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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
달동네.
대구엔 달동네라고 할 만한 곳은 없었다.
도시 자체가 산을 끼고 있는 지형이 아니었고 구시가지의 일부를 포함한 대다수의 구역이 바둑판처럼 반듯했다.때문에 용철은 타 지역의 달동네를 찾아가서 일을 벌이기로 했다.KTX를 타고 일부러 서울까지 올라갔다.
첫 출격 시간은 밤 11시로 잡았다.
일단 11시가 되기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근처 여관에서 머물면서 시간을 죽여야했다.용철은 밀리아를 대동하고 달동네 근처의 허름한 모텔을 찾았다.
"첫 사냥이니까 좀 떨릴수도 있겠지만 차차 나아질거에요."
"그런데 꼭 동행할 필요가 있을까요? 밀리아씨가 위험할수도 있고..."
"어머. 저는 걱정하지마세요. 이래뵈도 제 몸정도는 지킬수있으니까요."
"그런데 가게에서 나오실줄은 몰랐네요.
이런 말 조금 이상할수도 있지만 늘 가게 안에서 만났으니까요."
"왜요? 저는 가게만 보라는 법 있나요?"
"그런게 아닙니다."
처음엔 그녀를 게임에 나오는 상점 npc정도로 생각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상점 밖으로 나온건 오늘이 처음이었다.어쨌든 그런 비현실적인 생각을 했다는 자체가 아직도 서툴다는 증거였다.오늘 사냥을 통해서 그런 서툰 모습을 말끔히 지워버리고 다시 태어날 생각이었다.
"방 하나 주세요."
용철이 모텔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입구쪽의 조그만 들창문이 열리면서 대충 예순정도 되어보이는 할머니가 얼굴을 내밀었다.노파는 용철과 뒤에 서있는 밀리아를 힐끔힐끔 쳐다보더니 방 열쇠와 함께 콘돔 하나를 내밀었다.아무 생각없이 그걸 받던 용철은 콘돔을 얼른 주머니에 구겨넣었다.
'윽...지금 뭐하는 짓이야. 이 할망구가!'
약간 무안한 생각이 들어서 열쇠를 받자마자 성큼성큼 앞서나갔다.
콘돔을 봐서 그런지 뭔가 기분이 약간 묘했다.상인과 능력자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계약관계였고 그 관계는 상황에 따라서 언제나 끊어질수 있었다.그걸 알고 있었기에 밀리아를 여자가 아닌 단순한 동료정도로 생각하려 했다.
용철은 또각또각 하는 그녀의 힐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배정된 방으로 갔다.
방문을 열자마자 온기가 훅 뿜어져나왔다.
허름한 외관과는 달리 방안은 제법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있을건 다있었다.방 한가운데에는 푹신푹신해보이는 퀸 사이즈 침대가 보기좋게 놓여있고 그 옆엔 제법 신형으로 보이는 프로젝션 TV와 수납장, 그리고 정수기까지 놓여있다.침대의 오른편에는 화장실겸 샤워실이 있었는데 출입구가 유리로 되어있었다.
"음.....!"
만약 여기 혼자 왔다면 나름대로 괜찮은 방이겠지만 여자가 있어서 분위기가 좀 묘했다.
물론 여기는 딱 하루만 쓸 임시거처일뿐이고 여기서 자는건 어차피 용철 혼자였다.우선 밀리아가 가게를 호출하려면 사람이 없는 조용한 공간이 필요했는데 서울에선 사람없는 곳을 찾기가 힘들었으니 무조건 방을 빌려야 했다.
"일단 나가서 뭐라도 좀 먹죠."
"어디 맛있는 집이라도 아시나보죠?"
용철은 별 생각없이 한 말이지만 밀리아는 뭔가를 기대했는지 눈을 반짝거렸다.
하긴 혼자라면 그냥 컵라면이나 먹었겠지만 지금은 여자가 있으니 식사에 좀 신경을 써야할거 같았다.아무리 애인이 아니라도 일단 여자는 여자니 그에 걸맞게 대우해야한다.게다가 이 여자는 보통 여자도 아니고 소중한 협력자였다.
한참 주변을 헤매던 용철은 '양푼이 해물짬뽕'이라고 적힌 간판을 보고 그 가게 안으로 슥 들어갔다.
"음~ 스멜."
수아년에게 뜯어먹힐때는 마음에도 없는 패밀리 레스토랑이나 커피전문점만 들락거렸지만 이젠 마음 편한 솔로였다.짬뽕이라는 간판을 보자마자 대학때 친구들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떠올랐고 그 가게에 즉흥적으로 들어가버렸다.
"이리 오세요. 밀리아."
"아...네."
그런데 그녀는 가게 입구에 딱 들어서면서부터 뭔가 표정이 심상치않았다.
자리에 앉으면서도 몇번이나 엉덩이를 뗐고 겨우 자리를 잡고도 자꾸만 주변을 둘러봤다.간혹 인상을 찡그리면서 입술에 손을 갖다대기도 했다.
'음? 왜 그러지?'
