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 싸라! (187/223)

짐 싸라!

여행자 프로그램의 패널은 모두 5명을 섭외했다.

MC까지 포함하면 6명이다.

예능 프로그램이다 보니 입담이 좋은 연예인 3명과 작곡가 3명이었다.

진행을 맡은 전문 MC가 차분하게 룰을 설명했다.

“후보는 패널과 시청자가 힘을 합쳐서 선정하게 됩니다. 제작진이 정해놓은 후보군에서 선택하는 겁니다. 후보가 정해지면 SNS를 통해서 투표하게 되죠.”

“1주일 내내 투표를 할 수 있나요?”

“아뇨. 방송 중에만 투표를 할 수 있습니다. 투표를 한 분들은 추첨을 통해 상품을 드릴 예정입니다.”

아무런 이득도 생기지 않는데 투표를 할 사람은 없다.

그래서 황영수는 PPL을 했던 회사에 연락을 돌려 상품을 얻어 냈다.

어차피 광고도 되니까 회사도 마다하지 않았다.

준비된 상품만 모두 100개다.

이를 민우가 탈락할 때까지 뿌릴 ‘예정’이었다.

그러한 예정을 순식간에 틀어지게 만드는 변수가 발생했다.

방송이 나가는 동안 SNS를 확인하던 스탭들은 모두 혀를 내둘렀다.

방송 중반인데 이미 투표한 사람이 천만 명을 훌쩍 넘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라 방송이 끝날 무렵에는 2천만 표에 이르렀다.

대한민국 인구는 5천만이다.

2천만 표면 대한민국 인구의 40%에 육박한다.

너무 어리거나 고령이라 투표를 할 수 없는 사람을 빼면 모두가 투표했다는 볼 수도 있다.

투표뿐만 아니라 시청률도 대박이 터졌다.

파일럿 방송때부터 PPL을 넣었던 기업의 매출도 상승곡선을 그렸다.

다양한 기업에서 PPL 문의가 들어 오니까 앞으로의 제작비는 걱정 없고, 출연자를 선정하는 일도 순항이었다.

시청률 높은 프로그램을 마다할 연예인은 없다.

비록 몸은 좀 고생하게 될지라도 인지도가 확 달라지니까.

비밀리에 접선하는 연예인들 모두 긍정적인 시그널을 보냈다.

물론 모두가 스케줄이 있어서 출연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는 게 어디인가.

그것도 얼굴을 가리고 출연해야 하는데.

호재가 연달아 이어졌지만, 상품을 보낼 때 악재가 터져버렸다.

추첨하고 SNS 아이디를 확인했더니 외국인이었다.

투표할 때는 표만 집계됐기에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보고를 받은 황영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미리 걸렀어야지.”

“어휴. 이천만 표에 가까웠어요. 그걸 일일이 확인해서 외국인을 거르고 추첨을 하라고요?”

작가가 눈을 부라리며 불길을 토해내자 황영수는 헛기침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상황이니까.

“우리가 외국에 방송하는 것도 아닌데 도대체 어떻게 본 거야?”

“해적방송 사이트가 한둘인가요.”

“그래서 어느 나라 사람이 추첨에 뽑혔는데?”

“그냥 골고루 있어요. 동남아시아 유럽, 아메리카 등등.”

“어쩐지 투표한 사람이 너무 많다 했다. 그나저나 상품도 문제네.”

상품을 지원받은 건 모두 100개였다.

1회에 20개씩 선물을 보내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투표자가 이천만 명이다.

그중 외국인이 절반 이상이고.

이 사실을 한국인이 알게 된다면 분명 뒷말이 나올 게 분명했다.

“이거 참 난감하네.”

혀를 끌끌 차는 황영수에게 공영희가 물었다.

“어떻게 하죠 선배님?”

“뭘 어떡해? 상품은 보내줘야지. 한국인만 선물을 받는 것도 이상하잖아.”

“그게 아니라 앞으로 투표 말이에요. 만약 민우 씨가 후보에 오르면···.”

“거기서 끝이겠지.”

한국의 연예인들에 관해 잘 모르는 이들이다.

가수인지 배우인지 이역만리 나라의 연예인인데 알게 뭔가.

민우가 후보에 오르면 외국인은 몰표를 던질 거다.

다양한 예능으로 얼굴을 알린데다가 민우가 확실하게 만능 엔터테이너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니까.

민우가 후보에서 떨어진 덕분에 첫 회 만에 정체가 밝혀지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민우의 다음 타자를 섭외해서 지금 촬영 중이기는 하다.

