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루살이 (215/223)

하루살이

민우와 전영진은 성큼성큼 걸어가는 자크의 뒤를 따랐다.

자크가 일행을 안내한 곳은 베니스의 한 골목에 있는 펍이었다.

펍의 외관은 세월의 때가 잔뜩 묻어 오래되어 보였다.

끼이익.

경첩조차 기름칠하지 않아 소름이 끼치는 소음을 흘려낸다.

출입문을 열자 잔잔한 재즈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안으로 성큼 들어서자 알코올의 찌든 냄새가 확 풍겨왔다.

전영진은 코를 쥐고 인상을 찌푸렸다. 민우나 자크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이었고.

민우는 주변을 둘러봤다. 손님은 없었다.

하긴 요즘 누가 이런 낡은 바에 오겠는가. 시설도 좋고 분위기도 좋은 술집이 널리고 널렸는데.

특히나 관광지인 베니스라면 시설 좋은 곳은 차고 넘친다.

비어있는 테이블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자크는 굳이 바에 앉았다.

민우와 전영진도 그의 옆에 앉았다.

일행을 둘러본 자크가 히죽 웃더니 주먹으로 바를 노크하듯 툭툭 두드렸다.

그때, 바 아래쪽에서 노인이 불쑥 솟아올랐다.

“으억!”

전영진이 혼비백산해서는 뒤로 넘어갔다.

“이거 참, 내 가게에 손님이 오고 별일이구먼.”

고개를 갸웃하던 그의 시선이 자크에게 닿았다. 흐리멍덩한 눈을 끔벅거리던 노인은 자크를 반갑게 반겼다.

“이게 누구야. 자아아아아크. 네놈이 여기 있다는 건 상을 타러 왔다는 거겠지?”

“아직 살아계셨네요?”

“내 반드시 네놈보다 더 오래 살 테다. 근데 데니스는 같이 오지 않았어? 네놈이 상 타는 날인데.”

데니스라는 이름이 나오자 자크의 안색이 흐려졌다.

노인은 아차, 하는 심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데니스도 자신과 비슷한 나이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괜한 말로 심기를 어지럽힌 것 같아 노인은 재빨리 자크를 위로했다.

“킁. 나이가 들면 다들 가는 거다. 풀 죽고 그러지 마라. 꼴 보기 싫으니까.”

“선생님은 지금 이비자에 가셨는데요.”

“스페인에 있는 섬? 죽은 거 아니었어?”

“인생은 60부터라고 하시면서 클럽에서 사십니다.”

“···빌어먹을. 네놈이나 데니스나 똑같은 족속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구만.”

투덜거리던 노인이 자신의 머리를 툭툭 치더니 민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거 내 정신 좀 보게나. 동양인 최초로 오스카 주연상을 받은 배우구먼. 누추한 곳에 와줘서 고맙네. 갈 때 사인이랑 사진을 찍어 주면 오늘 술값은 공짜로 주지.”

“놀랍네요.”

“자네를 알아봐서?”

“네.”

“그게 뭐 대수라고. 이쪽 바닥에 관해서 관심이 있는 자라면 누구나 다 알 건데. 워낙 시끌시끌했어야 말이지. 어디 보자.”

민우에게서 시선을 뗀 노인이 이번에는 전영진을 바라봤다.

“자네가 국토순례 감독이지?”

“네? 네.”

“흐흐. 연출이 좀 아쉽기는 했지만 괜찮았네. 오랜만에 힐링했거든. 자네도 그 상패 들고 사진 한 장 찍어 주고 가게.”

자크가 불퉁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는요? 제 것은 황금사자상인데요.”

“그건 우리집에도 있는데 뭐하러? 수집하는 건 나한테 없는 걸 하는 거야. 있는 걸 굳이 수집할 필요가 있을까?”

한마디로 자크를 찌그러뜨린 노인이 민우를 바라봤다.

“오스카 주연상을 가지고 왔으면 우리 집에서 가장 좋은 술을 줬을 텐데 아쉽구만.”

“주연상 받은 배우가 이곳에 한둘 온 것도 아닌데 일 년에 한병 줄까 말까 하는 술을 내준다고요? 그거 차별 아닙니까?”

“동양인 최초잖아, 멍청아! 프리미엄 몰라? 네가 그러니까 3대 영화제 상을 다 휩쓸지 못하는 거야. 고작 두 개째 따냈다고 자랑하러 오는 꼬락서니라니. 쯧쯧.”

혀를 차던 노인이 아래로 쑥 사라졌다.

전영진이 놀라 벌떡 일어나자 자크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 아래에 지하실이 있거든요. 아마도 이 가게에서 가장 비싼 술을 가져올 생각인가 보네요.”

흐흐, 하고 웃은 그가 손을 마주 비볐다.

“저를 이곳에 데리고 온 이유가 있었군요.”

“겸사겸사죠. 윌리엄이 이렇게 나올 거라고 대충 예상은 했거든요.”

“윌리엄? 혹시 윌리엄 해리우드입니까?”

