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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
호텔 방에 새로운 아침이 찾아왔다.
동녁하늘을 붉게 물들였던 태양이 어느새 하늘 높이 솟구쳐 온 세상을 비췄다.쏟아지는 햇살은 창가쪽으로 누워있던 용철의 얼굴을 서서히 달구며 깊은 잠을 깨웠다.하지만 용철은 벌떡 일어나지 못하고 자꾸만 뒤척였다.
분명 잠결에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긴했는데 그게 그렇게 귀에 걸리는 소리는 아니었다.사람 목소리를 듣는순간 본능적으로 일어서려고 했지만 피로에 쩔어버린 몸이 자꾸만 누우려고 했다.그러고보니 이전 생각하면 참 게을러진거 같다.이전엔 아무리 피곤해도 같은 숙소를 쓰던 신 과장이 부르면 벌떡 일어났었다.집에서 자더라도 부모님 목소리만 들리면 반사적으로 일어나서 아침 먹을 준비를 했었다.그런데 지금은 누가 부른다는걸 인식하고도 일어나는대신 애꿎은 베게만 껴안고 침대위를 뒹굴었다.
"오빠. 일어나세요. 벌써 아침이에요."
"음?"
용철은 오빠라는 말을 듣고서야 눈을 스스륵 떴다.
겨우겨우 상체를 일으키고 옆을 돌아보니 마리엘이 침대 옆에 다소곳이 서있었다.용철은 마리엘과 눈을 마주치고 나서도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하품을 했다.어제 너무 설쳐서 그런지 온 몸에 안 아픈 곳이 없었다.작전을 끝마치고 집에 돌아왔을때 마리엘이 마사지를 해준다는 것도 마다하고 그냥 뻗어버렸었다.
"제가 룸 서비스를 시켰어요. 얼른 일어나 식사하세요."
"응. 그래..수고했어."
용철은 마지못해 일어나 욕실로 가면서도 내내 하품을 했다.
욕실로 통하는 유리만을 열기도 전에 침대옆에 서있던 마리엘이 수건을 들고 따라왔다.그녀는 용철이 욕실로 들어서자마자 살짝 까치발을 하며 용철의 목에 수건을 걸어줬다.
"고마워."
그녀는 대답대신 쌕 웃으며 식탁쪽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항상 먼저 식탁에 앉았지만 그녀는 절대 용철이 오기전엔 수저를 들지 않았다.용철이 대충 씻고 나올때까지 마리엘은 자기 지정석에 앉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뭐해? 배고프면 먼저 먹지?"
"아니에요. 제가 어떻게 먼저 먹어요.
엄마가 어른 앞에서 먼저 수저드는거 아니랬어요."
"그래...하긴 한국식으로 생각하면 그렇긴하지."
갑자기 어른 운운하니 좀 쑥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말 잘듣고 귀여운 동생이 생긴거 같아서 흐뭇했다.
"얼른 먹자. 이러다가 다 식겠다."
"응!"
그녀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용철은 막 수저를 들다말고 그녀를 잠시 바라봤다.비록 이 애와 함께한지는 얼마 안됐지만 이렇게 잘 웃고 귀여운 아이인줄은 몰랐다.
마리엘에게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단지 그녀가 희귀한 힐러였기 때문이었다.
처음 리우 호텔의 프론트 앞에서 만났을때 그녀는 거의 다 죽어가는 얼굴이었다.약간의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말을 걸고 끝내 새벽이 오기를 기다려 그녀에게 저녁겸 아침식사를 대접했을때도 그녀는 단 한번도 웃지 않았다.
하긴 그때는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이 아이가 웃던 찡그리던 그저 그 가치를 몰라보는 놈들에게 그녀를 분리시켜야겠다고 생각했을뿐이다.말하자면 자신이 탐냈던건 어디까지나 그녀가 가진 잠재력이었다.정식대원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걷돌던 과거는 분명 그녀에게 커다란 아픔으로 남았을테지만 그 능력을 탐내는 자신에게 그녀의 아픔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기회였다.
