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예능을
옆에는 홍경섭으로 예상되는 남자가 곰 탈을 쓰고 서 있었다.
대충 체형을 봐서는 틀림없어 보였다.
“나까지 이게 무슨 꼴인지···.”
“네 얼굴을 아는 사람도 있으니까 어쩔 수 없어.”
“이러고 비행기를 탈 수 있냐? 어림도 없지.”
“그래서 탈속에 마스크를 쓰라고 했잖아. 오프닝은 찍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어.”
홍경섭은 툴툴거리기는 했지만 민우의 말이 맞는지라 입맛만 다셔야 했다.
이런 상황이 꺼려졌다면 민우를 따라나서지 말아야 했다.
회사에 직원은 많아졌지만, 민우는 자신이 꼭 챙기고 싶었다.
쓸데없는 생각이지만 그게 민우에게 보답을 하는 거라고 믿기도 했고.
황영수가 민우를 보며 감탄했다.
“준비가 철저하시네요.”
“정체를 확실하게 숨겨야 하니까요.”
사실 인형 탈까지는 생각지 않았다. 그냥 꽁꽁 싸매고 나와도 충분했으니.
그런데 민우를 보니 이게 오히려 더 그림이 살 것 같다.
황영수가 VJ에게 손짓했다. 카메라를 세팅하고 짧은 촬영 준비를 서둘렀다.
평일의 공항이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제법 된다.
최근 개인 방송도 늘어서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도 많지만, 이상한 컨셉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도 적지 않다.
생각이 짧았음을 자책한 황영수가 난처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오프닝을 다른 곳에서 할 걸 그랬나 봅니다.”
“어쩔 수 없죠. 외국이 촬영지라는 것을 알리기에는 공항보다 좋은 장소는 없을 것 같으니까요. 제가 당분간 입국할 수 없으니까 지금 찍어야 하고요.”
민우의 위로에 힘을 얻은 황영수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촬영을 시작해볼까요?”
공항을 배경으로 간단한 인터뷰를 할 예정이다. 목소리는 차후 편집과정에서 변조할 예정이고.
질문은 황영수가 하기로 했다. 다른 제작진은 너도나도 거절해서 어쩔 수 없이 최종 책임자인 그가 총대를 멨다.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한 황영수가 목소리를 깔고 물었다.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풉!”
여자 작가가 큐시트로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트렸다.
황영수가 눈을 부라리자 순식간에 웃음이 사라졌다.
어차피 편집하면 그만이므로 민우는 개의치 않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안녕하십니까, 이상한 나라의 토끼입니다.”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이번에는 홍경섭이 큽, 하고 웃음을 삼켰다.
민우가 토끼 탈 속에서 눈살을 찌푸리더니 홍경섭을 가리켰다.
“이쪽은 벌꿀 노리는 곰이고요.”
“나?”
“네, 너요.”
졸지에 방송에 출연하게 생긴 홍경섭이 당황했다.
의외의 사태가 발생했음에도 황영수는 매끄럽게 대처했다.
어차피 이 예능의 주인공은 민우다. 주인공의 사고가 흘러가는 대로 진행하면 될 뿐이다.
물론, 촬영본을 확인한 후 못쓰겠다 싶을 때는 편집하면 그만이고.
“지금 여기는 어디입니까?”
민우는 기왕 컨셉을 잡은 상황이니 끝까지 밀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생울타리 밑의 토끼굴입니다.”
황영수는 재빨리 메모장을 펼쳤다.
[주변에 조경수로 만든 울타리 CG를 만들 것.]
그러고는 홍경섭을 슬쩍 바라봤다.
괜히 조금 떨어져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홍 대표님 근처에는 꿀통.]
어설픈 CG가 오히려 웃음 포인트가 될 거다.
메모를 마친 그가 다시 질문을 이어나갔다. 현재 심경이라거나 각오와 같은 뻔한 질문들이 주를 이뤘다.
몇 가지 간단한 질문이 끝나자 입국 수속을 시작했다.