조금전까지만 해도 뭔가 잔뜩 설레는 얼굴이었는데 그 얼굴이 이렇게 순식간에 우거지상이 될 줄이야.용철은 그녀의 표정변화가 신경쓰였지만 그냥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가게가 좀 오래됐고 약간 냄새가 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뭐 드실래요?"
"아무거나요."
그녀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의향을 물었지만 그녀는 새침하게 대응했다.
"여기 해물짬뽕 두개요! 큰거 하나 작은거 하나!"
용철은 테이블을 탕탕 치면서 남자답게 주문을 했고 밀리아앞에 물컵을 놓고 직접 물을 따라줬다.이전부터 그랬지만 용철은 항상 여자를 최우선적으로 배려했다.물론 수아같은 쌍년까지 배려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그런 년만 제외하면 전부 대우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당연한 이야기지만 미인은 더더욱 그렇다.
그런데 밀리아는 여전히 기분이 안좋은거 같았다.
용철은 레스토랑이라면 환장을 하던 수아년을 떠올리고 일단 그녀의 취향부터 묻기로 했다.만약 돈이 얼마가 들던 무조건적으로 깨끗하고 화려한 것만 선호한다면 그건 상당히 피곤한 타입이다.이제부터 그런 사람은 아예 철저히 무시할 생각이었다.
"혹시 패밀리 레스토랑이나 이런거 좋아하세요?"
"아뇨."
"혹시 냄새가 좀 나서 그러시나요?"
"아뇨. 딱히 그런건 아니지만 이런 분위기가 별로 익숙치 않네요."
그녀는 가게 바깥쪽을 슬쩍 내다보며 손톱끝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그러고보니 가게 안에 사람이 제법 많았고 좀 시끄러웠다.
용철은 그녀가 화난 이유를 다시 분석했다.냄새나 음식의 값어치 문제가 아니라면 아마 이 분위기 문제일 가능성이 컸다.그러보니 비밀상인들은 시끄러운걸 아주 싫어해서 일부러 인적 없는 곳만 찾아다닌다는 소리를 들은 적 있었다.
그걸 생각못했다.이전같으면 뭘 하든 여러가지 가능성을 다 생각해본다음에 결정했을텐데 갑자기 좀 과격해지고 충동적으로 변한거 같다.그때문에 살짝 민망한 생각도 들었지만 용철은 이전처럼 얼굴을 붉히지는 않았다.
"으흠. 사실 먹는게 뭐 그렇게 중요합니까? 맛만 있으면 되는거죠."
"네?"
그녀는 살짝 말꼬리를 쳐올렸다.확실히 기분나쁜거 같았다.
"먹는거는 맛만 있으면 되는겁니다.
먹는 자리가 쓸데없이 분위기 좋을 이유는 없는거에요.차라리 좀 시끄럽고 지저분해도 맛있는거 먹고 포만감 느끼면서 조용한 곳에서 시간을 보내는게 낫죠. 안그래요?"
그렇게 말한건 비싼 레스토랑을 들락거리면서 그 비싼 고기의 반도 제대로 안쳐먹고 수다만 늘어놓던 수아년때문이었다.용철은 음식앞에서 그러는거 딱 질색이었다.말을 할때 하더라도 먹을건 다 먹고 해야한다는게 용철의 신조였다.그런데 밀리아는 그 생각에 동의할수가 없는지 벌써부터 슬쩍 짝눈을 뜨고 있었다.
"좀..."
"네?"
"아니에요. 아마 이것도 그 비급서의 영향이겠죠.
확실히 처음 봤을때하곤 많이 달라졌어요. 이전의 용철씨라면 가게에 들어오기전에 제 의견부터 물었겠죠.물론 지금 모습이 나쁘다는게 아니에요.힘을 얻는대신 그 댓가로 섬세함을 잃어버렸으니까요.당신은 전사고 그러니 굳이 섬세할 이유는 없어요."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왜 그러는지 아니깐 이해할수 있어요."
그녀는 이제 안심하라는듯 환하게 웃었다.
그런데 그건 자연스러운 웃음과는 좀 거리가 멀었고 억지로 웃는거 같았다.
그러던 와중에 마침내 짬뽕이 나왔다.
"자~ 드십시오. 이거 엄청 맛있습니다."
용철은 우선 밀리아에게 음식을 권하자마자 해물을 게눈 감추듯 먹어댔다.
한달간의 수련으로 외모만 변한게 아니라 식욕도 왕성해졌다.하지만 밀리아는 여전히 그 짬뽕을 들여다보기만 했다.이런걸 먹어본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그녀가 처음으로 본 짬뽕은 정말 괴상한 음식이었다.특히 손이 안갔던건 면발위에 수북하게 얹힌 낙지와 홍합이었다.그녀는 용철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면서 젓가락질을 하는 척 했다.
'으으...이거 이상해. 이런거 대체 어떻게 먹는거야?'
옆에서 용철이 쩝쩝거리면서 맛있게 먹는걸보니 먹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 괴상한 생김새가 도무지 손이 안갔다.그녀는 젓가락으로 낙지를 살짝 건드렸다가 젓가락을 놓고 또 건드렸다가 놓기를 반복했다.그녀가 낙지로 장난치는동안 용철은 짬뽕을 국물 한방울 남김없이 싹 먹어버렸다.
