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세 얼간이 (209/223)

세 얼간이

저녁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누웠다.

깜깜해진 하늘에 하나둘 별이 떠올랐다.

유승원은 아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별자리에 관한 내용인 듯하다.

“와, 하늘에 별 좀 봐. 너무 예쁘다.”

“그거 인공위성이야. 요즘 별을 어떻게 보냐?”

“···선배는 감수성이 쥐꼬리만큼도 없나 보네요.”

“너도 독립해봐. 감수성이 밥 먹여 주지 않더라.”

“에휴. 그나저나 혜성이랑 혜성이 아버지는 참 사이가 좋아 보이네요. 안 그래요, 선배?”

“부자지간이니까 그렇지.”

“부모랑 모두가 사이 좋은 건 아니거든요.”

“누가 다 사이가 좋대? 근데 넌 안 피곤하냐?”

“왜요? 저랑 이야기 하는 게 피곤해요?”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걷느라 피곤하니까 얼른 자자는 거지. 나 졸리다.”

“어휴.”

유보배가 가슴을 두드렸다. 민우도 유보배와 같은 심정이었다. 어찌 저렇게 눈치가 없는지.

“청춘이로다.”

곁에서 대충 봐도 유보배는 전영진에게 마음이 있어 보였다.

어째 어린애들과 함께 있으니 늙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러고 보니 배유진과 전화 통화도 뜸해졌다.

그래도 아쉽지 않다는 것은 그만큼 유대관계가 옅다는 뜻일 거다.

‘아마도 인연이 아닌 거겠지.’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살짝 졸았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뜨자마자 동녘이 부옇게 밝아 오고 있었다.

길게 기지개를 켠 민우는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노숙을 하면 제대로 씻을 수 없다는 게 문제다.

“어쩔 수 없이 시내에 가기 전까지 모자로 버텨야겠네.”

아침도 먹어야 하기에 밑 재료도 준비해야 한다.

우선 말린 표고버섯과 육포는 물에 담가 불려두고, 개울가로 향했다.

어제 밥을 할 때도 확인했었지만 주변에 민가가 없어서 그런지 깨끗한 물이다.

아무래도 환경 오염도 신경 써야 했으므로 비누나 샴푸 같은 건 쓰기 꺼려졌다.

덕분에 대충 세수만 하는 수준에 그쳤으나 이마저도 감지덕지다.

물이 없는 곳에서 노숙 할 때는 생수로 눈곱만 떼야 했으니까.

물을 떠서 노숙하던 곳으로 갔더니 그제야 모두 잠에서 깨어난 모습이었다.

“슬슬 아침 먹고 출발해야 하니까 산책이라도 하고 오세요.”

“도와드릴 건 없나요?”

“딱히 없는 거 같네요. 어제 먹고 남은 밥으로 간단하게 죽을 끓일 생각이라서요. 위에 부담스럽지 않을 테니까 혜성이한테도 좋을 거 같고.”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번에도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겸연쩍은 표정을 지은 유승원이 돌아선 그는 유혜성을 데리고 주변을 거닐었다.

“저도 돌아보고 올게요.”

전영진만 남아서 민우를 카메라로 촬영하고 있었다.

“너도 가봐.”

“저는 촬영해야죠.”

“죽 만드는 걸 촬영해서 뭐 하게? 보배나 따라가.”

자꾸만 미적거리는 전영진의 엉덩이를 걷어차서 쫓아낸 후, 홀로 남아 요리에 집중했다.

불린 표고와 당근, 양파는 잘게 다졌다.

달궈진 냄비에 기름을 두르고 다진 마늘을 넣고 살짝 볶았다.

당근과 양파 그리고 육포를 함께 넣어 달달 볶아준 뒤 식은 밥과 함께 잘 섞어주었다.

불린 쌀이 아니라 남은 밥이기에 지금 넣어도 충분하다.