민우와 홍경섭은 인형 탈을 벗었다. 안에는 마스크까지 쓰고 있는 치밀함을 보였다.
재빨리 선글라스를 끼고, 모자까지 씀으로써 정체를 가렸다.
행인 몇 명이 의문을 품고 바라보기는 했지만 민우라고 확신하지는 못할 거다.
입국 수속을 마친 일행은 하늘을 날아 미국으로 향했다.
이 모습을 구경하고 있던 한사람이 인터넷 사이트에 글을 올렸다.
제목 : 공항에서 촬영하는 거 본 썰.
인형 탈 쓰고 인터뷰 같은 거 하고 비행기 타러 감.
키가 무척 큼.
혹시 몰라서 사진도 찍었음.
나는 왠지 강민우 같다고 생각함. 왜냐하면 걷는 모습이 드라마에서 보던 것과 너무 비슷해서.
└강민우가 뭐하러 인형 탈을 쓰냐?
└맞음. 지금 S급 연예인이잖아. 인형 탈은 신인들이나 쓰는 거지.
└팩트) 지금 최고의 MC도 신인 때는 개미 탈 썼음.
└그리고 키가 커 보이는 건 인형 탈 때문이겠지. 네가 키가 커 보이는 것처럼.
└이눔, , , 쉬키, , , 머리, , , 큰 거로, , , 놀리는 거, , , 아니다, , , 천벌, , , 받는다.
└아 쉼표 빌런 더럽게 짜증 나네! 왜 글자를 읽는 데 숨이 막히는 건데!
잠깐 반짝했던 논란은 이내 사그라들었다.
가장 큰 이유로 민우가 인형 탈을 쓸 리가 없다는 거였다.
어디 개인 방송의 BJ가 어그로 끄는 거라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그리고 명품을 둘둘 말고 다녀도 이상하지 않을 톱스타가 한국의 중견 회사 옷을 입고 있다는 것도 지적됐고.
할 일 없었던 어느 한 네티즌은 글에 첨부된 여러 장의 사진을 분석해서 상표 가린 다양한 제품들이 어떤 건지를 알아냈다.
이로 인해 가성비 좋은 제품 같은 경우 예능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매출이 오르는 현상이 발생했다.
회사 차원에서는 이런 상황마저 흡족했다.
방송이 시작되면 과연 얼마나 매출이 폭발하게 될까.
이러한 기대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 * *
무시무시한 집중력을 발휘한 제이콥은 한 달 만에 시나리오 수정을 끝내버렸다.
주인공을 바꾼다는 것은 주춧돌을 빼서 다른 것으로 교체한다는 뜻이다.
집을 지을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주춧돌을 놓는 것이니, 주춧돌을 뽑는다는 것은 집을 다시 짓는다는 말과 같다.
시나리오를 받아 든 로이드는 광기 어린 제이콥의 집착에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내용도 흠잡을 곳 없다.
주인공의 인종은 아시아인. 외모 묘사도 민우가 연상됐고, 그가 세트장에서 보였던 연기가 시나리오에 녹아있었다.
로이드는 티끌 같은 트집이라도 잡아 보려고 시나리오를 샅샅이 살펴봤지만 사소한 오류조차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미처 생각지도 못하고 지나쳤던 부분까지도 이번 시나리오에 추가해버렸다.
내용마저 풍성해져 버렸으니 거절할 명분조차 없게 됐다.
시나리오를 끝까지 읽은 로이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졌습니다. 시나리오도 이전보다 나아졌으니 더는 반대할 이유도 없겠군요.”
작가와 감독은 어차피 같은 생각이었고, 제작사마저 손을 들었다.
캐스팅은 급물살을 타고 진행되었다.
에드가 롤랑에 민우. 루크역에는 앤드류, 그리고 에드가의 조력자 겸 연인으로 애나가 확정됐다. 애나의 작전이 통하는 순간이었다.