세계 3대 영화제의 최고상을 모두 휩쓴 건 물론이고, 오스카에서 상까지 타낸 감독이다. 굵직한 상이란 상은 모조리 휩쓸던 그는 돌연 은퇴 선언을 하고는 세상에서 모습을 감췄다.

그런 그가 이런 곳에서 술집이나 하고 있다니.

“맞아요. 한때 거장으로 유명했던 사람. 지금은 은퇴하고 다 망해가는 술집이나 운영하고 있지만.”

“다 들린다. 망하기는 누가 망해? 이래 봬도 이 건물이 내 건데.”

“손님 없으면 망하는 거죠.”

“그깟 손님 없어도 돼. 나 먹을 술도 모자라니까. 옜다 받아라.”

윌리엄이 술병 하나를 던졌다.

화들짝 놀란 자크가 호들갑스럽게 술병을 받았다.

“이 비싼 술을 떨어뜨리면 어쩌려고 던져요?”

“아까우면 바닥이라도 핥아먹겠지. 내가 그것까지 신경 써줘야 하나?”

병만 봐서는 값비싼 술처럼 보이지 않는다.

민우의 의문스러운 시선을 눈치챈 윌리엄이 피식 웃었다.

“우리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술이네. 한 백 년은 꼬박 넘은 코냑이지. 내가 매년 담가서 수량은 유지 중이고. 내 아들과 손자에게도 물려줄 생각이지.”

자크가 한마디를 더 보탰다.

“돈을 주고도 못 사는 술이니까 비싼 술이죠.”

윌리엄이 각자 앞에 벌룬 글래스를 놓는 사이 자크는 경건한 손짓으로 코냑의 코르크 마개를 열었다.

그저 마개를 열었을 뿐인데 새어 나온 향기는 삽시간에 주변을 잠식해버렸다.

꽃 같기도 하고, 과일 같기도 하며 견과류와도 흡사한 그런 향기다.

쪼르르륵.

자크는 벌룬 글래스 절반이 못 미치게 술을 따라주었다.

당장이라도 마시고 싶은 욕구가 들끓었지만, 코냑을 더 맛있게 즐기기 위해서는 체온으로 데울 필요성이 있다.

잔의 아랫부분을 손바닥으로 감싸 들고 대략 10분가량은 충분히 데워줘야 한다.

길고 긴 기다림의 끝에 드디어 한 모금 입 안에 머금었다.

“후와아아...”

전영진은 자신도 모르게 괴상한 감탄성을 토해냈다.

민우도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잔을 다시 한번 바라봤다.

윌리엄이 씩 웃으며 말했다.

“어때? 사인과 사진값은 충분하겠지?”

“물론입니다. 오히려 모자란 거 아닐까 걱정될 정도네요.”

“그 정도는 아니고. 그냥저냥 마실만 한 정도지.”

술을 홀짝이던 민우가 스쳐 지나가듯 물었다.

“그런데 영화는 다시 하지 않으십니까?”

술의 반응을 물을 때만 해도 눈을 반짝이던 양반이 영화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썩은 동태눈깔로 바뀌었다.

“자네는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어떻게 하겠나?”

“풍경을 구경하겠죠.”

“근데 뒤에 더 큰 산이 있다면?”

“올라가 봐야죠.”

“꼭대기에 닿았는데도 또 산이 있다면 어쩌겠나.”

“끝을 봐야 하지 않을까요?”

“나랑 반대군. 나는 계속해서 눈앞에 나타나는 산이 지겨워져서 그만뒀네.”

심드렁하게 대답한 그가 술잔을 쥐었다.

“그리고 영화보다 이 술이 더 좋아지기도 했고.”

“저도 그럴 거 같아요. 매번 여쭙습니다만 술 만드는 법 가르쳐 주시면 안 됩니까?”

“너는 칸 영화제에서 상이나 타고 와서 떠들어.”

“쳇.”

넷은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윌리엄은 코냑을 2병이나 더 내주었다.

민우는 원래 술을 잘 못 마셔서 홀짝이는 수준이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완전히 술고래다.

경쟁하듯 스트레이트로 퍼마시다가 한 병만 남게 되자 서로 눈치를 살피더니 언더락잔에 얼음을 채우고 마시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술맛도 봤겠다. 민우가 자크를 바라봤다.

“그저 술이나 마시자고 저와 따로 자리를 만든 건 아닐 테고. 용건을 말씀해보시죠. 보다시피 시간이 너무 지체돼서요.”

자크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아무런 말도 없이 술만 즐겼는데 벌써 시간은 새벽 2시가 넘어간다.

“이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좋습니다.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죠. 사실 예상을 하셨다시피 출연 제의를 하고 싶어서입니다.”

술에 취해 졸던 윌리엄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하루살이를 찍을 생각이냐?”

“주무시는 줄 알았는데요.”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제가 봤을 때 미스터 강의 연기력이라면 충분히 될 것 같습니다. 거기에 제 연출력이 곁들여진다면?”

자크가 바의 테이블을 주먹으로 탕, 하고 내려치며 자신감 있게 말했다.

