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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어어어! 용철아!"
버스에서 내려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멀리서 누군가 손짓을 하는게 보였다.
얼른 그쪽으로 걸어갔다.그곳엔 유행이 몇년은 지난듯한 우중충한 가죽잠바에 화가들이나 쓰고다닐법한 빨간 베레모 차림의 친구 범석이가 멋쩍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패션센스는 여전하구만. 아예 파이프까지 물지 왜?"
용철은 그놈을 보자마자 혀를 찼다.
저딴 복장을 하고 시내에 나오라면 설령 백만원을 준다고 해도 사양하고 싶었다.잠바는 그렇다고쳐도 저 모자는 정말 뭇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용철은 슬쩍 반눈을 뜨며 그 모자를 가리켰지만 범석이는 그냥 씨익 웃기만 했다.
"러시아에서는 괜찮은데 왜?"
"여긴 한국이야."
"상관없어. 남들이 보는 시선이 중요하냐? 내가 편해야지."
"마...맞다. 범석이가 전부터 한 패션....하잖아."
옆에 꿔다놓은 보리자루처럼 서있던 성재도 용철을 만나자마자 반색을 했다.
"아....이새끼. 진짜."
오랫만에 만나지만 않았다면 보자마자 욕을 한바가지 퍼붓고 싶었다.
용철도 딱히 옷을 세련되게 잘 입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놈들보다는 백만배 나았다.그나마 범석이는 이상하게 입어도 키가 훤칠하고 야성적인 상남자 스타일이라 넘어갈만 했지만 이놈은 아니었다.성재의 키는 152였다.여자 평균키보다도 작았다.키만 작은게 아니고 얼굴도 잔뜩 얽어서 마치 멍게처럼 울퉁불퉁했고 피부까지 우중충한 흙빛이었다.거기에 눈까지 실눈이라서 지하철같은데서 여자랑 마주치면 여자가 비명을 지를 정도였다.
솔직히 이런 외모라면 어떤 옷을 입어도 별로겠지만 그래도 제대로 차려입으면 어느정도는 대우받는 법이다.그런데 이놈은 복장까지 추레했다.위에 걸친건 축 늘어져서 쭈글쭈글한 체크무늬 남방이었고 그나마 땀으로 흥건했다.바지는 베이지색 면바지였는데 며칠동안 안갈아입었는지 여기저기 국물같은게 묻어있었고 이상한 냄새가 났다.
솔직히 말하면 친구만 아니면 죽여버리고 싶었다.
"용철아...왜...? 나 반갑지 않냐?"
"어..그래. 반갑다. 반가워."
이놈과 떨어져있었던 그 5년이란 시간은 원수도 용서할만큼 길고 긴 시간이었다.하지만 예나지금이나 똑같은 몰골을 보니 그저 한심하기만 했다.
문득 대학교 들어가서 처음으로 경험했던 미팅 날이 떠올랐다.
그때 같이간 맴버가 바로 범석이와 성재였다.범석이가 먼저 들어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을때는 분위기가 괜찮았고 용철이 들어갔을때도 그럭저럭 괜찮았다.하지만 마지막으로 성재가 들어갔을때 장내는 물을 끼얹은듯 정적에 휩싸였었다.여담이지만 그 미팅을 주선했던 사람은 다음날 그 여자애들에게 온갖 욕을 먹었다.
하여간 옷을 또 저렇게 입고왔는데 주머니에 돈이 있을리가 없었다.
'돈은 또 내가 반이고 범석이가 반이겠구만...'
성재때문에 기분을 잡치긴 했지만 너그럽게 풀어버리기로 했다.
까짓거 오랜만에 만난 친군데 옷이 좀 더러우면 어떻고 돈이 없으면 어떤가?
용철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근처 고깃집에서 소주 몇명을 마시고 게임방에 들어갔다.지금은 손 끊은지 오래됐지만 학교 다닐땐 이놈들이랑 어울려서 피시방에서 스타 크레프트 하는 재미가 꽤 쏠쏠했었다.한참 스타에 미쳐있을때는 레더점수를 몇천점까지 올리고 나름 배틀넷 강자로 군림하기도 했다.
