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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소주 (202/223)

당소주

어떤 종목이 됐든 간에 입소문 타는 게 힘들다. 입소문만 타면 이후는 순조롭다.

내일부터 미남입니다는 그런 점에서 이미 다른 모든 영화를 압도했다.

아시아인 최초의 오스카 주연상이라는 쾌거에 슬쩍 영화감독이라는 최근 소식을 곁들였으니.

민우에 관한 기사가 나올 때면 양념처럼 영화 제목이 언급됐다.

사실 영화를 제작할 때만 해도 손익분기점을 넘기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타이밍 좋게도 거대한 호재 덕분에 관객은 순조롭게 늘어났다.

온갖 미디어에서 민우의 소식을 타전했으니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노릇.

그저 눈감고 귀 닫으며 사는 사람만 아니라면 민우에 관해서 다들 알게 됐다.

이번 영화에서 가장 큰 혜택을 받은 사람은 반태근이었다.

섭외요청이 쏟아지고 잠까지 줄여가며 하루를 보낸다고 한다.

그리고 민우는 또 다른 대기록을 눈앞에 두었다.

“천만 배우이자 천만 감독이었던 사람이 있었나?”

“단군 이래 아마도 없을 거다.”

“그 기록을 네가 세우기 직전이고?”

“너무 멀리 간 거 아냐? 이미 관객도 주춤해진 상태인데.”

3주 차까지 700만을 넘겼다. 그런데 4주 차에 들어서부터 관객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보통 천만 관객이 들어오는 영화는 대부분이 3주 차가 끝날 때 천만을 돌파했다.

그런 면에서 내일부터 미남입니다는 이번 주가 고비나 마찬가지다.

만약 5주 차까지 300만 명이 마저 들지 못한다면 천만 관객은 물 건너갔다고 봐야 한다.

민우가 입맛을 다셨다.

“굳이 관객 숫자에 목매지 말자. 700만도 엄청난 성적이잖아.”

손익분기점이 300만이었으니까 이미 많은 수익도 올렸다.

홍경섭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목매야지. 너 또 감독할 거야?”

“절대 안 하지.”

색다른 경험은 한 번으로 충분하다.

감독도 매력적인 직업임은 분명하지만 자신의 길이라는 확신은 들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번에 천만 넘겨야지.”

“왜 기록에 목숨을 걸고 그러냐.”

홍경섭은 익살스러운 평소 모습을 지우고 진지한 태도를 보였다.

“민우야. 기록은 평생 남는 거야. 괜히 모두가 최초, 최대를 원하는 게 아니라고. 혹시라도 나중에 너 같은 배우가 나타나서 감독한 영화까지 천만 관객을 동원해봐. 너는 곧바로 잊히는 거야.”

“오스카 주연상도 받았는데?”

“천만 관객의 배우가 감독으로 영화를 찍어서 천만 명을 불러 모으고, 국제 영화제에서도 상을 탄다면?”

“에이. 그럴 사람이 어디 있겠어?”

“지금 내 눈앞에 거의 근접한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민우의 말문이 막혔다.

히죽 웃은 홍경섭이 평소처럼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무튼 물 떠 놓고 빌어보자. 혹시 알아? 막판 스퍼트로 천만 관객 넘을지.”

민우는 미신에 기대는 대신 다른 방법을 택했다.

“혹시 공중파 섭외 들어온 건 없어?”

“어떤 거? 드라마?”

“아니. 예능이나 토크쇼 같은 거.”

“있지, 왜 없겠어? 네가 시간이 안 되니까 다 거절했던 거지. 지금도 전화 한 바퀴 돌리면 너 올해 스케줄만 하다가 한 살 더 먹게 될걸?”

질린 표정을 지은 민우가 냉큼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까지는 할 필요 없고. 그냥 영화 홍보나 하게. 토크쇼나 예능 같으면 괜찮을 거 같은데.”

턱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던 홍경섭이 중얼거렸다.

“그런 거라면 꽤 괜찮은 프로가 있긴 해. 근데 시청률이 영···.”

“어떤 건데?”

“TVB 방송국에서 하는 예능인데, 출연자들의 장기를 소재로 삼는 게 있거든. 재주를 감상하고 토크쇼도 하고 뭐 그런 거.”

“당소주?”

“술 말고.”

“제목 줄인 거잖아. 당신의 소질을 보여주세요. 그거 말하는 거 아냐?”

“맞아 그거.”

21일을 반복할 당시 꽤 재밌게 봤었다.

제목과 달리 토크쇼가 주제다. 다만 토크만 하면 지루하기에 출연자가 가진 재주를 선보이는 것일 뿐.

이미 몇 년째 장수하는 프로그램이라 신규 방송과의 시청률 경쟁을 할 수 없다 보니 심야 시간대로 옮겼다.

지금은 동 시간대 시청률 1위다. 물론 2%를 간신히 넘기는 수준이지만.

