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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탈 등장 (184/223)

토끼 탈 등장

살의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번들거리는 눈빛에 루크는 오금이 저렸다.

짐승의 노린내가 코끝에서 느껴지는 것 같다.

입가에 머문 미소는 흡족한 포식자의 여유다.

이대로 있다가는 잡아 먹힌다.

위기의식을 느낀 루크는 목숨줄과도 마찬가지인 가방을 상대의 얼굴에 힘차게 던졌다.

퍽!

순간 루크는 달렸다. 전력을 다해서 달렸다.

뒤에서 짐승이 쫓아오고 있다. 잡히면 죽는다. 잡히지 않으려면 도망쳐야 한다.

이대로 맞고 기절해줬으면 좋으련만, 상대는 괴물이다.

모든 상황을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행동하고 있었다.

이곳으로 도망친 것도 마찬가지.

마치 거미줄에 걸린 것처럼 그 어떤 짓을 하더라도 놈에게서 빠져나갈 수 없었다.

가까스로 자동차에 도착했다.

까만색 무스탕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안도감이 들었다.

이대로 차를 타고 멀리 떠나버리면 어떻게 자신을 잡을 것인가.

이 마을에서 멀쩡한 차량은 이것뿐인데.

그래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서둘러 자동차의 문을 잡았다.

덜컥, 덜컥.

“분명 잠그지 않았는데.”

당황한 그가 주머니에서 자동차 키를 꺼냈다. 아니, 꺼내려 했다.

“뭐야? 키가 어디 갔어?”

신체 여기저기를 더듬어 봐도 없는 키가 솟아날 리가 없다.

처벅, 처벅.

피로 흠뻑 젖은 짐승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안색이 해쓱해진 루크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Fuck!”

그제야 키를 차에 넣어두고 내렸다는 게 떠올랐다.

주변을 둘러봤다. 평소 굴러다니던 돌멩이 하나 보이지 않는다.

결국 루크는 팔꿈치를 크게 휘둘러 차량 유리를 깨버렸다.

팔꿈치에서 끔찍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지체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몸을 던지듯 운전석에 앉은 그가 시동이 걸리자마자 악셀을 힘차게 밟았다.

부아앙!

굉음과 함께 자동차가 튀어 나갔다.

느긋하게 도착한 민우가 멀어지는 차를 보며 혀를 찼다.

“이런. 가스가 얼마 없을 텐데.”

언제나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준다.

지금도 그렇다.

자동차는 안전하지만, 가스를 빼버렸다.

조금만 주위를 둘러봤다면 키가 꽂혀있는 오토바이를 볼 수 있었을 게다.

자동차보다 오토바이가 더 위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스는 가득 차 있다.

지금 처한 상황은 얼마 못 가 멈춰버릴 자동차보다 오토바이가 더 안전하다.

흥, 흥흥.

콧노래를 부른 민우가 오토바이에 올랐다.

부르르릉, 시동이 걸리고.

부아앙! 굉음과 함께 오토바이가 쏘아져 나갔다.

“오케이!”

러셀의 외침에 터질 것 같던 현장의 긴장감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도로변으로 쭉 달렸던 민우가 되돌아왔다.

부르르릉.

오토바이를 세우고 시동을 끄는 민우에게 러셀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강. 이번에는 스턴트 쓰는 게 어때?”

정중한 단어만 사용하던 러셀은 그간 친해진 덕분에 민우를 친근하게 대하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우려할 법도 했다.

민우는 위험한 액션도 마다하지 않았으니까.

컴퓨터 프로그램의 발달은 영화 촬영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몸값 비싼 배우가 위험한 컷을 찍을 필요가 없다. 스턴트 배우의 얼굴에 배우의 얼굴을 합성하면 그만이니까.

그뿐만 아니라 화면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것을 CG 처리 한다.

예전에는 창문을 설탕 유리로 채우고 몸을 던져 깼다면, 이제는 그것도 CG로 만들어낸다.

방금 루크가 깨버린 차량 유리처럼.

혹여나 스탭이 헷갈려서 실제 유리가 있을 걱정도 없다.

거의 모든 배우가 스턴트 배우의 도움을 받았지만, 일부 유명 배우는 직접 액션을 소화하기도 한다.

그중에는 민우도 있었다.

할리우드 영화라서 직접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 있을 때부터 그랬다.

민우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위험한 일은 스턴트 배우에게도 위험한 법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그들은 전문적으로 액션을 배웠지 않나.”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오래전에는 스턴트 배우가 실제로 목숨을 걸고 액션을 찍었다고 한다.

민우도 그랬다. 한때 죽어도 부활하던 시절이 있었다. 부활이라기보다는 시간이 되돌려지던 때지만.

아무튼 그때는 미친놈처럼 액션 연기에 매달렸었다.

사실 까놓고 말해서 민우보다 더 스턴트 연기를 잘 할 수 있는 배우는 지구상에 없다고 봐도 좋을 거다.

진짜로 목숨을 내놓고 액션을 몸에 새겼으니까. 게다가 투자한 시간 자체도 차원이 다르다.

