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상식장에서 (199/223)

시상식장에서

이제는 미국에 오는 것도 익숙했다.

예전 같았으면 며칠 여유를 두고 입국했을 거다. 그러나 지금은 영화 개봉 때문에 너무 바빠서 시간을 뺄 수 없었다.

결국 스케줄을 빠듯하게 잡아서 시상식 하루 전에 미국에 도착했다.

시차 적응이고 뭐고 할 겨를도 없다. 어차피 시상식이 끝나면 곧바로 한국으로 떠나야 하니까.

거의 24시간을 잠에 빠져 있다가 시상식장으로 가야 할 시간이 되어서야 깨어났다.

상체를 일으키자 머리가 띵하더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일어나려다 말고 비틀거리자 홍양석이 화들짝 놀라 민우를 부축했다.

“괜찮으세요, 형?”

가까이서 본 민우의 피부는 거칠하고, 다크서클도 짙었다.

푹 자서 더는 잠이 오지 않지만 피로가 다 풀린 건 아니었다.

“양석아, 미안한데 나 물 좀 줄래?”

“잠시만요.”

민우를 벽에 기대두고 생수를 가지고 왔다.

500mL짜리 한 병을 모두 비우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체력의 한계가 찾아온 것도 몰랐다.

“시상식에 참가하지 않았으면 쓰러졌을지도 모르겠는데.”

홍양석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민우를 살폈다.

“그러게 좀 느긋하게 작업하시지. 서두를 필요도 없는데.”

민우가 피식 웃었다.

“너도 경섭이 닮아가냐? 잔소리는.”

침대를 벗어난 민우는 생수 한 병을 더 마시고 시간을 확인했다.

슬슬 준비하고 떠나야 늦지 않을 것 같았다.

스타일리스트가 따라온 게 아니라 모든 준비는 민우가 해야 했다.

“턱시도는?”

“드레스룸에 들어가자마자 보이도록 걸어 뒀어요.”

“오케이. 너는 쉬고 있어.”

샤워를 하고, 메이크업도 하고, 턱시도를 입고.

물 흐르듯 준비를 해나가는 모습을 보며 홍양석은 감탄했다.

“형 준비 하시는 거 동영상으로 찍어서 애트라 애들 보여줘야 할까 봐요. 시청각 자료로 쓰게.”

“네가 애트라를 맡고 있어?”

“네. 지금은 애들이 휴식기라서 제가 형을 서포트 하게 됐고요.”

“그랬구만. 근데 애들이 준비하는 데 오래 걸리고 그래?”

“새벽부터 전쟁터예요. 그래도 애들이 그러는 게 이해되기도 해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스케줄이 있으니까.”

“나도 해봐서 아는데 그거 보통 힘든 게 아니더라.”

“이해만 합니다. 힘든 만큼 돈을 버니까 괜찮다고 생각하니까요.”

“그건 맞지.”

애트라는 1집 활동 중에 정산을 받았다.

그 말은 제작하는 데 들어간 비용을 모두 갚았다는 뜻이다. 왜 변제냐면 그게 빚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이런 케이스는 매우 드물다. 웬만한 대박이 터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잘나가는 아이돌도 3~4집 때가 돼서야 정산을 받았다고 인터뷰를 했었다. 물론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지만.

애트라가 첫 정산을 받았을 때 민우는 명품 수트 5벌이 생겼다.

멤버 모두가 한 벌씩 선물해준 것이다. 어째서 선물로 수트만 줬는지는 알 수 없었다.

홍경섭이 넌지시 귀띔해주기로는 누구는 비싼 거, 누구는 싼 거, 이렇게 갈릴까 봐 그랬다고 한다.

비싼 것이어야 제대로 선물하는 느낌을 준다니.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쩔 수 없다. 물건의 액수에 따라 마음의 크기도 달라지는 세상이니까.

잡담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준비가 끝났다.

시상식장으로 이동하기 위해 집을 나갔더니 집 앞에 리무진이 대기 중이었다.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는 일전에 랄프의 집으로 안내해줬던 그 사람이다.

