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레커닝-28화 (28/215)

28====================

타국

나인철을 따라 지하 세미나실로 들어갔다.

슬그머니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밀자마자 수많은 시선들이 용철을 덮쳤다.세미나실은 대학에서 흔히 볼수있는 계단식 강당이었다.학교다닐때 지각 좀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교실이 이런 계단식 강의실일 경우에는 문을 열었을때 일제히 쏟아지는 시선의 압박이 장난이 아니다.문을 빼꼼히 열고 안을 살폈을때 강당의 모양새가 계단식이라는걸 알았고 그 때문에 입장이 조금 꺼려지기도 했지만 용철은 의외로 당당하게 들어갔다.

"Ola"

(안녕하세요.)

한참 뭔가를 이야기 하던 강사는 뒤늦게 들어오는 용철을 보고 이맛살을 찌푸렸다.용철은 그가 인상을 쓰던말던 강의실 윗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올라갔다.칠판과 가까운 쪽엔 사람이 빼곡하게 앉아서 들어갈 곳도 없었지만 뒷쪽엔 여기저기 자리가 많았다.용철은 중간에 빠져나가기 쉬운 맨 뒷줄의 가장 끝자리를 노렸지만 그 자리엔 가방이 놓여있고 그 바로 옆에는 어떤 흑인여자가 다리를 꼰채 앉아있었다.

용철은 그 여자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당당하게 Ola를 외치며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 자리에 냅따 앉아버렸다.좀 어이가 없었는지 그 여자의 입가가 살짝 벌어졌지만 용철은 여자가 인상을 쓰던말던 하품을 했다.여기 들어온건 단지 다른 교육생들의 얼굴을 익히기 위해서였다.남들은 메모지를 꺼내놓고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지만 아는 포르투갈어라곤 오직 Ola밖에 없는 용철에게 저 강사의 말은 훌륭한 수면유도제였다.

눈을 반쯤 감고 잠시 앉아있으니 나인철이 곧 따라들어왔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강사에게 뭐라고 지껄이기 시작했는데 아마 늦게 와서 미안하다고 하는거 같았다.그때문인지 몰라도 용철을 보고 인상을 구기던 강사가 그를 향해 씨익 웃고있었다.그는 강사에게 이야기를 하고 연단옆에서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마침내 용철을 발견한 그는 맨 윗쪽자리로 뚜벅뚜벅 걸어올라왔다.

용철의 옆에서 불안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앉아있던 흑인 아가씨는 갑자기 또다른 동양인이 나타나 용철의 옆에 서자 찔끔하면서 왼쪽자리로 물러섰다.조금전 바닥에 밀어놓은 백팩을 향해 그녀가 막 손을 내뻗었을때 용철이 조금전 그녀가 앉아있던 그 자리를 향해 질풍처럼 엉덩이를 들이댔다.나인철이 서있는걸 보고 좀 미안해서 자리를 비켜주려던 찰나에 이 여자가 알아서 옆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앉으시죠."

"네. 혹시 메모지 없죠?"

"네...그런걸 준비하라는 말은 없어서.."

"녹음기 쓰는건 결례라서..."

"대학교하고 좀 비슷한거 같네요."

전공수업을 들을때 같은 과 친구중 하나가 녹음기를 돌리다가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그때는 그 교수가 왜 저렇게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이는지 몰랐고 단지 그 교수가 또라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거 같았다.강의실에서 녹음기 돌리는걸 이쪽에서도 금기로 삼는걸 봐서 이들도 그걸 강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인철은 결국 용철 옆에 있던 흑인에게 부탁해서 메모지를 얻어냈다.

"용철씨가 포르투갈어를 모르니까 제가 일단 적어놨다가 요점만 말해줄게요."

"네. 정말 감사합니다."

"아뇨. 뭐....어차피 저도 매니저한데 돈 받고 하는 일이니깐."

"그래도 감사합니다."

"허...거참."

그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너무 넉살이 좋은 용철이 약간 적응이 안되는 눈치였다.