“그럼 거기로 하자. 겸사겸사 신세 진 것도 갚아야겠다.”

“내가 말해놓고도 좀 그런데 시청률은 진짜 별로야. 괜찮겠어?”

“시청률이 나오지 않으면 또 어때?”

민우가 히죽 웃었다.

“내가 잘 나오게 하면 되는 거지.”

남들이 보면 재수 없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미 여러 차례 증명했기 때문에 반박할 수조차 없다.

그래서 칭찬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시청률의 요정님께서 출동하시니까 당연히 잘 나오겠지.”

민우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 * *

우선 홍경섭은 배우들의 매니저와 연락을 해서 의향을 물었다.

바쁘기는 매한가지지만 영화 홍보를 위한다니까 흔쾌히 허락했다.

여기에 민우가 신세를 갚는다는 말도 한몫했고.

일단 가장 중요한 PD와 조율이 남았기에 가부 결정만 하고는 TVB 방송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당신의 소질을 보여주세요’ PD는 차원호다.

한때 스타 PD로 유명했으나 지금은 흘러간 세월을 안타까워하는 사람 중에 한 명이 되었다.

“안녕하십니까, 차 PD님. 저 KH 엔터의 홍경섭이라고 합니다.”

-아! 홍 대표님이 어쩐 일로 전화를 다 주셨어요?

“어휴, 우리 회사에 백수가 있지 않습니까. 밥만 축내니까 밥벌이라도 하라고 했더니 차 PD님의 프로그램이 괜찮겠다네요.”

-백수··· 요? 어디 보자. 지금 KH에서 휴식기에 들어간 연예인이 누구더라.

“그 왜 강모 씨라고.”

순간 수화기 너머에서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헉! 설마 강민우 씨 말씀 하시는 건가요?

“왜 아니겠어요. 요즘 일이 없어서 노는 녀석은 강 씨뿐이죠.”

-아이고! 강민우 씨라면 저희 쪽에서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죠! 아니다. 배우시니까 지하 주차장부터 녹화하는 스튜디오까지 레드카펫이라도 깔아 둘까요? 레드카펫이 지겨우시면 꽃이라도 문제없습니다. 말씀만 하세요!

“잠시만 진정하시고요. 조건이 있습니다.”

-어···. 출연료는 너무 많이 드릴 수 없습니다. 저희 프로 제작비가 워낙 적어서요.

“그게 아니라 내일부터 미남입니다 배우들과 함께 출연하려고 해서요.”

-히익!

괴성과 함께 우당탕하는 소음이 들렸다.

“여보세요?”

잠시 후 헐떡거리는 소리와 함께 차원호가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의자가 뒤로 넘어가는 바람에. 혹시 주연배우도 함께 출연할 예정인가요?

“주연 두 분하고 조연 두 분까지요.”

차원호는 듣자마자 거절부터 했다.

-무리입니다. 제작비가 부족해요.

“출연료는 괜찮습니다. 대신 영화 홍보를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설마 출연료를 안 받겠다는 뜻인가요? 어차피 다들 저희 프로그램에 홍보하러 나오니까 그건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홍보를 위해서 출연한다지만 대가는 받아야죠. 많이는 못 드리겠지만요.

“그럼 제작비가 모자라지 않는 선에서 알아서 주세요.”

이미 민우의 몸값만 억대다. 톱스타인 한수연은 두말할 것도 없고. 게다가 반태근도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 되었다.

뿐인가? 함께 출연할 차규화와 허강필도 조연이지만 몸값은 상당한 수준이다.

한명 한명 이름이 나올 때마다 차원호는 침을 꼴딱꼴딱 삼켰다.

지금은 한물간 스타나 SNS 인플루언서, 혹은 개인 방송 BJ를 섭외하며 명맥을 이어가는 중이지만, 방송 초창기 때만 해도 차원호는 잘나갔다.

스타 PD랍시고 거만함도 탑재했었다.

PD의 명함은 시청률인지라 아무리 그가 망나니처럼 굴어도 출연자는 줄을 섰다.

그러나 그의 인기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프로그램이 오래되고 점점 식상해지면서 시청률이 떨어지기 시작했으니까. 동시에 그의 거만함도 사라졌다.

이제는 아무리 신인이라 할지라도 웃으며 아부할 수 있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정말 그분들이 모두 출연하신다고요?

“허락은 받았습니다. PD님께서 최종결정만 해주시면 됩니다. 아참. 이번 주말에 특별편성으로 가능할까요? 저희도 좀 급해서요.”

-일단 윗선에 보고를 해봐야 알 겁니다. 물론 허락은 떨어질 거고요. 문제는 이번 주 방송에 나가기로 했던 출연자인데, 방송을 미룬다는 걸 받아들일지 모르겠네요.

순식간에 말을 쏟아낸 차원호가 비음을 흘리며 한마디를 더 보탰다.