여기에 물을 붓고 뭉근하게 끓이다가 표고버섯을 넣고 소금으로 간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냄새를 맡은 사람들이 슬금슬금 모이고 있었다.

“타이밍 맞춰서 오셨네요. 방금 다 됐습니다. 얼른 앉으세요.”

각자의 그릇에 죽을 떠줬더니 양도 딱 맞게 떨어졌다.

“후후 불어서 천천히 먹어.”

“네, 아저씨.”

“아저씨 아니고 형 임마.”

“히히.”

민우를 놀리는데 재미 들린 유혜성을 필두로 모두가 죽만 먹었다.

아침의 신선한 공기와 함께 먹는 죽은 각별한 맛이었다.

늘 그렇듯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법이다.

민우는 이미 사인과 사진도 찍어주고 이별의 준비를 마쳤다.

그런데 같은 유 씨라며 그사이 친해진 유보배가 유혜성과 떨어질 줄 모른다. 서로 손까지 부여잡고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누나한테 꼭 전화해야 해. 알겠지?”

“전화번호 외워뒀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서울 오면 꼭.”

“네. 어휴. 얼른 가세요. 우리 아빠 기다려요.”

“쳇, 매정한 놈.”

유승원이 민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덕분에 잘 먹고 재미있게 걸었습니다.”

민우가 그의 손을 잡으며 슬쩍 웃었다.

“저희도 즐거웠습니다. 영화가 완성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가자, 혜성아.”

유혜성이 민우에게 손을 흔들었다.

“형, 다음에 봐요!”

“자식이 헤어질 때가 되니까 형이라네. 너도 잘 가.”

“히히.”

두 부자는 영덕 시내 방향으로 떠났다.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일행은 발걸음을 멈추고 바라봤다.

두 사람이 넋을 놓은 사이 민우는 한쪽으로 걸어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민아야. 잘 지내지? 나야 잘 지내지. 고생은 무슨. 걷는 거뿐인데 무슨 고생이냐. 갑자기 연락한 건 다름 아니라 한 명 치료비 후원 좀 해줬으면 해서. 난치병을 앓고 있는 아이인데 이름은 유혜성이라고 해. 아버지는 유승원이고. 전화번호 알려줄 테니까 연락해 봐. 그래, 서울 가서 보자.”

전화를 끊었는데도 아직까지 일행은 움직일 줄 모르고 있었다.

민우가 외쳤다.

“해 떨어지겠다 얼른 가자!”

* * *

그간 여행하는 사람은 있어도 걸어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셋은 그저 풍경만 감상하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동해를 지나 남해를 거쳐 일행이 도착한 곳은 한반도 육지의 최남단인 해남 땅끝마을이었다.

이곳에 도착했더니 꽤 많은 사람이 보였다. 한눈에 봐도 국토대장정을 떠나는 사람들이다.

이곳은 국토종단을 하는 사람들이 필수로 찍는 코스다 보니 그렇다.

“역시 이곳에서 출발했어야···.”

“어휴. 선배는 다 문제인데 그게 제일 문제야. 인제 와서 그런 말을 해봤자 뭐해?”

“너 그러면서 은근슬쩍 반말한다?”

“···요!”

“어휴. 언제 철들래.”

“철들면 죽는댔어요.”

“말도 안 돼. 도대체 누가 그런 헛소리를 해?”

“울 엄마가요.”

“생각해보니까 나도 들어본 말인 거 같아. 헛소리는 내가 한 거지.”

“그만 싸우고. 슬슬 우리도 출발해야지. 촬영은 넉넉하게 했어?”

“너무 넉넉해서 탈이죠.”

“좋아. 그럼 우리도 출발하자. 가면서 사연이 있어 보이는 사람과 대화도 하고. 사람들이 많으니까 앞으로 출연자 구하기는 더 쉬울 거야.”

주변을 충분히 구경하고 드디어 길을 떠났을 때.

“저기요!”

