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레커닝-25화 (25/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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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탈

뉴스에선 연일 살인사건을 보도했다.

연쇄살인범 윤영철의 죽음을 시작으로 서울인근에서 변사체가 잇따라 발견됐다.서울 변두리의 인적없는 곳에서 중학생 3명이 둔기에 맞아 머리가 터진채 발견되는가 하면 수배중이던 강도살인범이 맨홀속에서 사지가 찢어진 시체로 발견되기도 했다.

서울 경기일원의 민심은 극도로 흉흉해졌고 웬만한 번화가를 제외하면 해만 지면 인적이 딱 끊겼다.

"대체 왜들 지랄이야. 그런 새끼들이 뒈진게 뭐가 문제라고."

"죽은게 누군가가 중요한게 아니고 시체가 발견된게 문제겠죠."

"에이. 젠장."

용철은 뉴스를 보다말고 리모컨을 확 집어던졌다.

그놈들을 죽이지 않았으면 지금쯤 불쌍한 희생자가 또 생겼을 것이다.그런데 당국은 그 사람같지도 않은 놈들이 뒈진걸 갖고 온갖 오도방정을 떨고 있다.법이라는건 선량한 사람을 지키기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결코 그런 인간이하의 범죄자를 위한게 아니다.저런걸 보도할 시간에 전국의 우범지역을 점검하고 범죄를 막을 생각을 해야한다.

용철이 열을 내던 말던 옆에서 묵묵히 떡볶이를 먹던 밀리아가 입술을 슬쩍 닦았다.

"솔직히 말하면 살인의 임펙트가 너무 컸어요.

용철씨는 항상 사지를 찢는다던지 머리를 터트린다던지 최대한 잔인하게 죽였어요.용철씨는 떳떳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사정을 몰라요.모르는 사람이라면 이걸 단순한 엽기살인으로 생각할만하죠.저들만을 탓할 문제가 아니에요."

"그럼 어떻게 하자고요? 밀리아씨가 시키는대로 목을 부러뜨렸잖아요."

용철은 유라를 만난 직후 성남에 들러 성폭행범 하나를 쳐죽였다.

그때는 최대한 분노를 억누르고 깔끔하게 목을 부러뜨렸다.하지만 그 사건도 지금 중학생 피살사건과 함께 뭇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렇죠.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 한국에선 행동하기가 어려운거 같아요."

"쳇. 좋은 일 하려고 해도 안도와주는구만."

"차라리 능력자가 흔한 다른 나라로 가서 경험을 쌓고 오는게 나을지도 몰라요."

"미국요?"

"굳이 미국이 아니라도 많아요.

브라질이나 우크라이나에서는 벌써 능력자 조합을 결성했으니까요."

"흠. 한국만 뒤쳐지는거네요."

"어쩔수 없죠. 아직 이 나라가 능력자를 받아들일 준비가 안됐으니까요."

"브라질이나 우크라이나라..."

용철은 해능취 카페에서 봤던 그 베너를 떠올렸다.카페에선 우크라이나와 브라질 취업을 알선하고 있었고 그쪽에선 한달에 2천만원이상의 순수입을 보장했다.물론 그 베너를 100% 믿은건 아니었지만 일단 정부 차원에서 능력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지원한다면 최소 한국보단 활동하기가 수월했다.게다가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언젠가는 한국에서도 능력자의 존재를 알게 될 것이다.그러니 괜히 혼자 능력자의 존재를 알리겠답시고 떠벌리는거보다는 차라리 능력자를 인정해주는 나라에서 용병으로 일하다가 한국 상황이 정리가 되면 돌아오는게 여러모로 나아보였다.

만약 한국에도 미국처럼 능력자부대가 생긴다면 외국 근무경력은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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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해외취업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지만 막상 한국을 떠나야한다고 생각하니 착잡했다.

밀리아와의 대화가 끝난 즉시, 해능취 카페의 서문식 매니저에게 연락해서 브라질 취업을 알선해달라고 했다.처음 전화를 했을때는 그렇게 쉽게 OK를 할지 몰랐는데 의외로 간단하게 허락을 얻어냈다.취업비자를 비롯한 필요한건 전부 해능취 카페에서 해주기로 했고 거기에 필요한 비용은 브라질에 도착해서 취업을 하는 즉시 입금하기로 했다.