“그깟 상 제발 가져가 달라고 제 앞에 무릎 꿇고 빌 겁니다.”

“할 수 있겠느냐?”

“해야죠. 그게 선생님이나 영감님의 소원 아닙니까.”

“빌어먹을 놈.”

나직한 욕설을 내뱉은 윌리엄은 한쪽에 던져두었던 종이 뭉치를 집어 들었다.

겉장은 뭐가 잔뜩 묻어 누리끼리한 색으로 얼룩덜룩했다.

“다시 한번 묻지. 칸 영화제. 자신 있어?”

“아직도 저를 못 믿으시네요. 영감님보다 더 어린 나이에 두 개의 영화제를 석권했는데도 불구하고요.”

“말이나 못 하면.”

종이 뭉치를 밀어주려던 윌리엄의 손이 멈췄다. 자크가 냉큼 마중을 나가 종이 뭉치를 쥐었다.

윌리엄이 종이 뭉치를 놓지 않는다. 종이 뭉치 너머로 윌리엄의 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자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독였다.

“미련은 버리세요. 이미 영감님은 도망쳤습니다.”

“쯧.”

세차게 혀를 찬 윌리엄은 미련을 버리듯 종이 뭉치를 자크의 앞에 내팽개쳤다.

“가지고 썩 꺼져.”

“이거 왜 이러십니까? 아직 술이 남았는데. 화난 척하면서 저를 보내고 혼자 다 드시려고 그러는 거 아닙니까?”

“크흠. 눈치를 챘나?”

“주류창고에 술도 많은 분이 고작 한 병에 목을 매고 그럽니까? 없어 보이게.”

“올해 마실 수 있는 술은 10병이 고작이니까.”

“그럼 딱 열 번만 더 오겠습니다.”

“올해 장사 끝이다. 다시는 오지 마라.”

둘의 사이가 보통은 아니었던지 농담을 주고받으면서도 기분 나빠 하지 않는다.

“아무튼 내 새끼 부탁한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한테도 이 녀석은 조카와 마찬가지니까.”

“자식 아니고?”

“영감님 자식이면 저한테 조카뻘은 될 거 아닙니까. 괜히 제 자식까지 만들지 마시죠.”

“네 농담 실력이 그 정도니까 칸을 못 따는 거야. 알겠냐?”

“영감님을 보면 굳이 그런 것 같지도 않던데요.”

“뭣이?”

눈을 부릅뜨며 화난 듯 보이지만, 손은 잔을 내밀고 있었다.

쨍.

둘의 잔이 마주치며 맑은 소리를 냈다.

민우는 윌리엄과 사진을 찍고, 사인까지 한 후에야 펍을 나설 수 있었다.

자크가 민우에게 종이 뭉치를 건네주었다.

“꽤 흥미로울 거라고 자신합니다.”

민우가 받은 종이 뭉치 위에 명함 한 장이 올려졌다.

“연락해 주세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자크는 쿨하게 떠났다.

호텔로 돌아온 민우는 샤워하고 종이 뭉치를 펼쳤다.

인쇄한 지 꽤 오래됐던지 겉장에는 ‘하루살이(ephemera)’라는 알파벳이 희미하게 적혀있었다.

사락.

겉장이 넘어가고.

사락, 사락.

종이는 끝없이 넘어갔다.

술에 취한 김에 푹 자버린 전영진이 일어날 때까지도 시나리오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

“형.”

“······.”

“형!”

“응? 불렀어?”

“불러도 대답도 없고. 그렇게 재밌어요?”

“아니. 재미라기보다는···.”

민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루의 무한한 반복을 겪은 민우다. 그런데 이 시나리오의 주인공은 단 하루만 살 수 있다.

그 하루를 마치 무한대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으로 시간을 보낸다.

‘이렇게 보면 나랑 반대 상황인데.’

하루를 대충 소비해버린 민우와 하루를 소중하게 대하고 있는 극 중 주인공.

왠지 모르게 이 영화를 찍고 나면 하루의 반복을 겪으며 비어버렸던 민우의 한곳이 채워질 것 같았다.

“그거 제가 봐도 되나요?”

“그러지 말라는 말도 없었으니까.”

한참 동안 시나리오를 보던 전영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이런 예술영화가 하고 싶었는데.”

“이제 입봉했으니까 천천히 준비해봐. 제작사도 반겨줄 거다. 베니스 영화제 심사위원대상까지 받았으니까.”

앞으로 전영진의 앞날은 탄탄대로일 것이다.

전영진에게서 관심을 거둔 민우는 다시금 시나리오를 들었다.

“또 읽으세요?”

“응. 내 버릇 같은 거라고 생각해.”

사락, 사락.

종이 넘어가는 소리는 베니스를 거쳐 한국까지 이어졌다.

스토리를 머릿속에 완벽히 집어넣은 민우는 그때서야 전화기를 들었다.

“감독님? 저 강민우입니다. 출연하도록 하겠습니다. 계약서 보내주세요.”

시나리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민우가 눈을 빛냈다.

이번에는 칸 영화제 주연상을 노려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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