물론 그것도 옛날 이야기였다.
용철은 시작하자마자 다 무시하고 캐리어부터 뽑으려고 했다.이전에 캐리어+커세어 조합으로 재미를 봤던 기억이 생생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캐리어는 뽑아보지도 못하고 초반 러쉬를 당해서 개박살났다.입구에 깔아놓은 캐논을 부수고 넥서스를 향해 질풍처럼 달려오는 저글링을 보며 용철은 한손으로 조용히 이마를 감싸쥐었다.
"아...쓰바..."
"저거 저거 또 캐리어만 뽑네. 요새 누가 캐리어 뽑냐?"
순식간에 첫승을 확보한 범석이 씨익 웃으며 담배를 물었고 용철은 발끈했다.
"시끄럽다. 스타 안한지 몇년짼줄 아냐?"
술을 마시고 손 끊은지 오래된 스타를 하니 제대로 될리가 없었다.
단축키를 다 까먹은 용철은 계속 마우스로 버벅대다가 쉴새없이 박살났다.게임이 제대로 안되니 느는건 미네랄이 아니라 커피와 담배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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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를 하고 게임방에 들러서 놀다가 또 술을 퍼마셨다.
어느덧 해가 저물었다.
벌써 다들 취흥이 올라서 얼굴이 벌개졌고 특히 성재는 몸을 가누지 못했다.
"자자~ 이제 4차를 가야지.
이 장범석님이 니들한데 한턱 쏜다!"
"미친놈."
"얌마. 내가 쏜다면 쏜다. 그거 몰라?"
"시간 너무 늦은거 아냐?"
범석은 여전히 갈데가 남았다는듯 용철의 팔을 잡아끌었지만 용철은 버릇처럼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평소에 워낙 바른생활 사나이로 살았기에 술을 마셔도 새벽에 들어간적은 거의 없었다.하지만 범석은 용철이 걱정하던 말던 실실 웃으며 자꾸만 어두운 골목쪽으로 끌고 갔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노래는 한 곡 하고 가야할거 아냐?"
"저 앞에 노래방 많던데?"
용철은 조금전까지 술을 마셨던 번화가쪽을 가리켰다.
술을 마시고 오다가 근처에서 꽤 삐까번쩍한 노래방을 여러곳 봤었다.그런데 이놈은 하필이면 어두운 골목길쪽으로 용철을 인도했다.
"야...노래만 부르면 무슨 재미가 있냐?"
"설마...퇴폐..."
"오케이!"
그놈은 그 자리에서 풀쩍 뛰더니 대뜸 손바닥을 들이댔고 용철은 말 없이 그놈의 하이파이브를 받아줬다.그놈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휘파람까지 불면서 앞장서서 걸었지만 그 뒤를 따르던 용철은 벌써부터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전에도 몇번 가봤지만 돈 아깝다는 생각만 들었다.
일단 돈도 아까웠고 그런 이상한 여자들을 만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설령 원래부터 소소한 일탈을 꿈꿨다고 해도 그런 여자들을 만나는건 뭔가 여친에게 죄를 짓는거 같아서 꺼려졌다.하지만 이놈이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다고 저러는데 매정하게 뿌리치고 가버릴수도 없었다.
'뭐....그냥 자는 척 하면 되겠지.'
어두운 골목길을 한참동안 걸어가자 멀리 차 한대가 겨우 지나갈듯한 좁은 아스팔트 길이 나타났다.이곳은 전형적인 슬럼이었다.전봇대 앞엔 쓰레기가 쌓여있고 먼지가 하얗게 앉은 차들이 아무렇게나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있었다.
"여기다. 들어가자."
"아우~ 돈 아까워."
"내가 낸다니까?"
"알았다. 알았어."
들어가자마자 범석이 아주 능숙하게 주인과 대화를 시작했고 용철과 성재는 룸으로 들어갔다.음침하고 맥주냄새 나는게 대학가의 흔한 노래방하곤 뭔가 분위기부터 틀렸다.용철이 뻘줌하게 룸안에 들어가있으니 범석이 카운터 쪽으로 갔다왔고 곧 여자들이 들어왔다.범석과 성재는 능숙하게 여자들을 쓰다듬었지만 용철은 팔짱을 낀채 눈을 감았다.