어깨를 으쓱한 민우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냥 추격하는 컷인데 위험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디 사고가 예고하고 난다던가? 아차 하는 순간 나는 게지. 어휴. 이럴 줄 알았다면 그냥 스튜디오에서 촬영하는 건데.”

매번 이렇게 투덜거리지만 민우를 말릴 수 없었다.

그간 민우가 보여준 게 없었다면 강제로라도 스턴트 배우를 투입했을 거다.

치익.

-배우 교체 끝났습니다.

러셀이 한숨과 함께 민우의 어깨를 툭 쳤다.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

“걱정하지 마세요. 시사회 때 병원이 아니라 영화관에 있고 싶으니까.”

민우의 농담에 픽, 하고 실소를 터트린 러셀이 카메라로 자리를 옮겼다.

“스탠바이!”

카메라를 비롯한 음향과 각종 사항의 체크가 끝나자.

“액션!”

러셀의 외침에 민우가 스로틀을 당겼다.

부아앙!

* * *

최대한 마을에서 멀어져야 하는데 가스가 먼저 떨어졌다.

항상 절반 이상 채워두는데 어째서 오늘은 이 모양인지.

“Fuck! Fuck! Fuck!”

루크는 운전대를 내려치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주저앉아 있다가는 금방 짐승이 쫓아올 거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마을에서 10마일 정도 떨어졌다는 점.

10마일이면 킬로미터로 환산하면 16Km가량 된다.

마을에 더는 자동차가 없으니 걸어서 쫓아오기에는 먼 거리다.

이 정도 거리라면 한숨 돌릴 정도는 충분할 것이다.

자동차에서 내린 루크가 품속에서 담배를 꺼냈다.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이려는 찰나.

부아아앙!

저 멀리서 굉음과 함께 불빛이 번쩍거렸다.

“오토바이?”

불안한 예감이 뇌리를 잠식했다.

담배를 내팽개치고 달렸다.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은 하지 않았다. 몸을 숨길만 한 잡목이 있는 곳은 한 방향뿐이었으니까.

루크가 도망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민우가 도착했다.

멋들어지게 오토바이를 세운 그가 주위를 둘러봤다.

10마일가량을 갈 수 있을 정도만 가스를 남겨뒀다.

이곳에서 그가 도망칠 곳은 한군데뿐이다.

반대쪽은 아무런 장애물도 없어 그저 눈만 돌리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만약 저곳으로 도망쳤다면 네 승리고.”

피식 웃은 민우가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한 곳은 루크에게는 안타깝게도 잡목이 있는 방향이었다.

“허억, 허억, 허억!”

거친 숨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달렸다.

갑자기 튀어나온 나뭇가지가 얼굴을 후려쳐도 멈추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총이라도 준비해둘 걸 그랬다.

사냥감이 총을 뺏을지도 몰라 모조리 치워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에드가는 칼을 기가 막히게 썼다.

그에게는 급소가 어디 있는지 훤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메스처럼 보이는 짧은 칼로 찌르는 족족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그리고는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것처럼 자신이 저지른 일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마치 상상하던 풍경이 실제로 눈 앞에 펼쳐지자 감격하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소름 끼치는 자식!”

이렇게 욕이라도 하지 않으면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한참을 달리던 루크는 멈춰 섰다. 그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젠장···.”

어느새 잡목 숲이 사라지고 눈앞으로 지평선이 펼쳐져 있었다.

사박, 사박.

저 멀리서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히 놈일 것이다. 그러니 반대로 돌아갈 수도 없다.

루크는 달렸다.

살아남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서.

* * *

민우의 영화 촬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였다.

“끝났다!”

편집실에서 먹고 자던 황영수가 양손을 번쩍 들었다.

옆에서 잠깐 졸던 공영희가 화들짝 깨어났다. 입가에 묻은 침을 쓱 닦아 내고 비몽사몽 헤매며 물었다.

“끝났어요?”

“그래. 이제 방송만 하면 돼.”

KCSI와의 협상도 순조롭다고 들었다.

비록 재방송이지만 고작 하루 차이로 KCSI에 방송된다.

첫 메인 PD를 맡은 작품에서 이 정도의 성과를 이룬 것은 PBS 방송국 사상 황영수가 처음이다.

그로 인해 이미 방송국 내에서 화제의 인물이다.

공영희가 하품을 하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잘됐네요.”

“잘됐지!”

“이제 집에 갈 수 있으니까.”

“······.”

공영희는 황영수에게 이를 갈았다. 다시는 황영수와 함께 프로그램을 찍지 않겠다는 다짐도 했다.

완벽주의자? 듣기에 따라서 멋진 단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 겪어보니 자신의 상상과 전혀 다르다.

“지나가던 개나 주라지.”

“뭐?”

“아뇨. 혼잣말.”

지은 죄가 있다 보니 황영수는 공영희의 살기 어린 눈빛을 슬그머니 피해버렸다.

사실 그간 찍었던 분량을 압축하는 게 무리기는 했다.