세트장 오디션에서 마음에 쏙 드는 연기를 선보였던 배우는 모두 뽑혔다.
그리고 오디션 결과가 민우에게 알려진 것은 그가 미국으로 와서 예능 프로그램 촬영을 막 시작할 참이었다.
제작진은 미국에 입국한 후 민우의 집에 머무르는 중이다.
어차피 방도 충분하니까 쓸데없는 곳에 돈 쓰지 말라는 배려였다.
민우의 집에는 별채 하나가 따로 있었는데, 그곳을 깨끗하게 정리해서 제작진에게 내주었다.
그리고 촬영 계획을 모두 짜두고 실행에 옮기려는 찰나, 기쁨에 찬 러셀의 연락을 받은 것이다.
“이거 참. 어쩌죠?”
홍경섭의 난처한 물음에 황영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저희는 괜찮아요. 어차피 예상했던 일이 벌어진 것뿐이니까. 근데 괜찮겠어요?”
“민우요?”
“네. 그때 말씀하시기로는 이틀의 휴식 시간에 예능 촬영을 하신다고 들었는데.”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촬영은 고된 일이다. 몸을 써야 하고 감정 소모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홍경섭이 엄지로 민우를 슬쩍 가리켰다.
“보시다시피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것 같은데요.”
그곳에는 새벽같이 일어나 조깅을 하고 돌아오는 민우가 있었다.
“체력은 짐승 같은 놈이라. 거기다 본인이 강력하게 원하기도 하고.”
황영수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리고 말았다.
그가 관찰한 민우는 자기관리에 철저한 사람이었다.
시간표를 짜두고 생활하는 건 아닐까 의심될 정도다.
흔히 외국에 가면 시차 적응을 하지 못해 잠을 설치기 마련이다.
민우는 그런 것도 없다. 비행기에서 수면시간을 조절하며 시차 적응을 끝내버렸으니까.
“모두가 괜찮다니까 계획대로 하죠. 시간만 보내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짬이 날 때마다 촬영을 해둬야 한다. 분량이 많으면 많을수록 편집을 할 때 여유로워지는 법이니까.
긴장으로 얼굴을 굳힌 황영수가 민우에게 물었다.
“이제부터 리얼입니다. 다시 한번 여쭤볼게요. 괜찮겠습니까?”
“네.”
“돈을 벌지 못하면 박스 깔고 길바닥에서 자야 할지도 몰라요. 영화 촬영도 하셔야 하는데 제대로 된 휴식도 취하지 못하면···.”
“걱정 붙들어 매세요.”
민우의 눈이 밝게 빛났다.
“굶지 않을 자신은 있으니까.”
준비를 마친 민우와 홍경섭, 그리고 제작진 일부는 먼저 산타모니카로 출발했다.
허가는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받아뒀기에 가서 공연만 하면 된다.
황영수는 여자 조연출과 함께 공항으로 향했다.
빌다시피 사정해서 겨우 모신 카메라 감독이 오늘 입국하기 때문이다.
보통은 VJ에게 카메라를 맡기는 편이지만 이번 프로그램에는 자신의 커리어가 달려있다. 그래서 특별히 감독을 초빙한 거다.
“그래. 이제 시작이지. 내가 뜨기만 해봐.”
그는 선배들의 프로그램을 도와주며 항상 불만을 품었다.
리얼 예능을 내세우면서 왜 리얼하지 않는 걸까.
분명히 굶기로 약속해놓고 카메라만 꺼지면 달라지는 연예인은 또 어떻고.
이게 다 힘의 균형이 달라서 그런 거라는 생각도 해봤었다.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피디가 힘이 있었다면 그런 태도를 보일 수 있었을까.
만약 자신이 시청률을 잘 뽑는 스타 PD가 된다면 절대 그렇게 행동하지 못하도록 할 생각이었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입국장의 문이 열리고 턱수염을 인상적으로 기른 남자가 캐리어를 밀며 모습을 드러냈다. 황영수가 손을 흔들었다.