언제나 다른 사람을 불렀는데, 지금은 불리고 있다.

“이거 색다른 느낌인데?”

“저도 그래요. 헌팅 하다가 헌팅 당하는 기분이랄까.”

“어휴, 생각하는 거 하고는.”

“왜요? 헌팅 안 당해 보셨어요?”

민우 일행을 부른 이들은 대학생으로 보이는 세 명의 남자였다.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고어텍스 등산복으로 완전 무장을 했다.

키가 껑충한 사내가 물었다.

“통일전망대까지 가시는 거죠? 국토종단? 횡단?”

“굳이 따지자면 종단에 가깝네요.”

“잘됐네요. 그럼 저희랑 함께 가시죠. 일행이 많으면 힘도 덜 들 테고, 이야기도 나누면 심심하지 않을 거고. 어떤가요?”

짧은 만남이라면 상관없다. 그런데 통일전망대까지다. 거의 한 달에 가까운 시간을 함께 걷는다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다. 게다가 영화까지 촬영해야 하지 않은가.

“죄송합니다. 저희는 사정이 있어서 하루 이틀 정도면 괜찮겠지만 끝까지 함께 할 수는 없어요.”

“코스가 다른가 보죠? 저희는 서해안 코스로 갈 예정인데.”

서해안 코스는 서해안을 타고 일직선으로 올라가는 대표적인 경로 중 하나다.

해남, 영암, 함평 등을 거쳐 수원, 과천, 서울, 고양, 파주, 임진각에 이르며 대략 600km 정도 된다.

지금 민우 일행도 이 코스를 따라갈 생각이다.

“코스는 같지만 사정이 있습니다.”

“그래요? 그럼 헤어질 때까지만이라도 같이 가죠.”

유보배가 작은 목소리로 전영진에게 속닥거렸다.

“이거 어째 우리가 하던 멘트인데.”

잠시 생각해보던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만이라도 괜찮다면 그렇게 하시죠.”

6명으로 불어난 일행은 영암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이라도 하죠.”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시선은 유보배에게 향해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확실히 유보배는 미녀 축에 속한다. 거기다 꾸준히 걸으면서 살도 빠져 미모가 더 두드러지기 시작했고.

국토 순례를 하면 고생하기 마련인데 민우 덕분에 힘든 것도 없어서 오히려 생기 넘쳐 보인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지금 미모가 더 활짝 폈으니 신기할 노릇이다.

남자 셋이 걸어 다닐 생각을 하면 눈앞이 깜깜했을 거다.

그런데 눈에 확 띄는 미인이 있다.

한 달 가까이 함께 다니면서 어떻게든 수작을 부려보고자 하는 마음이 눈에 훤하게 보였기에 속으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저기 저희가 사실은···.”

전영진이 영화 촬영 중이라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민우가 중간에 만류했다.

아무런 사연도 없고 그저 국토종단을 했다는 허세만 부리고 싶어 하는 녀석들. 어차피 이들은 모두 편집이다.

“그냥 강 형이라고 부르세요.”

본명을 밝힐 수는 없었다. 알게 되면 또 무슨 야단법석을 떨지 알 수 없었으니까. 마스크로 충분히 정체를 가린다면 알지 못할 것이다.

“저는 전영진입니다.”

“유보배예요.”

“아, 유보배 씨. 저는 장영필. 얘는 윤성민, 쟤는 김우석이에요. 그런데 세 분 다 대학생이신가요?”

“저는 아니고 이 둘은 대학생입니다.”

자신을 장영필이라고 소개했던 키가 껑충한 남자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대학을 다니지 않는다니까 무시하는 그런 기색이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이후부터는 대화에서 민우를 배제했다.

장영필이 윤성민을 가리켰다.

“얘는 T대 다녀요.”

T대는 대한민국 대학순위 TOP10에 항상 들어가는 명문대다.

“야. 갑자기 학교 얘기는 왜 하고 그래?”