B팀을 보내서 촬영하고 황영수는 한국에서 편집을 하는 중이다.

원래라면 B팀에 공영희가 가야 했지만 그녀는 거절하고 편집에 더 힘을 주고 있었다.

그렇다고 민우가 후보에 올랐는데 뺄 수도 없다. 그거야말로 조작방송을 하는 격이니까.

“투표하는 SNS를 우리 방송국 사이트로 바꿀까요?”

“그럼 회원가입을 해야 하잖아. 그것부터가 벌써 진입장벽을 세우는 거야.”

“ARS는요?”

“나쁘지는 않은데···.”

문자 투표 같은 경우 보통 유료로 진행한다.

한 통에 100원씩인데 대략 이통사와 문자 집계업체가 각각 30%, 방송국이 40%를 가진다.

문제는 유료라는 점이다.

이에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은 분명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우려에 공영희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럼 문자 투표를 무료로 하죠.”

“장난해? 천만 명이 투표하면 우리는 빼더라도 분배해줘야 할 돈만 6억···.”

벌컥 화를 내다가 멈칫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그냥 던져 본 거예요. 브레인스토밍 몰라요? 누가 옛날 사람 아니랄까 봐.”

“잠깐만 조용히 있어 봐.”

아이디어 뱅크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황영수의 심상치 않은 기색에 공영희가 입을 다물었다.

황영수는 재빨리 A4용지 하나를 꺼내 뭔가를 휘갈겨 썼다.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쏟아내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다.

적기를 마친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후다닥 달려갔다.

“선배! 어디 가요!”

그녀의 물음에 대답해줄 여유가 없다.

황영수는 곧바로 국장실로 쳐들어갔다.

“국장님!”

“너는 노크도 할 줄 모르냐?”

“우리 사이에 노크는 무슨.”

“우리 사이가 뭐? 연인이라도 되냐? 그리고 친한 사이일수록 지킬 건 지켜야지.”

“다음부터 꼭 지킬게요.”

“어휴. 내가 앓느니 죽지. 무슨 용건인데 급하게 쳐들어온 거야?”

황영수는 국장의 책상 위에 방금 작성을 마친 A4용지를 내려놨다.

“우리 프로그램에 투자 좀 하시죠.”

“응? 투자?”

여행자는 제작비가 크게 들지 않는다.

PPL은 엄청난 수익을 가져다줬고, 광고비도 빵빵하다.

투자를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갑자기 제작비를 내놓으라니까 의아한 것이다.

“얼마나.”

“모릅니다.”

“뭐?”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종이를 툭툭 두드렸다.

“읽어 보시면 알 겁니다.”

종이를 집어 들고 한동안 내용을 읽던 국장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니까 SNS로 투표를 하면 강민우의 정체가 바로 밝혀지게 될 테니까 ARS로 하자? 유료도 아니고 무료로?”

“네.”

“네가 말 한 투자금은 무료 ARS로 인해서 업체에 분배해야 할 돈이고?”

“정확하십니다.”

국장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사실 연예인 한 명 때문에 불필요한 지출을 하는 것은 반대 입장이다.

게다가 출연료도 엄청나게 쥐여줬지 않은가.

그런데 그 연예인이 강민우다.

이미 PBS에서 강민우의 덕을 꽤 많이 봤다. 그와 척져서 좋을 일은 하나도 없다. 이참에 좋은 이미지를 심어두면 나쁠 것 같지도 않고.

“투표는 몇 명 정도 예상해?”

이게 핵심이다. SNS처럼 2천만 명이 무료로 투표해버리면 분배해야 할 금액만 12억이 넘을 테니까 한방에 적자다.

“제가 이통사랑 문자 집계업체와 조율해보겠습니다.”

얼마인지 말은 하지 않았다. 황영수도 예상 불가였으니까.

국장은 책상을 검지로 툭툭 두드렸다.

ARS 투표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자주 사용한다.

제법 시청률이 나오는 프로그램도 투표는 200만 수준이었다. 대략 2억 원에 60%면 1억 2천.

계산을 마친 국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해봐. 설마 쪽박 차기야 하겠냐?”

이 소식을 민우도 들었다.

자신을 위해서 룰 자체를 바꾸려 한다는데 어찌 가만히 보고만 있겠는가.

“그럼 제가 절반을 부담하겠습니다.”

어마어마한 출연료를 받았으므로 그 정도는 무리 없다.

황영수는 양손을 내저었다.