“오랜만입니다, 미스터 강.”

“반갑습니다. 미스터 랠프가 보냈나요?”

운전기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랄프가 앉아있었다.

“자리는 많으니까 편하게 앉으시게.”

실소를 터트린 민우가 리무진에 올랐다.

홍양석도 민우의 뒤를 따랐는데, 그의 얼굴에는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어째 새가슴인 것도 사촌이 똑 닮았는지.

“굳이 마중 나오지 않으셔도 괜찮은데요.”

“허허. 그럴 수야 있나. 내가 권한 시나리오에 출연해서 수상 후보가 됐는데.”

한물갔다는 소리를 듣던 랄프다. 손수 마중까지 나올 이유로 충분하지 않은가.

최근 민우 덕분에 최근 랄프의 주가도 제법 회복한 모양새다.

랄프는 차가 부드럽게 출발하자 잔을 내밀었다.

“가볍게 한잔 마셔도 괜찮을 것 같은데. 어떤가?”

잔을 받은 민우가 슬쩍 웃었다.

“이번에는 아르망디가 아니군요.”

“크루그 끌로 드 당보네일세.”

민우도 마셔봤다. 세계에서 비싼 샴페인에 속하며 300여만 원이 훌쩍 넘는다.

샴페인이 혀를 적셨다. 강한 산미에 달콤한 꿀과 고소한 견과류, 그리고 과일의 풍미가 어우러져 황홀한 느낌마저 든다.

“내가 비싼 샴페인을 준비하는 건 맛 때문이 아닐세. 물론 맛도 있겠지만 내 입맛에는 아니거든. 내 취향은 럼이라.”

럼은 럼주라고 하며 사탕수수즙이나 당밀을 발효시키고 증류한 다음 숙성의 과정을 거친 술이다.

흔히 해적의 술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도수가 높기 때문에 마시고 나면 뱃속이 불이 난 것같이 느껴진다. 가격도 싸고.

“근데 왜 비싼 샴페인을···.”

“이건 상대의 격을 높여주기 위해서 마시는 거네. 내가 이 정도로 비싼 샴페인을 준비했다. 당신을 소홀히 대하지 않는다. 뭐 이런 느낌이랄까.”

“저는 가격을 따지지 않습니다. 다만 샴페인은 괜찮네요. 독한 술은 취향이 아니라.”

민우의 말에는 인연을 계속 이어가자는 뜻을 함축하고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랄프가 흐뭇하게 웃었다.

“참고하지.”

창문에 짙은 색의 커튼이 드리워져 있기에 가고 있는 건지 멈춰 있는 건지 모를 정도였다.

홍양석이 안절부절못하자 랄프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걱정하지 말게. 원래 주인공은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니. 늦지 않게 도착할걸세.”

영어를 잘 모르는 홍양석이지만 뜻은 대충 이해했다.

민우도 느긋한 모습이라 그제야 마음 놓고 샴페인을 입에 머금었다.

“오···!”

맛이 꽤 마음에 들었던지 홍양석은 샴페인 한잔을 아껴가며 조금씩 마시기 시작했다.

비싼 술이라 아껴 먹는다고 오해한 랄프가 말했다.

“마음 놓고 마시게. 원하면 더 줄 터이니.”

샴페인 잔을 입에 문 홍양석이 민우를 바라봤다.

“다 마시래. 많다고.”

민우가 통역을 해주자 홍양석은 고개를 저었다.

“담당 연예인을 케어해야 하는 데 제가 취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런가? 본인의 뜻이 그러하다면 어쩔 수 없지. 생각이 바뀌면 말하게.”

“싫으면 말래.”

“······.”

홍양석이 눈을 가늘게 뜨고 민우를 바라봤다.

“왜?”

“저 사람은 분명 제법 길게 말한 것 같은데 통역을 거치니까 많이 짧아진 것 같아서요.”

“뉴모노 울트라 마이크로스코픽 실리코 볼케이노 코니오시스.”

“네?”

“알파벳으로 45자나 돼. 이게 무슨 뜻인 줄 알아?”

