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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조금 큰 현장에는 항상 2가지의 식당이 존재한다.
식당이 2개 존재한다기보단 차라리 식당의 종류가 두가지라고 하면 더 정확하겠다.
일반적으로 상당히 큰 현장에는 항상 3~4개의 함바식당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원청의 사무직과 감리단의 식당이고 또 하나는 바로 하청업체 직원들을 포함한 현장인부들의 식당이다. 노가다 아저씨들이 말하는 함바식당이란 주로 후자를 지칭하지만 원청의 사무직들도 스스로를 '노가다'라고 지칭하니 넓게보면 전자의 것도 함바식당이라고 볼수있다.
원청의 식당과 하청업체 직원들이 이용하는 식당은 그 청결도나 여러가지 측면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전자의 식당이 웬만한 대학교 학생식당만큼 밝고 깨끗한 분위기라면 후자는 음침하고 냄새나며 사람으로 들끓는다.
힘겨운 검측 임무를 마치고 용철은 함바식당으로 들어왔다.
지금 시각은 정오를 훨씬 넘긴 12시 35분.
쓰고있던 헬멧을 바닥에 뒤집어놓고 급히 수저를 들었다.
점심시간은 12시 정각에서부터 1시까지였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서류상의 기준이었을뿐이다. 하청업체의 간부급이나 기타 감시의 눈길에서 멀어질수있는 자들에게 점심시간이란 고무줄처럼 쭉쭉 늘어나는 시간이다.
물론 용철은 현장소장도 아니고 공사과장도 아니다.
그저 감리나 신 과장이 부르면 좆빠지게 달려가야하는 그저그런 하급직중 하나였을뿐이다. 그러니 남들이 점심시간을 고무줄처럼 늘리던 놀던 그런건 딴 세상 이야기였다.
용철은 자신을 그저 잡부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일반적인 인부보다는 훨씬 좋은 대우를 받았다. 엄연히 하청업체 소속이었지만 식사는 원청에서 했다.이는 지금 용철의 위치가 좀 묘했기 때문이다. 소속은 하청업체인 세명건설이고 급료도 그곳에서 지급했지만 실제 일을 하는 곳은 거의 원청인 K 건설이었다.
원청의 사무동 1층에는 용철의 자리가 존재했고 문제의 지 과장은 그 바로 뒷쪽 라인에 앉아 있다.용철의 자리는 지 과장이 일어서기만 하면 뭘 하는지 정확히 보이는 위치였다.물론 그들이 자리를 이렇게 잡은 이유는 뻔했다.
물론 어차피 일을 하는건 원청에서 하던 하청업체에서 하던 달라질게 없었고 기왕 같은 일을 할거면 시설이 좋은 원청에서 하는게 여러모로 유리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으니 그건 용철이 일을 하는 곳이 원청의 이 자리뿐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하청업체인 세명건설의 컨테이너에도 용철의 자리가 존재했다. 신 과장이 부르면 즉각 달려가서 바로 그 자리에서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해야했다. 물론 지 과장이 부를때면 눈썹이 휘날리게 달려와서 원청의 바로 이 자리에 앉아 지 과장이 시키는 일을 해야했다.
원청과 하청업체를 연결하는 다리. 그게 바로 용철이었다.
잘 들어가지도 않는 밥을 억지로 퍼넣고 있을라니 핸드폰이 뚜르르 울렸다.
ㅡ>신 과장놈
"아...쓰벌 새끼. 왜 또 찾고 지랄이야."
남들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인 K 건설 유니폼을 입고 원청에서 근무하는 용철을 약간 시기했지만 실상을 알고보면 이게 결코 편한게 아니었다. 두 군데 다리를 걸치고있다는건 두군데의 비위를 모두 맞춰야한다는 소리였다.
오전 검측에서 감리가 난리를 치는 바람에 그놈을 달래느라 점심시간을 훌쩍 넘겨버렸었다. 우여곡절끝에 겨우겨우 감리의 싸인을 얻고 타설까지 마쳤지만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그놈들 틈바구니에서 시달리다가 완전 녹초가 되어버렸다.
"예."
다른 전화번호같으면 여보세요라고 했겠지만 전화를 건 사람이 명백하다.
"용철아. 통신감리가 찾던데?"
"통신감리가 뭐라고 해요?"
"몰라. 새끼야. 하여간 너 찾으니까 오후 검측하기전에 올라가봐라."
"예."
그렇게 말하면서 전화를 끊고 일단 쳐넣던 밥을 마저 쳐넣었다.