"아니! 아직도 안먹었어요?"
"네...에.....이런거 먹어본적이 없어서...."
"처음 먹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말합니다. 속는셈 치고 한번만 먹어봐요."
"으으..."
밀리아는 용철의 성화에 못이겨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낙지를 잡고 입으로 가져갈때까지 그녀는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았다.
"어? 맛있어."
그런데 그녀의 굳어있던 표정은 정말 순식간에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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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끝에 식사를 마치고 인근의 극장을 찾았다.
옛날엔 영화 보는걸 좋아했지만 어른이 되면서 점점 영화관을 멀리하게 됐다.수아년과 사귈때는 토요일마다 서울로 올라와서 영화를 보곤했는데 그게 보통 피곤한 일이 아니었다.옛날에 보던 영화는 순전히 자기만족이었다면 언제부터인가 영화를 보는 주체는 수아였고 자신은 몸종겸 물주가 됐다.
극장에 오는 자체가 짜증나고 피곤했지만 특히 재미라곤 눈꼽만큼도 없는 로맨스 영화를 보자고 할때는 미칠거 같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자유로운 솔로였다.
더이상 그런 년에게 끌려다닐 필요도 없었고 보고싶은 영화를 마음껏 볼수 있었다.특히 수아년을 사귀면서 꿈도 못꿨던 액션영화를 오랜만에 봤을땐 정말 너무 좋아서 미칠거 같았다.밀리아가 그 영화를 좋아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중간에 나가지는 않았으니 어느정도 만족한 것만은 분명했다.
그렇게 식사를 하고 영화를 보고 번화가를 거닐다보니 어느새 밤이 이슥해졌다.
용철은 우선 모텔로 돌아가서 옷부터 갈아입었다.
대구에서 입고왔던 점퍼와 청바지를 벗어놓고 미리 준비한 추리닝으로 갈아입었다.구두도 벗어놓고 간편한 운동화로 갈아신었다.끈은 단단하게 조였고 야구모자를 썼다.
"됐죠? 그럭저럭 쓸만하지않아요? 뭐해요? 입어요."
"네에....."
용철은 밀리아에게도 추리닝을 내밀었지만 그녀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뭔가 한심한 인간을 보는듯한 반응이었지만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지금은 사냥을 하러 가는거지 선을 보러가는게 아니었다.
용철은 추리닝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휘파람까지 불면서 달동네쪽으로 걸어갔다.
이곳은 변두리였고 지대가 제법 높았다.
이런 동네일수록 길이 꼬불꼬불하고 어두컴컴하기 마련이었다.만약 이런 어두운 길모퉁이에 성폭행범이 숨어있다고 해도 그놈이 튀어나오기전엔 절대 알수가 없었다.물론 파이터로서의 능력을 완벽하게 개화시키며 인간보단 맹수에 더 가까워진 용철에게 그런 놈을 발견하는건 식은죽 먹기였다.
지금의 용철은 500미터 앞에 있는 사람의 냄새도 능히 맡을수 있었다.
달밤에 추리닝 커플이 된 둘은 어두운 달동네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거리는 약 800미터. 느껴지시나요?"
한참 걷던 밀리아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멀리 어둠속을 주시했다.
"네. 충분히 느껴지네요."
용철의 감각이 극도로 곤두서기 시작했다.
마치 배고픈 맹수처럼 용철이 어두운 골목길 안으로 순식간에 달려갔다.지금의 용철은 100미터를 8초만에 주파했고 맨주먹으로 시멘트 벽을 종이장처럼 뚫을수 있었다.감각도 극도로 발달해서 저 어두운 골목속에서 움직이는 모든게 생생하게 보였다.
적외선 카메라를 능가하는 용철의 눈이 어둠속에서 움직이는 물체를 포착했다.
바로 강간범.
"야. 가만 있어. 이년아. 소리치면 죽여버린다?"
"제..제발 살려주세요. 아저씨."
"씨발년아. 조용히 하라고 했지?"
강간범은 겁에 질린 여자를 깔아뭉개고 우악스럽게 주먹질을 하기 시작했다.
여자는 맞으면서도 그저 벌벌 떨기만 했다.강간범은 씨익 웃으면서 그녀의 바지를 마구 벗어내렸다.곧 하얀 팬티가 드러났고 그것도 순식간에 벗겨졌다.
강간범이 막 그녀를 짓누르고 올라타려던 순간.
어둠속에서 뭔가가 비호처럼 날아와 그놈의 뒷통수를 가격했다.
"크억!"
단 일격.
조금전 질러댄 비명이 놈의 유언이었다.
악질 범죄자라고 해도 그래봐야 일반인일뿐이었다.
용철의 주먹이 뒷통수를 가격하자 놈은 눈을 까뒤집고 그 자리에서 엎어졌다.
-5의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30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용철의 선글라스위로 이제껏 한번도 보지못했던 새로운 메세지가 출력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