“최 감독님, 여기요!”
턱수염을 기른 남자, 최석환이 황영수에게 다가왔다.
“약속 지켜야 해.”
“물론입니다.”
만약 정규 편성을 따내면 그를 영입하기로 했다.
한국은 지긋지긋하다며 외국으로 도는 프로그램을 선택한 것이다.
그의 사연이 떠오른 황영수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직도 트라우마에서 못 벗어나셨어요?”
최석환은 일과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절대 입을 열지 않는 인물이다.
이유를 물어봤더니 혹시라도 말실수하게 될까 봐서란다.
술에 취했을 때 슬쩍 물어봤더니, 자신 때문에 여배우 한 명이 은퇴하게 된 뒤로 과묵해졌다나.
그 일로 인해 드라마국에서 예능국으로 자리를 옮겼고.
최석환이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말을 해줬나?”
“제가 조르니까 마지못해 대충 대답해 주셨죠.”
“술을 끊던지, 이민을 가던지 선택해야겠네.”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제가 죽을 때까지 비밀을 지키면 될 일이니까요.”
“장담하지 마. 사람 앞일은 모르는 거더라.”
그라고 몰라서 촬영장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지인에게 말했겠는가. 비밀을 지키리라 믿었기에 말을 해준 거지.
믿던 도끼는 세차게 발등을 찍었다.
그리고 도끼는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더라.
그저 찍힌 자신의 발등만이 아플 뿐.
황영수는 최석환의 캐리어를 대신 밀며 제작진의 차에 올랐다.
민우와는 산타모니카 해변 쪽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내 차가 출발하고, 창밖을 보던 황영수가 중얼거렸다.
“방송가에 떠도는 소문이 없는 거로 봐서는 망나니는 아닐 텐데.”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조연출의 귀가 쫑긋해졌다.
“강민우 씨요?”
“응. 뭐라도 아는 거 있어?”
“제가 선배님보다 발이 넓고 귀가 크지 않습니까.”
“잡설은 됐고, 본론만.”
“최근 열애설로 시끌시끌했던 거 빼면 깨끗해요. 그거도 기자가 괜히 조회 수 빨아 먹으려고 오버했던 거고.”
“알려지지 않은 건 아니고?”
“오히려 덜 알려졌죠.”
“진짜?”
“미담이요. 무명 생활이 길어서 스탭들한테 다 잘해주고, 엑스트라도 챙겨주고. 거기다 겸손하고. 피디님도 보셨잖아요.”
물론 봤다. 경험도 했고. 매 끼니 요리를 챙겨주는 스타가 어디 있겠나.
일반인이라도 귀찮아할 일이다. 카메라도 돌지 않는데 며칠간 그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대충 한두 번 챙겨주고 호텔로 가게 했을 거다.
“민우가 참 한결같은 사람이지.”
황영수가 놀란 얼굴로 최석환을 바라봤다.
“강민우 씨랑 친하세요?”
“엑스트라 때 같이 일한 적이 있어. 그때가 처음으로 촬영장에 나왔을 때였지 아마. 나도 보조였을 때고. 어린 녀석이 똘망똘망하게 다니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있네.”
조연출이 눈을 반짝이며 최석환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인사성 바르고, 열정 있고 그런 거지. 우리도 모임이 있거든. 거기 나가서 가끔 들리는 소문은 한결같더라고. 지금 모습과 별다를 필요가 없다고 보면 돼.”
“자세하게 말씀해주실 생각은 없으시죠?”
“내 성격 알면서.”
“치.”
조연출이 삐진 표정을 지어봐도 최석환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황영수는 조만간 회식 자리를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과묵한 최석환이지만 술에 잔뜩 취했을 때 물어보면 직접적은 아니더라도 돌려서 대답은 해주니까.
과연 어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기대감을 감추지 못한 황영수의 눈앞으로 산타모니카 해변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의 커리어에 첫발을 내디딜 작품을 이제 촬영하러 간다.