"시간당 4만원에 보도비는 두당 2만원씩요."
"알아! 알아! 이 장범석님이 다 낸다! 다 이리와!"
"아이~ 이 오빠 화끈하네?"
"화끈한거 이제 알았어? 어허~ 좋다! 태평성대로다!"
범석이는 취할때마다 목소리가 커졌다.
옆에서 들으니 시끄러워 미칠거 같았지만 의외로 여자들 반응은 괜찮았다.성재는 보도 아가씨들에게도 전혀 관심을 받지못했지만 푸대접에 익숙한지 입을 헤벌리고 있었다.
"버...범석아. 여자들 너무 이쁘다."
"이새끼야! 즐겨! 인생을 즐기라고! 으하하하하!"
두놈은 벌써 만취했는지 완전 맛이 가있었다.
곧 여자들이 자리를 찾아갔는데 세 여자가 전부 범석이를 찍은거 같았다.범석이가 그중에 하나를 골랐고 나머지 둘중 하나가 엄청난 기세로 용철옆으로 와서 앉았다.행동이 느린 여자는 할수없이 성재쪽으로 갔다.
그놈들은 파트너가 결정되자마자 껴안고 가슴을 만지는등 아주 발광을 했지만 용철은 얌전했다.옆에 앉은 여자에게 마지못해 어깨동무만 했을뿐 만지지는 않았다.다만 중립적인 관점에서 두 친구를 관찰할뿐이었다.그때 옆에 있던 여자가 슬쩍 말을 걸어왔다.
"오빠는 춤 안춰요?"
"아니. 조금 피곤해서 쉬다가 갈려구요."
"그래요? 그럼 안아줄까요?"
"으흠."
여자가 앉던 말던 귀찮아서 무시하려고 했지만 그 여자는 제법 넉살이 좋았다.이쯤되니 용철도 미안해서 그 여자를 계속 외면할수는 없었다.할수없이 그 여자가 이끄는대로 그녀의 다리를 베고 잠시 누웠다.누워서보니 저 두놈이 하는 꼴이 더 요지경속이었다.여자를 끌어안고 춤을 추는 범석이는 차라리 보기 좋은 편이었다.성재라는 놈은 남들이 보던 말던 여자의 옷속에 노골적으로 손을 쑤셔넣고 있었다.
"춤추기 힘들면 잠시 누워있어요."
"네. 그러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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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새벽 1시가 훌쩍 넘었다.
오랜만에 친구들 만나서 논 것치고도 참으로 과하게 놀았다.용철은 완전히 맛이 가버린 성재를 우선적으로 택시에 태워 보내고 도로앞에서 담배를 물었다.
인적이 완전히 끊겨 휑하게 변한 거리에 서있으니 뭔가 기분이 묘했다.
용철은 무의식중에 뒤를 돌아봤다.이 근처에 창녀촌이 있다는건 전부터 알았지만 그 노래방과 이렇게 가까운 곳일줄은 몰랐다.국가차원에서 사창가를 단속하기 시작했고 그때문인지 이 사창가로 들어오는 앞길은 저녁 8시만 되도 컴컴했었다.
그런데 좁은 골목을 접하고있는 뒷길은 이렇게 호황이었다.
주변엔 이미 인적이 끊긴지 오래였지만 창녀촌쪽은 불야성을 이뤘고 지금도 남자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하필이면 편의점이 저쪽에 있냐."
조금전에 범석이 놈이 음료수를 산다고 편의점에 갔는데 그 편의점이 공교롭게도 창녀촌 바로 앞이었다.이놈이 너무 늦어서 좀 걱정됐지만 저쪽으로 조금만 접근해도 삐끼 아줌마가 마구 호객행위를 했기에 근처로 다가갈 엄두가 안났다.물론 군대가기전엔 완전 발정상태였고 남들 다가는 곳이라고 해서 호기를 부리면서 저기에 갔었다.