“저야 모르죠.”

“진폐증, 폐진증, 규성 진폐증. 뭐 이런 뜻이야. 그럼 마밇러삐나따빠이는 무슨 뜻일 거 같아?”

“야, 얄라뽕따이요?”

“서로에게 꼭 필요한 것이면서도 자신은 굳이 하고 싶지 않은 어떤 일에 대해서 상대방이 자원해서 해 주기를 바라는, 두 사람 사이에서 조용하면서 긴급하게 오가는 미묘한 눈빛이라는 뜻이야.”

“아! 그거 유머사이트에서 봤어요. 그거 한국어로 해석하면 조장하실 분? 이라는 뜻이랬어요.”

허를 찌른 공격에 민우의 말문이 막혀버렸다.

되돌아 생각해보니 맞는 것 같다. 다들 조장은 하기 싫지만 남이 맡아줬으면 하니까.

“그런데 단어들은 갑자기 왜 꺼내신 거예요?”

“아까 통역이 의심된다며. 타국의 언어를 한국어로 바꾸다 보면 짧아질 수도, 길어질 수도 있다는 걸 알려주려고.”

“그렇군요.”

“그런 거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둘은 동시에 시선을 돌렸다.

홍양석은 샴페인을 마시고, 민우는 커튼을 살짝 걷어 창밖을 바라보고.

묘한 침묵이 가득한 리무진은 조금씩 어두워져 가는 도로를 달리고, 또 달렸다.

* * *

“헤이, 민우!”

턱시도를 입은 앤드류가 민우를 반겼다.

민우와 악수를 하고 살짝 껴안은 그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시상식장을 돌아다녔다.

시상식장에는 민우가 아는 배우도, 그렇지 않은 배우도 있었다. 비중으로 따지자면 후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물론 아는 얼굴이라고 해서 서로 친분이 있는 건 아니다.

작년에 시상식장에 초대받았던 사람이 올해도 초대될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게다가 할리우드의 인맥은 빈약했으니 아는 얼굴이 드물 수밖에.

앤드류는 워낙 발이 넓어서 민우에게 사람들을 소개해주기 시작했다.

반갑게 맞아주는 배우도, 외면하는 배우도 있다.

민우가 동양인이라는 이유도 있을 거고, 경쟁자라고 여기는 이유도 있을 거다.

어디를 가도 이런 사람들은 존재하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배우에게서는 반응이 갈렸지만, 감독 쪽은 아니었다.

모두가 민우를 반겼다.

연타석 홈런을 터트린 민우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 감독이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인종이라는 불리한 조건까지 극복해버린 배우를.

두루두루 얼굴을 익히고 덕담도 나누고.

시상식장을 한 바퀴 다 돌아갈 때쯤이었다.

“마지막으로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 그전에 너한테 양해부터 구해야 할 거 같다.”

“내키지 않으면 그냥 넘기지.”

“워낙 좀스러운 성격이라 해코지를 할지도 몰라서. 그냥 대충 장단만 맞춰주면 돼.”

민우의 어깨를 툭 친 앤드류가 한쪽 구석에 있는 노인에게로 걸어갔다.

노인은 노인인데 덩치가 웬만한 청년 못지않다. 피부는 혈색이 넘치며 팽팽하기까지 했고.

흑인과 백인의 혼혈인 남자에게 앤드류가 인사했다.

“알렉스.”

“음? 이게 누구야?”

“잘 지냈죠?”

“너만 오지 않았다면 잘 지내고 있었지.”

“저도 알렉스를 못 봐서 편안하게 지냈습니다.”

농담을 한 번씩 주고받은 다음 서로 부둥켜안았다.

“크라임 타운 잘 봤다. 연기가 제법 늘었던데?”

“저야 언제나 잘했죠.”

“건방진 모습도 여전하구먼. 그런데 함께 온 사람 소개는 언제 해 줄 거냐?”

“아참. 여기는 강민우라고 해요.”

민우가 손을 내밀었다.

“강민우라고 합니다.”

“나는 알렉스일세.”

민우는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

“내가 누구인지 궁금한 눈치구먼.”