일주일에 2번씩 촬영했음에도 불구하고 분량은 넘쳐났으니까. 그걸 쳐내고 쳐내서 가까스로 완성한 거다.

무려 한 달 동안.

이번 봄 개편 때 방송하려다 보니 일정이 빠듯해져 버렸다.

사실 가장 큰 원인은 황영수였다.

예정과 달리 미국에서 촬영하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게다가 일주일에 2회 촬영. 한 달 동안 8번의 촬영을 했다.

이 정도라면 예능프로 하나를 통으로 촬영했을 기간이다.

그러다 보니 도저히 뺄 게 없을 정도로 분량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그래서 황영수는 편집을 하던 와중 머리를 썼다.

파일럿 프로그램은 따로 만들기로.

미국에서 촬영한 것 중 중요한 부분은 모조리 빼내서 따로 편집했다.

민우의 별채에서 편집점을 미리 체크해두지 않았다면 더 오래 걸렸을지도 모른다.

파일럿 프로그램이 정규편성 되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황영수는 자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봄 개편 일주일을 앞두고 편집이 끝나서.”

“그간 고생한 덕분에 우리 한 달은 널널하게 꿀빨 수 있다.”

“꿀 안 빨아도 되니까 앞으로 한 달간 널널하게 일하면 안 됐을까요?”

“크흠.”

핵심을 찌르는 질문에 헛기침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한 달은 일하지 않아도 월급도 나올 테고, 좋네요.”

황영수의 눈동자가 또르륵 굴러갔다.

솔직히 일하지 않는 건 아니다.

다음 연예인과 촬영지도 섭외해야 하고, 예산도 짜야 하고, 큐시트에 기타 등등.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사실 봄 개편이 되기 전에 일을 끝내려고 했다. 그러나 눈치를 보아하니 당장 그랬다가는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르겠다.

어쩔 수 없이 황영수는 인심 쓰듯 선언했다.

“닷새간 휴가 가자.”

휴가라는 말에 공영희가 펄쩍 뛰었다.

“정말요? 그럼 출근 안 해도 돼요?”

“···출근은 해야 하지 않을까?”

“그게 무슨 휴가야.”

“은근슬쩍 반말하지 말고. 출근해서 아무것도 안 하고 놀면 그것도 휴가지.”

“네네. 그렇다고 치죠. 끝났으니까 저는 먼저 나가볼게요.”

공영희가 편집실을 나갔지만, 황영수는 자신이 편집을 마친 것을 다시금 틀어봤다.

정체가 밝혀질 만한 그 어떤 사소한 것도 놓칠 수 없다.

그렇게 눈이 빠져라 세 번을 더 확인하고 나서야 황영수도 편집실을 나섰다.

시간은 흐른다.

개편을 위한 파일럿 프로그램은 보통 명절 특집으로 방송된다.

민우가 촬영했던 예능은 ‘여행자’라는 임시 제목으로 설날 방송되었다.

이때는 민우도 영화 촬영을 끝내고 명절을 보내기 위해 귀국한 상태라 가족과 함께 TV로 볼 수 있었다.

“어? 이거 재미있겠다.”

프로 연기자인 민우가 어설픈 대사와 함께 PBS 채널에 멈췄다.

“새로 시작하는 프로그램이야?”

“아니. 파일럿 프로 같은데.”

“그게 뭔데. 비행기 조종사가 나오는 거야?”

강민아의 말에 민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거 농담이지?”

“재미없어?”

“어휴. 너는 그래서 시집이나 가겠냐.”

“여기서 결혼 이야기가 왜 나와? 그러는 오빠가 먼저 장가가야 내가 결혼하지 않을까?”

“요즘 세상에 누가 순서 지켜서 결혼하냐. 먼저 가. 상대가 있을지 의문이지만.”

“이거 왜 이러셔? 만나는 사람 있거든?”

“갑자기 처남 될 사람이 불쌍해진다.”

“거기서 그만하는 게 좋을걸.”

스산한 강민아의 말에 민우는 입을 다물었다.

하필 TV에서 나오는 CF는 민우가 찍은 자동차다.

“저 회사는 주식 안 떨어졌나 몰라.”

CF를 두고 슬쩍 돌려 깐다. 함께 한세월이 얼만데 그런 걸 모르겠는가.

“검색해봐. 판매량 10% 늘어서 주식도 올랐으니까.”

“······.”

놀랍게도 ‘여행자’가 시작되기 전에 방송된 CF 중 절반이 민우의 것이다.

“오빠 CF 몇 개나 찍은 거야?”

“모르겠다. 하도 정신없이 스케줄을 소화해서.”

빡빡하게 굴린 홍경섭도 대단하고, 그 스케줄이 들어오도록 만든 민우도 대단하다.

혀를 내두르며 TV에 시선을 집중하던 강민아가 화면이 암전 되자 자세를 고쳐 앉았다.

TV 한가득 ‘여행자’라는 글자가 떠오르고.

지이이잉-!

일렉기타의 굉음이 스피커를 뚫고 강민아를 덮쳤다.

그리고 화면에 나타났다.

토끼 탈을 쓴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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