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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박이냐, 쪽박이냐 (192/223)

대박이냐, 쪽박이냐

전 세계 누적 수입 11억9천6백만 달러 달성. 십만 단위는 잘라낸 수치다.

크라임 타운의 기록에 할리우드는 다시 한번 두 눈을 둥그렇게 떠야 했다.

11억 달러가 넘는 수입을 거둔 영화는 많다.

하지만 R등급의 영화가, 그것도 특출난 스타가 없는데도 흥행에 성공했으니 놀란 눈으로 볼밖에.

퍼스트 러브도 10억 달러를 벌어들였지만, 그때는 대부분이 해외 쪽에 집중됐었다. 북미의 수입은 전체의 20%가 될까 말까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장르 때문인지 해외에서의 수입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북미의 수입이 40%는 족히 됐고, 의외로 중국에서 20%가 넘는 수입이 들어왔다. 한국은 말할 것도 없고.

만약 퍼스트 러브만큼 해외의 수입이 있었다면 12억 달러는 아득하게 넘어갔을 거다.

민우는 또 한 번 돈방석에 앉았다.

연달아 홈런을 날렸으니 할리우드에서도 그의 티켓 파워를 어느 정도 인정하게 됐다.

이노치는 결재판을 받아 들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작비를 제한 10억 달러 중에서 자신의 몫은 30%.

물론 여기에 스탭이나 계약상 인센티브를 주면 더 빠진다.

그러나 100%에서 30%로 한참 쪼그라든 수입을 보니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이노스 픽처스가 이번 기회에 기사회생은 했지만 할리우드의 평가를 뒤집을 정도는 아니었다.

의외로 능력을 검증받은 것은 CHA ENM쪽이었고.

이노치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더 속이 뒤틀렸다.

평판을 뒤집기 위해서는 성공하는 수밖에 없다.

“시나리오 검토는 어떻게 됐어?”

“3편 정도 남은 것 같습니다. 한 번 더 의견을 취합해서···.”

“됐어. 그거 다 가지고 와.”

사실 어느 작품이 뜰지 아무도 모른다. 절대 흥행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영화가 뜬금없이 터지는 일도 있으니까.

하지만 전문가들이 거르고 걸러낸 시나리오가 성공할 확률은 높다.

이노치는 3편을 일본에 보낼 생각이다. 타케시에게도 보내주고 그곳에서 검증을 거칠 예정이다.

아무리 좋은 시나리오라도 주연배우가 고사하면 도로 아미타불이다. 그러나 할리우드에 진출할 수 있게 해주는 영화다. 타케시가 거절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북미나 다른 나라에서 흥행하지 않아도 된다. 일본에서만 대박이 터져도 충분하다.

최근 일본을 대표하는 남자 배우가 할리우드에 진출한 작품이다.

애국심을 살살 건드리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래, 이런 슬로건이 좋겠군. 영화 보고 응원하자!”

워낙 작은 목소리인데다가 일본어로 중얼거려서 비서는 알아듣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잘 못 들었습니다.”

“아냐. 됐어. 나가봐.”

고개를 꾸벅 숙인 비서가 나가자 이노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 일본에서 대유행하면 아시아는 당연히 따라오는 법이지. 한국에서 천만? 우리는 이천만이 목표다. 퍼스트 러브가 아시아에서 6억 달러를 벌어들였던가? 그쯤이면 충분하겠군.”

거나하게 삼켜대는 김칫국이 이노치를 취하게 했다.

* * *

홍경섭은 미국에서 온 제안서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이 정도면 잘못 보낸 거 아닌가 싶은데.”

“왜?”

“아니. 이노스에서 한 작품 더하자고 연락이 와서.”

제안이 온 게 의아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홍경섭의 말에 어리둥절했다.

멀뚱거리며 자신을 바라보자 홍경섭이 자신의 머리를 툭 쳤다.

“이런. 내가 너무 밑도 끝도 없는 대답을 했네. 이노스에서 주연이 아니라 조연을 권해서 그래.”

민우가 턱을 쓰다듬었다.

좋은 배역이라면 단역인들 마다할까. 다만 문제는 민우의 몸값이다.

주연배우와 맞먹는 출연료를 조·단역에게 책정할 미친 제작사는 없을 테니까.

물론 주연보다 높은 몸값을 조연에게 지급하는 예도 있을 거다. 계약서상에 찍힌 돈은 당사자들만 알고 있으니까.

“잠시만 전화 통화 좀 해볼게.”

홍경섭도 의문이 가득한 건 민우와 같았기에 휴대폰을 들었다.

민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할리우드 쉽지 않네.”

이미 두 작품이나 주연으로 대박을 냈는데도 조연을 제안하다니.

도대체 얼마나 많은 작품으로 성공해야 하는 걸까.

착잡해지는 마음을 달래려는데 홍경섭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됐습니다. 끊습니다.”