오늘 메뉴는 불고기에 계란찜에 쥐포조림까지 있어서 나름대로 풍족했지만 맛을 느낄 여유도 없었다. 원청의 부장급같은 고위직이나 이사급으로 대우받고 있는 감리들,그리고 자기 컨테이너에선 왕으로 군림하는 현장소장 정도를 제외한 나머지는 칼 같이 시간을 맞춰서 움직여야 했다.
"통신감리가 나를 왜 찾는다는거야. 귀찮게..."
통신감리 이성욱은 처음 용철이 이 현장에 왔을때 최종보스나 마찬가지였다.
이곳의 실질적인 책임자인 원청의 이 부장은 꽤 서글서글한 사람이었다. 때문에 비위맞추기도 쉬운 편이었고 한번 비위를 맞춰놓으니 그때부턴 제법 잘해줬다. 그 다음에 상대해야할 사람들은 바로 원청 2층의 감리들이었다. 품질관리기사가 하는 일은 감리들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따라서 이들과 사이가 좋지않다면 직무 수행자체가 아예 불가능했다.
2층엔 여러 명의 감리가 있었다.
각각 전기, 통신, 소방, 조경, 건축등으로 전공이 있었고 그에 맞춰서 공사를 세세하게 감독했다. 용철이 오기전에 있던 품질관리기사는 감리들과 사이가 안좋아서 그만뒀는데 그때 트러블을 일으킨 상대가 바로 통신감리 이성욱이었다. 싸움을 벌인 이유는 매우 간단했다. 바로 이성욱이 너무 깐깐했기 때문이다.
드르륵~
원청 2층의 감리단 사무실 출입문을 열었다.
하얀헬멧과 K 건설 유니폼, 그리고 안전띠로 중무장한 용철은 입구쪽에서 가까운 통신감리 이성욱의 자리로 다가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사님. 저 왔습니다."
이전엔 '부르셨습니까?'라고 사극에나 나올법한 대사를 읊어댔지만 상대가 오히려 당황하는 바람에 그만뒀다.
"그래. 구 기사.
내가 부른 이유를 알겠어?"
"아....하하하."
용철은 다분히 가식적인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웃지만 말고~ 응?"
"아...저...그..... 죄송합니다."
이성욱은 그런 용철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이전에 그만뒀던 정 기사는 바로 이런 밑도 끝도없는 행동때문에 그만뒀다. 이성욱은 뭔가 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항상 이런식으로 말문을 열었는데 상대는 그가 뭣때문에 이러는지 모르고 당황할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처음 이성욱과 마주쳤을때 용철은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몰라서 그냥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정말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그때 이성욱은 이러면서 탁자를 탁 치고 일어났었다.
마치 당장 때려죽일듯 이글거리는 눈빛.이미 2달전의 일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모골이 송연했다. 그때 쏘아보던 그 눈빛이 너무 매서워서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었다.
하지만 용철은 곧 그를 상대할 해법을 찾아냈다.
이 현장에선 고작 2달이지만 그래도 직장생활 4년차였다.
이성욱은 자존심이 매우 세고 신경질적인 타입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금요일마다 있는 원청 회의덕분이었다. 그는 회의때마다 늘 자기가 잘났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남이 발언할때도 그걸 잘라먹는가하면 자기가 아는걸 남이 모른다는 이유로 대놓고 무안을 주기도 했다.
이때문에 원청 직원, 하청업체 직원을 불문하고 거의 모든 사람과 사이가 안좋았다.
만약 같은 직장이 아니었으면 이런 사람과 말을 섞을 이유도 없었겠지만 기왕 부딪칠 운명이라면 적으로 만드는거보단 아군으로 만드는게 훨씬 나았다.
자존심이 세고 자신에게 도취된 사람일수록 남이 자기 말에 태클걸거나 간섭하는걸 극도로 싫어한다. 때문에 이런 타입일수록 자신을 우러러보고 순종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래서 용철은 그가 설령 틀린 말을 해도 항상 고개를 끄덕였고 최대한 예의를 갖췄다.
이전에 있던 정 기사는 이성욱앞에서 늘 바른소리를 하고 뻣뻣하게 굴다가 끝내 옷을 벗었다. 그러니 그 실패를 거울삼아서 정기사와는 완전 정반대로 행동했다.
그러자 미친개로 불리던 그가 변했다.
여전히 깐깐하긴 했지만 그래도 신 과장이나 지 과장보단 훨씬 나았다.
"괜찮아. 모를수도 있지."
그는 괜찮다는듯 씨익 웃으며 손부채를 부치기 시작했다.
"구 기사."
"예."
이성욱은 다소곳이 손을 모으고 서있는 용철을 슥 쳐다보더니 또한번 씩 웃었다.
"자네 통신을 한번 공부해볼 생각없나?
비전공자라도 열심히 하면 돼. 여기서 경력쌓아서 감리가 되는 것도 생각보다 괜찮구."