때문에 사령관을 상대로 박박우기고 끝내 이 숙소로 끌어들였을때는 약간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한참 예민할 나이에 남자와 함께 지낸다는건 분명 보통 일이 아니다.그리고 자신은 그 곤란한 상황을 이용해서 그녀에게 무리한 선택을 강요한 셈이다.아무리 꺼림칙해도 결코 거절할수 없다는걸 알았기에 그렇게 했다.이 숙소에 거의 반강제로 끌어넣고 문 있는 방 하나를 내주면서 생색을 냈다.나쁜 사람이 아니라는걸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하지만 그건 지금 생각해보면 막다른 골목에 몰린 사람을 괴롭히는 짓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걸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거 같다.
그 마음속에 어떤 고뇌가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결코 그걸 표현한 적은 없었다.물론 갈 곳없는 그녀에게 더이상의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지도 모르고 아직 너무 어려서 앞뒤를 분간할 능력이 없었는지도 모른다.어쨌든 저렇게 밝게 웃어주는 모습을 보니 약간은 무거웠던 마음이 홀가분해지는거 같았다.데리고 온 목적이 뭐든 저 애가 행복해하면 그걸로 된거다.단지 비겁한 자기 변명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했다.
"왜요?"
"응? 아....아무 것도 아냐."
그녀는 밥을 먹다말고 자기 얼굴만 쳐다보는 용철이 이상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왜요? 하고 물을때 왠지 콧소리가 과도하게 들어간거 같았지만 단순한 착각으로 치부했다.다시 수저를 들던 용철은 뭔가 이상한 시선을 느끼고 슬쩍 고개를 들었다.그녀는 밥을 먹다말고 두 손으로 턱을 괸채 용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에헤~"
"웃기는....밥이나 먹어라."
"치..!"
용철이 무안을 주자 그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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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치고 우선 이것저것 치웠다.
용철은 평소에도 좀 지저분한 편이라서 과자같은걸 먹고 봉지를 아무렇게나 던졌다.이 호텔은 고급이라서 장기투숙객실마다 청소요원이 하나씩 따라붙었지만 저런 과자봉지까지 치워달라고 하긴 좀 미안했다.게다가 방을 너무 더럽게 써서 괜히 그 사람들 불렀다간 분명 뒤에서 손가락질 할거 같았다.그래서 그냥 직접 해결하기로 했다.둘은 방 여기저기 널부러진 과자봉지를 치우고 진공청소기를 끌고 다니며 청소를 했다.
근데 막상 청소를 하려고 마음은 먹었지만 실제로 하니 귀찮았다.
용철은 청소를 하는둥마는둥 청소기를 건성으로 끌고 다녔지만 마리엘은 무척 진지한 얼굴로 집안을 열심히 쓸고 닦았다.
그녀는 이곳에 있는 내내 방안에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침대 시트가 조금만 구겨져도 그걸 반반하게 다듬었고 용철이 아무렇게나 집어던진 베게도 항상 있던 자리에 가지런히 놔뒀다.방안의 소품들도 늘 반질반질하게 닦아놨고 용철이 아무렇게나 마시고 집어던진 캔이나 쓰레기도 말끔하게 치웠다.용철이 엄청 더럽게 생활하면서도 늘 깨끗한 방에서 지낼수 있었던건 마리엘 덕분이었다.
청소만으로는 만족할수 없는지 그녀는 용철이 퇴근할때마다 등을 보여달라고 졸랐다.그러다가 아주 조그만 상처라도 하나 발견하면 거기 달라붙어서 몇시간이고 진득하게 치료를 해줬다.물론 용철이 상처를 입어봐야 살짝 긁히는 정도였지만 마리엘은 흉터가 생기는건 용납할수 없다면서 상처가 완전히 사라질때까지 힐을 퍼부어댔다.