-모두가 허락하더라도 촬영에 편집까지 하려면 시간이 부족할 텐데···.

“저희도 사정이 있어서요. 힘들 것 같으면 말씀해주세요. 다른 프로그램 알아볼 테니까요.”

평소라면 사정을 봐주겠지만, 지금은 시간이 생명이다.

홍보가 목적인데 아무리 방송의 컨셉이 마음에 들더라도 이번 주를 놓치면 타격이 클 게 뻔하다.

영화관도 관객이 들지 않는 영화를 천년만년 걸어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생각을 마친 차원호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오늘 안에 연락드릴게요.

전화를 끊은 홍경섭은 인터넷을 살펴봤다.

혹시라도 방송 출연이 불발될 때를 대비해서 다른 프로그램들을 알아보는 거다.

고작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인터넷 삼매경에 빠져있던 홍경섭은 휴대폰이 울리자 정신을 차렸다.

발신자는 차원호다.

전화를 받자마자 텐션이 저세상 끝까지 올라가 버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됐습니다! 홍 대표님. 당장 녹화는 내일인데 모두 가능하시겠습니까? 한 분이라도 빠지면 국장님께 다시 보고 해야 해서요.

“녹화는 내일 몇 시죠?”

-오전 10시부터 오후 8시까지 10시간입니다.

“내일 모두 모시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홍경섭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예스, 만세, 등등의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아마도 스피커폰으로 함께 듣고 있었나 보다.

-좀 요란하죠?

차원호의 겸연쩍어하는 말에 웃음이 나왔다.

언제부턴가 모든 것이 당연해졌다. 그저 전화 한 통화만 해도 서로 모셔가려고 한다.

작은 방송 출연을 따내고 기뻐하던 때가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지난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이제는 고생을 끝내고 과실을 따는 단계였으니까. 그것도 아주아주 많이.

홍경섭은 지금부터 바쁘다. 다른 배우에게도 연락해야 하니까.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네, 홍 대표님. 감사합니다!

홍경섭은 신호음이 울리는 수화기를 보며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감사합니다라···.”

그건 이쪽에서도 해야 했던 말인데.

사회적 위치가 달라지면서 잊어버렸던 단어를 다시금 떠올리게 했다.

* * *

오전 9시 30분.

TVB 방송국 주차장에 짙은 선팅을 한 밴이 들어섰다.

차량의 문이 열리고 훤칠한 키의 청년이 내렸다.

미리 연락을 받은 스태프가 청년에게 다가갔다.

“환영합니다, 강민우 씨.”

순간 민우는 당황했다. 대기실을 안내하는 스태프는 아무래도 막내가 담당하기 마련이다. 그게 아니라면 조연출이 하거나.

그런데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남자는 아무리 봐도 40대는 훌쩍 넘은 것 같다.

“PD님이 직접 마중 나오셨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대체 불가능한 슈퍼스타께서 친히 왕림하셨는데 제가 직접 나와야죠. 근데 제 얼굴을 아셨나 봅니다?”

“그냥 넘겨짚었는데 다행스럽게도 맞았나 보네요.”

“하하, 그랬나요? 제가 강민우 씨를 위하여 우리 방송국에서 제일 좋은 대기실로 준비해뒀습니다.”

“굳이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었는데요.”

“아뇨. 당연한 거죠. 얼른 가시죠.”

차원호의 장담대로 대기실은 호화로웠다.

넓은 데다가 칸막이가 쳐진 곳 뒤에는 침대도 있고, 심지어 샤워실까지 있다.

중앙의 테이블 위에는 음료와 다과도 준비되어 있었다.

아침 일찍 샵에 들러 준비를 하고 왔기에 할 일도 없다.

멀뚱멀뚱 앉아 있던 홍경섭이 테이블 위의 과자를 습관처럼 까먹었다.

“습관이 이래서 무섭다니까. 그거 칼로리가 얼만 줄 알아?”

과자를 씹던 홍경섭이 멈칫했다.

“너는 꼭 뭐 먹을 때 그런 말을 하고 그러냐.”

“괜찮아 먹어. 먹고 싶은 거 먹으려고 운동하는 거잖아.”

안색이 해쓱해진 홍경섭은 입안의 과자를 삼켜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다.

일요일이 되면 홍경섭은 일주일간 먹고 싶었던 걸 먹는다. 칼로리도 철저히 계산해서 운동하는데 오늘 변수가 생겼으니 그가 당황할밖에.

결정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데.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홍경섭은 자신도 모르게 입안의 것을 꿀꺽 삼켜야 했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반태근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홍경섭은 철천지원수를 마주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기세가 얼마나 살벌하든지 움찔한 반태근은 한 발짝 물러나고 말았다.

홍경섭이 스산하게 말했다.

“나 혼자 안 죽어.”

아무래도 홍경섭이 운동할 때 반태근도 함께해야 할 운명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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