"아유. 제가 어떻게 감히...."
이성욱은 항상 저자세로 일관하는 용철을 꽤 마음에 들어했다.
"그래. 밥은 먹었어? 검측이 좀 늦게 끝나지 않았었나?"
"예. 밥은 조금전에 뛰어와서 시간 맞췄습니다.
오늘 통신이사님을 또 뵐수있을줄 알았는데 통신공사가 없더라구요."
"그래서 불렀잖아."
"아...네."
"그래. 아무리 바빠도 밥은 먹고 해야지."
신 과장한데 전화질까지 했을 정도면 분명 보통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보자마자 쓸데없는 소리만 늘어놨다. 하긴 감리가 이렇게 불러놓고 영양가 없는 소리라도 해주는게 차라리 나았다. 골치아픈 신 과장이나 지 과장이 전화를 했을때 그냥 끊어버릴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감리는 원청에서 이사급으로 대우받고 있었기에 그쪽에서 아무리 급한 일로 찾아도 용철이 감리와 이야기할때는 절대로 터치할수 없었다.
그리고 사실 용철도 이 감리가 편했다.
이성욱은 대인관계가 협소하고 주위의 평판도 안좋았지만 몇안되는 친구만은 확실히 챙겼다. 물론 용철이 이성욱의 친구는 절대 아니었지만 그는 용철을 자신의 몇안되는 부하정도로 여기고 가끔씩 편의를 봐주곤 했다.
"아참....전화를 해놓고 쓸데없는 소리만 했네. 이 사진 말이야."
"네."
감리는 산더미처럼 쌓은 문서속에서 A4용지 한장을 꺼내들었다.
그건 어제 갖다줬던 검측요청서에 첨부됐던 사진이었다.
검측을 할때는 일단 검측요청서를 만들고 그 부분의 도면을 첨부한다. 그걸 원청으로 갖고가서 이 부장의 싸인을 받으면 1차 승인이 완료된다. 그럼 이제 이 부장사인이 들어간 요청서를 감리에게 들고가서 어느 부분에 어떤 공사를 검측 할 것인지를 보고하고 감리를 대동하고 실제 검측 지점으로 이동하게 된다.
감리가 OK 싸인을 보내면 검측을 했다는 증거인 현장사진을 촬영하게 된다.
검측요청서에 바로 이 사진까지 첨부하면 모든 검측이 완료된다.
문제는 바로 이 사진의 퀄리티.
처음 이곳에 배치되서 첫 검측을 받았을때 이성욱에게 욕이란 욕은 다 먹었었다.
왜 사진을 삐딱하게 찍었느니 사람이 제대로 안나왔다느니 현장이 어느현장인지 알수가 없을만큼 조도가 낮다느니 온갖 트집을 잡았었다.
"알지?"
"네."
이제 척하면 삼천리였다.이건 바로 사진이 마음에 안드니 바꿔오라는 소리였다. 용철은 그 사진을 받아들고 부리나케 달려나갔다. 검측 사진을 찍을때는 바로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최대한 많은 사진을 찍는다. 때문에 감리가 사진갖고 태클을 걸때는 그냥 다른 사진으로 바꿔오면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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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님. 사진을 바꿔왔습니다."
"음? 벌써 끝났어?"
"아...최대한 빨리 바꿔야할거 같아서요."
이성욱은 버릇처럼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더니 흡족하게 웃었다.
용철은 땀으로 범벅이 된 헬멧을 벗어들고 이성욱 앞에 다소곳이 섰다. 사진을 바꾼다고 해결되는게 아니고 OK싸인이 떨어질때까지 몇번이고 바꿔야한다.
"쩝....뭐 그렇게 사진이 잘나오지는 않았는데 이정도면 됐어."
"감사합니다."
"또 내려갈거야? 밖에 많이 더운가봐?"
"네. 신 과장님이 찾으면 또 가봐야 해서요."
"그래? 내가 신 과장 혼내줄까? 신 과장이 구 기사 괴롭혀?"
"아...하하하..."
용철은 대답하기 곤란할땐 항상 이런식으로 대답을 회피했다.
물론 이 가식적인 웃음이 모든 사람에게 통하는건 아니다. 오직 이성욱과 소방감리 우대웅에게만 통했고 전기감리 임우영 앞에서 이딴식으로 웃었다간 아주 난리가 난다. 물론 생각같으면 신 과장 좀 혼내주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가 그 말을 한건 단순한 농담이었다. 그걸 모르고 실제로 그렇게 해달라고했다간 이상한 놈으로 찍힐지도 모른다.
물론 그는 그정도 권한을 갖고있다.
마음만 먹으면 신 과장이나 지 과장 후리는건 일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