"쉬세요. 제가 할게요."
그녀는 용철이 끌고다니던 청소기를 냅따 빼앗더니 여기저기를 꼼꼼하게 청소했다.
"야야. 너무 그렇게 꼼꼼하게 할 필요 없다."
"싫어요. 먼지가 몸에 얼마나 해로운데요."
"야. 살면서 먼지도 좀 마시고 살아야지 몸에 저항력이 생기지."
"방이 더러우면 이상한 병균이 생길지도 몰라요.
오빠는 늘 다치잖아요.상처에 세균이 들어가서 곪기라도 하면 어쩌려구요."
"놔두면 낫겠지."
"그런게 어딨어요!"
용철은 또 하품을 하면서 소파쪽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청소를 너무 꼼꼼하게 하지말라고한건 단지 귀찮았기 때문이다.대충 청소요원이 보고 욕 안할정도만 치워두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마리엘은 그 청소요원이 못미더운 모양이었다.그녀는 방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쉼없이 걸레질을 했다.특히 용철이 묵는 큰 방은 아예 바닥이 번쩍번쩍할만큼 정성껏 닦아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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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정말 순식간에 가버렸다.
식사를 마치고 정신없이 청소를 하고 또 소파위에 누워 뒹구는 동안 하늘 높이 걸려있던 해는 어느새 서산으로 기울고 조금씩 어둠이 찾아왔다.TV를 보고 또 식사를 하면서 마리엘과 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딱히 기억에 남는 말은 없었다.그만큼 그녀가 했던 이야기들은 용철의 관심을 붙들기에 턱없이 부족한 하찮은 가쉽거리였다.그런데 별 영양가도 없는 이야기를 종알종알거리면서도 그녀는 무척 즐거워보였고 그때문인지 몰라도 그 말을 무시하지 않고 다 들어줬다.
저녁 9시.
용철은 마리엘이 묵는 작은 방을 꼼꼼하게 점검했다.
침대도 한번씩 만져보고 방안의 온도도 체크했다.리우는 사시사철 기온이 높은 동네라서 에이컨을 끼고 살수밖에 없었지만 뭐든 지나치면 탈이 나는 법이다.
방안은 약간 싸늘했는데 조금전에 에어컨 온도를 조절하자 또 약간 후덥지근했다.
때문에 그냥 약간 서늘한 정도를 유지하고 이불을 덮기로 했다.
"자..이불 덮고 자라. 감기 걸릴라."
용철은 뒤에서 가만히 서있던 마리엘에게 호피무늬 이불을 내밀었다.
그 이불은 극세사 이불이라서 얇지만 아주 따뜻하고 얼굴에 닿는 감촉도 좋았다.
"오빠는 안자요?"
"난 좀 생각할게 있어서."
"응."
"얼른 자. 아직 크는 애가 너무 늦게까지 안 자면 몸에 해롭다."
"저...다 컸어요."
그녀는 조금전 그 말이 기분 나빴는지 갑자기 시무룩했다.
"웃기고 있네. 야. 오빠가 자라면 자는거지 뭔 말이 많아."
"그래도...."
사실은 용철이 자기전까지 같이 있고 싶었지만 차마 그 말을 할수가 없었다.
용철은 항상 9시만 되면 그녀를 먼저 재웠고 늦게까지 TV를 보다가 거실에 있는 침대에서 잤다.처음 며칠은 용철이 시키는대로 했지만 동시통역기 덕분에 말이 통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그때는 같이 있어봐야 딱히 할말도 없었기에 일찍 잤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저도 TV 보고 싶어요."
"아참~ 진짜. 야. 지금 TV켜봐야 이상한 프로밖에 안해."
"그래도 보고 싶은데 어떡해요."
"야. 안돼. 뭔 여자애가 그런걸 봐?"
