 앞에서 봤을때 숙소에 못들어가고 서성이는게 분명 누군가의 괴롭힘때문이라고 짐작은 했다.그런데 그건 그 당시에 나인철을 비롯해서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외면했기 때문이고 보호자가 있으면 분명 달라질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보니 달라진건 아무 것도 없는거 같다.

마리엘을 괴롭히는건 그 뒤를 봐주는 자신을 무시하는 짓이었다.

남들이 보던 말던 본부 앞에서 손을 잡고 돌아다닌건 그 괴롭히는 놈들 보라고 한 짓이었다.그런데 그런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것들이 또 마리엘을 건드렸다.

절대 그냥 놔둘수 없었다.

"어떤 개년들이...그년들 누군지 알아?"

"내가 누구냐? 나인철 아니냐? 당연히 알지."

용철이 눈을 부라리며 묻자마자 나인철이 기다렸다는듯 대답했다.

"그 씨발년들 어디사는지 알아?"

"알지."

"가자. 다시는 못괴롭히게 아주 개박살을 내준다."

용철이 나인철을 대동하고 막 일어서려는데 마리엘이 옷자락을 붙들었다.그녀는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용철이 자기때문에 싸우는게 싫었기 때문이다.안그래도 용철에게 민폐만 끼치는데 이젠 쓸데없는 싸움에 말려들게 만들었다.그녀는 죄책감에 짓눌린채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만해요. 오빠. 저는 괜찮아요."

그렇게 세게 맞았음에도 마리엘의 얼굴엔 별다른 상처가 없었다.

물론 그건 경험치를 나눠주면서 그녀의 물리방어력이 엄청나게 상승했기 때문이다.사실 그런 1레벨 양아치들이 아무리 때려봐야 16레벨인 마리엘을 쓰러트린다는건 불가능했다.마리엘은 다치지 않았으니 괜찮다고 했지만 용철의 분노를 삭히긴 역부족이었다.

"뭐가 괜찮다는거야? 그렇게 당하고도 정신을 못차리니?

그런 개 잡쓰레기들은 피하려고 하면 더 신이 나서 설친다구.이기던 지던 악으로 덤벼야 해! 악으로 덤벼서 살점이라도 물어뜯어야해! 그래야 더 못 괴롭힌다."

"아프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열받은 용철을 침을 튀기면서 마구 열변을 토했다.

괴롭힘을 당하고 축 늘어진 마리엘의 모습위로 중학교때 자신의 얼굴이 겹쳐보였기 때문이다.그때의 자신은 반에서 가장 작고 약한 애에 속했다.양아치들은 아무 이유도 없이 단지 힘이 약하는 이유만으로 온갖 방법으로 자신을 괴롭혔다.당하고 당하면서 생각했다.어떻게 하면 이 지옥을 탈출할수 있을지 머리를 싸매고 생각했다.그리고 나온 결론은 죽을 힘을 다해서 덤비자는 것이었다.얻어맞으면서도 끝까지 달려들었고 끝내 그 양아치놈의 목을 물었다.있는 힘껏 물고 고개를 뒤틀자 살점이 뜯어졌다.

그때 이후로 양아치들의 괴롭힘은 사라졌다.

미친 놈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모든 친구를 잃었지만 그래도 괴롭힘은 면했다.그때서야 알았다.악만 있으면 못할게 없다는걸.그리고 그걸 마리엘에게도 가르쳐주고 싶었다.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싸움 자체를 두려워하는거 같았다.

"괜찮아요. 제발 그러지말아요. 대원들끼리 싸우면 징계를 당해요.

저 때문에 오빠가 징계를 당하는건 싫어요.그러니까...제발 싸우지 마요."

"으흠!"

생각같으면 그 잡년들을 다 때려죽이고 싶었지만 마리엘이 꼭 울거 같아서 마음이 흔들렸다.게다가 대원끼리 싸우면 징계를 당한다니 그것도 문제였다.

"그냥 패는건 일시적인 화풀이밖에 안돼."

"후우! 짜증나네."

"용철아. 일단 진정하고 사령관한데 이야기하는게 어떨까?"

"사령관?"