“왜? 네가 노력해서 갔는데 그게 숨길 일이야?”

겉으로는 말리면서도 입꼬리는 씰룩거리는 것이 어지간히도 기쁜 모양이다.

아마도 학벌이라도 자랑하고 싶었나 보다.

유보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구나. 저랑 선배는 S대 다녀요.”

“······.”

T대 머저리의 입이 단박에 다물어졌다.

아무리 T대가 명문대라지만 대한민국 최고 대학의 발끝에도 미치지는 못할 테니까.

입을 다물고 걸어가던 장영필이 다시금 발동을 걸었다.

“성민아. 너희 아버지 우리 병원에 언제 오신대?”

“그건 갑자기 왜?”

“우리 아빠가 로펌에 의뢰할 일이 있다고 들었거든. 그래서 너네 아버지 소개해 드렸는데. 소식 못 들었어?”

“금시초문인데.”

학벌로 안 되니까 이제는 집안을 내세울 심산인가보다.

“아, 우리 집이 병원을 하거든요. 아빠가 원장이고. 얘 아버지는 로펌 변호사고.”

굳이 묻지도 않는 이야기를 꺼내는 걸로 봐서 얄팍한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나이가 몇인데 아빠예요?”

“아빠를 아빠라고 부르지 그럼 뭐라고 불러요? 엄마라고 부르나?”

“어유. 유치해.”

무안해진 장영필의 얼굴이 벌게졌다.

“쯧쯧. 그러기에 돈도 얼마 못 버는 병원이 왜 끼어들어?”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녀석이 나섰다.

“안녕하세요, 유보배 씨. 저는 김우석이라고 해요.”

“네.”

“우리 집은 회사해요. 연 매출 300억짜리.”

“중소기업이네요.”

“크흠. 그렇기는 하죠.”

“매출이랑 당기순이익이랑은 다르죠. 연 매출 말고 당기순이익은 얼만데요?”

김우석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몰랐기 때문이다. 그냥 집에서 돈 타서 쓸 줄만 알았지 회사에 관심은 없는 편이었다.

“어디 가서 돈 자랑 하지 마세요. 자기 거도 아니고 아빠 거잖아요. 그렇게 치면 여기 이 선배는···.”

“야야, 됐다.”

화들짝 놀란 전영진이 유보배를 말렸다.

“가만히 좀 있어 봐요. 연 매출 1,000억짜리 벤처기업인데. 세 분 중에서 우리 선배보다 많이 버는 집 있어요?”

“······.”

학벌 자랑도 못 해, 돈 자랑도 못 해.

쪽팔림을 금치 못한 세 명의 얼간이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

“뭐해요? 너무 뒤처지시는데.”

“아, 저는 조금 쉬다 갈 거라서요. 너희는?”

“나도 다리가 아프네.”

“먼저 가세요. 금방 따라갈게요.”

그렇게 세 얼간이를 남겨 두고 민우 일행은 발걸음을 옮겼다.

“칫. 강느님의 정체만 밝힐 수 있었어도 쟤들은 끽소리도 못했을 텐데.”

“이미 아무런 말도 못 하던데?”

“그래도요. 어휴. 대학 가자고 눈살 찌푸리는 꼬락서니하고는.”

민우는 빙긋 웃었다.

자신을 위해서 화를 내주는 유보배가 고마워서.

“좋아. 시내가 나오면 가장 먼저 먹을 음식은 특식이다.”

그 특식은 유보배가 가장 좋아하는 제육볶음이고.

“고기 좀 사자.”

“정말요? 만세!”

기특한 일을 했으면 포상이 따라야 하는 법이다.

세 얼간이와 인연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질겼나 보다.

그나마 가까운 마트에 들러 고기를 사고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저희가 고기 좀 사 왔는데 같이 요리해주시면 안 될까요? 도대체 요리 할 줄 아는 놈들이 아무도 없네요.”

유보배의 얼굴이 못마땅함으로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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