나인철이 열심히 메모를 하는 가운데, 용철은 책상에 엎드려 꿀 같은 휴식을 취했다.옆에 앉은 흑인 여자의 체취가 너무 강해서 비위를 거슬렀지만 근 하룻동안 단 한숨도 못잤다는걸 감안하면 그런건 방해거리도 못됐다.그런데 아직 엎드려 자는데 익숙하지 못해서 그런지 공항과 그 근처에서 만났던 미인들의 모습이 눈에 삼삼했다.용철이 들이댔던 여자는 다들 예뻤지만 특히 공항에서 딱 마주쳤던 그 여자는 정말 보통 미인이 아니었다.속옷광고 같은걸 보면 거기 나오는 여자들은 하나같이 헉 소리가 나올만큼 아름다웠지만 그때만난 그 여자의 미모는 그 모델들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Let me say that you are one good-looking guy."

(당신 잘 생겼어요.)

그 달달한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생생했다.

약간 당혹스러웠는지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감도 없지않았지만 그래도 그녀는 상큼하게 웃으며 잘 생겼다고 해줬다.용철은 천사같이 아름다운 그녀를 떠올리며 입을 헤벌렸다.그런 퀸카중의 퀸카를 왜 하필이면 대합실에서 만났단 말인가.숙소 주변에서 만났으면 몰래 따라가서 숙소를 알아낸 다음에 작업을 해볼텐데 정말 아쉬웠다.

"용철씨. 그 침..."

"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책상이 축축했다.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리다가 옆에 앉은 흑인과 눈이 딱 마주쳤다.손가락 끝으로 레게머리를 살살 꼬아가며 뭔가를 메모하던 그 여자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화들짝 놀랐다.마치 사람 잡아먹는 맹수를 본듯한 그 표정이 용철을 기분나쁘게 만들었다.용철이 딱히 인종주의자는 아니지만 남자란 항상 예쁜 여자에게 끌리는 법이다.만약 흑인 혼혈이었다면 어느정도 용철의 관심을 끌수있었을지 모르지만 이 여자는 오리지널이었다.

'안 잡아먹어. 이 썅년아.

뭔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자빠졌어. 난 눈이 없는줄 아니?'

============================================

"아함~~!"

용철은 세미나실에서 나오자마자 힘껏 기지개를 켰다.

난생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무리를 해서 그런지 머리가 띵했다.시선집중을 각오하고 세미나실에 들어간건 다른 후보생들의 얼굴을 익히기 위해서였는데 너무 피곤해서 주변을 살필 여유가 없었다.덕분에 얼굴을 외운건 강사와 나인철, 그리고 옆에 앉았던 흑인뿐이었다.가장 먼저 탈출한 용철이 담배를 물고 건물 입구를 서성이고 있으니 다른 후보생들은 그제서야 가방을 챙겨들고 세미나실을 나서고 있었다.

"용철씨. 이제 분위기를 좀 알겠어요?"

"으음...조금 지루하다는 그런 분위기? 다들 날뛰고싶어하는거같던데."

"그렇게 보셨나요? 꼭 그렇지는 않은데 말이죠."

나인철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쿠바산 시거를 꺼냈다.

잠시 담배를 피우고 있으니 몇몇 남자 후보생들이 다가와 저마다 담배를 물었다.용철은 그들이 정해진 곳에서 흡연을 하는걸 보고 약간 놀랐다.이런 광경은 오직 흡연자를 반쯤 죄인취급하는 한국이나 일본,그리고 유럽에서만 볼수있다고 생각했었다.물론 그건 남미에 대한 일종의 편견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람 사는데는 어딜가나 똑같은거 같네요. 흡연구역에서 피우는 것도 그렇고."

"여기만 그래요. 일단은 시내 중심가고 여긴 관공서니까요.

시 외곽으로 가보면 저마다 담배를 물고있을겁니다.바람에 날리는 재도 장난아니죠."

"아...그렇군요."

남자들이 먼저 나와서 담배를 피우는 것과는 달리, 여자들은 좀 늦게 나왔다.그건 아마 이것저것 챙길게 더 많아서일 것이다.그중에 몇명은 곧 이쪽으로 합류해서 같이 담배를 피웠다.그때 한 갈색머리 아가씨가 다가오더니 용철의 어깨를 툭 쳤다.그녀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뭔가를 열심히 이야기했지만 용철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용철이 눈만 껌뻑이자 그녀는 입가에 손가락 두개를 갖다대고 입술을 쭉 내밀었다.