나인철은 그게 정답이라는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용철은 영 내키지 않았다.

만약 여기가 학교고 대원들이 학생이라면 사령관은 학생주임이다.양아치가 선량한 학생을 괴롭히면 학생주임에게 고발하는게 맞다.하지만 그 사령관은 마리엘이 괴롭힘을 당한다는걸 알면서도 방치한 인간이었다.그런 인간에게 도움을 청해봐야 제대로 된 도움을 줄리가 없었다.그렇다고 그것들을 직접 징벌할수도 없었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왜? 사령관이 못미더워서?"

"당연한거 아냐? 이 애가 본부앞에 있었을때부터 누구 하나 거들떠보는 놈이라도 있었냐? 너 포함해서 어느 누구하나 이 애한데 관심을 준 적이 없어.그런데 지금와서 사령관한데 그런 부탁을 해봐야 제대로 들어주겠냐 이 말이지."

"아니...그건 다 지난 일이고.

지금은 상황이 다르잖아. 네가 엄청난 활약을 펼치면서 사령관이 너한데 거는 기대가 대단해.지금 넌 우리 BOPE의 슈퍼 스타야. 네가 부탁하면 뭐든 들어줄거야."

"으흠...."

용철은 짧은 신음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털썩 앉았다.

나인철의 말도 어느정도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다.마리엘은 예나지금이나 준대원이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마리엘의 보호자인 자신은 사령관의 신임을 얻고있다.하긴 부작용을 감수하면서 직접 처리하는거보다는 좀 찌찔해보이지만 사령관의 힘을 빌리는게 옳다.

"어쨌든 그건 그렇게 처리하기로 하고....

귀여운 동생이 도시락 싸왔는데 그래도 관심 좀 가져줘야할거 아냐?"

"아...그랬지. 음."

용철은 그제서야 마리엘이 들고있던 바구니를 떠올렸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인철 이놈이 따라오지만 않았으면 그 잡년들이 한 짓을 알지도 못했을 것이고 분노하지도 않았을거다.이놈만 없었으면 그냥 마리엘과 도시락을 나눠먹으며 평소때처럼 한가로운 오후를 보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보니 이놈이 좀 이상했다.

이놈은 얼마전까지만해도 용철씨 용철씨 하면서 뭔가 끝까지 거리를 두는거 같았다.그런데 요근래 갑자기 말을 놓더니 친구하자며 먼저 손을 내밀었다.왜 갑자기 변했을까? 그리고 이렇게 곰살맞게 구는 이유는 대체 뭘까? 나인철의 첫 인상은 차가웠고 생각하는 방식이라던지 마리엘을 대하는 태도라던지 하나같이 그 인상과 일치했다.

그런데 지금 하는 행동은 이전에 봤던 그 이미지와 180도 달랐다.양아치들에게 당하는 마리엘을 구해준 것도 그렇다.본부앞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마리엘을 바보라면서 비웃던 그가 갑자기 정의의 사도가 됐다.

이놈은 얼마전까지 자신의 포르투갈어 통역이었다.

그런데 통역을 통하지않고 마리엘과 대화하는걸 전혀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보통 사람이라면 대체 어찌된 일인지 그 이유라도 물어보는게 정상이다.그런데 나인철은 그런건 전혀 묻지 않았다.게다가 어딘지 모르게 의뭉스러운 그 미소는 뭔가 불길하기까지 했다.

용철은 겉으로는 웃으면서 속으로는 이놈을 경계했다.

나인철은 두 사람을 교대로 쳐다보더니 갑자기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났다.

"아참. 내 정신 좀 봐. 남이 데이트하는데 멋대로 끼면 안되지. 으흠!"

"데이트는 무슨 데이트야."

마리엘은 데이트라는 말을 듣자마자 얼굴을 붉혔지만 용철의 퉁명스런 반응에 곧 시무룩해졌다.그놈은 용철이 인상을 쓰던 말던 슬슬 휘파람을 불면서 가버렸다.

'흥. 무슨 꿍꿍이 속이지?'

뭘 생각하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꿍꿍이가 있었다.