처음 수수료 이야기가 나왔을때는 사기가 아닌지 의심했지만 후불이라니 믿을만했다.

막상 각성해서 능력자가 됐지만 힘을 얻었다는거 외에는 달라진게 없었다.

지금의 용철은 그저 4년동안 벌어놓은 돈으로 겨우겨우 먹고 사는 그저그런 백수였다.그렇다.그 돈이 떨어지기 전에 이 능력을 활용해서 돈을 벌 생각을 해야했다.어설픈 슈퍼맨 놀이는 이제까지 한걸로 족했다.일단 꼬리가 길면 언제 밟힐지도 모르고 그럼 밀리아에게도 피해를 주게 된다.떠나기 싫어도 떠날수밖에 없는게 자신의 운명이었다.

이제 곧 이 나라를 떠나 브라질이라는 더 큰 물에서 놀게 될 것이다.

문득 유라가 생각났다.

팔공산 인근을 사실상 근거지로 삼으면서 집에 들어가지 않은지도 꽤 됐다.

지금 의지할 곳이라곤 오직 밀리아와 유라뿐이었고 그중 밀리아는 자신과의 관계를 능력자와 상인으로 완벽하게 선을 긋고 있었다.결국 조언자는 될지몰라도 진심으로 마음을 나누는건 불가능했다.이제 낯선 곳에서 혼자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더더욱 외로워졌다.유라의 전화번호를 저장한 단축키를 꾹 눌렀다.

사실 단축키에 그 번호를 저장하면서도 큰 기대는 안했다.

클럽에서 만난 여자라는 선입견때문인지 그녀가 지금쯤 다른 놈을 만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뚜르르르~~

신호음이 몇번 울렸다.

두어번 더 울려도 안받으면 그냥 끊어버리려했지만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에 수화기 건너편에서 유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유라야. 나야. 기억나? 구용철."

"구용철....아! 용철 오빠."

"어어..그래. 기억하고 있네?"

"그럼. 내가 먼저 번호줬는데 기억하고 있지."

그 목소리를 듣는순간 가슴을 짓누르던 답답함이 훅 하고 날아갔다.

그게 진심인지 그게 아니면 단순한 쇼맨쉽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목소리에선 반가움이 잔뜩 묻어났다.속마음이야 어쨌든 누군가 반겨준다는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래. 뭐해?"

"나? 공부해."

"으흠!"

"뭐야? 그 반응은...? 거짓말인거 같아?"

"아니야. 설마 내가 그런 생각을 하겠어?"

"으흥. 하긴 뭐...클럽에서 춤추다가 만났는데 그렇게 생각할수도 있지."

그녀는 조금전 공부한다는 말을 듣고 뜸을 들였을때는 살짝 뾰로통한 반응을 보이더니 또 금새 웃었다.저런걸보면 뒷탈이 없이 꽤 털털한 성격인거 같다.물론 딱 한번밖에 안 만난 여자를 너무 섯불리 판단하는건지도 모르지만...

"너 어딘데? 한번 볼까?"

"나 지금 도서관이야. 아~ 하긴 공부도 잘 안되긴 했어.

중간고사 기간이라서 공부하는데 이상하게 머리가 많이 아프더라.그게 오빠 만나서 신나게 놀고 머리 식히라고 그랬나보다."

"어이구...참나. 중간고사기간이면 공부를 해야지."

"왜에~ 좀 놀고 공부해도 되잖아."

"알았다. 알았어. 어디로 갈까?"

"혹시 아직 서울이야?"

"응. 여기서 일이 안끝나서 좀 더 머물거야."

"아...그래. 어쨌든 연락해줘서 고마워."

"고맙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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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공부한다는 말이 썩 와닿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가르쳐준 곳으로 찾아갔다.

"오호. 여대잖아."

그곳엔 모 여대가 있었다.