사실 TV를 보고싶은게 아니고 용철이랑 같이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차마 그 말을 입밖에 낼수가 없었고 그래서 만만한 TV 핑계를 댔는데 용철은 막무가내였다.그녀의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한건 지금 TV를 켜면 거의 반이 포르노 영화였기 때문이다.보수적인 용철은 아직 자라는 애가 그딴걸 보게 내버려둘수는 없다고 생각했다.물론 몸은 어른이나 별로 다를 것도 없었지만 그래봐야 몸매만 좋은 애였다.
"얼른 자."
"칫..."
용철의 강요에 못이겨 침대위로 올라가면서도 그녀는 내내 입술을 삐죽거렸다.
"이불 덮고 코~ 하는거다. 알지?"
"제가 무슨 아기에요?"
"하여간 빨리 자."
"오빠."
용철이 막 불을 끄고 나가려니 그녀가 또한번 불렀다.
"아~ 왜?"
그녀는 호피이불을 꼭 껴안은채 침대위에 앉아 용철을 가만히 바라봤다.
방안의 조명탓인지 몰라도 약간 갈색이 감도는 그 머리칼이 오늘따라 더 탐스러워보였고 약간은 헐렁한 잠옷 사이로 드러난 브레지어 끈이 용철의 시선을 사로잡았다.그건 얼마전 밀리아의 상점에서 사준 속옷이었다.비키니처럼 입을수도 있고 속옷으로 활용할수도 있었는데 처음 그걸 선물했을때 그녀는 약간 당황하면서도 그걸 고맙게 받았었다.
약간 짜증스럽게 대응했음에도 그녀는 별로 겁 먹은 기색이 없었다.그녀는 용철을 바라보며 이불을 더더욱 꾹 껴안았다.
"나...토벌할때 같이 가면 안되요?"
"그냥 뒤에 있으라면 좀 뒤에 있어라. 거기가 얼마나 위험한지 아니?"
"그래도 오빠만 위험하게 싸우는건 불공평하잖아요.
저도 힐 할수 있고 오빠 도와줄수 있어요. 근데 뒤에만 있으면 무슨 소용이에요?"
"네가 나한데 힐을 하고 말고가 중요한게 아니고 네가 다칠수도 있어.
오빠는 그게 싫어. 사령관한데 가서 큰소리 뻥뻥치면서 너를 맡는다고 했는데 네가 다치기라도 해봐라. 그럼 내가 뭐가 되냐?"
"다쳐도 좋으니까 그러죠..."
그녀는 약간 원망스런 얼굴로 아랫입술을 꾹 깨물더니 고개를 돌렸다.
"나는 네가 다치는거 싫어.
너 총 맞으면 어떻게 되는줄 아냐? 넌 너무 약해서 한방만 맞아도 죽어."
"제가 한방 맞고 죽으면 오빠라고 무사할리가 없잖아요.
제가 옆에 있으면 맞을때마다 치료할수 있어요.그런데 왜 안된다는거에요?"
그녀는 어느새 눈물까지 글썽였다.
눈물을 보는 순간 가슴이 짠했지만 그렇다고 그 위험한 곳으로 끌고갈순 없었다.물리방어력이 극히 낮은 힐러가 놈들의 총을 맞고 무사할 가능성은 거의없었다.만약 그녀를 대동한다고 해도 그건 어느정도 레벨이 오르고 총을 버틸수있다는 확신이 섰을때다.그때까진 그냥 뒤에 두고 경험치만 먹일 생각이었다.
"야. 고집 좀 그만 부려라.
내가 안된다면 그런줄 알아.너 남자 말 무시하냐?
집에서 아버지나 오빠 말 무시하면 어떻게 되는지 너도 알지?"
"그게 아니라....도움이 되고 싶다는거죠."
마리엘은 호피이불를 꼭 껴안더니 곧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에게 용철은 의지할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박대했지만 용철만은 그러지 않았다.그게 고마웠고 어떻게든 용철을 돕고 싶었다.하지만 용철은 약하다는 이유로 그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다.그게 너무 서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