"오빠. 일단 좀 드세요. 제가 이것저것 해왔어요."

"응. 그래. 얼른 먹자."

하긴 나인철이고 양아치들이고 그딴건 중요하지 않다.

이 BOPE는 어차피 스쳐가는 직장일뿐이다.여기 온 이유는 단지 한국에서 능력자가 생소했고 그때문에 표면적으로 활동할수 없기때문이었다.그러니 여기서 알게된 사령관이나 나인철이나 이런 사람들은 이제까지 거쳐왔던 직장동료들이랑 다를게 없다.물론 직장동료를 넘어 인간대 인간으로 교제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관계를 이어가겠지만 아쉽게도 그런 사람은 단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사람을 죽이는걸 업으로 삼아서 그런지 하나같이 거칠고 이기적이고 아주 지독하게 현실적이다.한마디로 인간미라곤 조금도 없다.

'뭐....사람을 수백명이나 죽인 내가 할 말은 아니다만.'

헌데 이 여자애는 다르다.

어찌보면 흔한 직장동료라고 볼수도 있겠지만 같은 숙소에서 사는 사람이다.같은 숙소에 산다는건 자신만의 공간을 양보한다는 뜻이다.그녀가 과연 어느정도까지 마음을 열었는지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으로 보면 거의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그러니 지금 신경쓸건 스쳐가는 인간들이 아니라 끝까지 같이 갈 사람이었다.

처음 마리엘을 데리고 왔을때.

그녀는 자기 방에 들어가서 문을 꼭 잠궜었다.

자신이 힐러를 필요로해서 그녀를 데리고 왔듯 그녀역시 단지 묵을 곳이 필요했을뿐이다.문을 잠근다는건 분명 언제 짐승으로 변할지 모를 구용철이라는 인간을 막기 위해서다.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그녀가 잠금장치를 풀어놓고 자기 시작했다.

마음만 먹으면 마리엘을 강간하는건 일도 아니었고 그녀도 자신이 그정도 힘을 갖고있다는걸 잘 알고 있다.그런데도 문을 잠그지 않는다는건 그만큼 완전히 믿기 시작했다는 증거다.물론 자신도 그 믿음을 저버리고 못된 짓을 할만큼 막되먹은 놈은 아니다.

인간이란 항상 마음에 벽을 갖고 다니지만 그 벽을 넘은 사람에겐 관대하다.

감리 이성욱이 그랬고 원청의 이부장이 그랬다.처음엔 경계하지만 한번 믿으면 끝까지 믿게 된다.정말 돌이킬수 없는 실수를 하지 않는이상 그 믿음은 오랫동안 유지된다.

"아~~ 입 벌려요."

"음."

마리엘은 샌드위치 하나를 용철의 입가로 가져갔다.

입을 아~ 벌리라는 말이 뭔가 좀 오글거렸지만 그렇다고 거부할 분위기도 아니었다.용철은 슬쩍 눈을 감고 입을 벌렸다.처음 눈을 감았을땐 갑자기 확 쑤셔넣으면 어쩌나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입안에 들어온건 샌드위치의 한 모서리뿐이었다.별 기대없이 먹었지만 맛은 상상이상이었다.시중에 파는 샌드위치는 마요네즈를 너무 쳐넣어서 느끼하거나 식초 과용으로 신맛만 더럽게 강했는데 이건 정말 맛있었다.

"음. 맛있다. 너 옛날에 요리 배웠냐?"

"헤...별거 아니에요."

"별거 아닌게 아닌데? 이제 시집가도 되겠구만."

"아....그....저...."

그녀는 시집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얼굴을 붉히면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용철은 그녀가 보는 앞에서 그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었다.별로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일부러 갖고 온걸 매정하게 돌려보낼순 없었다.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너무 맛있어서 아무리 배가 불러도 꾸역꾸역 쳐먹을수 있을거 같다.

"입 닦으세요. 여기 물도 있어요."

"응. 그래 고마워."

"뭘요."