“제가 할리우드에 아는 사람이 거의 드물다 보니 실례를 하고 말았군요.”

“모를 수도 있지. 지금 자네의 모국인 일본에 가서 내가 누군지 물어도 아는 사람은 없을걸?”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입니다.”

“음? 코리아가 어디 있는 나라인가? 일본과 중국은 아네만.”

민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앤드류가 안절부절못하며 끼어들었다.

“알렉스, 코리아 몰라요?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나라.”

“아. 독재국가.”

이쯤 되니 민우도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다.

“농담이라면 지나치시네요.”

“아닌가? 이거 미안하네. 내가 타국에 관한 관심이 그리 많지 않아서. 알려주면 경청하겠네.”

정말로 미안한 얼굴이다. 꾸민 것도 아닌 진실하게 미안한 그런 표정.

알면서 조롱했다면 모르겠지만, 실제로 몰라서 실수했다는데 어쩌겠나.

“방금 알렉스가 언급한 나라는 노스 코리아. 저는 사우스 코리아입니다.”

“그렇구먼. 내 꼭 기억해두겠네. 다시 한번 사과하지.”

눈치만 살피던 앤드류가 분위기를 끌어 올리기 위하여 호들갑을 떨었다.

“그나저나 알렉스. 오랜만에 국제영화제에 초청됐다면서요? 그것도 베를린.”

앤드류의 말을 듣고 나서야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 21일을 반복할 때 어떤 감독이 베니스 국제영화제의 심사에 관하여 불만을 표했다는 인터뷰를 본 적 있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서 영화와 관련된 인터뷰, 뉴스, 다큐멘터리들을 원어로 보다가 주워들은 소식이었다.

“그래. 베를린은 다르겠지. 대가리에 똥만 가득 찬 어느 영화제와는 달리. 거기는 예술을 모른다니까.”

얼굴 가득 자부심이 넘쳐흐른다.

“그것뿐인가? 요즘은 너도나도 상업영화에만 집중하지 않나. 사람이 배부른 돼지가 되어서야 쓰나? 배가 고파도 소크라테스가 돼야지.”

상업영화를 찍는 사람들에게 싸잡아 광역 딜을 넣는 알렉스였다.

한바탕 설교 같은 말을 쏟아 낸 그가 앤드류를 바라봤다.

“근데 차기작은 어떻게 하기로 했나?”

“이미 계약했죠.”

“그래? 이거 아쉽구만. 이번에도 상업영화인가?”

“그렇게됐습니다.”

“쯧쯧.”

민우는 대충 알렉스의 성격을 짐작했다. 남에게 관심이 없고 자아도취적인 성격.

앤드류정도 되는 배우라면 출연 계약을 함과 동시에 기사가 나기 마련이다.

업계관계자면서 모르고 있었다면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알렉스의 시선이 민우에게로 향했다.

“자네는 어떤가? 국제영화제에 관심 있나?”

“관심이야 있죠.”

“그럼 나랑 작업 하나 하는 건 어떤가?”

민우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어렸다.

“저는 베니스 영화제에 가고 싶습니다. 가능할까요?”

알렉스가 얼굴을 찌푸리자 앤드류는 해맑아 보이는 민우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왜? 국제영화제 하면 베니스 아냐?”

자신을 두 번 죽이는 발언에 화를 참느라 알렉스의 얼굴이 울긋불긋해졌다.

“국제영화제를 언급하셨으니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겠죠, 알렉스?”

이제는 알렉스의 얼굴이 똥 씹은 것처럼 와락 일그러졌다.

선빵으로 3연타를 쳤으니 그대로 갚아줘야지.

거기에 이자도 추가해서

“근데 저는 예술 영화는 좀···. 아직은 돈이 좋아서요.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 배부른 돼지가 좋아서.”

한동안 씩씩거리던 알렉스는 발을 쿵쿵거리며 자리를 떴다.

발암물질을 퇴치해버리자 앤드류는 민우에게 존경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쓱.

들어올린 앤드류의 엄지가 그의 마음을 대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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