거칠게 전화를 끊은 홍경섭이 다시금 이를 부득부득 갈아댔다.

“영구치는 조심해야지. 그러다 임플란트한다.”

“내 영구치가 문제야? 이 새끼들이 졸렬한 짓을 하려고 하는데.”

“졸렬한 짓?”

“주연배우가 타케시란다.”

“타케시? 잠깐만 어떤 사람인지 검색해보고 얘기하자.”

타케시 료헤이.

나이는 올해 35세.

일본을 대표하는 남자 배우다.

무명 시절을 오래 겪다가 신데렐라처럼 화려하게 날아올랐다.

어찌 보면 민우와 비슷한 경우라고 볼 수 있었다.

“음?”

민우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가 화려하게 부상하게 된 계기는 다름 아닌 혐한 발언을 한 이후다.

대놓고 하면 그건 미친놈이고, 타케시는 자신이 한국에서 살았던 것을 경험담으로 풀어냈다.

[한국에서의 10년은 터널을 지나는 것 같았다.]

실제로 그가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역겨운 내용이라 대충 살펴보면 일본에서 한국으로 넘어가 배우 생활을 해보려고 했다.

일본에서 무명이었던 배우가 한국에서 유명해질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 탓을 자신이 아니라 한국에 떠넘겼다.

시스템은 미개하고 재능이 넘치는 배우를 알아보는 눈도 부족하다. 그리고 결정적인 발언은 한국의 콘텐츠가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하다는 거다.

홍경섭도 같은 인터뷰를 보고 있었는지 혀를 찼다.

“이거 꼭 자기들 얘기하는 거 같은데. 갈라파고스의 대명사가 어딜.”

“대충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네. 그래서? 그 졸렬한 짓이 어떤 짓인데.”

“너를 조연으로 쓰고 싶대. 출연료는 타케시와 동급으로 주고. 인센티브도 동일. 출연료는 주연급으로 주겠다. 하지만 조연이지.”

“난 또 뭐라고.”

“이게 대수롭지 않은 일이야? 돈만 주고 너를 이용하겠다는 뜻이잖아. 화를 내야 정상아냐?”

“대수롭지 않지. 출연할 생각이 없으니까.”

“어?”

“내가 출연할까 말까 고민해야 대수로운 일인 거잖아. 나와 상관없는 일인데 과연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

“맞지, 맞지. 근데 뭔가 좀 이상해.”

“뭐가?”

“갑자기 일본인을 쓰겠다잖아. 그것도 주연으로. 제작비가 일본자금이 아닌 이상 할리우드에서 아무런 경력도 없는 사람을 쓸 리가 있나?”

“제작사 대표가 미국인이라며. 얼굴도 봤다지 않았어?”

“그러니까 이상하다는 거잖아. 언제는 동양인이 주연이라고 바꾸라고 날뛰더니 일본인을 쓰겠다고? 혹시 이노스가 일본 쪽인가?”

민우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럴 수도 있겠다. 대표는 바지사장이고.”

“어차피 우리랑 상관없는 일인데 뭐. 정중하게 거절할게.”

민우의 눈치를 살핀 홍경섭이 조심스레 물었다.

“휴식기를 가질 생각은 변함없는 거지?”

“응.”

“좋아. 기왕 쉬는 거 푹 쉬어라. 어디 여행이라도 가고.”

“너도 쉬엄쉬엄해. 또 쓰러지지 말고. 남자가 체력이 그렇게 약해서 장가나 가겠냐?”

“너보다 일찍 갈 거 같으니까 걱정하지 마시죠.”

“누가 먼저 가는지 내기할까?”

“어쭈? 나는 프러포즈만 하면 끝인데.”

“제수씨한테 일러줘야겠다.”

“아오, 이 고자질쟁이 자식! 뭐만 하면 이른데!”

홍경섭이 발끈해서 달려들자 민우는 킬킬거리며 도망쳤다.

한편, 민우의 거절 소식을 들은 이노치는 분노했다.

“이런 배은망덕한! 누구 덕분에 영화에 출연하고 많은 돈을 벌고 인기를 얻었는데!”

자신이 출연을 막았던 사실은 기억하지 못하는 그였다.

씨근덕거리던 그는 인터폰을 눌러 비서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번 영화의 인선은 최고로 구축하도록 해. 돈 같은 거 아끼지 말고.”

대주주의 의견을 거스를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직원들은 최선을 다해서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노치는 제작 방향을 퍼스트 러브로 잡았다.

민우가 할리우드에 얼굴을 알린 작품이기도 하고, 북미보다 아시아 쪽에서 크게 인기를 얻었으니.

이미 이정표가 있으니 그대로 따라가면 될 일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타케시의 외모가 발목을 잡았다.

35세의 나이인데 중년에 가까운 중후함이 그의 매력 포인트라 하이틴 영화는 애초에 불가능이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 로맨스다.