그녀는 용철이 샌드위치를 다 먹기를 기다렸다가 손수건으로 입술을 살살 닦아줬다.그녀의 손수건에선 향긋한 냄새가 났다.이전같으면 샌드위치를 쳐먹고 그냥 대충 손등으로 문질러 닦았겠지만 그것도 옛날 이야기였다.마리엘은 용철을 따라다니면서 이것저것 부지런하게 도왔다.뭘 먹기만 하면 입을 닦아주고 욕실에 들어가면 목에 수건을 걸어줬다.리모컨을 찾으면 구석에 쳐박혀있던걸 용하게도 찾아왔다.

입가를 닦아주며 그녀와의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갸름한 턱선과 눈처럼 뽀얀 피부.그리고 자그마한 얼굴과 유난히 반짝이는 눈.아무리봐도 정말 예쁜 소녀였다.그녀는 너무 어렸고 그때문에 여자로 볼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얼굴을 마주할때나 잠든 모습을 볼때면 한번씩 정말 가슴이 두근거렸다.

손수건의 향취만큼이나 은은한 여인의 살냄새가 조금씩 콧끝을 스쳤다.

그녀가 옆에 붙어앉아 입술을 닦아주고 또 한번씩 팔짱을 낄때마다 한창 물오른 소녀의 젖가슴이 팔뚝에 닿아 짜릿한 전율을 일으켰다.

무심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찔끔했다.

얼굴이 너무 가까웠고 곧 눈물을 흘릴듯 촉촉하게 젖어있는 그 눈이 시야를 가득채웠기 때문이다.약간은 뾰로통한듯 또 약간은 호기심에 가득한듯 여러가지 감정이 어지럽게 뒤섞인 그 눈이 마치 하나의 낙인처럼 가슴속 깊은 곳을 강렬하게 잠식하는 것 같았다.

샌드위치를 다 먹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곁을 떠나지 않았다.

문득 아주 어릴때 학교앞에서 팔던 병아리를 사들고 좋아하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벌써 20년도 넘은 일이지만 그때의 기억이 왜 이렇게 생생하게 떠오르는지는 정말 모를일이다.단지 귀엽다는 이유로 샀고 또 가격이 싸다는 이유로 샀다.그걸 집에 갖고와서 쌀알도 주고 벌레도 잡아주면서 키우려고 했지만 끝까지 살아남은 놈은 거의 없었다.

병아리의 운명은 자신을 산 사람에게 달려있다.

철없는 병아리는 주인을 어미로 생각하고 따라다니지만 간혹 짖궂은 아이들은 그 병아리를 괴롭히다가 죽이기도 한다.괴롭힘을 당하다가 끝내 죽어가면서도 병아리는 그래도 주인만 바라본다.의지할 곳은 오직 그 주인뿐이기 때문이다.

부모를 잃고 동료 능력자들에게 천대받으며 마지막으로 있을 곳을 찾은 그녀가 마치 철없는 꼬마들에게 운명을 맡긴 그 불쌍한 병아리처럼 느껴졌다.

이제 병아리는 구용철이라는 꼬마에게 팔렸다.

힐러 마리엘은 전사 구용철이 없으면 더이상 있을 곳이 없다.

그녀를 살릴지 죽일지는 이제 오직 자신에게 달려있다.

사령관을 찾아가 담판을 지은 그 시점에서 자신은 이미 병아리를 산 셈이다.그녀에게 다른 선택을 할 여지를 아예 빼앗은 셈이다.이제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녀를 맡은 이상 이 선택 뒤에 결코 후회를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어깨가 약간 눌리는거 같아서 옆을 돌아보니 그녀는 어느새 자신의 어깨에 기댄채 눈을 감고 있었다.

"자냐?"

그녀의 팔목은 어느새 용철의 팔을 살짝 감고 있다.

팔짱을 끼고싶은데 아직 약간 부끄러웠는지 고민한 흔적이 역력했다.이 행동을 어른에게 기대려는 아이 본연의 행동으로 이해해야할지 그게 아니면 연애감정으로 이해해야할지 아직은 좀 헷깔렸다.뭐...지금 상황에선 어느 편이라도 상관은 없었지만.

용철은 그녀가 깨지않게 그자세 그대로를 유지한채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래. 오빠한데 기대고 싶으면 언제든 기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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