"아. 담배 빌려달라고?"

용철은 씨익 웃으면서 담배 한 개피를 내밀었고 그녀도 방긋 웃으며 답례했다.포르투갈어로 대화를 시도하다가 즉시 바디랭귀지로 전환하는걸 봐서 이곳사람들은 어느정도 외국인에게 익숙한 모양이었다.외국인에게 천연덕스럽게 다가가서 담배를 빌려달라고 할 정도라면 이건 타고난 넉살이 좋다고 해야할까.여자들이 남자들 틈에 아무렇지도 않게 끼어들어 저마다 담배를 빡빡 피워댔지만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한국같으면 분명 난리가 날 일이지만 이것도 이 사람들의 문화니 존중해야했다.

그렇게 담배를 피우면서 잠시 서있으니 건물 안에 들어갔던 나인철이 다시 걸어나왔다.

"숙소배정문제로 잠시 갔다왔어요."

"숙소요? 혹시 다인실은 아니겠죠?"

여자랑 합숙할수 있다면 그건 대환영이지만 관계자가 미치지 않은 이상 그럴 일은 없었다.용철이 합숙에 유독 민감했던건 세명건설의 합숙소때문이었다.신 과장을 비롯해서 껄끄러운 놈들과 같은 숙소에서 지내야 했고 그것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었다.

"다인실이라도 여자는 없으니까 안심하세요."

"여자가 문제가 아닌데..."

"무슨 애 만들 일 있어요? 혼숙을 하게."

그는 용철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는지 엉뚱한 소리를 했다.

"남자랑 합숙하는 것도 영...

만약 배정한 숙소가 다인실이면 제가 따로 숙소를 구하던지 해야할거 같아서요.제가 좀 잠꼬대가 심해서 같이 자면 다른 사람들이 힘들어요."

사실 용철은 무척 얌전하게 자는 편이었지만 이상한 남자들과 합숙하는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거짓말이라도 해야했다.이곳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체취가 심한 편이라서 냄새에 민감한 용철에겐 상당한 스트레스였다.게다가 남자라니...생각하기도 싫었다.

"아마 독실은 없을거에요.

꼭 독실을 써야한다면 다른 호텔에서 지내는수밖에 없죠."

"그래도 잠은 좀 따로 자고 싶어서요."

"네. 그럼 그러세요.

근데 웬만하면 숙소에서 지내는게 나을텐데. 다른 사람들하고 친해지기도 쉽고."

"같이 어울리는거야 상관없다지만 잠까지 같이 자고 싶지는 않아서요."

"그렇다면 어쩔수 없죠.

BOPE에서 정한 숙소는 저기 보이는 리우 호텔입니다."

그는 길 건너편을 가리켰다.

그 건물은 외벽을 붉은 타일로 장식한 오래된 5층 건물이었다.그 건물은 딱보기에도 불결해보였다.깔끔한 용철에게 점수를 따기엔 한없이 모자란 건물이었다.

"저기말고 따로 자려면 어떤 호텔로 가야하나요?"

"따로 숙소를 잡으면 호텔이야 많죠.

코파카바나 인근에 가면 관광객을 위한 고급호텔이 많습니다.그런데 가격은 각오해야할거에요.일단 거기서 며칠 묵으면서 적응을 하고 숙소로 옮기는 것도 좋죠."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때 백팩을 맨 흑인 여자가 둘의 곁을 스쳐지나갔다.

잠시 그쪽을 바라보던 나인철이 씨익 웃으며 용철을 돌아봤다.

"아까보니 자꾸 에이미를 쳐다보시던데? 혹시 관심이라도...?"

"에이미요?"

"네. 아까 용철씨 옆에 앉았던 여자요."

"글쎄요. 저는 별로..."

"그래요? 자꾸만 옆으로 붙어앉으시길래 혹시나 했는데."

"그럴리가요.저는 저런 타입은 영 별로라서."

그는 다리라도 놓아주겠다는듯 적극적으로 들이댔지만 용철은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혹시 흑인이라서 그럽니까?"

"글쎄요...."

용철은 미적지근하게 대응했다.