“아뇨, 아뇨.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전화 통화로 미리 조율을 좀 했는데 기존의 30%가 아니라 15%에 해주기로 했어요. 이제 만나서 계약서에 사인만 하면 됩니다.”

SNS 투표에 2천만 표가 몰렸다는 것을 어필한 덕분이었다.

그중 10%만 ARS 투표에 참여해도 200만이다. 게다가 기존의 ARS처럼 유료가 아니라 무료라면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하게 될 거고.

대충 300만 정도면 30%를 받던 때와 같다.

시청률도 잘 나오는 프로그램이니까 그들도 손해를 감수하고 끼어든 것이다.

민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 때문에 고생이 많으시네요.”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솔직히 저희도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는데요. 외국인이라니.”

그들이 상품도 받았다는 후기가 인터넷에 퍼지면 더 많은 외국인이 투표하게 될 거다.

그러면 그들에 의해서 방송이 좌지우지되어버린다.

절대적으로 많은 표를 가진 쪽이 외국인이니까.

그들이 한국의 연예인 사정에 밝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투표의 의미가 퇴색되고 만다.

“근데 갑자기 투표의 방법을 바꾸면 말이 나오게 될 텐데요. 특히 외국인은 투표할 수 없게 되니까 더더욱.”

“어쩔 수 없죠. 그건 감수하는 수밖에.”

민우는 턱을 툭툭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민우가 입을 열었다.

“이건 어떨까요? SNS로는 짧은 감상 후기를 받는 겁니다. 역시 이들도 추첨해서 선물을 준다면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요. 비중을 두자면 ARS와 SNS 모두 절반씩.”

듣고 보니 좋은 아이디어다.

SNS도 놓치지 않고 투표의 방향도 자연스럽게 ARS로 넘어갈 수 있다.

“투표와 후기를 함께 한다면 추첨에 뽑힐 확률도 올라갈 테고요.”

무작위로 뽑아서 후기가 후기답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선택하면 된다.

“좋은 아이디어 같습니다. 그렇게 진행하도록 하죠.”

2회에서는 투표를 ARS로 바꿨다.

무료 ARS였기에 SNS에서 투표했던 한국인 대부분은 문자 투표에 참여했다.

공영희가 기겁했다.

“400만 넘었는데요.”

SNS는 폭주상태고, ARS 투표 숫자도 미친 듯이 올라가고 있었다.

홍경섭은 민우와 함께 TV를 보고 있다가 연락을 받았다.

-시청률 30%에 ARS 투표만 500만입니다. 이야, 이거 ARS 투표는 기록을 세웠네요.

“근데 괜찮은가요?”

홍경섭도 들었다.

문자 투표 한 번에 30원의 지출이 생긴다는 것을.

지금 상황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감을 잡기 힘들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죠. 하하.

어색한 웃음을 흘리는 황영수였다.

통화를 끝낸 홍경섭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500만이라. 유료 투표였으면 수입 장난 아니었겠는데.”

“그럼 투표하는 사람이 절반 정도로 줄었겠지.”

“근데 투표가 중요해?”

홍경섭의 물음에 민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다 시청률이랑 연결되는 거잖아. 솔직히 시청률이 정확한 건 또 아니고.”

미국은 시청 수로 조사하는 반면 한국은 시청률 측정 기구를 표본 가구에 설치하고 시청 정보를 수집하는 방식이다.

ARS 투표는 시청 수를 단번에 확인할 수 있다.

“방송국은 괜찮으려나? 500만이면 1억 5천인데.”

“그 정도는 충분할 거야. 아마 광고 단가도 훌쩍 뛰었을걸?”

민우의 말대로 출혈을 예상했던 국장은 오히려 더 많은 수입을 거두게 되자 황영수 팀에게 금일봉을 내렸다.

예정에 없던 보너스를 받게 된 황영수 팀은 그날 회식도 했다.

2회, 3회.

회가 거듭할수록 유력한 후보가 떨어졌다. 슬슬 민우가 맞는 것 같다는 의견이 대세가 되었다.

“이대로면 4회에 정체가 밝혀질 것 같은데.”

홍경섭은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1회 출연료만 20억이다.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한동안 고민하던 그에게 영어로 된 메일이 날아왔다.

메일을 확인한 홍경섭의 눈이 확 커졌다.

후다닥 휴대폰을 쥔 그가 민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민우야! 미국 가야겠다! 짐 싸라!”

홍경섭이 켜 놓은 메일에는 퍼스트 러브의 주연인 민우를 오스카 시상식에 초대한다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그것도 주연상 후보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