근데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그저 시간낭비였고 돈 낭비였다.
생각보다 재미있지도 않았고 언제 시작해서 언제 끝났는지도 기억이 안났다.물론 그때 술을 좀 마시긴 했다.그런데 아무리 취했다고 해도 약간은 기억이 날 것같은데 그때의 일만큼은 정말 아무리 떠올리려해도 생각나는게 없었다.
그래서 더 허무한지도 모른다.
잠시 기다리고 있을라니 범석이가 스X벅스 커피 2잔을 들고 다가왔다.
"성재는?"
"그 새끼는 내가 보냈어."
"지옥으로?"
"미친놈."
이렇게 설 익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택시를 기다렸다.
이제 다시금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갈때가 됐다.녀석은 아직도 더 놀고 싶은지 뭔가 좀 아쉬운 기색이었지만 용철은 이놈만큼 체력이 좋지 못했다.
범석은 창녀촌쪽을 힐끗 돌아보다가 피식 웃었다.
"한번 따먹고 갈래?"
"됐다. 그냥 집에가서 잠이나 잘란다."
"너도 참 인생 재미없게 산다. 빠구리도 안하고 무슨 재미로 사냐?"
"나 고자나 게이 아니거든. 할거는 다 하고 사는 사람이거든?"
"그래? 의외인데?"
"진짜야. 여자친구 있어."
"오호."
그놈은 정말 의외였는지 어깨를 으쓱했다.
둘은 다시 인적없는 도로쪽으로 말없이 시선을 던졌다.조금전까지만 해도 택시가 많더니 막상 필요해서 잡으려고 하니 안보였다.그놈은 그냥 기다리기 심심했는지 여자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하긴 대학때부터 이놈은 여자로 시작해서 여자로 끝나던 놈이었다.
"여자는 역시 러시아 여자가 최고지.
외국년이고 한국년이고 돈 밝히는건 똑같은데 그래도 외국년이 덜 밝혀."
돈밝힌다는 말에 문득 명품 백을 밝히던 수아가 생각났지만 고개를 흔들어버렸다.어쨌든 이놈이 러시아로 가더니 현지에서 여자를 꽤 많이 후린듯했다.
"운동만 열심히 하면 여자는 알아서 꼬여.
백인 여자들이 동양남자 싫어한다고? 그거 뻥이야. 하기 나름이야."
"하긴 그런 마인드면 외국에서도 먹히겠지."
어딜가도 박을 궁리만 하는 이놈이 이해가 안됐지만 어찌보면 좀 부럽기도 했다.이놈이 이 여자 저 여자 박는게 부러운게 아니다.남들이 가지말라는 길을 억지로 가서 거기서도 나름대로 자리를 잡은게 신기했고 그 엄청난 적응능력이 부러웠다.
문득 이놈에게 능력자에 대해 물어보고 조언을 구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놈은 러시아라는 넓은 물에서 놀다왔다.러시아는 큰 나라다.그러니 미국처럼 능력자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 능력자라고 아냐?
신기한 힘을 가진 사람들이 특수부대에 있다던가?"
"아니. 능력자가 뭔데?"
근데 아쉽게도 범석이는 능력자가 뭔지도 몰랐다.
사실 성재가 없는 지금이 이놈에게 능력자가 됐다는걸 밝힐 순간이었지만 여기가 미국이 아니라는게 문제였다.이놈의 시큰둥한 반응을 보면 러시아에서도 아직 능력자는 생소한 존재라는게 분명했다.그러니 지금와서 능력자라는걸 밝혀봐야 이해를 못할 가능성이 크고 자칫 잘못하면 이상한 놈으로 취급받을지도 모른다.게다가 능력자가 됐다고 해도 아직은 전사로 갈지 마법사로 갈지도 결정못한 반쪽자리였다.
미국에선 능력자들이 대우받고 있다지만 한국은 아직 아니었다.
그리고 설령 미국에서 인정받고 일할수있다고 해도 아직 한국을 버릴수 없었다.
한국에는 부모님과 사랑하는 수아가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