사실 흑인은 그냥 싫었지만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하면 자칫 인종주의자로 오인당할지도 몰랐다.때문에 그냥 저런 타입은 취향이 아니라고 두루뭉실하게 말해버렸다.

"다들 흑인에 대해서 편견을 갖고 오시는데 막상 흑인이랑 한번 해보면 생각 바뀝니다.흑인년들이 얼마나 쫄깃쫄깃한데요? 볼깃살이 탱탱하고 구멍도 아주 끈적끈적한게 죽여줍니다.쑥 집어넣으면 아주 흔들어보기도 전에 나온다니까요? 흔한 백인년이나 동양년하곤 차원이 달라요 한번 흑인 맛보면 다른 년들은 쳐다보기도 싫다니까요?"

"그렇군요."

제아무리 쫄깃쫄깃해도 이쪽에서 관심없으면 헛것이었다.

그렇게 나인철의 흑인찬양론에 귀를 기울이다보니 어느새 서산에 해가 걸리고 있었다.용철은 나인철과 함께 코파카바나 해변쪽으로 잠시 걸었다.리우하면 딱 떠오르는게 바로 거대 예수상과 코파카바나 해변, 그리고 삼바축제일만큼 그 해변은 명물중의 명물이다.

"저쪽으로 보시면 10층이상의 건물은 다 호텔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아..."

"저기 가서 아무 호텔이나 방 잡고 지내시면 되요."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우선 호텔 위치를 알아놓고 다시 BOPE 본부쪽으로 돌아왔다.

나인철은 본부 건너편의 리우 호텔에 머물고 있었기에 예의상 그를 배웅해야했다.세미나가 끝나고 꽤 오랜시간이 흘렀음에도 본부에선 아직도 간간히 사람들이 나오고 있었다.현지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본부 옆길에 세워놓은 차에 올라탔고 외지인들은 전부 리우호텔로 향했다.리우 호텔로 통하는 횡단보도앞에 막 섰을때 갑자기 뭔가가 용철의 눈길을 확 사로 잡았다.

한 여자가 본부의 담 밑에 양반다리를 한채 약간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새까만 V넥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이었다.바지는 무릎이 터지긴했지만 그게 닳아서 터진 것같지는 않았고 옷에 때가 탄 흔적은 조금도 없었다.그때문에 얼핏보면 그냥 이 근처 흔한 여대생처럼 보였다.그런데 대체 왜 길바닥에 그냥 앉아있는걸까.

'노숙자? 아닌데...노숙자치곤 너무 깨끗해.'

애초에 지저분한 노숙자라면 아예 신경쓸 이유도 없었겠지만 그 여자는 여기까지 오면서 봤던 노숙자들과는 너무도 달랐다.게다가 분명 저 여자를 어디서 봤던 것 같았다.

'그래. 세미나실에서 봤어. 거기서 봤으면 능력자라는 소린데?'

뭔가 좀 이상했다.

그녀가 BOPE 세미나실에 들어왔다는건 이곳에서 일 할만한 능력을 갖췄다는 소리였다.오늘 여기서 세미나에 참석한 사람들은 다들 번호표를 받았다.그 번호표가 있으면 브라질 당국에서 제공하는 숙소를 이용할수 있다.물론 용철은 합숙하기 싫다는 이유로 아예 그 숙소쪽은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돌아갈수 있었다.

그런데 저 여자는 뭔가?

리우 시내에 사는 사람이면 차를 끌고왔을테니 벌써 집에 갔을 것이고 외지인이라면 숙소로 향할텐데 그 여자는 이도저도 아니었다.얼핏보면 버스라도 기다리는듯 보였지만 조금만 유심히보면 그녀가 기다리는게 결코 버스가 아니라는걸 알수있었다.이곳을 지나는 노선은 몇개 안되고 그나마 다들 한번씩 근처 정류장을 거쳤었다.그런데 그녀는 버스가 정차하던 말던 그저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저 사람은 뭐죠? 왜 저기서 혼자 앉아있는거죠?"

나인철은 별걸 다 물어본다는듯 잠시 용철을 쳐다보다가 곧 씨익 웃었다.

"저 애는 힐러에요. 아무도 안받아줘서 저기서 저러고 있는거에요."

"힐러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