그렇게 잘나가는 명문대는 아니었지만 서울의 대학수준이 장난이 아니라는걸 감안하면 완전 노는 애들은 꿈도 못꿀 곳이었다.용철은 우선 대학 정문 옆에 있는 포장마차로 갔다.벌써 해가 떨어진지 오래됐지만 정문 앞엔 학생들이 많았다.포장마차에서 핫도그 하나를 사들고 멀리 정문쪽을 바라보니 불 꺼진 건물들 사이에서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커다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모든 학교가 그런건 아니지만 중앙도서관은 보통 그 학교에서 가장 크고 높은 건물이었다.도서관의 특성상 수많은 서적을 보관해야하는데 그때문에 건물의 덩치가 클수밖에 없었다.

핫도그를 들고 주변을 서성이다보니 멀리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오빠!"

"어어! 그래..!"

갑자기 입이 헤벌어졌다.

깔끔한 청바지에 하얀 패딩을 걸친 그녀가 정문 안쪽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용철은 그녀를 보자마자 반도 안먹은 핫도그를 휙 던져버리고 후다닥 달려갔다.

"많이 기다렸지?"

"아니. 별로."

"우리 뭐 할까? 영화볼래? 저기 비디오 방 있는데.."

처음봤을때는 너무도 다른 복장이 일종의 컬쳐쇼크로 다가왔다.

그걸보니 똑같은 사람인데도 장소에 따라서 이렇게 달라질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지금의 그녀는 야함과는 거리가 멀었다.누가봐도 조금 예쁘장한 여대생에 불과했다.

처음엔 유라를 기다리는데만 정신이 팔려 근처를 살필 겨를이 없었는데 유라를 만나자마자 학교 앞 유흥가에서 쉴새없이 번쩍이는 수많은 네온사인이 숨막힐듯 다가왔다.여대앞인데도 없는건 거의 없었다.분위기 좋아보이는 카페랑 호프집.노래방과 비디오방 피시방 그리고 규모가 상당히 큰 편의점까지.졸업한지는 꽤 오래됐지만 마치 남의 학교가 아닌 자신의 모교 앞에 서있는듯한 착각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여대앞이라서 여자만 있는줄 알았는데 남자도 꽤 많았다.

용철이 서있던 그 정문앞엔 다른 학교 학생으로 보이는 남자들이 쉴새없이 서성댔고 이따금 정문쪽으로 헐레벌떡 달려갔다.그리고 그들이 뛰어가는 곳엔 약속이나 한듯 누군가가 손을 들고 웃으며 남자를 반겨주고 있었다.

유라가 보자마자 팔짱을 낄수있었던건 아마 그런 특유의 분위기때문인지도 모른다.

"영화?"

"응. 딱 둘만 들어갈수 있어."

"뭐? 저번처럼 그거? ■-art?"

"에이...참! 남들이 들어!"

"들으면 뭐 어때?"

"하여간 빨리 가자! 머리 아파 죽는줄 알았어!"

그녀의 손에 이끌려 학교앞 네온사인을 향해 달려가면서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숱한 사람을 만나면서도 늘 혼자라는 생각을 버릴수가 없었다.

그건 아마 지금까지 살고 있던 삶이 스스로 원하던 그런 삶이 아니었기때문일 것이다.삶이 힘들었기에 세상에 버림받았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런 생각이 들때면 수아를 찾았다.그건 단지 성욕때문이 아니었다.그 목소리를 듣고 그 체온을 느끼면서 삶의 괴로움을 잠시 잊고 싶었던건지도 모른다.지금도 마찬가지였다.아직 이 땅에 남은 미련과 새로운 곳에서 새 출발해야한다는 불안감이 용철의 가슴을 바짝바짝 조여들고 있었다.

그때문에 유라에게 전화를 했고 이렇게 만났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게 이 여자도 마찬가지였던거 같다.

아직은 사회를 모르기에 그 고민이 철없다고 볼수도 있지만 그건 직장인의 관점일뿐이다.학생의 입장에선 성적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무거운 압박으로 다가올 것이다.유라는 그걸 떨치기위해서 클럽에서 놀았던건지도 모른다.물론 미래에 대한 생각도 없이 무턱대고 논다는게 결코 옳은 일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그걸 이해할수도 있을거 같았다.둘다 기댈 곳이 필요했고 그걸 알았으니 이제 기대면 된다.

앞으로 이 생활은 오래지 않아 끝난다.

그러니 미련이 남지 않을때까지 실컷 지금을 즐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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