“퍼스트 러브도 내막을 들여다보면 로맨스에 가깝기는 하지.”

그렇게 애써 자기변명을 하며 선택에 수긍했다.

주연 여배우는 이노치의 강력 추천으로 루시 레이먼드가 우선순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를 제외한 모두가 반대하는 바람에 포기해야만 했다.

이번에도 차선책으로 캐스팅 한 여배우는 루지나 라일스.

루지나는 올해 30살이 된다. 미모가 대단하고 연기력도 출중한 편이다.

그녀가 요구한 출연료가 타케시보다 많았지만, 이노치는 수락했다.

현재 할리우드의 인지도는 타케시보다 루지나가 높았으니까.

대신 타케시가 알게 되면 문제가 될지도 모르기에 계약서에 적힌 내용을 밝히지 않는 것이 조건이었다.

감독은 콕스가 대두되었으나, 액션 영화가 아니면 반쪽짜리에 불과했기에 제외되었다.

물망에 오른 여러 감독 중에서 가장 먼저 연락한 사람은 더그였다.

퍼스트 러브의 연출이 너무 좋았기에 제안을 했다.

안타깝게도 더그는 다음 작품을 준비 중이라 정중하게 거절해왔다.

두 번째 제안을 보낸 감독 카일은 흔쾌히 수락했다.

이노치는 거듭 차선책만 선택되는 것이 심히 불쾌했다.

머리라도 식힐 겸 단골 바에 들렀다.

머리가 복잡할 때면 바텐더가 명쾌한 답을 내놓는 경우가 종종 있었던 탓이다.

사장인 바텐더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힌 적이 없다. 그랬기에 그저 작은 가게나 하나 운영하며 입에 풀칠한다고 알고 있다.

컵을 닦던 바텐더는 이노치가 돌려서 말하는 상황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뒤죽박죽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차선책만 쭉 선택되는 것도 길조입니다.”

바텐더도 무일푼으로 일본에서 미국으로 넘어와 체인점을 여럿 만든 사람이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재수 좋게 성공한 타입이다. 성공한 사람의 조언은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는 게 평소 지론이다.

그 덕분에 계속해서 성공할 수 있었던 거기도 하고.

바텐더가 괜찮다고 하니 왠지 모르게 속이 편해지는 느낌이다.

이노치는 다시 정력적으로 나서서 일을 진행했다.

일이 잘 풀리려는지 프리프로덕션은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총제작비 2억 달러.

타겟은 아시아다. 그래서 아시아 각 나라로 해외로케도 끼워 넣었다.

할리우드 영화의 촬영지가 자국이라면 그냥 넘기지 않고 볼 테니까.

2억 달러는 현재 이노치에게도 쉽지 않은 자금이었다.

크라임 타운의 성공으로 돈은 벌었지만, 세금과 기타 비용들을 제하면 그리 많은 돈도 아니다.

또 다른 투자자를 받을 것인가, 혼자 진행할 것인가. 쉽지 않은 고민이 들었다.

이노치는 다시금 펍을 찾았다.

바텐더는 이노치가 언제나 마시는 라임 한 조각을 띄운 진토닉을 앞에 내려놓았다. 단골손님이 술을 한 모금 넘기는 것을 보고 나서야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고민이 있으신가 봅니다.”

이노치가 놀라 바텐더를 바라봤다.

“어떻게 알았소?”

어떻게 알기는. 고민이 있을 때마다 들르니까 알지.

속으로 이노치를 비웃은 바텐더가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며 말했다.

“돈과 관련된 일이겠군요.”

“허어···.”

마치 자신의 속에 들어왔다 나온 것처럼 집어 내다보니 감탄성이 절로 나왔다.

바텐더는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로 컵을 닦았다.

노년에 가까운 나이의 남자가 고민이 있다면 그게 여자 문제겠는가? 돈 문제겠지.

게다가 얼마 전에도 들러서 돈과 관련된 분위기를 물씬 풍기지 않았던가.

이노치의 성격상 문제점은 우유부단하다는 거다. 그래서 과감하게 일을 진행하라고 조언을 해줬었다.

눈앞의 남자가 단골이 된 것을 보니 그 조언들은 지금까지 유효했을 것이다.

그래서 편한 마음으로 평소처럼 한마디를 해주었다.

“그냥 진행하십시오. 하지 않아서 후회하는 것보다 나을 겁니다.”

“그냥 진행하라···.”

“길조도 많지 않았습니까. 분명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마음을 굳힌 이노치는 쌈짓돈을 탈탈 털어 제작비를 맞춰냈다.

총 제작 기간 3개월.

제목은 ‘바다 너머 사랑’으로 결정했다.

퍼스트 러브의 가제에서 따온 것이다.

가을이 시작될 무렵, 실패하면 쪽박을 차게 될 영화가 크랭크 인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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